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몸을 씻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사울은 그레이에게 다친 곳을 보여 주었다.
“전하, 또입니까?”
“그렇게 되었어.”
그레이는 한숨을 내쉬며 붕대를 꺼내 사울의 팔에 감아 주었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은 그레이는 간단한 응급 치료는 의사 못지않게 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레이는 사울에게 붕대를 감아 주면서도 걱정을 늘어놓았다.
“그 투구 전사인지 뭔지 위험한 일을 그만두셔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어째 그 때보다도 더 자주 다치시는 것 같습니다.”
“별 수 없잖아? 실력을 키우려면 대련이 최고고 대련은 실전에 가까울수록 효과가 좋은 법이니.”
“아무리 그래도 매번 이렇게 다치시면 어떡합니까. 이러다 얼굴에 상처라도 입으시면…….”
“뭐 어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돌아가신 부인께서 이렇게 아름답게 낳아 주셨는데.”
어머니 이야기를 들은 사울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낳아주고 돌아가시던 순간까지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셨다는 어머니.
하지만 너무 어릴 적 돌아가셔서 기억도 없고, 전생의 기억이 확연한 지금에는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전생의 가족들에 대한 기억이 확연했으니까.
아버지, 어머니, 형님, 여동생.
가족들 중 한 명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훗…….’
사울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울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리 없는 그레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 때로는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행동해야 한다.
붕대를 다 감은 사울은 아르멜을 불렀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그래.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아르멜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사울이 물었다.
“먼저 내 검술 실력에 대해서 묻고 싶어.”
“저와 열 번 정도 대련을 하셨지요. 처음 대련을 했을 때보다는 나아지셨습니다.”
“그럼 내가 왕국 최고의 전사가 될 수 있을까?”
아르멜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왕국에 저보다 어린 강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어림없다는 표현을 완곡하게 돌려 말한 것이다.
카스텔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사울에게 마법 자질은 있지만, 최고 수준은 아니라고.
사울도 자신의 재능으로는 일정 수준까지가 한계이며, 최고 수준은 어려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운 좋게 전설의 마법 아이템을 손에 넣거나, 드래곤 심장이라도 먹지 않는 한은.
여러모로 우울해지는 느낌에 사울은 말을 돌렸다.
“선생님은 요즘 문제의 육체 개조에 대해 조사하는 데 여념이 없더군.”
“말씀대로입니다. 제게도 자주 찾아오십니다.”
“육체 개조 조사는 어때?”
“아직 정보가 너무 불명확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단자에 대한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는 상태입니다.”
“육체 개조 마법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하얀 까마귀와 관련이 있겠지?”
“그럴 겁니다. 무엇보다 하얀 까마귀의 3인자인 칼립소가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이단자라…….”
사울의 주적은 가멜다 왕국, 정확히 말하자면 가멜다 왕국에서 전생의 자신 가문을 망친 자들이다.
하지만 이단자라는 존재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이단자들이 날뛰어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 자신이 움직이는 것도 어려워 질 수 있으니까.
“정말 우리들의 적이 이단자라면, 조력자를 찾는 건 어떨까?”
“조력자라면?”
“빛의 교단.”
빛의 교단.
율렌 섬, 나아가 이 세계 절대 다수가 숭상하는 빛의 신을 모시는 빛의 교단.
빛의 신이 어둠을 물리치고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천지 창조 이야기는 이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름도 없이 빛의 신, 혹은 신이라 불리는 존재.
어둠을 숭배하는 극히 일부의 이단자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숭상하는 존재.
대륙 절대 다수가 믿는 빛의 교단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여러 정치적인 사건 이후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빛의 교단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두 나라가 300년 넘도록 대립하고 있는 율렌 섬에서도 빛의 교단은 다르센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영토를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빛의 교단은 어둠을 따르는 자, 사령술사, 기타 이단 행위를 벌이는 자들을 쫓고 심판하는 데는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언제나 교단 측의 정치 개입을 경계하는 사울의 아버지도 이단자 문제 만큼은 빛의 교단의 협조를 구할 정도였다.
“확실히 빛의 교단의 도움을 받으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일단 신전에 연락을 해 봐. 네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왕자 전하께서 직접 신전에 도움을 요청하실 겁니까?”
