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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32화 (32/232)

32화

“전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해.”

대화를 마치고 사울의 방에서 나온 아르멜에게 카스텔이 말을 걸었다.

“이야기 좀 해요.”

“알겠습니다.”

카스텔은 아르멜을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카스텔의 방에 들어온 아르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혀 여자답지 않은 방이군. 검은 마녀의 방답기는 하지만.’

카스텔의 방에는 보통 여자의 방에서 있을법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

침대와 탁자, 의자 같은 기본적인 가구와 어지러이 놓인 책들이 전부였다.

비록 영주의 저택에 신세를 지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본인 취향으로 꾸밀 수 있을 것인데 방이 이렇다는 건 카스텔이 보통 여자와는 취향이 다르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카스텔이 먼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아르멜도 뒤이어 카스텔의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아르멜은 이곳에 오기 전 상관인 루시아 왕녀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아이 곁에 검은 마녀가 붙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네, 전하.’

‘알고 있겠지만 카스텔은 성도, 작위도 없는 평민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례를 범하면 안 돼. 그녀는 전쟁 영웅이며 아바마마가 누구보다 총애하는 사람이니까.’

‘물론입니다 전하. 그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카스텔도 감시할까요?’

‘감시? 훗. 카스텔이 네 감시를 모를 것 같아?’

‘…….’

‘카스텔 상대로 선을 넘지마. 그녀를 완전히 다룰 수 있는 건 아바마마뿐이니까.’

아르멜이 보기에 다르센 왕국의 왕자와 왕녀를 통틀어도 루시아만큼 냉철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루시아가 당부할 정도면 카스텔을 함부로 대하는 건 정말 위험하다는 뜻이다.

아르멜 역시 검은 마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에 대한 좋은 소문은 물론, 나쁜 소문들도 말이다.

“…….”

어색한 침묵 속에서 마침내 카스텔이 입을 열었다.

“왕녀 전하께서 보내셨지요.”

“그렇습니다.”

“그분의 영역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아요. 당신이 무슨 일을 해도 내가 방해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내가 당신을 부른 건 도움이 필요해서에요.”

“제 도움 말입니까?”

“그래요.”

검은 마녀에게 일개 청년 장교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아르멜은 의아해 하면서도 어쨌든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왕자 전하는 나이에 비해 생각이 많은 분이세요.”

“네? 아, 그렇습니까.”

“그래요. 언제나 많은 생각을 하고 계시지요. 나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를 제외하면, 아니 그 때마저도 많은 생각을 하실 때가 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전하는 생각이 많으신 분이니, 증거 없는 이야기를 꺼내서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죄송합니다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망친 다크 엘프 말이에요.”

“칼립소 말씀입니까?”

카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는 숨이 붙어 있는 게 다행인 상태였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직접 손을 썼으니 그건 보장해요. 그런데 어떻게 하루도 안 지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탈출할 수 있었을까요?”

아르멜이 자신의 상식 속에서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을 꺼냈다.

“포션이나… 치료 마법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직접 조사해 봤지만 그런 흔적은 전혀 없었어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구할 수 있는 마법서를 모조리 뒤져 봐도 해답은 나오지 않더군요. 그렇다면 책이 아닌 내 머릿속의 지식에서 해답을 구해야지요.”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네.”

“그게 무엇입니까?”

질문을 받은 카스텔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육체 개조.”

“!!!”

육체 개조.

마법과 연금술 등을 동원하여 육체를 개조하는 일.

이 기술이 등장한 초창기에는 동물이나 몬스터는 물론 인간이나 지성을 가진 이종족 대상으로도 육체 개조가 시도되었다.

하지만 동물이나 몬스터에게 막강한 힘을 주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그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 개조는 통제할 수 있는 인간과 이종족에 한정되었다.

하지만 육체 개조는 인간이나 이종족 상대로는 너무나도 비도덕적인 일이었고, 수많은 무리수와 문제들을 일으켰다.

결국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모두 육체 개조를 법으로 금지하고 적발될 시 엄격하게 처벌했다.

나아가 빛의 교단에서도 육체 개조를 이단 행위로 지정하고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 결과 육체 개조는 금기 중의 금기로 취급받으며 사장되었다고 알려졌다.

만약 다른 사람이 증거도 없이 이런 말을 꺼낸다면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스텔의 말이라면 무시할 수 없었다.

“칼립소라는 자가 육체 개조를 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가능성이 있어요. 오래전에 본 적이 있어요. 한쪽 팔이 잘렸는데 하루도 되지 않아 상처를 재생하는 ‘인간’을. 그 역시 육체 개조를 받은 자였지요. 본의는 아니었지만.”

“화, 확실히 육체 개조로 비상식적인 치유력이나 재생력을 부가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신에게만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증거가 있다면 전하께 직접 알렸겠지요.”

“과연, 알겠습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윗사람을 모시는 입장이다.

책임질 수 없는 위험한 발언을 함부로 말하지 않고 싶다는 건 충분히 납득이 갔다.

“그러면 왕자 전하께 비밀로 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 조사하면 되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카스텔은 방에 있던 종이 몇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육체 개조에 필요한 마법과 연금술 재료들이에요. 흔한 것도 있지만, 유니콘의 눈알처럼 육체 개조 이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재료도 여럿 있어요.”

