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7화 (17/232)

17화

얼마 후, 사울은 몸을 일으켰다.

훈련장 밖으로 가니 그레이의 모습이 보였다.

“전하, 또 이렇게 힘든 훈련을 하셨습니까.”

“늘 있는 일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레이가 카스텔에게 원망 어린 시선을 보냈다.

몇 년 동안 이런 일을 반복해 온 카스텔은 늘 그렇듯 그레이의 원망 어린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겼다.

그런데 그레이 곁에 한 명이 더 있었다.

“전하.”

시녀에게 주전자를 받쳐 들게 한 채 사울을 기다리는 건 아이나였다.

아이나의 낯선 분위기에 사울은 적잖이 놀랐다.

낯선 분위기의 원인은 간단했다.

항상 갑옷 차림이었던 그녀가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또 아이나의 머리와 목의 은제 장신구도 눈에 띄었다.

수도의 귀족 영애들이 가진 드레스에 비하면 검소하지만 천박하지 않은 드레스.

보석 하나 박히지 않고 수수하지만 잘 어울리는 은제 장신구.

그것들로 감싼 아이나의 모습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갑옷 차림이라고 아름답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그때와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옥에 티라면 아이나의 표정이 밝지 않다는 점이었다.

사울 앞에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입이 조금 삐죽 나온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런 건가.’

처음 보는 아이나의 귀족 영애다운 차림.

그리고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불편해하는 표정.

사울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눈치를 챘다.

이 지방에서는 갑옷 차림이 드레스 차림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격식을 갖춘 복장이다.

계속 갑옷 차림으로 사울과 만난다 해도 왕자에게 무례를 범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봐도 저런 게 익숙하지 않아 보이는 아이나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장신구를 채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왕자인 사울의 취향을 맞추어 주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사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이나를 응시했다.

그런 사울이 부담스러운지 아이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생각을 확신한 사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드레스 차림도 익숙지 않아 보이는 영주의 딸과 날 결혼시킬 생각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아이나와 날 친구로 만든 뒤 무언가 얻어 낼 생각일까.’

꽤 정확하게 홉킨스 가문의 생각을 읽은 사울은 일단 맞춰 주기로 했다.

“그대의 드레스 차림은 처음 보는 군요.”

“네. 전하께서는 이쪽이 더 익숙하실 것 같아…….”

여전히 아이나의 표정은 불편해 보였지만 차림새나 행동거지가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명색이 귀족 영애로서 기본적인 예절과 몸가짐은 익힌 모양이었다.

“아름답군요. 레이디.”

“가, 감사합니다.”

이런 일이 낯선지 아이나는 순간 당황해하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뭐, 그런 것일까.’

역시 아이나가 자신에게 한눈에 반해 갑자기 티를 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 가까워진 뒤, 얻어 낼 것을 얻어 내겠다는 뜻이 아닐까.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이용할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감히 왕자를 이용하려 한다고 화를 낼 일은 아니다.

변방에서 간신히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는 영주 가문이 스스로 굴러 들어온 왕자의 비위를 잘 맞추어 이용하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사울도 당분간 이 지방에 머무르면서 원활히 활동하기 위해서는 영주의 도움이 필요했다.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면 안 되겠지만, 도움을 주고받는 건 괜찮지 않겠는가.

결정한 사울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대는 나와 나이가 같다지요?”

“네, 전하.”

“대단해요. 나는 여기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실전을 치른 적이 없어요. 책만 보고 훌륭한 선생님께 배우기만 했을 뿐이지요. 이번 실전이 처음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대는 나보다 한발 앞선 모양이군요.”

사울의 예의 바른 말에 아이나의 얼굴이 더욱 빨개지며 안절부절못했다.

왕자에게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을 테니 정상적인 반응이다.

왕자고 뭐고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던 ‘선생님’ 쪽이 이상한 것이다.

사울은 자신의 뛰어난 외모와 신분, 그리고 예의 바른 행동이 얼마나 효과적인 무기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대와는 조금 더 친해지고 싶어요.”

“영광입니다. 전하.”

“그대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일단 들어갈까요?”

“네. 여기 음료수입니다. 그리고 왕자님을 위해서 서비스를 특별히 준비해 두었습니다.”

