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아이나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내 정체를 숨긴 채 움직여 볼 생각이에요.”
“정체를 숨긴다고요?”
“카스텔 선생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가면을 쓰고 적들을 도륙 내던 선생님이 가면을 벗는 것만으로도 대부분 정체를 알아보지 못 했다고요. 그렇다면 내가 가면을 쓰고 다른 옷을 입으면 어떨까요? 누구도 내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겠지요.”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 사울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아이나의 표정을 읽은 사울은 자신의 말이 진심임을 밝혔다.
“농담이 아니에요.”
“하, 하지만 전하. 귀하신 몸으로 그런 일을 하시는 건 곤란합니다.”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가면과 복장 같은 것으로 내 정체를 숨길 테고, 이후 인간이나 다른 지성을 가진 종족을 상대로 경험을 쌓을 생각이에요. 물론 홉킨스 가문과 이 지역에 민폐를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오히려 도울 생각이지요. 듣자 하니 이 지역의 치안이 썩 좋지 않다던데.”
“…네. 그건 사실입니다.”
영주의 딸이며 저택에서 사치를 부리는 대신 군인으로 활동하는 아이나라 영지 상황에 대해 잘 알았다.
누구도 홉킨스 가문이 이 지역에서 폭정을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왕의 직할령과 비교해도 세율이 높지 않았고, 노역이나 징병 같은 것들도 국왕 직할령보다 크게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삼백 년 전쟁’ 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서도 홉킨스 가문은 할 만큼 하고 있고, 영지민들도 대부분 크게 만족하지는 못해도 큰 불만도 없이 홉킨스 가문의 지배에 순응하고 있다.
문제는 영지 안팎으로 치안의 불안 요소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병력은 한정되어 있고, 그 상당수는 가멜다 왕국을 상대하거나 이종족들 지역을 관리하는 데 쓰이고 있다.
따라서 영지 안을 돌볼 병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빈틈을 노리고 치안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탈영병과 범죄자들이 뭉쳐 도적 집단을 형성하여 영지를 맴돌며 약탈하는 건 영지의 일상에 가까웠다.
심지어 가멜다 왕국에서 간첩을 보내 치안을 어지럽히려는 시도를 한 적도 있다.
게다가 잊을 만하면 출몰하는 몬스터들도 있다.
가멜다 왕국과의 휴전 조약이 맺어진 지 오래지만 홉킨스 가문의 영지는 평화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따라서 영지의 치안 문제는 홉킨스 가문이 언제나 골머리를 앓는 부분이었다.
홉킨스 가문은 치안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있다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그 사람이 왕자만 아니라면.
‘아버님께서 가능한 왕자의 부탁을 들어주라 하셨지만…….’
섣불리 이런 말을 들어주기로 약속했다가는 후환이 두렵다.
“전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이나가 말끝을 흐리자 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려운 부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대가 부담스러워 하는 것도 잘 알고요. 그래서 내 부탁으로 인하여 그대와 홉킨스 가문이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이익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봤어요.”
“저희 가문의 이익… 이라고요?”
“그래요. 일단 그대가 가장 먼저 걱정할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요. 내가 죽거나 크게 다쳐 홉킨스 가문이 그 책임을 질 상황은 만들지 않겠어요. 내가 가는 곳에는 항상 선생님이 대동할 거예요.”
검은 마녀 카스텔.
몇 년간 세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검은 마녀의 명성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런 카스텔이 사울과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사울이 도적이나 깡패 따위에게 크게 다치거나 죽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진다.
“또 있어요. 나뿐만이 아니라 선생님도 실전 훈련을 바라고 있어요. 알다시피 선생님은 ‘가르시아 남매’에게 당한 상처로 오랫동안 실전을 못 나갔어요. 그래서 선생님의 개인 훈련도 필요한 상황이지요.”
“그럼……?”
“선생님 개인적으로도 따로 시간을 내서 정체를 숨긴 채 영지의 치안 개선을 도와줄 거예요. 영주님이 의뢰만 한다면 즉각 선생님이 나서 처리할 겁니다. 상대가 몬스터든 도적이든 아무 상관없어요.”
