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쉴드.”
마나 그 자체의 힘을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 내는 방어 마법이다.
사울은 눈 먼 화살이나 투창이 날아와도 문제없도록 반구형으로 자신의 몸 전체를 가리는 방어막을 쳤다.
한 박자 늦게 날아온 투창은 사울의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사울의 마법이 이어졌다.
마나를 구체로 뭉쳐 날리는 ‘마나 볼’이었다.
기초적이고 간단한 마법이라 주문이나 시동어마저도 외지 않고 손짓만으로도 쓸 수 있는 마법이지만, 약한 고블린 상대로는 충분했다.
푸른 마나 구체가 빠른 속도로 고블린에게 날아갔다.
고블린은 몸을 피하려 했지만, 사울의 마법이 더 빨랐다.
마나 구체가 사울에게 창을 던지려던 고블린의 몸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사울의 입에서 시동어가 흘러나왔다.
“파이어 볼!”
거꾸로 쥐고 있던 마법 검의 보석이 빛나며, 보석 위에 사람 머리만 한 불덩어리가 생성되었다.
이어 사울이 마법 검을 휘두르자 불덩어리가 고블린 몇 마리가 모인 곳으로 날아갔다.
쾅!
고블린 한 마리에 직격한 불덩어리가 폭발했다.
폭발과 열기는 직격 당한 고블린은 물론, 근처에 있던 여러 마리의 고블린까지 함께 저승길 로 데려갔다.
“전하!”
싸우면서도 사울 쪽을 살피던 아이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이나의 눈에 사울이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처럼 고블린 몇 마리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카스텔이 사울 뒤에 있었지만, 아이나는 본능처럼 사울 쪽으로 몸을 날렸다.
만에 하나 사울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은 온전히 자신들의 몫이 될 것이다.
초대도 안 받고 찾아온 왕자의 억지 때문에 홉킨스 가문이 피해를 보는 건 절대 피해야 할 일이었다.
다행히 아이나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워터 스피어.”
시동어를 읊조리며 사울이 마법 검을 휘둘렀다.
거꾸로 쥔 마법 검의 궤적에 몇 개의 얼음 창날이 만들어졌다.
투박하지만 날카로운 얼음 창날 여러 개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고블린들은 사울은커녕, 그가 친 방어막도 못 건드리고 얼음 창날에 맞아 쓰러졌다.
‘대단하군.’
사울의 아이나를 향한 감탄 이상으로 아이나도 사울에게 감탄했다.
애송이 취급했던 사울 왕자가 이 정도까지 해낼 줄이야.
그런 아이나와 사울의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사울은 아이나 쪽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한 박자 늦게 아이나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눈치챘다.
고블린 한 마리가 몰래 아이나의 후방을 노린 것이다.
“꽥!”
사울의 마나 볼에 맞은 고블린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아이나도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경계하며 고블린 사냥을 계속했다.
고블린 처리는 사실상 사울, 그리고 아이나 두 명이 도맡았다.
사울은 여러 마법으로 접근하기도 전에 고블린들을 처리해 나갔고, 아이나는 접근하는 족족 방패와 도끼로 쓸어 냈다.
삐익!
잠깐 사이에 열 마리 가까운 고블린이 죽은 가운데, 남은 고블린 무리에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울은 이 휘파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강 알고 있었다.
‘큰 놈’을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그 생각이 맞았다.
“크르르…….”
조잡한 우리에 갇혀 있던 호그가 풀려났다.
핏발 선 눈으로, 사울과 아이나를 씹어 먹을 듯이 노려보는 놈들이 세 마리나 있었다.
고블린처럼 호그 역시 몬스터 중 강한 편에 속하는 놈은 아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창칼을 들어도 맞설 엄두도 못 낼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사울은 방심하지 않고 더욱 정신을 집중시켰다.
호그가 세 마리. 아직 살아남은 고블린이 십여 마리.
가능한 이것들을 자신과 아이나 두 명이서 처리해야 한다.
빠른 생각을 마친 사울은 아이나에게 명령했다.
“내가 호그 세 마리를 상대하지요. 나머지는 그대가 처리해요.”
“전하,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정말 위험해지면 선생님이 나설 테니.”
“아…….”
