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말씀이 지나치세요!”
항상 사울에게 예의를 지키던 아이나가 보기 드물게 화를 냈다.
그리곤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아버지의 부하를 의심한다면 누구라도 화를 낼 테니. 하지만 지금은 첩자나 매수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첩자를 심거나 뇌물로 매수하는 건 언제나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울 역시 전생 때 뇌물을 받은 아군 때문에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더군다나 상대는 악당들이다.
그런 놈들은 필요하다면 누구든 매수하려 할 것이다.
사울은 일단 그것부터 막을 필요를 느꼈다.
내부의 적 때문에 정체가 드러나고, 곤경에 처하는 건 사양이니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에요. 저희, 아니 이 영지 안에 도적 무리와 손을 잡는 불한당 같은 자들이 있으리라고는…….”
쉽사리 믿지 못하는 아이나에게 카스텔도 한마디 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네?”
“영주님 휘하의 사람들을 모두 합치면 천 명은 넘겠지요. 천 명의 사람 속에는 누구와도 손을 잡고 사욕을 채우려는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제아무리 상대가 악당일지라도.”
“.....”
반박할 수 없는 말에 아이나는 더 말하지 못했다.
이어 사울도 말했다.
“당분간 민감한 정보는 우리들만 알고 있는 게 좋겠어요. 그대의 가족과 충복을 못 믿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 말처럼 천 명이 모이면 그 속에는 탐욕에 눈이 먼 자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네.”
“내 말에 그대의 마음이 언짢았다면 사과하지요.”
“아닙니다. 제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어요.”
아이나의 말에 사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나가 잘못한 건 아니다.
열여섯 살의 소녀가 배신이나 매수에 대한 가능성까지 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건 힘들 수밖에 없다.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사울 역시 아이나처럼 순수한 모습을 유지하지 않았을까.
“자, 그럼 모두들 휴식을…….”
회의를 마치려던 사울의 눈에 카스텔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선생님?”
“…….”
“무슨 일이지요?”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적의를 가지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싸울 준비를 하십시오.”
다른 사람도 아닌 카스텔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심상찮은 일이다.
사울도, 아이나도 본능적으로 무기를 손에 쥐었다.
사울은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현재 아군의 현황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지금 우리 병력이 얼마나 되지요?”
“그러니까… 밖에서 경계하고 있는 병사들을 포함해서 13명입니다.”
“모두들 정예병들이고요.”
“네. 도련님.”
병사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기에 습격자도 눈이 있다면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습격을 온다?
사울은 방금 전 대화를 생각하며 현재 상황을 파악했다.
‘투구 전사’의 동선은 영주의 측근과 자신의 일행만이 알고 있다.
일행인 아이나와 카스텔은 항상 같이 있었기에 믿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정체불명의 습격자는 영주 측근을 통해 ‘투구 전사’의 동선을 알아냈을 것이다.
첩자를 통해 ‘투구 전사’의 정체를 알면서도 쳐들어왔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다.
사울의 정체를 알고도 쳐들어왔다면 ‘투구 전사’를 공격하는 것을 넘어, 왕국과 한판 붙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니까.
사울이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병사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큰일입니다!”
“수상한 자들을 발견했나?”
“그렇습니다!”
아이나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주변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라. 혹시 마을 전체를 공격할 수도 있으니 마을 쪽의 동태도 살펴라.”
“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정체불명의 자들의 목표는 마을이 아니었다.
병사가 뛰어나가고 오래잖아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어지러이 울려 퍼졌다.
“누구냐!”
“모조리 죽여라!”
병사들과 정체불명의 적들이 싸우는 소리에 사울은 아이나, 카스텔과 눈빛을 교환했다.
눈빛만으로도 대화가 통했다.
앉아서 기다릴 게 아니라 밖에 나가서 상황을 살피고 싸우자는 뜻이었다.
그렇게 문밖으로 나가니 이미 여관 곳곳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검을 빼드는 사울에게 아이나가 나직이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해 주세요.”
“그러지요.”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은 상황에서 영지 주민을 먼저 생각 하다니 기특한 마음씨다.
아이나의 부탁을 기억하며 사울 역시 싸움에 가담했다.
습격자들은 투구를 쓴 사울과 아이나를 알아보았다.
“저 연놈들이다!”
“살려서든 죽여서든 끌고 가라!”
습격자들은 하나같이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하지만 마나를 다루는 자는 없었다.
마나를 다루는 전사나 마법사와 그렇지 못한 전사의 차이는 크다.
사울과 아이나는 별 도움 없이 습격자들이 덤벼드는 족족 쓰러뜨렸다.
사울은 자기에게 달려드는 습격자를 검집으로 가격해 쓰러뜨리며 말했다.
“가능한 생포해요!”
아이나도 방패로 적을 후려치며 대답했다.
“네!”
습격자가 예뻐서 생포하는 게 아니다.
죽은 자는 말을 못하니 가능한 많이 생포해야 쓸모 있는 정보를 들을 기회가 생긴다.
그렇게 싸우면서도 사울은 무언가를 느꼈다.
지금 습격은 예고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군가 있어.’
마나를 다루는 자는 다른 마나를 가진 존재를 감지할 수 있다.
카스텔 같은 실력자라면 마나의 유무와 상관없이 적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데, 사울은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사울도 마나에 민감한 만큼 ‘다른 마나를 다루는 자’의 존재는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지금 습격을 받고 있는 여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누군가.