“고마워요.”

사울은 아이나의 시녀가 받쳐 든 쟁반에서 놓여 있던 음료수를 집었다.

한 모금 마시니 새콤달콤한 맛에 시원하기까지 한 게 아주 좋았다.

따로 얼음을 넣은 것도 아닌데 이처럼 음료수가 시원하다는 건 마법을 쓴 게 분명했다.

음료를 차갑게 식히는 것 정도야 사울의 마법으로도 가능했지만, 알아서 차가운 음료를 가져 온 정성은 마음에 들었다.

“선생님도 한잔해요.”

“네, 전하.”

카스텔의 몫도 있었기에 카스텔 역시 함께 목을 축였다.

이어 사울은 아이나의 안내에 따라 욕실로 향했다.

이 저택의 욕실이야 몇 번 가 봤기에 새삼 안내를 받을 건 없었지만, 오늘은 좀 특별했다.

유독 좋은 입욕제에 평소보다 섬세한 마사지까지, 사울이 처음 도착한 날보다도 더 서비스가 좋은 느낌이었다.

마사지를 받으며 사울은 자기도 모르게 몇 번이나 웃었다.

정직하게 잘 보이려 하는 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가 보니 아이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덕분에 목욕까지 잘했어요. 이제 내 방으로 갈까요?”

머물던 손님방으로 가니 방 앞에 서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그레이와 감찰관 피에르였다.

둘 다 지금 상황을 불편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울은 모르는 척 두 사람을 지나쳐 방에 들어갔다.

카스텔이 함께 들어오려 했지만 제지했다.

“선생님. 아이나와 단 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

카스텔은 말없이 물러났지만, 그 역시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시종 그레이, 감찰관 피에르, 거기에 카스텔 선생님까지.

모두들 아이나와 가까워지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그레이야 날 걱정해서일 테고, 피에르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 테고, 카스텔은… 내가 여자랑 노느라 마법에 소홀히 할 거라 생각하는 걸까?’

모두들 걱정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걱정한다고 무작정 끌려 다닐 필요는 없다.

사울은 아이나와 마주 앉았다.

다시 봐도 아이나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왕국 수도에서는 하급 귀족들도 안 입을 검소한 드레스와 장신구를 착용했지만 그런 것이 아이나의 미모를 가릴 순 없었다.

수도의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비싼 드레스와 고급 장신구를 입히면 곧바로 사교계의 주목을 끌 것이다.

거기에다 아이나는 외모만 출중한 여인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여러 번 실전을 치른 전사다.

전생에 평민과 큰 차이도 없던 하급 귀족으로 살았던 사울로서는 이래저래 호감이 갔다.

“이야기나 좀 해 볼까요? 내게 궁금한 게 있나요?”

“…….”

아이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드레스를 입고 장신구를 걸쳐도 이런 일이 어색한 것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사울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그 드레스와 장신구 모두 훌륭해요. 그대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해 주는군요.”

사울은 귀족 영애들을 띄워줄 때 하던 식으로 말했다.

보통 이 정도만 말해도 보통 귀족 영애들은 진심으로 기뻐하거나 최소한 기쁜 시늉이라도 했다.

아이나는 달랐다.

기뻐하는 시늉은 하려는 것 같은데, 그 시늉마저 어설펐다.

역시 아이나가 드레스를 낯설어 하듯, 드레스 칭찬 역시 낯선 것일까.

사울은 아이나가 정말 관심 있어 할 만한 화제를 찾기로 했다.

그녀의 지난 모습을 돌이켜 보면 무엇을 관심 있어 하는지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그대의 도끼 솜씨가 훌륭하던데, 어디서 배웠나요?”

이 질문에 아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홉킨스 가문의 기사들에게 배웠습니다.”

귀족 영애에게 가문의 기사가 도끼술을 가르쳐 주었다니.

왕국 수도에서는 흔치 않은 일인데 험한 변방 지역이라 그런 모양이다.

곱게 자랄 법한 귀족 영애가 이렇게 실력이 뛰어나다면, 이 영지 안팎에 분명 수많은 강자들이 있을 것이다.

