36화
사울이 투구 전사 활동을 멈춘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사울은 수련과 여러 정보 수집 및 분석으로 시간을 보냈다.
멈춘 기간 동안 아르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대련을 통해 검술을 키우고, 여러 가지 보고를 받으면서 왕국 정보부가 하는 일과 정보 분석 등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다.
아르멜 역시 사울 같은 거물과 가까이 지내는 게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했는지 사울과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사울은 아르멜이 자신의 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누님의 사람이니까.
누님의 사람을 함부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가는 후환이 두렵다.
“요즘도 루시아 누님과는 연락을 주고받나?”
아르멜에게 보고를 받은 사울이 물었다.
“네, 전하.”
“그럼 나에 대해서도 꼬박꼬박 보고를 올리겠지?”
“네, 전하.”
“나에 대해서는 가능한 좋은 말만 써 주면 고맙겠는데.”
“걱정 마십시오. 전하께 큰 흠이 있다고 보고한 적은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말입니다.”
이제는 이렇게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농담과는 별개로 아르멜의 보고서는 가볍게 넘길 만한 게 아니었다.
아직 분명히 드러난 정황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정황이나 증거들은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얀 까마귀의 3인자, 칼립소는 분명 마법으로 육체 개조를 받은 자이며, 육체 개조가 하얀 까마귀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하얀 까마귀는 분명 악마 토끼풀 사업이 주 수입원이었지?”
“네, 전하.”
“쓰레기 같은 놈들.”
악마 토끼풀.
율렌 섬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악마 토끼풀은 쓰기에 따라 이름처럼 악마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신의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적당히 사용하면 마취와 진통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사울 역시 전생에 악마 토끼풀을 종종 사용했다.
통증을 참아야 할 때나 수술을 받아야 할 때 악마 토끼풀의 힘을 빌렸다.
큰 상처를 입고 지옥 같은 고통에 시달릴 때 악마 토끼풀을 먹거나 연기를 흡입하면 고통이 사라졌다.
고통 대신 포근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이처럼 악마 토끼풀은 상황에 맞게 사용하면 최고의 진통제였지만, 남용하면 중독에 이르고, 삶 전체를 저당잡히게 된다.
사울도 전생에 전장이나 삶에 지친 사람들이 악마 토끼풀에 중독되어 삶이 망가지는 광경을 많이 봤다.
중독된 자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라도, 가진 것이 없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악마 토끼풀을 구하려 한다.
결국 중독자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르고 형장의 이슬이 된 경우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악마 토끼풀 문제가 심각해지자 율렌 섬의 두 나라 모두 이를 심각한 사안으로 다루었다.
세상 어디에도 이보다 효과적인 마취제나 진통제가 없기에 사용을 아예 금지시킬 수는 없었다.
대신 불법적으로 재배하는 자, 그리고 불법적으로 판매하는 자는 이유 불문 사형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악마 토끼풀 중독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중독자들도 급증했고, 수요와 공급이 나날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독자들은 영혼을 팔아서라도 악마 토끼풀을 씹거나 피우려 했고 그만큼 판매자는 큰돈을 얻었다.
이 돈을 노리고 악마 토끼풀 사업에 몰려든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 결과 악마 토끼풀 판매자들 사이에서도 다툼이 있었고, 그 다툼의 승자가 하얀 까마귀의 두목인 킬리안 비셔스였다.
“수도에는 아직 악마 토끼풀 문제가 크지 않았지.”
“네, 전하.”
“이 지역은 어때?”
“최악은 아니지만 큰 문제입니다. 잊을 만 하면 악마 토끼풀 문제로 사형장에 가는 사람이나 이종족이 있답니다.”
“이종족까지? 하긴 그렇겠군.”
육체 개조 문제로 쫓고 있는 칼립소도 다크 엘프다.
칼립소가 속한 하얀 까마귀가 악마 토끼풀을 유통한다면 다른 이종족이 악마 토끼풀 문제로 사형장에 오르는 게 이상할 건 없다.
사울은 화제를 돌렸다.
“교단 쪽은 어때?”
“일단 말은 넣어 놓았습니다.”
“아직 뚜렷한 반응은 없고?”
“네.”
사울은 빛의 교단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둠을 숭상하거나 빛의 신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저 신앙심이 깊지 않을 뿐이었다.
