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아이나는 방패를 뻗어 자신에게 날아오는 ‘라이트닝 볼트’ 마법을 막았다.
펑.
마법과 방패가 부딪친 순간, 자그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단순히 마법과 나무가 부딪쳐서는 저런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
마나를 방패에 씌워 마법을 튕겨 낸 게 분명했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전사가 흔히 쓰는 기술이지만, 열여섯 살 소녀가 손쉽게 쓸 만큼 쉬운 기술은 아니다.
‘대단한데.’
감탄한 사울에게 아이나가 도끼를 던졌다.
빠르고 정확한 공격은 검으로 막아 내기 어려웠다.
사울은 전방에 마법 방어막을 쳤다.
방어막에 막힌 도끼는 공중에서 곧바로 아이나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사울이 다시금 마법을 시전했다.
혹독한 훈련 덕분에 마법 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기초적인 마법은 빠르게 시전할 수 있었다.
아이나도 자신에게 날아오는 마법 세례를 막아 냈다.
그러면서 도끼를 던지거나 달려들며 사울을 쓰러뜨리려 했다.
마법과 도끼, 방패가 오가는 공방전 끝에 누구도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했다.
아이나 쪽의 상황이 변할 때까지 말이다.
“……!”
아이나의 눈빛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사울은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보았다.
마나가 떨어진 모양이다.
자신보다 마법 실력이 뛰어난 사울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마나를 과도하게 쓰다 한계가 온 것이다.
빈틈을 포착한 사울은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실수를 할 수 있다.
급한 쪽에서 서두르는 법이다.
지금 급한 건 마나가 모자란 아이나다.
아이나가 급하게 움직이다 보면 그만큼 빈틈도 커질 것이다.
사울의 예상대로 아이나가 서두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회라 느낀 듯, 전력을 다해 도끼와 방패를 휘두르며 덮쳐 왔다.
아이나는 먼저 도끼를 던졌다.
지금이 대련이라는 것도 잊은 듯 막강한 위력이 실린 도끼가 사울의 마법 방어막을 강타했다.
지금껏 몇 번의 공격을 막아 내느라 약해져 있던 방어막이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도끼를 다시 잡은 아이나가 방패와 도끼를 동시에 휘둘렀다.
방패로 날아오는 공격을 최대한 막아 내면서 도끼로 일격에 쓰러뜨리겠다는 전술이었다.
사울은 대련에서는 느끼기 힘들었던 위협을 느꼈다.
‘이건 위험해.’
적당히 할 때가 아니다.
적당히 했다 패하는 건 둘째 문제다.
이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의 딸이 대련 도중 왕자에게 큰 부상이라도 입힌다면?
올해 성인식을 치른 청년들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고 넘어가기 어려울지 모른다.
사울은 진짜 적을 상대하듯, 마법을 준비하고 시전했다.
무리를 감수하고 마법 검 없이 두 마법을 동시에 시전했다.
먼저 ‘라이트닝 볼트’ 가 아이나를 덮쳤다.
전격이 아이나가 휘두른 방패에 맞은 순간, 방패가 손에서 날아갔다.
그럼에도 아이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도끼를 치켜들었다.
동시에 사울은 쥐고 있던 검을 놓으며 양손을 뻗고 시동어를 외었다.
“마나 블래스트.”
마나 그 자체가 물리적인 충격력이 되어 아이나를 덮쳤다.
“악!”
사울을 덮치기 직전까지 갔던 아이나의 몸이 붕 치솟았다.
그 광경을 본 사울마저 아차 싶었다.
상대가 위협적이라 그만 전력을 다해 버렸다.
몇 미터나 날아간 아이나의 몸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무언가가 그녀를 받쳤다.
사울은 카스텔이 슬쩍 마법을 써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사울은 아이나에게 달려갔다.
“괜찮아요?”
“괜찮… 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나의 몸 상태를 확인한 사울은 안도하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만 힘 조절을…….”
“아닙니다. 제 패배이니까요.”
곧 대련에 참관했던 가문의 기사들이 달려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지금 바로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의사를 불러 오겠습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지 기사들의 행동은 빨랐다.
두 명은 들것을 가져와 아이나를 조심스레 옮겼고, 나머지 한 명은 의사를 부르러 달려갔다.
사울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큰 공격을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공방을 주고받다 살짝 부딪치거나 얻어맞은 곳곳에 멍이 들어 있었다.
이어 사울은 아이나를 살폈다.
들것에 누운 아이나 역시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분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눈에 눈물이 맺힌 것도 모른 채 분해하다 뒤늦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닦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나를 바라보던 사울은 그레이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다니요. 저 아가씨, 참으로 몹쓸 사람이군요. 감히 왕자님에게 무기를 휘두르다니…….”
“대련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
“정도라는 게 있습니다! 내 감찰관에게 이야기를 해서…….”
그레이라면 이럴 줄 알았다.
사울은 작게 한숨을 쉬며 그레이를 말렸다.
“별일 아니니까 일을 키우지 마.”
“하지만…….”
“날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내가 먼저 제안한 대련인데 그 일 때문에 왕실과 홉킨스 가문 사이가 나빠지면 안 되잖아?”
사울의 정론에 그레이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못했다.
그레이를 진정시킨 사울은 카스텔에게도 인사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아이나가 크게 다치지 않았어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카스텔의 반응은 미지근했지만, 사울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크게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었다면 지적과 함께 곧바로 야간 수업에 들어가자고 말했을지 모른다.
“이번 대련, 어떻게 보았어요?”
“전하께서는 딱 예상만큼의 실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 아이나는?”