사울은 호기심과 호승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렇군요. 나는 검을 다루지만 내 검 솜씨는 대단하지 않아요. 그대의 도끼와 내 검이 부딪친다면 오래잖아 내 검이 부러지겠지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저는 전하의 마법 솜씨에 감탄했습니다.”

“그래요? 우리 둘이 대련이라도 하면 누가 이길지 궁금하군요.”

“대련… 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요.”

대련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이나의 눈이 다시 한번 반짝거렸다.

수도의 귀족 영애들이 요즘 유행하는 옷감이나 의상, 보석 이야기를 할 때의 눈빛과 흡사했다.

수도의 귀족 영애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울은 꽃과 같은 소녀보다는 전사나 마법사로서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소녀 쪽에 더 호감이 갔다.

눈앞의 아이나처럼 말이다.

개인적인 호감과는 별개로 순수하게 대련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직접 맞붙어 봐야 확실히 실력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뜻을 정한 사울이 말했다.

“그대에게 대련을 신청합니다. 레이디.”

무도회에서 춤을 신청하듯 대련을 신청하자 아이나는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울의 진심을 알아챈 듯 여전히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입니다, 전하.”

몇 시간 후.

몸을 거의 회복한 사울은 저택 야외로 향했다.

저택 바로 뒤에 훈련장으로 쓰는 공간이 있었다.

영주 일가는 물론, 영주의 허락을 받은 기사까지 훈련 및 대련을 하는 장소로 애용하는 곳이었다.

이미 날이 저문 탓에 훈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왕국 수도에서는 흔한 물건인 마법 램프도 이 곳에서는 드문 물건이라 횃불 여러 개로 불을 밝혔다.

훈련장 곳곳에 횃불을 밝히니 서로 대련을 할 만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시작하지요.”

“네, 전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레이와 카스텔, 그리고 몇몇 영지의 기사들이 입회한 가운데 사울과 아이나가 마주 보고 섰다.

아이나가 크게 다쳐도 곤란하고 사울이 크게 다치면 더욱 곤란하기에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둘 다 갑옷 대신 움직이기 편한 복장을 입었으며, 무기는 날이 선 금속제가 아닌 나무로 만든 훈련용 무기를 가져 왔다.

사울은 가느다란 목검을 잡았다.

아이나는 나무 도끼와 방패를 잡았다.

아이나는 나무 도끼와 방패에도 익숙한 모양이었지만, 사울은 가느다란 목검에 썩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이 쓰던 마법 검과 비교하면 길이도 무게도 미묘하게 차이가 났다.

‘내가 조금 불리한 조건이군.’

사울은 굳이 불리함을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불리한 상황에서 싸우는 것도 좋은 경험이니까.

사울과 아이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자세를 잡았다.

사울은 마법 검을 쓰듯 검을 거꾸로 잡지 않고 양손으로 검을 쥐는 자세를 취했다.

“하압!”

외침과 함께 아이나가 선공에 나섰다.

도끼는 치켜들고 방패로는 몸통을 방어하는 자세.

공방 모두를 신경 쓴 자세라 당장은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사울은 검을 들어 도끼를 막았다.

검과 도끼가 부딪치는 순간 둔탁한 느낌이 손목을 타고 전해져 왔다.

상당히 강력한 공격이다.

나무 도끼지만, 막지 않았다면 한 방에 끝났을지 모른다.

사울이 공격을 막자 아이나는 곧바로 방패를 휘둘렀다.

무기와 방패를 동시에 휘두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건만, 아이나는 도끼에 이어 익숙한 손놀림으로 사울을 방패로 가격하려 했다.

사울은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방패가 그런 사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 도끼와 방패가 연속적으로 날아왔다.

짐작대로 무기를 다루는 솜씨는 아이나 쪽이 위다.

그렇다면 정답은 마법이다.

몇 발 뒤로 물러난 사울이 검을 한 손으로 쥐었다.

한 손에 검, 다른 빈손으로는 마법을 준비한다.

소위 전투 마법사들의 일반적인 자세다.

아이나도 사울의 생각을 눈치챈 듯 다시 몸을 날렸다.

사울이 마법을 못 쓰게 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사울은 간발의 차로 마법 시전에 성공했다.

사울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전격이 아이나를 노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