피 튀기는 전장에서 종교란 마음의 위안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빛의 교단은 율렌 섬에서 삼백 년 간 이어진 전쟁을 방관만 하지 않았다.
기회만 되면 전쟁을 그만둘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율렌 섬 곳곳에 고아원이나 빈민 구제 시설을 짓거나, 중립 지대에 신전을 지어 두 나라의 협상 장소로 제공하는 일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일이 세상에 도움이 안 된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사울은 개인적으로 빛의 교단을 이렇게 평가했다.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이상주의자’라고.
그 이상주의자들에게서는 아직 별다른 반응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굳이 안달할 필요도 없다.
“그럼 좀 더 기다려 봐.”
“네, 전하.”
“시간이 있으면 우리 대련이나 한 번…….”
문밖의 노크 소리에 사울은 말을 멈췄다.
“계십니까? 급한 보고입니다!”
“들어와라.”
사울의 방에 들어온 것은 왕국 병사였다.
사울이나 영주 휘하의 병사가 아닌, 아르멜 휘하의 병사였다.
아르멜의 부하가 연락도 없이 사울의 방에 들어왔다는 건 보통 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무슨 일이지?”
“급한 전갈입니다.”
병사가 내민 쪽지를 받아 든 아르멜의 눈빛이 변했다.
“무슨 일이지?”
“전하. 저희 쪽 병사들이 첩자를 한 명 잡았답니다.”
“첩자? 어느 쪽의?”
“가멜다 왕국의 첩자인 것 같습니다.”
“가멜다 왕국?”
적국 사이에 첩자가 오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때에, 하필이면 홉킨스 영지에서 가멜다 왕국의 첩자가 붙잡혔다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예감에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첩자를 조사할 것이라면 나도 함께 하겠다.”
“알겠습니다. 전하. 가능하다면 카스텔 님의 도움도 받았으면 합니다.”
사울은 아르멜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카스텔의 마법이라면 덜 끔직한 방법으로 첩자에게 정보를 캐낼 수 있을 테니까.
* * *
아르멜은 회색 그림자의 권력을 이용해 홉킨스 영지 몇 곳에 아지트를 마련했다.
문제의 첩자가 감금된 곳도 그 아지트 중 한 곳이었다.
첩자를 붙잡은 사실을 영주에게 알리거나,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왕국 정보부 차원에서 이 일을 처리하려 했다.
“…….”
카스텔, 아르멜과 함께 아지트로 간 사울은 감금된 첩자의 모습을 보았다.
겉보기에는 그저 여행 상인처럼 보였다.
상인을 가장하여 정보를 캐내려 한 것이리라.
듣기로 여러 조사를 위하여 영지 곳곳에 풀어 둔 아르멜의 정보원에게 걸려들어 잡혔다고 한다.
“…….”
꽁꽁 묶인 첩자는 체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그렇게 심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는지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사울은 카스텔을 돌아보며 말했다.
“선생님.”
“네.”
카스텔이 손을 뻗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의아해하던 첩자는 곧 눈살을 찌푸렸다.
명색이 첩자라 인내심이 강했지만, 카스텔의 마법은 웬만한 인내심으로 견딜 수 없었다.
“크으으윽…….”
이를 악물며 신음하던 첩자의 표정이 어느 순간 멍해졌다.
카스텔이 사울에게 말했다.
“끝났습니다.”
사울도 아르멜에게 말했다.
“이제 심문을 할 수 있을 거야.”
“네, 전하.”
아르멜은 사울의 이런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아직 어린데도 이런 일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군.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야.’
그러면서도 아르멜은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첩자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대답하는 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옮겨 적었다.
대수롭지 않은 말도 있었지만, 중요한 이야기도 있었다.
“너는 무슨 목적으로 파견되었지?”
“…명령을 받았소.”
“무슨 명령을 받았나?”
“…왕자와 검은 흉성에 대한 조사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소.”
첩자의 말에 ‘왕자’와 ‘검은 흉성’ 모두 흠칫했다.
일단 사울은 심문이 끝날 때까지 두고 보았다.
이런 일은 아르멜이 전문가였고, 아르멜은 사울이 궁금해 할 만한 것까지 세세히 질문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렇게 심문이 끝났다.
첩자의 입에서 사울과 카스텔이 언급된 것, 첩자가 소라드 지방에서 왔다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특별한 부분은 없었다.