“도움을 요청하면 빚을 지는 셈이니 그건 곤란해. 왕자인 내가 교단에 빚을 지면 왕실이 대신 갚아야 할 수도 있으니.”
“그러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빛을 따르는 자로서, 이단자의 흔적을 잡았다고 신전에 알려. 그럼 교단 윗선에 보고가 들어갈 테고, 어떤 형태로든 관심을 보이겠지. 우리가 빚을 지는 게 아니라 그쪽에서 먼저 움직이도록 하면 빚을 만드는 게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사울의 말에 아르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혹시 그 쪽에서 우리에게 빚을 지울 기미가 보이면 없던 일로 해. 교단에 빚을 지는 것 보다는 우리 힘만으로 싸우는 게 나을 테니까.”
“네, 전하.”
“내가 알아야 할 다른 일은 없나?”
“홉킨스 영지 전반에 걸쳐서 계속 조사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것이 나오면 보고 드리겠습니다.”
“알았어.”
모든 것이 불명확한 상황이다.
이럴 때는 그저 눈앞의 일에 충실한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사울은 당분간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소라드 지방.
홉킨스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인 갈레트 지방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가멜다 왕국 영토다.
갈레트 지방과 마찬가지로 적국의 경계에 가까운 지방이라 몇 번이나 영토 주인이 바뀌었을 만큼 평온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하지만 소라드 지방과 갈레트 지방은 큰 차이가 있었다.
갈레트 지방은 홉킨스 가문이 다스리지만, 소라드 지방은 가멜다 왕국 왕실이 직접 다스렸다.
그 때문에 두 지방을 모두 다녀 본 사람들은 갈레트 지방보다 소라드 지방이 좀 더 엄격한 통제 하에 놓인 곳이라고 평하고는 했다.
“이놈들아, 서둘러라!”
“훈련에 낙오하는 놈들은 저녁 식사 때 보리만 퍼먹이겠다!”
소라드 지방의 인구는 갈레트 지방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주둔하는 군사의 숫자는 비슷했다.
그만큼 지역에 군인비율이 높아 말 그대로 군사 도시에 가까웠다.
이런 딱딱한 군사 도시에도 범죄자들은 있었다.
그리고 하얀 까마귀도 있었다.
“이 투서를 가멜다 왕국 사람들에게 전달하면 되는 것이오?”
“그렇다. 두목 명령이다.”
“투서를 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저 투서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그것을 왕국 놈들이 읽고, 반응을 보이도록 하는 게 임무다.”
“그건 쉬운 일은 아닌데. 뭐 알겠소. 두목의 명령이면 따라야지.”
소라드 지방의 조직원들은 이 지역에서 잔뼈가 굵었다.
투서를 지역의 왕국의 높은 사람에게 전달하여 읽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문제의 투서는 높은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가멜다 왕국을 대신하여 소라드 지역을 다스리는 행정관.
라켈 슬리드 남작이었다.
“이게 무언가?”
언제나 격무에 시달리던 라켈은 자신의 탁자에 놓인 투서에 곱지 않은 표정이 되었다.
비서가 대답했다.
“중요한 투서라고 합니다.”
“투서? 이런 투서 따위를 내 책상에 올려 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게… 꼭 행정관님이 보셔야 한다고…….”
소라드 지방의 책임자로서 공식적으로 올라오거나 내려온 문서를 보기도 바쁜 라켈이다.
그런데 누가 보냈는지도 분명치 않은 투서 따위를 읽으라고 하다니.
달리 생각하면 보낸 자도 알 수 없는 투서가 자신의 책상까지 올라온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출처를 알아봐야겠지만, 그게 누구든 여기까지 투서를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힘이 작용한 것이다.
“시간 낭비가 아니었으면 좋겠군.”
마뜩찮은 표정으로 봉인된 투서를 열어본 라켈의 눈이 커졌다.
“아니…….”
“행정관님?”
“이 투서를 보낸 자가 누구라고 했나?”
“알 수 없습니다.”
“투서를 보낸 자는 몰라도, 가져온 사람은 있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기사 중 한 명이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받았다고 합니다. 꼭 행정관님이 보셔야 할 내용이라 무례를 무릅쓰고 올렸다고 들었습니다.”
