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전하.”
“내가 영주님이 따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했군요.”
“아닙니다. 전하께서 부족한 제 딸을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혹시 제 딸이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아니에요. 즐거웠어요. 무례라면 따님에게 상처를 입힌 내가 무례했지요.”
던칸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사울은 그와 작별하고 카스텔과 그레이를 데리고 갔다.
던칸은 사울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다 딸을 만나러 갔다.
손님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레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전하.”
“무슨 일이야?”
“영주의 딸과 계속 친하게 지내실 겁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어?”
“전하께서 좋으시다면 제가 주제넘게 말씀드릴 건 아닙니다만……. 폐하나 전하의 형님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레이의 말뜻을 못 알아들을 사울이 아니었다.
사울이 만에 하나 선을 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리라.
“걱정 마. 나도 아바마마께서 이곳을 마냥 좋게 보시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아.”
“그걸 아시면서…….”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아바마마나 이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아바마마나 이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할 테니까.”
“…….”
“그레이.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고 이야기해 주는 건 정말 고마워. 하지만 지금은 나를 좀 더 믿어 주면 좋겠어.”
“네, 전하.”
사울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그레이는 소득 없이 손님방에서 나왔다.
방에서 나오고도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 듯 걱정스런 표정을 짓던 그레이는 그때껏 옆에 있던 카스텔에게 말했다.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카스텔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인적 없는 곳으로 갔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이야기인가요?”
“물론이지요. 전하와 가장 가깝고, 전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나와 당신 아닙니까. 그런 나도 지금 전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왜 이런 곳에 오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나도 이래저래 듣는 이야기가 많아요. 국왕 폐하께서는 전하의 이런 행동에 진노하시거나 편해하시지는 않았지만, 다른 귀족들은 달라요.”
“당신도 전하께서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나요?”
카스텔의 말에 그레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의 머리……. 아니, 그게 무슨 무례한 말이요?”
“전하가 이곳에 오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 몇몇 시종들이 수군거리는 걸 보았어요. 궁금해서 마법으로 엿들었지요. 그들이 말하기를 자기들이 모시는 귀족들이 전하께서 과거 머리에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스스로 그런 곳에 갈 리 없다던가.”
“이런. 그런 소문까지 도는 겁니까.”
카스텔은 자기가 잘못 말했냐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카스텔을 겪어 볼 만큼 겪어 본 그레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소문까지 나올 정도면 귀족들은 전하의 행동을 좋지 않게 보고 있다는 겁니다. 적대하기보다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모양이지만, 그것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하가 영주의 딸과 선이라도 넘는다면…….”
“선……?”
무엇을 말하는지 알 만한 나이인 카스텔이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자, 그레이는 다시 한숨을 쉬며 말해 주었다.
“…전하와 영주의 딸이 혼인을 한다는 소문이라도 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카스텔이 손을 저었다.
“그건 곤란해요. 아직 전하께서는 배워야 할 것이 많은데.”
“…내 생각에 아직 전하께서는 그럴 마음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걸 봐도 영주의 딸에게 넘어가 눈과 귀가 흐려지실 것 같지도 않고요. 하지만 남들은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요?”
“하루 빨리 전하를 수도로 모시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께서 가장 믿는 게 나와 당신 아닙니까. 우리가 힘을 합쳐 전하께 진언을 드리면 전하도 생각을 돌리시지 않을까요.”
카스텔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뭐라고요?”
“전하가 여기에 온 건 전하의 뜻이니 따를 거예요.”
“그 무슨 무책임한…….”
카스텔이 언성을 높이려는 그레이의 말을 잘랐다.
“그레이.”
순간 그레이도 움찔했다.
검은 마녀, 혹은 검은 흉성이라 불리는 절대 강자.
지금 카스텔의 눈빛과 목소리는 그 악명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살기가 느껴지거나 마법을 쓰려는 기색은 없었지만 쏘아보는 것만으로도 여느 사람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렇게 그레이를 진정시킨 카스텔이 말했다.
“당신이 정말 전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뭐요? 그야……. 당연하지요!”
확신 어린 그레이의 말에 카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나보다 전하를 오래 알았으니 내가 모르는 전하의 모습을 알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레이, 나 역시 당신이 보지 못하는 전하의 모습을 봐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나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지요? 내가 검은 마녀라 불리기 전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야…….”
물론 왕실 사정에 밝은 그레이는 알고 있었다.
입 밖으로 함부로 내기도 어려운 카스텔의 과거 말이다.
여느 사람은 상상도 못 할 피와 고통, 어둠으로 얼룩진 과거.
그리고 과거를 씻기 위해 카스텔이 무슨 끔찍한 짓을 하였는지도.
그레이의 표정에서 대답을 읽은 카스텔이 다시 말했다.
“전하를 처음 볼 때부터 느꼈어요. 전하의 고통과 고뇌를. 끔찍한 고통과 고뇌를 느낀 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깊이 숨겨진 어둠. 나는 그것을 보았어요.”
“전하의 고통이라면……. 어머님을 일찍 여읜 일 말이요?”