“카스텔 님이…….”
한 명의 존재만으로 영지의 치안을 개선시킬 수 있을까?
카스텔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확실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덥석 받아들이기엔 문제가 컸다.
함부로 대답했다 책임을 질 자신도 없었다.
“일단 아버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부탁해요.”
* * *
급한 용무가 있다는 말에 던칸은 하는 일도 잠시 멈추고 아이나의 방문을 기다렸다.
“무슨 일이냐?”
“사울 왕자님의 일이에요.”
아이나에게서 사정을 들은 던칸의 눈이 커졌다.
“왕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
“네, 아버님.”
정말 독특한, 아니 괴상하기까지 한 부탁이다.
차라리 일방적으로 무리한 부탁을 한 것이라면 납득할 수 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왕자라면 변방의 영주 따윈 평민들처럼 ‘무시해도 되는 존재’로 비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괴상한 부탁이다.
거기에다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그 무리한 요구를 감수할 만한 대가를 제시한 것도 독특했다.
노회한 정치인 수준의 계략은 아니라도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어린 왕자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기에는 꽤 철두철미하지 않은가.
‘부담스러운 요구이기는 하다. 하지만 내 딸과 검은 마녀가 함께 왕자와 다닌다면 만에 하나라도 큰 사고가 일어나진 않겠지. 무리한 요구이기는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요구를 들어준다면 그만큼 빚을 지우는 셈이니…….’
결심한 던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도와주거라.”
“진심이세요?”
“그래. 사울 왕자가 널 이길 정도로 실력이 대단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실력이 있다면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테고, 무슨 일이 생겨도 너와 검은 마녀가 함께 다닌다면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겠지. 허락하겠다. 마음껏 돕거라.”
“…알겠습니다.”
던칸의 대답을 들은 아이나는 그 길로 사울을 찾아가 뜻을 전했다.
“고마워요. 나의 별난 행동에 어울려 줘서.”
“…그나저나 정체를 숨긴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선생님처럼 가면을 쓸 생각도 해 봤는데, 차라리 투구를 쓰는 게 낫겠어요. 가볍지만 얼굴을 완전히 가려 주는 투구를 쓰고 영지의 치안을 악화시키는 자들을 상대하는 거지요. 선생님과 함께.”
사울은 아이나를, 나아가 그녀 뒤에 있을 던칸을 안심시키기 위해 카스텔 이야기를 계속 반복했다.
카스텔이라는 안전장치가 없었다면 두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계획을 말렸을 것이다.
아니, 사울부터가 안전장치도 없이 무책임하게 이런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아이나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 * *
사흘 후.
사울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준비한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안전제일이라 갑옷은 몬스터 사냥 때 입었던 ‘마법 갑옷’을 그대로 입기로 했다.
대신 그 위에 가벼운 옷을 하나 더 걸쳐 마법 갑옷이 드러나는 것을 피했다.
얼굴에는 투구를 쓰기로 했다.
다행히 영주의 소장품 중 사울이 쓸 만한 게 있었다.
얼굴 가리개까지 만들어진 가죽 투구였다.
보통 뛰어난 실력자들은 지나치게 무거운 갑옷이나 번거로운 투구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무거운 갑옷이나 투구보다 마나나 마법으로 신체를 보호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사울이나 아이나 정도만 되어도 실전에서 투구를 쓰지 않는 게 유리한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투구를 쓰지 않았다.
그런 사울에게 투구는 낯설었지만, 다행히 영주의 가죽 투구는 얼굴을 가리면서도 쓰기 편한 물건이었다.
거기에다 마법으로 투구 자체의 무게를 줄이고 강도를 높였다.
덕분에 금속 투구보다 훨씬 가볍고 쓰기 편하면서도 금속 투구 수준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물건이 탄생했다.
사울은 준비된 의상을 모두 걸치고 투구까지 써 보았다.
