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30화 (30/232)

30화

율렌 섬에서 카스텔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카스텔의 이름을 들은 제온은 물론, 칼립소도 크게 놀랐다.

“검은 흉성?”

“검은 마녀 말입니까?”

다르센 왕국 출신인 제온은 카스텔을 ‘검은 흉성’이라 불렀다.

반면에 인간 국가 출신이 아닌 칼립소는 ‘검은 마녀’라 불렀다.

다른 명칭이지만, 가리키는 대상은 같다.

비록 가멜다 왕국 최강의 실력자인 ‘가르시아 남매’에게 패한 후 명성이 많이 꺾였지만, 여전히 검은 마녀 혹은 검은 흉성의 이름값은 높았다.

“그래. 그 카스텔 말이다.”

자신이 괴물이라 부른 여자에게 당하고 온 칼립소도 킬리안의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그럴 리가요. 그 정도의 거물이 그런 변방에서 뭘 하고 있다는 거죠?”

“그건 나도 모르겠다.”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제온도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두목의 말은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온의 말에 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칼립소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패배의 충격에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제온의 말에 칼립소가 발끈했다.

“내가 헛것이라도 보았다는 말이야?”

“자신만만하게 나갔다 패하지 않았나. 누구라도 그런 일을 당했다면 큰 충격을 받았을 테고, 그럼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 변방 영지에 난데없이 검은 흉성이 나타났다니… 너 같으면 믿겠는가?”

“너 이 자식…….”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으르렁대는 칼립소를 말린 건 킬리안의 손짓이었다.

손끝에서 거미줄 같은 빛이 일렁이는 킬리안의 손짓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화가 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킬리안이 말했다.

“칼립소.”

“네, 두목.”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알겠다. 나보다 강한 자를 만나 패했다면 큰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지. 하지만 실패는 실패다.”

“…인정해요.”

“네 처분은 조금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 이만 물러가라.”

“네. 두목.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요.”

“뭐지?”

“이 굴욕을 갚을 기회를 주세요. 그 투구 전사라는 연놈들, 그리고 그들 곁에 붙어 있는 괴물년… 그 연놈들 앞에서 피를 뿌리며 뒹굴었던 이 굴욕을 풀 기회를 주세요.”

칼립소의 눈에 살기가 일렁였다.

지금 이 자리의 누군가를 향한 살기가 아닌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자를 향한 살기다.

그런 부하의 모습에 킬리안이 작게 웃었다.

“알았다. 일단 근신하고 있어라.”

“네. 두목.”

칼립소를 내보낸 킬리안은 제온에게 말했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두목이 말씀하신 것처럼 칼립소가 거짓을 말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단순무식해도 두목을 배신할 녀석은 아니니까요.”

“그건 알고 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앞으로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느냐다.”

“솔직히 두목이 말씀하신 ‘카스텔’ 이야기는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또 카스텔이 아니라 하더라도 저 칼립소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 정도의 실력자가 홉킨스 가문에 붙어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투구 전사라는 것들의 존재도 그렇고요.”

제온의 말을 알아들은 킬리안이 물었다.

“영주나 왕실에서 본격적으로 날 잡으려고 한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말 칼립소가 말한 괴물이 카스텔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아니라고 해도 그 정도의 강자가 우리를 공격했다는 건 나쁜 징조입니다.”

“그에 대해 알아보고 대책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

“네, 두목.”

조언을 들은 킬리안은 문득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잘게 썬 잎사귀를 손톱만한 크기로 뭉쳐 만든 덩어리.

그 덩어리를 입에 넣어 씹은 킬리안의 눈빛이 순간 번득였다.

정체불명의 덩어리에 머리를 잘 돌아가게 해 주는 효과라도 있는 것일까?

킬리안은 눈빛을 번득이며 금방 결단을 내렸다.

“레디아에 정보원을 보내라. 지금 홉킨스 가문 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쪽에서 알아보라고 해.”

“네. 두목. 홉킨스 가문의 영지 쪽은 어떻게 할까요?”