상당히 강력한 마나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
잠시 후 습격자를 모두 처리한 사울이 시선을 돌리자 아이나의 표정도 굳은 게 보였다.
아마 사울과 비슷한 것을 눈치챈 것이리라.
“나가지요.”
“네.”
일단 사울과 아이나는 밖으로 나갔다.
아이나에게 들은 말도 있고, 사울 역시 상관없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에 자리를 옮겼다.
사울 일행이 자리를 이동하자 정체불명의 누군가 역시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사울을 노리거나 아니면 일행 전체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싸울 만한 장소가 있어요.”
“그리로 안내해요.”
아이나가 안내한 곳은 마을 외곽이었다.
어둠 속에 습격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 사울은 마법 불빛 몇 개를 만들어 주변을 밝혔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금 사울을 따라온 건 아이나와 카스텔뿐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전력이다.
“누구냐, 나와라!”
사울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저편에서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후훗.”
싸늘한 여자의 목소리.
하지만 인기척은 하나가 아니다.
사울은 검을 빼든 채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곧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인간들이 나타났다.
아니, ‘인간들’은 잘못된 표현이다.
무리 대부분은 인간으로 보였지만 선두에 선 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마법 불빛에 비치는 짙은 갈색 피부.
유독 길고 뾰족한 귀.
전투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빨간 쇼트 드레스 차림.
조각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살기 어린 표정.
그런 여자를 본 사울이 중얼거렸다.
“다크 엘프…….”
다크 엘프.
보통 엘프가 피부색이 밝다면, 다크 엘프는 피부색이 짙은 갈색이거나 회색빛을 띈다.
과거 인간이 이종족을 노예로 부리던 시절에는 다크 엘프는 어둠에 혼을 팔아넘긴 자들이라 불리며 특히 박해받았다고 한다.
물론 옛날이야기다.
율렌 섬에서 노예 제도가 철폐된 지는 200년이 넘었다.
다크 엘프 또한 어둠에 혼을 팔아넘긴 자들이라기보다는 단순한 핏줄 차이라는 점도 오래전에 밝혀졌다.
일반적으로 피부가 밝은 엘프는 마법에 능하고, 다크 엘프는 체술이 능하다고 알려졌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 느껴지는 심상찮은 마나의 기운의 주인은 저 다크 엘프가 분명했다.
‘강하다.’
사울의 본능이 알려왔다.
저 다크 엘프는 강적이라는 사실을.
아마 이번 생에 사울이 만난 ‘적’ 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일 것이다.
“넌 누구냐?”
사울의 말에 다크 엘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
“너희 연놈들이 그 유명한 ‘투구 전사’들 같군. 맞지?”
투구 전사.
정체를 숨기기 위해 지금도 투구를 쓰고 있는 사울과 아이나를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다크 엘프는 사울과 아이나를 번갈아 보다 흥미롭다는 듯 입술을 핥았다.
“재미있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사내놈은 아직 어린 것 같고, 계집년도 보아하니 아직 덜 자란 애송이에 불과한 것 같은데. 고작 어린 인간 둘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을 했다는 말이야?”
다크 엘프가 말하는 ‘우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사울은 짐작했다.
“역시 너희들은 하얀 까마귀 소속이군.”
“멍청한 꼬마는 아니네.”
엘프도, 다크 엘프도 장수하는 종족이다.
인간 기준으로는 서른 살로도 보이지 않는 저 다크 엘프도 실제 나이는 훨씬 많을 것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실력을 쌓을 시간이 많다는 뜻이다.
실제로 엘프나 다크 엘프 중에서는 여느 인간을 뛰어넘는 실력자들이 많았다.
지금 눈앞의 다크 엘프 역시 ‘여느 인간은 뛰어넘는 실력자’가 분명했다.
‘우리가 질리는 없지만… 그래도 저 자를 얕보면 안 되겠어.’
사울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대체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지?”
“내가 할 질문을 그쪽에서 하고 있네. 너희 연놈들은 하얀 까마귀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우리 일을 방해하는 거지?”
“원한은 없지만 너희 일을 방해할 이유야 많지. 살인, 강도, 절도, 밀수, 금지된 약…….”
사울의 대답에 다크 엘프가 피식 웃었다.
“상상한 것 중 가장 재미없는 대답이네. 결국 영주나 왕국의 개들이 알량한 정의감으로 우리 일을 방해한 것이다?”
아무래도 저 다크 엘프는 사울 일행이 일개 용병이나 영주 혹은 왕국 휘하의 기사쯤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크 엘프의 표정에는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고, 동시에 살기가 넘쳤다.
사울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울이나 아이나의 정체도 모르고 그저 ‘투구 전사’를 찾아 온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나 아이나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수습하기도 쉬울 테니까.
“선택권을 주지. 투구를 벗고 순순히 날 따라와. 아니면 이 자리에서 가지고 놀다 목을 잘라 줄 테니.”
다크 엘프의 말에 사울은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싫다면?”
“목이 잘리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말과 함께 다크 엘프가 손가락을 퉁겼다.
그녀의 곁에 있던 몇몇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다크 엘프가 하얀 까마귀 소속이라면, 저들도 하얀 까마귀 소속 도적들일 것이다.
하지만 도적이라고 해서 얕볼 수는 없었다.
모두에게서 마나가 느껴졌다.
도적 주제에 마나를 다루는 법을 익힌 모양이었다.
다크 엘프를 포함하여 적들의 숫자는 총 여섯 명.
이런 상황에서 사울은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반칙을 좀 써야겠군.”
사울의 말에 다크 엘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