“당장 그 기사를 불러와!”
라켈이 화가난 게 아니라 일이 다급하여 목소리를 높였다는 사실을 알아챈 비서는 재빨리 문제의 기사를 데려왔다.
행정관 집무실에 나타난 기사는 라켈도 아는 얼굴이었다.
이 지방 토박이이며, 지역 세력가들과도 두루 관계가 좋아 2년 전 부임되어 온 라켈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다.
“자네가 이 투서를 내게 보냈나?”
“그렇습니다. 행정관님.”
“투서 내용은 알고 있었나?”
“투서를 행정관님이 가장 먼저 보셔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쓸데없는 마법 같은 것은 걸려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고요.”
“그렇다는 말이지.”
라켈은 자신이 받은 투서를 기사에게 보여 주었다.
서글서글한 표정을 짓고 있던 기사였지만, 투서를 보고는 여유를 잃었다.
“아니.”
“자네도 몰랐다는 말인가?”
“몰랐습니다.”
“그 내용을 몰랐다고는 해도, 투서를 내게 전달할 정도면 신뢰가 가는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겠지?”
“그, 그렇습니다만.”
“그럼 자네 생각을 듣고 싶군. 이 투서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나?”
기사는 생각지 못한 사태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기사는 자신에게 투서를 준 정보원에 대해 떠올렸다.
이 자리에서 이름을 밝힐 만큼 깨끗한 인간은 아니지만, 그가 취급하는 정보만은 믿을 만하다.
“허튼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기사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이번에는 라켈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장난이나 근거 없는 투서는 아닌 것 같다.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 아닌가.
이 정도의 일을 본인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크나큰 공적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실패한다면?
문책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리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라켈은 지방관 부임 2년 만에 실패자로 낙인찍히고 쫓겨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투서 내용에 대해 상부에 보고해야겠군.”
“아, 알겠습니다.”
“이런 내용을 상부에 보고하면 시끄러워질 거야. ‘제왕의 눈’이 개입하겠지.”
제왕의 눈이라는 말에 기사의 눈이 커졌다.
가멜다 왕실 정보부 제왕의 눈.
다르센 왕국에 ‘회색 그림자’가 있다면, 가멜다 왕국에는 ‘제왕의 눈’이 있다.
정보를 다루는 일에 있어서는 다르센 왕국의 누구보다도 유능하고 냉정하며 무자비한 자들.
그들이 개입한다는 것만으로도 걱정되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차, 차라리 그냥 못 본 것으로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투서를 말인가?”
“네. 지방관님.”
“이걸 자네에게 보낸 게 누구든, 의도가 있어서 보냈겠지! 그 의도도 모르는데 없던 일로 하자고? 그러다 일이 잘못되면 자네가 책임질 수 있나?”
“하지만…….”
자기보다 나이도 더 많은 기사가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에 라켈은 혀를 찼다.
“가능한 자네 신변에 큰 문제는 없도록 해 보겠네. 하지만 없던 것으로 넘어갈 수는 없어! 자네 목이랑 자리가 온전하고 싶으면 당장 이 투서 보낸 놈을 체포해! 그래야 상층부에 변명할 말이라도 있을 테니.”
“아, 알겠습니다. 그럼.”
기사가 물러가고 라켈은 다시 머리를 부여잡았다.
“가뜩이나 골치 아픈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왕자에 검은 흉성이라고?”
둘 중 한 명만 있어도 지방관으로서는 신경 쓰이는 일이다.
하물며 적국 왕자와 검은 흉성, 두 거물이 근방에 있다니.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말인가.
‘사울 어쩌고 하는 왕자라면 모를까 검은 흉성이라면 이곳 병력이나 인재들로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지. 하지만…….’
지방관은 윗선에 보고만 하라고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다.
자신의 권한 안에서 책임질 수 있는 일은 해야 했다.
책임질 일을 회피하다 나중에 더 큰 책임으로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라켈은 다른 기사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지금 당장 갈레트 지방에 첩자를 파견하도록 하게.”
“첩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갈레트 지방에 무슨 변화가 있는지 샅샅이 알아내어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