“소라드 지방이라면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
“네, 전하. 가멜다 왕국 영토입니다.”
“그 곳에서 명령을 받았다는 건… 가멜다 왕국 왕실의 짓일까?”
사울의 말에 아르멜이 다른 의견을 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째서?”
“왕실에서 직접 이 일에 개입했다면 ‘제왕의 눈’이 움직였을 겁니다.”
“그렇겠지.”
사울도 제왕의 눈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가멜다 왕국 정보부.
다르센 왕국에 ‘회색 그림자’가 있다면 가멜다 왕국에는 ‘제왕의 눈’이 있다.
회색 그림자처럼 제왕의 눈도 자국에서 두려움을 살 만큼 철두철미하/며/ 냉혹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제왕의 눈이 개입한 게 아니라면 지방군이나 그 지역을 다스리는 귀족이 한 짓일까?”
“그럴 확률이 높을 겁니다.”
“그렇군. 소라드 지방은 영주가 다스리는 곳이었던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국왕이 파견한 지방관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전생 때도 사울은 소라드 지방과는 큰 인연이 없었다.
한두 번 스치듯 지나친 적은 있지만 직접 싸우거나 군사 활동을 벌인 적은 없었다.
거기에다 십 오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가.
그곳에 대한 일은 일단 아르멜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이다.
“첩자 하나 보냈다고 선전 포고를 할 수도 없는 일이지. 확대시킬 일은 아니니 가능한 조용히 처리해.”
“네, 전하.”
“저 첩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일단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냥 죽이는 것 보다는 다른 용도를 찾아보는 것이 이득일 것 같습니다.”
“그렇군.”
‘첩자 사건’은 대충 마무리 된 것 같다.
문제는 가멜다 왕국에서 이곳에 사울과 카스텔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언젠가는 알려질 일이었다.
가능한 숨기려 했지만, 이런 일이 언제까지 숨겨지겠는가.
하지만 정보가 생각보다 빨리 퍼졌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자연스럽게 퍼진 정보가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퍼뜨렸다는 느낌.
‘그게 사실이라면 누군가 나를 견제하고 있다는 뜻인데.’
사울과 카스텔의 가치를 생각하면 견제할 가치는 충분하다.
문제는 누가, 왜 견제하느냐였다.
가멜다 왕국이 직접 자신과 카스텔의 움직임을 알아내고 첩자를 보낸 것인가.
아니면 이 상황을 만든 누군가가 따로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말이 되는 상황이라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앞으로 계속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심문을 마친 사울은 아지트 밖으로 나왔다.
영주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영주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후계자인 칼랜드였다.
“전하.”
“무슨 일인가요?”
“가멜다 왕국의 첩자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울이 알기로 아르멜은 가멜다 왕국 첩자를 잡았다는 소식을 영주에게 알리지 않았다.
사울이나 카스텔이 입을 연 것도 아니니 나오는 답은 하나다.
누가 알려준 게 아니라, 직접 알아냈다는 것.
‘역시 영주도 만만한 인물이 아니군.’
상황을 알고 온 사람에게 모르는 척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일단 사울은 곧이곧대로 말해 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럼 왜 저희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건 영주의 일이라기보다는 왕국 정보부의 일이니까요.”
“전하,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건 아닙니다.”
“어째서요?”
“저희 홉킨스 가문은 왕실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그에 따른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저희 영지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들에 대해 알 권리도 포함됩니다.”
“이곳에서 적국의 첩자를 심문하는 것 역시 홉킨스 가문의 권리에 포함된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저희 가문이 왕실에서 받은 권리입니다.”
칼랜드도 단단히 각오를 하고 온 게 분명했다.
아마 칼랜드 개인의 뜻이 아닌 영주의 뜻이겠지.
사울은 아직까지는 홉킨스 가문과 정쟁을 벌이고픈 마음은 없었다.
사울의 마음을 읽은 듯 아르멜이 사울에게 귓속말을 했다.
“잠시 물러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첩자를 저들에게 보여 주자고?”
“이미 저희가 알 것을 다 알았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래. 다 알고 찾아온 소영주를 모르는 척 쫓아낼 수는 없겠지.”
귓속말을 마친 사울이 칼랜드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소영주가 직접 아르멜과 첩자를 만나고 오세요. 그럼 불만이 없겠지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아르멜과 칼랜드는 다시금 첩자를 만나러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