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하루를 꼬박 움직여 본거지로 돌아온 킬리안과 칼립소를 맞이한 건 조직의 2인자인 제온이었다.
“오셨습니까. 두목.”
“별일 없었나?”
“네. 두목은 어떠셨습니까?”
“손볼 놈들은 다 손봤다.”
예상대로의 답변에 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짧다는 건 마을 하나를 통째로 쓸어버리고 적대 관계인 도적단이나 깡패들을 성공적으로 쓸어버렸다는 뜻이다.
적을 때려잡는 것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하는 두목과 칼립소니까.
“그래. 새로 들어온 소식은 없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그러니까… 중요한 보고입니다.”
제온의 말뜻을 알아들은 킬리안은 자신과 제온, 그리고 칼립소만 남겨놓았다.
하얀 까마귀의 수뇌부인 세 명만 남게 되자 제온은 비로소 보고했다.
“왕국 수도에 갔던 자들이 정보를 보내왔습니다.”
킬리안은 칼립소를 힐끗 돌아보곤 물었다.
“이 녀석에게 굴욕을 준 놈에 대한 정보가 있던가?”
“그러니까… 상당히 놀라운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제온의 말에 칼립소가 눈을 번득였다.
“무슨 정보인데?”
“두목이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온이 내민 문서를 받아 든 킬리안이 양미간을 좁혔다.
“사울이라는 왕자가 홉킨스 가문 영지로 떠났다? 무슨 이유로?”
“그건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자가 홉킨스 가문으로 떠났다는 정보도 어렵게 얻었습니다.”
“사울. 처음 듣는 이름인데.”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후궁 소생이며 어머니도 이미 죽었다고 합니다.”
“그럼 왕실에서 꼴 보기 싫은 왕자를 유배 보낸 것 아닌가?”
“그것이… 이것도 읽어 보십시오.”
제온이 문서 한 장을 더 내밀었다.
그 문서를 살펴본 킬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 왕자가 검은 마녀를 수하로 두고 있다고?”
“네.”
“검은 마녀를 수하로 둔 왕자가 홉킨스 가문에 와 있다면…….”
“검은 마녀도 홉킨스 가문 영지에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겠지요.”
그 말을 들은 칼립소는 놀라다 못해 경악했다.
“날 그 꼴로 만든 계집이 검은 마녀였다고?”
“그건 몰라. 검은 머리를 가진 실력 있는 여자라고 다 검은 마녀는 아니니까. 하지만 수도에 간 녀석들이 보내 온 정보가 사실이라면 너와 싸운 그 여자가 검은 마녀일 가능성이 높겠지.”
문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킬리안이 문득 말했다.
“제온.”
“네, 두목.”
“정보가 사실이라면 이런 이야기겠지? 처음 듣는 왕자가 홉킨스 가문에 왔고, 왕자의 수하인 검은 마녀가 무슨 이유에서든 투구 전사라는 놈들과 함께 내 조직을 박살내고 칼립소를 공격했다.”
“네, 두목.”
“그렇다면 검은 마녀가, 아니면 왕자 놈이 내게 선전 포고를 한 셈이고.”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내가 이 건방진 왕자 놈을 잡아죽이면 어떻게 될까?”
농담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된다면 킬리안은 정말 왕자를 잡아죽일 생각이다.
제온은 새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리 조직 전체가 반역자로 낙인찍힐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처럼 조무래기들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왕실 최정예 병력이 우릴 쫓겠지요. 두목이나 저희들은 물론, 하얀 까마귀에 소속된 전원을 마지막 한 명까지 추적하고 죽일 겁니다.”
“그 결과 우리 조직이 멸망할 것이다?”
“네, 두목.”
제온의 직언에 킬리안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군.”
“…….”
“홉킨스 가문에 사울이라는 왕자 놈이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나?”
“네. 두목.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검은 마녀가 사울 왕자의 충복이라니 아마 함께 왔겠지요.”
생각하는 킬리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제온은 그것이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보았다.
자기 말을 듣고 인내심을 발휘할 생각이었다면 저렇게 생각을 많이 할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는 건…….