“그것도 하나의 고통이겠지요. 하지만 그 일만은 아닌 것 같아요. 전하는 나는 물론 당신도 모를 크나큰 고통과 고뇌를 안고 계신 분이에요. 그건 확신할 수 있어요. 그것이 내가 전하 곁을 지키는 이유 중 하나이고요.”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고통과 고뇌 속에 짓눌린 자는 어떻게든 그것을 풀어내려 하지요. 지금 전하가 이곳에 있는 것도 그것을 풀어내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요?”
“이해를 못 하겠군. 대체 전하의 고통과 고뇌가 무엇이기에?”
“그건 나도 몰라요. 당신도 모를 테고, 오직 전하만이 알고 있겠지요. 그렇다면 나는 전하를 도울 뿐이에요.”
“으음…….”
그레이는 카스텔의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사울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쭉 보아 온 자신 아닌가.
어머니를 일찍 여읜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온한 삶을 보내 온 사울에게 ‘검은 마녀’가 공감할 만큼의 고통과 고뇌가 있다는 말인가?
어쨌든 카스텔은 협력할 뜻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레이로서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해는 못 하겠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조금 더 지켜볼 수밖에.”
“…….”
“하지만 이건 명심하시오. 나는 돌아가신 부인께 직접 사울 왕자님을 부탁 받은 몸이오. 전하의 안위가 내 삶의 목적이지. 전하가 잘되시기를 바라지만, 전하가 잘되려다 큰 실수를 하여 몰락하는 건 원치 않소. 당신도 이제는 전하의 측근이 아니오? 전하에 대한 충성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전하가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도와주시오.”
그러자 카스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몇 년 동안 카스텔을 마주해 온 그레이도 거의 본 기억이 없는 미소였다.
“나는 전하를 믿어요. 영민한 분이시니까.”
“…당신의 믿음이 잘못된 게 아니기를 바랄 뿐이오.”
그레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카스텔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기 전 다시 한번 알람 마법을 점검해 보았다.
만에 하나 저택 안팎에서 사울에게 쓸데없는 짓을 할까 걸어 둔 주문이다.
이 저택에서 사울 주변에 ‘예상치 못한 접근’이 있을 경우, 카스텔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점검을 마친 카스텔은 마법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한 말을 떠올렸다.
“고통과 고뇌라.”
분명 사울 왕자는 카스텔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평온한 삶을 보내다 막 성인식을 치른 몸이다.
그런 그에게 무슨 대단한 고통이나 고뇌가 있을까.
하지만 카스텔은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분명 사울에게는 무언가가 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카스텔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아이나와 만난 던칸은 간단한 인사 후 안부를 물은 뒤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래, 대련에서 졌다고?”
“죄송해요, 아버님.”
“죄송할 것까지야. 사울 왕자는 검은 마녀의 제자라고 하지 않느냐. 당연히 실력이 뛰어날 수밖에. 자책할 것 없다.”
아이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던칸은 딸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대련에서 져서 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울에게 묘한 호감 같은 것을 느낀 모양이다.
“앞으로 사울 왕자와 어떻게 지내고 싶으냐?”
“오늘의 패배를 설욕하고 싶어요.”
눈치 없이 본심을 꺼낸 아이나는 뒤늦게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던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왕자에게 너무 무례하게 굴지는 말거라.”
“죄송해요. 아버님.”
“그래, 사울 왕자가 마음에 들기는 하였느냐?”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저나 우리 가문에 해를 끼칠 생각도 없는 것 같고요.”
“그렇다면 당분간 사울 왕자와 친하게 지내거라. 홉킨스 가문의 영애답게 예를 지키면서 말이다. 혹시 왕자가 무언가 요구를 한다면 어려운 게 아닌 한 되도록 들어 주고.”
“네. 아버님.”
“그럼 쉬거라.”
이때까지만 해도 아이나는 예상치 못했다.
다음 날 사울이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정체를 숨기고 좀 더 다양한 실전 경험을 쌓으려는데, 도와주었으면 해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하?”
* * *
사울은 자신이 홉킨스 가문의 영지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실전 경험을 쌓는 것부터 시작해서 보다 많은 것을 익히며 잘하면 작게나마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행동하기는 이르다.
실전을 통해 더 강해지는 것에 집중할 때다.
마음을 정한 사울은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행동하기로 했다.
대련이 있은 다음 날, 사울은 아이나를 찾아갔다.
“전하.”
“몸은 좀 어때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 많이 나았습니다.”
“다행이군요.”
사울은 본론을 꺼냈다.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이미 이야기했듯 나는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요. 하지만 왕자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지요. 몬스터라면 모를까 인간이라면 왕자와 싸우는 걸 두려워 할 테니까요.”
아이나도 사울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렇습니다. 전하께 함부로 손을 대었다 반역자가 되는 걸 각오할 만큼 겁 없는 범죄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맞아요. 한편으로는 내가 정체를 드러내고 다니면 반역자나 혹은 적국의 자객이 날 암살하려 할 수도 있을 테고요.”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그대의 도움을 받고 싶어요.”
“무슨 도움 말씀이십니까?”
“정체를 숨기고 좀 더 다양한 실전 경험을 쌓으려는데, 도와주었으면 해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