“과연. 하지만 그렇게 희귀한 재료라면 유통되는 걸 찾기도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정보력을 가지고 있고 비밀도 지킬 수 있는 당신에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아르멜은 넘겨받은 종이를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뜻밖의 말을 들었지만, 들은 이상 못 들은 척 넘길 수는 없었다.

그만큼 ‘육체 개조’는 끔찍하고 불경스러운 행위였다.

그보다 큰 죄는 반역, 적과의 내통, 어둠을 따르는 이단 행위 정도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한번 조사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나저나 육체 개조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군요. 예전에도 이런 일을 조사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카스텔의 눈이 번득였다.

악명 높은 검은 철가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이지만, 그런 카스텔의 눈빛이 번득이자 아르멜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국에서는 존경과 두려움을 담아 검은 마녀라 부르고, 적국에서는 공포와 혐오를 담아 검은 흉상이라 부른다.

왜 사람들이 카스텔을 그렇게 부르는지 비로소 실감이 갔다.

무슨 말 실수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르멜은 일단 사과부터 했다.

“죄, 죄송합니다.”

다행히 카스텔의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스스로도 실수한 것이라 생각한 듯 이내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요.”

“알겠습니다.”

“아무튼 조사는 잘 부탁해요.”

이야기를 마친 카스텔의 손짓에 아르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스텔의 방을 나선 아르멜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휴우. 정말 진땀을 뺐군.”

그렇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아르멜은 먼저 방구석에 놓아둔 상자를 열었다.

마법으로 단단히 잠겨 있는 상자는 원칙적으로 주인인 아르멜만 열 수 있었다.

억지로 열 수는 있지만 그러면 흔적이 남기에 주인인 아르멜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자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아르멜은 문서들을 정리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모아 둔 각종 정보들.

이곳에 온 뒤 모으기 시작한 각종 정보들.

여기에 지금부터 모으기 시작해야 할 정보들이 생겼다.

정보를 정리하고 문서에 보고 내용을 끄적이던 아르멜은 문득 중얼거렸다.

“육체 개조라. 사실이라면 왕국이 뒤집어 질 지도 모르는데. 그나저나 이런 일을 언제까지 왕자님에게 숨길 수 있을지 모르겠군.”

* * *

아르멜이 합류한 이후에도 사울은 ‘투구 전사’ 활동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것이라 주요 멤버가 세 명이 되든 네 명이 되든 큰 차이는 없었다.

다행히 아르멜도 투구 전사로서 활동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뛰어난 검술과 마법 실력을 겸비한 전사로서, 검술 실력으로만 따지면 사울보다도 위였다.

또 다른 실력자가 합류한 덕분에 투구 전사는 보다 수월하게 영지의 범죄자들을 소탕할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열심히 움직인 덕분에 영지가 조금은 더 깨끗해졌다.

투구 전사의 활약에 겉으로 드러나 있던 도적단이나 깡패 조직 따위는 더 활개 치지 못했다.

영지의 치안도 나아졌고, 실전 경험도 쌓았으니 사울 입장에서는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울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언제나 생각할 것이 많은데, 요즘에는 생각할 것들이 더 늘었다.

“아이나.”

“네, 전하.”

“선생님이랑 아르멜 말이에요.”

“두 분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나의 모습에 사울은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최근 두 사람 사이의 이상한 기류를 아이나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싸울 때는 눈썰미가 밝아도 그 외에는 아직 미숙한 탓이리라.

사울은 자신이 아는 것을 조금 가르쳐 주기로 했다.

“요즘 두 사람이 자기들끼리 무언가 주고받는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인가요?”

“아르멜과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비밀로 하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요. 아르멜은 몰라도 선생님은 그런 일을 잘 못 숨기거든요. 두 사람이 영주나 그대에게 나쁜 일을 꾸미는 것 같지는 않지만.”

“네? 그 기사라면 모를까 카스텔 씨가 도련님께도 비밀로 하신다니…….”

“그러니까 그대는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죠?”

“네, 전하.”

“그럼 두 사람에게 직접 듣도록 하지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르멜이라면 몰라도 카스텔 씨가 숨기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지요. 선생님이 하는 일이니.”

이 말을 하면서 사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거짓말을 한 게 아닌 탓에 더욱 쓴웃음이 나왔다.

정작 나쁜 마음을 품은 건 사울 자신이었으니까.

사울은 겉으로도 미소를 드러내며 자신의 진심을 감췄다.

“아무튼 두 사람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도록 하죠. 그대도 함께 들어요.”

“네, 전하.”

곧 사울의 부름을 받은 카스텔과 아르멜이 불려 왔다.

마을 여관에서는 투구를 벗고 나면 가능한 편하게 지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렇지 못했다.

사울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카스텔이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래요. 요즘 선생님과 아르멜 사이에 일말이에요.”

“…….”

“둘이 몰래 사귀는 게 아니라면 다른 ‘투구 전사’에게도 아는 것을 공유하는 게 어때요?”

농담 섞인 사울의 말투에 아르멜은 일단 안도했다.

왕자님이 진심으로 화가 났다면 상황이 어려워질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더 숨기면 정말 상황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결심을 굳힌 아르멜이 카스텔을 불렀다.

“카스텔 님.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

카스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받은 아르멜이 말했다.

“먼저 전, 아니 도련님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을 사죄드리겠습니다.”

“나는 괜찮으니 어서 말해 봐.”

“그러니까… 저희는 무언가를 조사 중이었습니다.”

“무엇을?”

“육체 개조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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