사울과 아이나뿐이었다면 아이나는 무리해서라도 자신이 위험한 역할을 떠맡았을 것이다.
왕자가 다치는 것보다는 자신이 다치는 게 백 번 낫다.
하지만 사울 뒤에는 ‘검은 마녀’ 카스텔이 있다.
카스텔이 보는 앞에서 왕자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네. 전하. 그럼.”
아이나는 안심하고 호그가 아닌 다른 녀석들을 맡았다.
포위망이 완성되어 아이나와 사울이 처리하지 못한다 해도 도망칠 수는 없겠지만, 이 자리에서 모두 처리하는 게 효율적이다.
아이나가 도끼를 휘두르며 고블린을 상대하는 사이, 사울은 호그 세 마리를 상대했다.
일단 약한 마법을 한 방씩 먹여 주는 것으로 셋의 관심을 끌었다.
“크르르…….”
호그들은 핏발 선 눈으로 사울을 노려보며 낮게 울부짖었다.
눈빛을 보니 정상은 아닌 것 같다.
고블린이 호그를 길들일 때 약을 쓰는 경우가 있다.
아마 눈앞의 녀석들도 약에 취한 것이겠지.
약에 취한 호그는 보통 호그보다 더 상대하기 어렵다.
사울은 먼저 무슨 마법을 쓸지 결정했다.
“어스퀘이크.”
마법으로 지진을 만들어 내는 주문.
기록에 따르면 어떤 대마법사가 마법으로 만들어 낸 인공적인 지진으로 도시 하나를 무너뜨린 적도 있다.
지금 사울에게 그런 능력까진 없었지만, 지금의 전투를 유리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콰지직.
마법에 의해 만들어진 대지의 진동에 호그 주변의 땅이 크게 요동쳤다.
엉망이 된 지면에 발이 빠져 휘청거리거나 심지어 쓰러지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렇게 호그 의 발을 묶은 사울은 가장 가까이 있던 호그에게 마법을 날렸다.
“파이어 볼.”
이번에도 파이어 볼은 사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커다란 불덩어리가 발이 묶인 호그의 몸에 직격했고, 그대로 바비큐가 되었다.
이제 남은 건 두 마리.
남은 녀석들은 그사이 엉망진창이 된 지면에서 몸을 추스르고 사울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사울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이 바로 마법사 입장에서 가장 위험한 때이다.
마법을 쓰고 다소 빈틈이 있는 상태에서 적의 공격에 직면했을 때 말이다.
상대가 인간이라면 검으로 상대할 수도 있겠지만 저런 무지막지한 몬스터는 지금 사울의 검술로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어떻게든 마법으로 빈틈을 메꾸는 게 낫다.
“블리자드!”
파이어 볼과 함께 준비한 마법이 시전되었다.
마법 검의 보석을 중심으로 하얀 기운이 두 갈래로 뿜어 나가 사울에게 달려들던 두 호그를 덮쳤다.
“키에엑!”
두 호그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차갑고 맹렬한 눈보라에 안면이 얼어붙은 탓이었다.
지옥 같은 냉기는 호그의 안면도 통째로 얼리며 감각까지 차단했다.
두 호그는 눈앞에 사울의 존재도 잊은 듯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폭주하는 몬스터가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지만, 다행히 몬스터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사울은 두 몬스터의 폭주부터 진정시키기로 했다.
“라이트닝 볼트.”
바람 속성에 속한 전격 주문, 라이트닝 볼트.
마법으로 만들어 낸 번개로 적을 감전시키는 주문이다.
얼굴이 얼어붙어 날뛰는 호그들은 번개를 맞고는 즉각 반응했다.
“꽤액!”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움직임이 크게 둔해졌다.
전격으로 몸이 마비된 것이다.
비록 적들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두 호그의 폭주까지 진정시킨 사울에게는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승기를 다 잡았지만, 몬스터를 상대할 때 방심은 금물이다. 마지막까지 완벽해야 한다.
사울은 침착하게 마법을 시전했다.
“에어 블레이드.”
마나가 응축되어 생성된 바람의 칼날이 호그를 덮쳤다.
화려한 마법은 아니지만 크고 튼튼한 상대를 베어 내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다.
제대로 날뛰지도 못하고 흐느적거리던 호그들의 목이 깊숙이 베였다.