“예상 이상이었습니다. 나이에 비해 경험을 많이 쌓았다 해도 그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이라면 상당한 자질입니다. 좀 더 잘 배우면 언젠가 전하를 능가하는 실력자가 될 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상당한 실력이었어요.”
카스텔이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사울이야 기본적인 자질에 전생의 기억, 카스텔이라는 최고의 선생을 두었다.
최적의 조건을 가진 사울을 고전시킨 변방의 소녀를 높이 평가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차기 영주가 될 칼랜드도 영민한 인물이라고 했지. 이런 변방에 인재가 여럿 있군.’
아이나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분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사울은 옷을 갈아입은 뒤 간단한 선물을 챙겨 아이나의 방을 찾았다.
웬만하면 부상을 입은 영주의 딸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사울은 ‘웬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전하.”
“아가씨의 상태는 어떤가?”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십니다.”
“내가 아가씨를 볼 수 있을까?”
“잠시 기다리십시오.”
사울은 ‘부탁’을 했지만 감히 왕자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곧 아이나의 방문이 열렸다
“전하.”
아이나는 의자 곁에 서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게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던 모양이다.
팔 한 곳, 다리 한 곳에 붕대를 감은 것도 보였다.
다행히 아이나의 얼굴은 깨끗했다.
진 것이 분한 나머지 지금까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상처는 좀 어때요?”
“심려를 끼쳐드릴 정도는 아닙니다.”
“다행이에요.”
그러면서 사울은 자기 시녀에게 들려 온 바구니를 내밀었다.
“전하, 이건?”
“선물이에요. 그대를 다치게 한 사과의 뜻, 그리고 좋은 승부를 보여 준 감사의 뜻을 담았어요.”
“…….”
아이나는 발끈하려다 참았다.
사울이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 광경을 똑똑히 본 사울은 아이나가 무례하다고 꾸짖지 않았다.
대신 여유롭게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
“다음번에 기회가 있다면 그땐 레이디가 이길 수도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전하.”
“자. 여기 선물을 받으세요.”
바구니에 덮여 있던 천이 벗겨지고 내용물이 드러났다.
하나같이 왕국 수도에서 유명한 과자들이었다.
버터, 크림, 설탕, 말린 과일 등 비싼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 만든 최고급 과자들.
이런 변방에서는 영주의 딸이라고 해도 쉽게 맛보기 힘든 진미였다.
과자를 본 아이나의 눈이 반짝였다.
“전하. 이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사양하지 말고 받아요.”
“…감사합니다.”
“어때요? 같이 맛보는 건?”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은 아이나가 시녀를 시켜 차를 타 오게 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는 반투명한 빛깔에 금속처럼 은빛이 비치는 게 특이했다.
사울도 아는 차였다.
“백금차로군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차를 드셔 보셨습니까?”
아이나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백금차는 다르센 왕국은 물론, 가멜다 왕국에서도 널리 마시는 차가 아니다.
가난한 변방지에서나 마시는 차였다.
사울 역시 이번 생에 백금차를 마시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전생에 변방에서 근무할 때 여러 번 맛본 기억이 있었다.
사실 왕자가 백금차를 아는 건 이상하게 여겨질 만 했다.
변방 것들이나 마시는 차였으니까.
다행히 사울은 이럴 때 좋은 변명거리를 알고 있었다.
“예전에 변방 지역에서 선물로 받은 적이 있어요. 꽤나 독특한 물건이라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러셨군요. 저희 영지에서는 고급인 차랍니다.”
곧 사울이 가져 온 과자와 아이나가 내온 백금차로 간단한 다과상이 차려졌다.
사울은 먼저 백금차의 맛을 보았다.
보기와는 달리 쇠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백금차 특유의 떫으면서도 미미한 단맛이 느껴졌다.
확실히 세련된 왕국 수도에서 유행할 고급스러운 맛은 아니다.
하지만 전생 때는 이 정도 차에도 감사하고 마셨었다.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맛이라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사울은 작게 웃으며 과자도 입에 넣었다.
떫은맛이 강한 차와 단맛이 강한 과자의 조화가 훌륭했다.
아이나를 보니 아이나 역시 과자 맛에 감탄한 표정이었다.
왕자 앞이 아니었다면 표정이 확 풀어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보니 아이나는 정말 사울이 보아 온 흔한 귀족 영애와는 많이 달랐다.
어린 나이에 군인으로서 한 몫을 해내면서도 대련에 졌다고 눈물을 흘리거나 맛있는 음식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뻐하기도 한다.
아이나와의 친근함이 우연이 아니라는 건 사울도 잘 알았다.
홉킨스 가문에서 판을 깔아 주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가문과는 별개로, 아이나 개인에게는 호감이 갔다.
나이도 같으니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맛이 어때요?”
“훌륭합니다. 전하.”
“이 차도 훌륭해요. 수도에서는 구경도 하기 힘든 물건이니까요.”
사울과 아이나는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 많은 교제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말도 잘 통하고 마음도 잘 맞는 느낌이었다.
한 번의 대련으로 단숨에 사이가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그렇게 사울과 아이나는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꽤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가 볼게요. 몸조리 잘해요.”
“네, 전하.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울은 방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카스텔이나 그레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과 그레이는 어디 갔지?”
“조금 전 영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은 옆방에서 영주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영주님이?”
던칸이 일부러 카스텔과 그레이를 만나러 왔을 리 없다.
자기 딸을 보러 왔다가 사울이 온 것을 알고 자리를 옮긴 것이 아닐까.
‘역시 영주도 나와 자기 딸이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모양이군.’
사울은 옆방으로 향했다.
영주와 카스텔, 그레이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울의 모습을 본 영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