“칼립소.”
“네, 두목.”
“넌 어둠의 친구들과 친하지?”
“뭐 아는 녀석들이 여럿 있고, 친한 녀석들도 좀 있지요.”
“그럼 어둠의 친구들더러 왕자의 목을 따 오라고 요구할 수 있겠나?”
칼립소는 킬리안의 질문 속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어둠의 친구’들이 왕자의 목을 따 오는 건 물론, 조직에 뒤탈 없이 처리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잠시 생각하던 칼립소가 고개를 저었다.
“어려울 것 같아요.”
“어둠의 친구들 중에서는 재미만 있으면 누구든 상관없이 죽여줄 녀석들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두목.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요즘 그 친구들과 연락이 잘 되지 않네요. 우리와 관계를 끊으려는 건 아닐 텐데, 아마 그쪽도 바쁜 모양이에요. 아마 지금 그 쪽에 의뢰나 요구를 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런가.”
킬리안의 시선이 제온 쪽을 향했다.
“제온. 가멜다 왕국 쪽에 연줄을 넣어 봐라.”
“가멜다 왕국에 왕자에 대한 정보를 흘리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내 손으로 그 왕자인지 뭔지 하는 놈을 찢어 죽일 수 없다면 대신할 놈을 찾아야지.”
생각 없이 한 말이 아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왕자를 상대할 수 있는 최고의 수를 꺼내 들었다.
휴전 협정을 맺었을 뿐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은 여전히 적대 관계를 유지중이다.
휴전 협정 이후 큰 규모의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을 뿐, 사소한 국지전이나 혹은 유혈 사태가 벌어진 사례도 적지 않았다.
기회만 있다면 서로를 견제하거나 공격하려 하는 두 나라다.
홉킨스 가문 영지와 가멜다 왕국은 그렇게 거리가 멀지도 않다.
과거 6년 전쟁에는 두 나라의 주 전장이 되어 영지 절반이 가멜다 왕국에 넘어간 적도 있다.
가멜다 왕국 입장에서는 적국 왕자와 검은 마녀라는 거물이 자기들 코앞에서 머무르고 있는 셈이다.
“확실히 그것이 지금 우리가 그 왕자나 검은 마녀를 상대하려면 가장 안전한 방법일 겁니다.”
“내 뜻에 찬성한다는 말인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반대입니다.”
“어째서?”
“그 왕자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그가 자의로 우리에게 해를 끼친 것인지, 검은 마녀가 우리를 공격한 것인지조차 확실치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왕자를 해코지 하려 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클 수 있습니다.”
자기 뜻에 반대하는 제온의 말에도 킬리안은 표정이나 눈빛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면 내버려두자는 말인가?”
“정말 사울 왕자나 검은 마녀가 우리를 적대한다면 대책을 마련해야겠지만, 벌써부터 그들을 자극하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중한 제온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킬리안이 입을 열었다.
“적국 왕자와 검은 마녀가 자기들 코앞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가멜다 왕국이 가만 있지 않겠지.”
“그건 틀림없습니다.”
“정보를 흘리면 그쪽에서 나름대로 움직일 테고, 홉킨스 가문 영지가 시끄러워지면, 우리는 그 틈을 노려볼 수 있겠지.”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다만 위험 부담이 크다는 건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홉킨스 영지 쪽 세력을 모두 잃느니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게 낫겠지. 그게 누구든 방해 되는 놈들이 죽어 주면 더욱 좋고.”
제온은 킬리안이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숨 걸고 막아야 할 만큼 미친 짓이라면 진언을 좀 더 올리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전쟁은 혼란을 부르고 혼란은 하얀 까마귀에게 좋은 기회가 된다.
킬리안 비셔스가 ‘하얀 까마귀’를 결성하고 율렌 섬 암흑가의 지배자가 된 것도 6년 전쟁 덕분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두목의 뜻이라면.”
“음.”
명령을 내린 킬리안은 칼립소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널 그 꼴로 만든 게 검은 마녀라면 어떻게 하겠나?”