이 모습만 보면 누가 봐도 안에 사울 왕자가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사울은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지만, 곁에 있던 그레이는 그렇지 못했다.
“전하…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사울이 태평스레 대답했다.
“이것도 다 강해지기 위한 방법이야.”
“하지만…….”
그레이는 카스텔의 말을 떠올렸다.
왕자님께 무언가 커다란 고뇌와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지금 사울 왕자의 행동은 그레이의 눈에는 그저 기행에 가까웠다.
기행을 저지르면서도 철두철미하게 행동해 말리기도 어렵다는 게 그레이 입장에서는 더욱 기가 막혔지만.
그러는 사이 함께 움직이기로 한 두 사람이 사울이 머무는 손님방에 찾아왔다.
평범한 차림의 카스텔.
평소 입고 다니는 것과는 다른 색과 모양의 가죽 갑옷을 걸친 아이나였다.
두 사람 역시 얼굴을 가렸다.
카스텔은 천으로 만든 복면을 썼고, 아이나는 사울처럼 투구로 얼굴을 가렸다.
이번 일은 최소한의 인원만 움직이기로 했다.
몇몇 인원들이 더 있지만 직접 움직이는 건 사울, 카스텔, 아이나 세 명 뿐이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가린 세 명의 모습을 본 사울은 새삼 자신이 독특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왕자의 기행’ 이라는 식으로 역사책에 남아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그만큼 괴상한 일이지만 사울은 이 일이 의미 있는 시간이 되리라 확신했다.
실전 경험을 쌓고 영주의 딸, 나아가 영주 가문과 더 친밀해지고 수도와는 완전히 다른 갈레트 지방을 직접 체험한다.
훗날 ‘왕자의 기행’ 소리를 듣게 되어도 할 만한 일이라 생각했다.
* * *
사울과 아이나 그리고 카스텔이 함께 정체를 숨기고 영지의 치안 유지 활동에 나선다는 계획이 확정되었다.
이 터무니없는 계획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 카스텔이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계획을 짠 건 사울이다.
아이나는 말하자면 본의 아니게 휩쓸린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나는 계획이 결정된 후 놀랄 만큼 빨리 적응했다.
어차피 결정된 일이니 꼭 성공시켜야 한다고 결심한 듯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전하. 가져왔습니다.”
아이나가 가져 온 서류는 언뜻 보기에도 감탄이 나올 만큼 깔끔했다.
“그대의 도끼 솜씨만큼이나 글 솜씨도 뛰어나군요.”
사울의 칭찬에 아이나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오라버니가 정리해 주신 겁니다.”
“하하. 그랬군요.”
어느 정도 짐작했다.
아이나는 서류 정리보다 직접 움직이는 일을 잘하는 스타일로 보였으니까.
그에 반해 아이나의 오라버니인 칼랜드는 서류 정리 같은 일의 전문가인 모양이다.
칼랜드가 정리해 준 서류는 상당히 보기 좋았다.
글과 그림이 적절히 배합되어 알아보기 쉽고 깔끔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충실했다.
“이것이 현재 영지 안의 문젯거리들이군요.”
“네. 전하. ‘몬’ 이라 표시된 부분은 몬스터, ‘범’ 이라 표시된 부분은 범죄자들의 소굴이나 주 출몰 지역입니다.”
영지 지도 곳곳에 표시된 ‘몬’과 ‘범’ 표시들.
사울은 그 중 ‘범’ 쪽에 주목했다.
“몬스터도 문제지만, 몬스터들은 선생님이 여유가 있을 때 좀 처리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요, 선생님?”
끄덕.
“우리는 이 ‘범’에 주목하기로 하지요.”
“네, 전하. 현재 우리 영지의 범죄자들은 크게 세 종류입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잡범과 불량배들, 또 하나는 좀 더 실력이 뛰어나고 질이 나쁜 깡패와 도적들, 그리고 하얀 까마귀입니다.”
하얀 까마귀라면 사울도 들어 본 적 있다.
사울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