“현상 유지해라. 투구 전사나 그 괴물 년이 나타나면 알아서 숨든 도망치든 하라 하고. 우리가 지금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알아야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다르센 왕국의 수도 레디아는 하얀 까마귀라도 함부로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다.

여태 도시보다 훨씬 치안도 잘 잡혀 있고, 악명 높은 왕국 정보부 ‘회색 그림자’ 의 눈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하얀 까마귀의 역량이라면, 그리고 제온이 직접 챙긴다면 충분히 왕국 수도에 정보원을 보내 쓸 만한 정보를 알아올 수 있었다.

한 가지 사항이 결정되고, 제온이 다른 말을 꺼냈다.

“알겠습니다. 두목. 그리고 사업 이야기 말입니다.”

“그래. 그것도 마무리 지어야지. 그 놈들이 뭐라고 했다고?”

“어둠의 의식을 치르는 데 협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의식이라.”

다시 한 번 킬리안의 눈이 번득였다.

* * *

요 며칠 사울은 다크 엘프를 놓친 일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기에 탈옥한 다크 엘프 추적에 실패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왕자 입장에서는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기껏해야 범죄자 한 명 놓친 것이고, 일개 범죄자가 왕자에게 보복하리라 생각하기는 힘들기에.

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다크 엘프가 도망친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놓쳐서 후환이 되는 건 아닐까.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지는 않을까.

고민하던 사울은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전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레이의 말과 표정만으로도 사울은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손님인가?”

“네. 루시아 왕녀님이 보내셨다고 합니다.”

“누님이? 알았어. 들어오라고 해.”

곧 장교 복장에 검을 찬 청년이 들어와 사울에게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짙은 갈색 머리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남들보다 조금 더 큰 키와 당당한 체구는 쾌남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왕자 앞에서 무례하지 않고 예는 갖추면서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게 일단 마음에 들었다.

“그대는 누군가?”

“루시아 전하의 휘하에 있는 아르멜 카를로스라고 합니다.”

“카를로스 가문이군.”

카를로스 가문이라면 사울도 잘 알고 있었다.

왕국 정계나 군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름 있는 귀족 가문이다.

물론 능력도 있을 것이다.

누님은 가문만으로 자기 수하를 뽑을 위인이 아니니까.

“수도에서 오는 길인가?”

“네. 전하.”

“수도는 별일 없나? 아바마마께서는 무탈하시고?”

“폐하께서는 무탈하십니다. 왕녀 전하나 다른 왕실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행이군. 그래, 누님께서 무슨 일로 보내셨지?”

“여기, 전하께서 보낸 편지입니다.”

사울은 아르멜이 내민 편지를 받았다.

눈에 익은 루시아 왕녀의 봉인을 뜯고 편지를 펼치니 익숙한 누님의 글씨체가 보였다.

편지 내용의 절반은 특별할 게 없었다.

안부 인사와 가족들의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이었다.

중요한 내용은 나머지 절반에 있었다.

‘홉킨스 가문 영지에서 하얀 까마귀와 부딪쳤다고 들었다. 하얀 까마귀를 일개 범죄 조직처럼 취급하는 자들도 있지만, 왕국의 역병과 같은 존재다. 그들이 끼치는 해악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도 없지. 네가 변방까지 가서 검은 마녀와 함께 하얀 까마귀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면 한다. 이왕 시작한 일이니 그들의 뿌리까지 뽑는다면 더욱 좋겠지.’

이런 대목을 넘어 편지 말미에 이르러 마침내 본론이 나왔다.

‘내가 총애하는 아르멜을 네게 보낸다. 유능하고 성실하며 왕국에 충성하는 인재니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해낼 게다. 앞으로 그를 통하여 나와 소통하고 함께 하얀 까마귀 문제를 해결하자구나. 자세한 이야기는 아르멜에게 듣거라. 그럼 몸조심해라.’

편지를 다 읽은 사울은 편지지를 곱게 접어 도로 봉투에 넣으며 말했다.