워낙 크고 튼튼한 몸이라 완벽하게 참수하지는 못했지만, 절반 이상 참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비명조차 제대로 못 지르고 호그 한 마리가 먼저 사망했다.
이어 다른 녀석 역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휴.”
호그 셋을 처리한 사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마침 아이나가 마지막 남은 고블린과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캬악!”
마지막 남은 고블린이 최후의 발악으로 투창을 던지려 했다.
그에 맞서 아이나가 도끼를 던졌다.
고블린의 손에서 투창이 떠나는 것보다 아이나가 던진 도끼가 고블린의 머리에 박히는 게 더 빨랐다.
“…….”
비명도 못 지른 채 마지막 고블린이 쓰러졌다.
아이나가 손을 뻗자 날아갔던 도끼가 저절로 움직여 아이나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마법 같은 광경, 아니, 마법 그 자체인 광경이다.
아이나가 마나를 다룰 줄 아는가 싶었는데 저런 형태로 쓰는 모양이었다.
“수고했어요.”
사울이 먼저 인사를 해 주자 아이나가 고개를 숙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하. 정말 대단한 실력이시군요.”
“그대의 실력도 대단했어요.”
서로 치하의 말을 건네는 가운데 카스텔이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
사울은 내기라도 할 수 있었다.
지금 카스텔의 말이 빈말이라는 것을.
“그, 그렇군요. 조금 피곤한데 나는 먼저 들어갈게요.”
“네, 전하. 뒷정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사울은 뒷정리를 아이나에게 맡기고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온 카스텔은 사울이 천막에 앉기 무섭게 말했다.
“전하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기회… 라고요?”
“네. 전하의 첫 번째 실전에서 미흡했던 부분을 스스로 밝힐 기회 말입니다.”
따듯한 칭찬을 해 주리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첫 번째 실전 치고는 정말로 잘 해내지 않았는가.
눈에 띄는 실수도 없었고 아군에서 사망자는커녕 중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성공적인 토벌이요, 첫 번째 실전 치고는 훌륭한 전투였지만 카스텔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울로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모른다고 하면 이후 훈련이 더 가혹해질 뿐이다
“그러니까……. 마법을 쓸 때 정확도나 효율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다행히도 정답이었다.
카스텔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전하였다면 훨씬 빨리 전투를 끝냈을 겁니다.”
“선생님 실력이 저보다 월등하니…….”
“실력 문제가 아닙니다. 전하의 능력, 마나, 실력 모두 감안해도 실수가 여럿 있었습니다. 어스퀘이크 마법을 쓸 때는 지나치게 마나를 많이 쏟아 부었고, 반대로 라이트닝 볼트 마법을 쓸 때는 필요 이상으로 마나를 아끼셨습니다. 호그의 발을 묶는 것은 적당히 하고, 전격으로 그들을 약하게 만들 때 보다 확실하게 마법을 썼다면 좀 더 수월했을 겁니다. 비록 실패하지는 않았지만, 미흡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요?”
“돌아가는 대로 전하의 미흡함을 채워 드리기 위한 수업을 하겠습니다.”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사울은 다른 질문을 했다.
“영주의 딸은 어떻던가요?”
“전하가 그렇듯,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선생님 눈에는 세상 모두가 그렇게 보일 거예요. 좋게 봐 줄만한 부분은 없던가요?”
“나이와 경험에 비하면 괜찮은 실력이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봤어요. 나와 비슷한 나이에 그 정도면 대단한 수준이겠지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확실히 전사로서의 능력은 상당해 보였습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침착하게 움직이는 게 인상 깊었습니다.”
“동감이에요.”
“전하 역시 첫 번째 실전치고는 침착하시더군요. 그건 높이 살 만 합니다.”
처음에 이런 칭찬을 해 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사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모른 척했다.
“상대가 약한 몬스터라 그런지 겁은 안 나더라고요. 또, 내 곁에는 선생님도 있으니까.”
“아니, 전하의 그 침착함은 대단했습니다. 분명 첫 번째 실전이실 텐데 예전에도 실전을 치러 보셨던 분처럼…….”
“…….”
설마 첫 번째 실전치고 너무 잘한 것이 문제일까.
그 실수로 카스텔의 의심을 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