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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21화 (21/232)

21화

“킬리안 비셔스……?”

“알고 계셨군요.”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자니까요.”

킬리안 비셔스.

다르센 왕국은 물론 이웃 나라인 가멜다 왕국까지 악명을 떨치고 있는 범죄자.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양쪽에 발을 걸친 범죄 조직 하얀 까마귀를 이끌며 상상 가능한 거의 모든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깡패 두목.

일개 깡패 두목이라고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킬리안 비셔스 본인도 뛰어난 마법 전사라고 알려졌고, 수하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탈영병이나 심지어 탈영 장교까지 여럿 두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본인과 부하들의 능력에 힘입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불과 5년 만에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모두의 공적이 되었다.

서로 다투는 두 나라가 킬리안 비셔스를 쫓는 일만큼은 조금이나마 협조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5년 넘게 잡히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이 영지에서도 하얀 까마귀가 있나요?”

“네. 킬리안 비셔스 본인도 몇 번 목격된 적 있습니다.”

“영주님도 골치가 아프겠군요.”

“그렇습니다. 몇 번 토벌을 시도해 보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서류를 살피던 사울이 말했다.

“그럼 잡다한 것들 몇을 처리하고, 하얀 까마귀를 사냥해 볼까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는 반가움보다 우려를 표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몬스터를 살상하는 거야 아무 문제없겠습니다만…….”

아이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사울이 아니었다.

범죄자를 잡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변방의 범죄자들은 강도와 살인에 익숙한 악질들이다.

가능하다면 모조리 생포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이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악질 범죄자들을 무사히 체포하기도 어렵고 무사히 감옥까지 끌고 와 재판을 받게 만드는 건 더 어렵다.

그런 악당들을 상대하려면 결국 피를 봐야 할 것이다.

아이나의 질문은 결국 피를 볼 자신이 있느냐는 완곡한 질문이었다.

사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자신은 사람 피를 보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로 취급되는 건가.

일단 사울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이 영지와 왕국의 치안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요.”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이라면.”

사울이 말을 돌렸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그러니까……. 이곳이 좋겠습니다. 전하.”

아이나는 영주의 저택에서 가장 가까운 ‘범’ 표시가 된 곳을 가리켰다.

“보통 사제타에서 멀어질수록 나타나는 범죄자들이나 몬스터들이 흉악해집니다. 그러니 멀지 않은 이곳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영지의 중심인 사제타에는 영주 군도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왕국 군도 주둔하고 있다.

따라서 사제타에서 멀어질수록 영주 군이나 왕국 군의 견제를 받지 않아 범죄자나 몬스터 세력이 큰 경우가 많았다.

“좋아요. 그럼 시작하지요.”

* * *

공식적으로 사울 왕자는 카스텔과 함께 영주 저택에서 계속 머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찰관 피에르에게도 사울이 정체를 숨기고 밖에 나다니는 건 비밀로 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들키겠지만, 들키기 전까지는 철저히 비밀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사울과 카스텔, 그리고 아이나와 기사 세 명이 비밀리에 영주 저택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사제타에서 조금 떨어진 마린다라는 이름의 마을이었다.

범죄자들의 근거지와 가까우면서도 마을 내부의 치안은 좋은 편이라 사울 일행의 아지트로 선택된 것이었다.

영주 저택에서 마린다를 향해 말을 타고 가다 보니 어느덧 해가 졌다.

승마라면 왕궁에서 배웠기에 익숙한 사울이었지만, 이렇게 장시간 말을 타는 건 처음이었다.

지나치게 오랜 시간 말을 탔더니 엉덩이부터 허리가 비명을 지르는 느낌이었다.

“끄응…….”

왕자의 체면 때문에 아프다는 소리도 못 하고 표정 관리하던 사울은 곁눈질로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카스텔, 아이나, 그리고 아이나를 따라온 기사 세 명.

모두들 태연한 표정이었다.

모두들 장시간 말을 타고 다니는 일에 익숙한 것이리라.

“…….”

일행들의 태연한 표정을 본 사울은 아픈 것을 참고 마린다에 빨리 도착하기를 기원했다.

* * *

힘든 여행 끝에 마침내 마린다에 도착했다.

다 합쳐 백 가구도 살지 않는 마을이지만, 이 영지에서는 꽤 큰 규모의 마을이라고 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아이나가 먼저 기사들과 함께 말에서 내려 마을을 살피러 갔다.

그런 아이나를 바라보던 사울이 말했다.

“아이나는 이런 일에도 익숙한 것 같죠?”

“네. 전…….”

카스텔이 ‘전하’라고 부르기 직전 사울이 눈짓을 했다.

알아들은 카스텔이 재빨리 호칭을 바꿨다.

“…도련님.”

“호칭 조심해요.”

“죄송합니다.”

정체를 숨길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외모와 말투다.

외모는 가면이나 투구로 숨기고, 말투도 왕자를 모시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

사울의 변장이 성공하기 위해서 꼭 지켜야 할 일이었다.

사울은 마린다를 한번 스윽 둘러보고는 말했다.

“좋은 마을이에요. 왕궁이 있는 레디아보다 훨씬 조용하고요.”

“도련님은 이런 마을이 좋으십니까?”

“왕국이나 수도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너무 번잡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때로는 이런 조용한 마을에 와 보고 싶었지요.”

“이 조용한 마을 코앞에 도적들이 들끓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물론이지요. 우리는 그 도적들을 잡으러 온 거잖아요.”

잠시 기다리는 사이 아이나가 돌아왔다.

“마을은 안전합니다. 하지만 말이 다니기에 좋지 않으니 걷는 게 편하실 겁니다.”