칼립소의 눈빛이 번득였다.
“찢어 죽여야지요.”
“검은 마녀에게 이길 자신이 있나?”
“정면 승부는 힘들겠지만 기습을 하거나 계략을 쓰면 이길 수 있어요.”
칼립소의 말에 킬리안이 피식 웃었다.
“약속하지. 네게 수모를 준 게 검은 마녀든 다른 녀석이든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
“고마워요, 두목.”
킬리안은 방침을 결정하고, 제온은 세부적인 계획을 짜고, 칼립소는 적을 죽일 궁리를 하며 칼을 갈았다.
하얀 까마귀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 * *
사울이 투구 전사 활동을 잠시 멈추고 영주 저택에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투구 전사 활동이 중단된 이유는 간단했다.
홉킨스 가문 영지에서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하던 도적이나 깡패들은 거의 토벌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울은 투구 전사가 때려잡을 만한 거물이 등장하거나, 하얀 까마귀에 대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투구 전사 활동을 쉬기로 했다.
쉬는 동안에도 사울은 수련을 쉬지 않았다.
압도적인 재능이 없는 사울이 살아남으려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사울은 마법 수련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검술에도 눈을 돌렸다.
특히 칼립소를 마주했을 때 깨달은 게 많았다.
‘카스텔이 아니었다면 난 칼립소의 손에 죽었을지 몰라.’
칼립소 같은 뛰어난 실력자의 등장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다고 실력 부족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전하. 시작하겠습니다.”
사울에게 목검을 겨눈 아르멜이 말했다.
사울도 마찬가지로 목검을 겨누며 대답했다.
“좋아. 시작해.”
사울의 허락에 아르멜은 기합과 함께 날카롭게 목검을 휘둘렀다.
눈에 띄게 독특하거나 압도적인 힘을 가진 공격은 아니다.
평범하지만 빠르고 정확하며 날카로운 공격.
지금 사울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한 수 위의 공격이기도 했다.
“…….!”
사울은 마나의 힘을 빌리지 않고 육체적인 힘과 기술만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 냈다.
두 목검이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잘 막았지만, 검을 막는 순간 손이 저릿했다.
이 한 번의 공방만으로도 알 수 있다.
힘, 속도, 기술 모두 아르멜이 위라는 사실을.
냉정히 말해 사울이 이 대련에서 이기는 방법은 대련 규칙을 바꿔 둘 다 마나도 쓸 수 있게 하거나, 사울만 마나를 쓸 수 있게 하는 방법뿐이었다.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은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의 실력, 특히 검술을 더 갈고 닦기 위한 대련이다.
아르멜도 이런 사울의 의도를 잘 알고 그에 따라 주었다.
대련을 할 때마다 봐주지 않고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두르는 게 고마웠다.
물론 그로 인한 부작용도 있었다.
“윽!”
열 번 정도 목검이 부딪친 끝에 사울의 검이 날아갔다.
아르멜의 목검이 사울의 검을 쥔 팔을 때린 것이었다.
쓰는 검이 목검이 아니었다면 팔이 잘렸을 것이다.
목검이라도 마지막 순간에 힘 조절을 하지 않았다면 뼈가 부러졌을지 모른다.
다친 곳을 부여잡은 사울에게 아르멜이 뒤늦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무례를 범한 것을 사죄합니다.”
아르멜의 말에 사울은 씁쓸하게 웃었다.
“괜찮아.”
이렇게 질 때마다 사울은 자신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냉엄한 현실을 깨우쳤다.
동년배 중에서는 강자에 속하겠지만, 세상에는 사울을 능가하는 강자들이 많다.
카스텔 같은 ‘최강’ 칭호를 노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도 말이다.
율렌 섬 최강자가 되기는 어렵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강해져야 한다.
왕실에서 배경도 한미한 사울이 큰 힘을 가지려면 스스로 강해지고, 그를 바탕으로 공적을 세우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것이 사울이 지고 또 져도 계속 대련을 하는 이유였다.
마법은 물론 검술도 갈고 닦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대련을 마친 사울은 훈련장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