“누님이 그대를 꽤나 총애하나보군.”

“과찬이십니다.”

“그래. 무슨 일인지는 알고 왔나?”

“전하를 도와 하얀 까마귀 문제를 해결하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영지 상황을 감시하는 일도 함께 맡았겠지? 물론 나도 감시하고.”

사울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아르멜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심지어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

“네, 전하.”

“뭐라고?”

왕자 앞에서 왕자 감시를 하러 왔다는 말에 옆에 있던 그레이가 더 놀랐다.

화가 난 그레이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사울이 손짓으로 말렸다.

“솔직하군. 나는 솔직한 사람을 좋아해.”

“감사합니다.”

“하얀 까마귀 문제 해결, 영지 감시, 왕자 감시. 이 세 가지 말고 또 다른 임무를 맡은 건 없나?”

“네, 전하. 믿으셔도 됩니다. 그 이상의 일은 제게 벅찬 일이니까요.”

솔직한 척 하며 남을 속이는 인간들은 전생 때부터 많이 봐 온 사울이다.

그런 사울의 눈으로 볼 때, 지금 아르멜은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좋아. 내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 * *

사울이 손님을 맞이할 시각, 영주의 방에서도 은밀한 이야기가 시작된 참이었다.

영주 던칸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딱 한 명의 사람만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님.”

“칼랜드.”

자신의 아들이자 영지의 후계자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칼랜드를 바라보던 던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도 들었겠지?”

“네. 왕실에서 또 한 명의 기사가 찾아왔다는 말씀이시지요.”

“아르멜 카를로스. 그 자의 이름이다. 들어 보았느냐?”

“카를로스 가문이라면 들어보았습니다만 아르멜이라는 이름은 못 들어 보았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카를로스 가문의 일원이고, 또 첩의 자식이 아니라 가문의 적자라더구나. 그리고… 회색 그림자 소속이라고 한다.”

회색 그림자라는 말에 칼랜드의 눈이 커졌다.

왕국 정보부 회색 그림자.

정보를 다루는 일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회색 그림자는 그 중에서도 왕국의 안위와 관계 깊은 일들을 도맡았다.

가멜다 왕국의 끄나풀이나 반역자를 색출하거나 국가의 안위를 뒤흔드는 수준의 중범죄자들을 쫓는 일 말이다.

“회색 그림자 소속의 기사가 영지에 찾아왔다면… 보통 일이 아니군요. 그 자가 목적을 밝혔습니까?”

”아르멜의 말로는 하얀 까마귀 문제라고 했다.“

일개 범죄 조직 때문에 악명 높은 왕국 정보부 소속 기사가 영지에 파견되었다.

그것도 왕자가 영웅놀이를 하고 있는 이 복잡하고 미묘한 시기에.

이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생각을 정리한 던칸이 입을 열었다.

“분명 하얀 까마귀는 왕국 수도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놈들이 팔고 있는 물건도 점점 퍼져 나가고 있다고 하고요.”

“그럼 순전히 범죄자를 잡으러 정보부 소속 기사가 파견 나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럴 리는 없겠지요. 우리를 감시하거나 경고하려는 목적도 있을 겁니다.”

“경고라.”

“몰래 움직이지 않고 대놓고 정체를 드러낸 것을 보면 경고의 목적도 있지 않겠습니까.”

던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던칸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다.

아직 젊지만 아들의 통찰력은 노회한 자신의 통찰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럼 어찌하면 되겠느냐?”

“트집 잡힐 일을 안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듣기로 그 기사는 사울 왕자 곁에 붙어 있을 것 같던데, 아이나는 어떻게 하지?”

“계속 사울 왕자 곁에 붙여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군.”

던칸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내렸다.

“아이나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도록 해라. 그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만에 하나 그 일을 알게 된다면 모든 걸 망칠 수 있다. 가능하면 모든 게 끝날 때까지 그 일은 모르도록 하는 게 좋다.”

“물론입니다. 아버님. 그 아이에게는 필요한 만큼만 일러두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