걷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왕족도 있지만, 사울은 그런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지요.”

사울이 말에서 내리는 사이 아이나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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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마을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주변을 경계한다.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군령으로 엄히 처벌할 것이니 명심해라.”

“네!”

병사들은 군기 잡힌 목소리로 아이나의 명령을 따랐다.

명령을 내리는 쪽도 듣는 쪽도 이런 일이 익숙한 게 분명했다.

그렇게 마을에 들어온 사울은 마을에 하나뿐인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여관 쪽과 이야기가 끝났는지 아이나는 곧바로 사울을 여관방으로 데려갔다.

사울 일행이 머무르는 여관은 마을에 하나뿐인 여관이자 하나뿐인 술집이며 식당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제 막 해가 서산에 넘어갈 시간인데 손님 몇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손님들은 사울 일행을 보고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투구를 쓴 아이나와 사울.

맨얼굴을 드러낸 카스텔과 기사들.

이런 여관에서는 흔치 않을 것 같은 광경인데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방에 들어 온 사울은 그제야 투구를 벗었다.

“이제 좀 살 것 같군.”

아이나도 투구를 벗으며 비슷한 소리를 했다.

“정말 그렇죠? 물론 투구가 쓴 사람의 목숨을 지켜줄 수도 있지만, 정말 답답해요.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실력자들이 투구를 쓰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가벼운 투구라도 이런데 무거운 강철 투구라면…….”

자신이 잘 아는 화제에 신이 나 재잘거리던 아이나는 뒤늦게 말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사울은 피식 웃으며 다른 말을 꺼냈다.

“마을 사람들도 우리들을 잘 받아들이더군요.”

“영주 군에서 영지 곳곳에 병사나 기사를 파견하여 임무를 맡기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마을에 일러두었습니다.”

“그럼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그저 영주 휘하의 병사, 잘해야 기사 정도로 알겠군요.”

“그렇습니다.”

말과 함께 아이나는 지도를 펼쳐 들었다.

“이 지도에 적힌 것과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그럼 하루 정도 쉬고 이틀 뒤부터 시작해요.”

“네. 도련님. 그리고… 혹 마음이 바뀌셨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사울이 사람 피를 보기 싫다고 해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아이나의 말뜻을 알아들은 사울이 피식 웃었다.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아이나는 기사들과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사울은 카스텔을 돌아보며 말했다.

“선생님도 이만 가 봐요.”

카스텔까지 내보낸 사울은 자신의 장비를 돌아보았다.

얼굴을 가리기 위한 투구.

수수하지만 마법으로 단련된 마법 갑옷.

일부러 허름하게 보이도록 칠하고 더럽힌 마법 검.

정체를 숨기기 위해 장비들도 세심하게 손을 보았다.

준비는 충분히 했지만 오랜만의 실전에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과 인간을 상대하는 건 다르다.

서로 다른 전략이 필요한 건 물론 기분도 다르다.

꼭 필요하지 않다면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다.

사울이 죽이고 싶은 상대는 가멜다 왕국의 원수들이지, 생전 본 적도 없는 도적이나 강도 무리가 아니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피를 봐야 할 것이다.

“망설이면 안 돼.”

첫 번째 실전에서 망설이다가 죽거나 큰 부상을 입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사신은 나이와 경험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사울은 마법 검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 * *

이틀 후.

사울은 아이나와 카스텔만 대동한 채 마을에서 멀지 않은 도적 소굴로 향했다.

“그 산에 도적들이 자리 잡은 지 반년 정도 되었다고 해요.”

“그런데도 아직 토벌을 못 했다고요?”

“네, 생각보다 영악한 놈들이에요. 대규모의 병력이 움직이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병력이 사라지면 이내 다시 나타나는 식으로 움직인다더군요. 지금 저희 영지에서는 소규모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 많은 병력을 장기간 동원할 수 없으니까요.”

“과연. 하지만 우리 셋만 가면 도적들이 도망치지 않겠지요.”

많이 긴장되지는 않았다.

영주 저택에서보다 조금 가벼워 진 아이나의 말투도 익숙해졌고, 쓰고 있는 가죽 투구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말을 타고 한 시간 가까이 이동한 사울 일행의 눈에 자그마한 산이 보였다.

지도에서 본 그 산이다.

“저 산이지요?”

“네. 산의 큰 동굴을 소굴로 삼고 있다고 해요.”

도적의 존재와 소굴까지 파악되었지만 토벌은 못 했다.

그만큼 도적들이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뜻이 될 수 있고, 영지 통제에 문제가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을 테고.

산 아래 도착한 사울 일행은 본격적으로 도적들을 찾기 시작했다.

나타나지 않으면 이쪽에서 찾아갈 생각이었다.

다행히 일부러 찾아 나서야 할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멈춰라!”

산길에서 외침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통나무가 굴러와 길을 막았다.

사울 일행이나 그들이 탄 말을 다치게 하지 않고 정확히 길만 막는 것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렇게 길을 막은 뒤 숲에서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에 허름하지만 나름대로 충실하게 무장한 인간들.

누가 봐도 도적들이었다.

“말 위에서 죽기 싫으면 내려라.”

도적 몇 명이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석궁을 겨눈 놈들의 살기 어린 눈빛을 보건대, 당장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석궁의 방아쇠를 당길 게 분명했다.

일단 사울 일행 모두가 말에서 내렸다.

동시에 사울은 카스텔 쪽에서 미미한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중일 것이다.

하지만 도움을 받으면 실전이라 할 수 없다.

자신과 아이나의 힘만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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