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사울이 떠나고, 연회장에 남은 영지 사람들끼리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정말 무모한 사람이네요.”
아이나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던칸이 그런 아이나에게 물었다.
“넌 왕자를 안내하면서 그의 모습을 보았겠지. 어떻더냐?”
“예의 바르고 선량한 사람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뭘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군요. 비리비리한 게 몬스터 그림자만 봐도 꽁지를 뺄 것 같은데.”
“정말 골치 아프군.”
확실히 골칫거리였다.
정말 사울 왕자가 ‘검은 마녀’의 제자라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실력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실력만 믿는 애송이가 실력 없는 겁쟁이보다 죽을 확률이 더 높은 법이다.
이 작은 영지에서 사울 왕자가 사고를 당하거나 목숨이라도 잃는다면?
그 모든 사태의 책임을 홉킨스 가문이 져야 한다.
그럼 홉킨스 가문의 자치권도 그날로 끝장일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
던칸의 걱정에 한 가신이 말했다.
“수도에 연락을 취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가신이 반대했다.
“소용없을 겁니다. 국왕 폐하께서 허락한 일이라는데요.”
“그럼 그 뭣도 모르는 어린 왕자가 제멋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 둬야 한단 말이오?”
“그럼 뭘 어떻게 한단 말이오. 왕자를 쫓아내거나 푸대접할 수는 없지 않소.”
가신들의 갑론을박을 듣던 칼랜드가 말했다.
“맞습니다. 아버님. 언제까지나 최선을 다해 왕자를 대접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있다면 왕자 본인은 몰라도 감찰관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영민한 아들의 말에 던칸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피에르가 만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피에르가 왕실에 나쁜 보고라도 한다면 바로 홉킨스 가문과 왕실 사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 경우 불이익을 받는 건 약자인 홉킨스 가문일 확률이 높을 터였다.
“정말 곤란합니다. 차라리 여행을 왔거나 쉬러 왔다면 만족할 때까지 대접하고 돌려보내면 되지만, 저 왕자는 실전 경험을 쌓으러 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말을 들어 보니 몬스터나 도적 토벌이라도 할 기세인데, 일이 잘못되면 우리 영지가 그 책임을 다 져야 할 겁니다.”
한 가신의 걱정스런 말에 모두들 한숨을 쉬었다.
그때, 아이나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
“좋은 생각이라도 있느냐?”
“제 생각에는 왕자의 말을 들어주는 게 어떨까 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제가 보니 그 왕자는 생사가 오가는 전투를 치러 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어요. 검은 마녀의 제자니까 마법을 배우기는 했겠지만, 삶과 죽음이 무엇이며 피의 무게감이 무엇인지 알기나 할까요?”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철없는 아이인지 깨달으면 스스로 이곳을 떠나지 않을까요?”
“왕자를 일부러 위험에 빠뜨리기라도 하자는 말이냐?”
“그렇게까진 할 필요 없겠지요. 하지만 전장에서 싸우는 게 무엇이고,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면 충분하지 않을까 해요.”
딸의 말에 던칸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잘못하면 우리가 곤란해질 수 있다.”
“제가 직접 그 왕자를 데리고 다니면서 현실을 가르쳐 준다면요?”
“네가?”
던칸은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성인식을 치른 지 오래되지 않은 딸이다.
하지만 성인식을 치르기 몇 년 전부터 ‘실전’을 치른 딸이기도 하다.
아이나는 타고난 전사였다.
어릴 때부터 도끼를 휘두르더니 성인식을 치르기 전부터 실전에 능숙한 전사가 되었다.
열세 살에 몬스터를 잡았고, 이 지방의 풍습에 따라 그 몬스터의 생가죽을 ‘전사의 증표’로 삼았다.
전사로서는 훌륭했지만 다른 부분은 미숙했기에 홉킨스 가문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나라면 애송이 왕자에게 실전의 냉엄함을 보여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영주의 딸이 직접 왕자를 도와 실전을 가르쳐 준다면 왕자를 푸대접했다는 이야기도 듣지 않을 것이다.
이 기회에 아이나가 더 성장한다면, 홉킨스 가문의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한참 생각하던 던칸이 물었다.
“자신 있느냐?”
“네, 아버님.”
“좋다. 그럼 네가 한번 그 왕자를 상대해 보거라. 다만 명심하거라. 설령 왕자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마지막까지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물론이에요. 우리 가문의 안위를 생각해서라도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음.”
* * *
사울은 카스텔과 그레이, 그리고 감찰관 피에르와 함께 자신의 방에 도착했다.
이 저택에서 가장 화려한 손님방이라고 했지만 사울의 궁전만큼 화려하지는 않았다.
“누추한 곳이라 죄송합니다.”
피에르의 정직한 말에 사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불편한 것이나 궁금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제게 말씀하십시오.”
“고마워요. 그럼 지금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말씀 하십시오.”
“감찰관이 보기에 영주나 다른 사람들이 날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 같던가요?”
사울의 날카로운 질문에 피에르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눈동자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왕자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울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역시 날 진심으로 환영하지는 않는군요.”
“죄, 죄송합니다. 변방 촌것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아니에요. 영주로서는 나 같은 사람이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큰 부담일 테니까요. 그들이 날 진심으로 환영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사울의 말에 피에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철없는 어린아이인 줄 알았더니……. 그나저나 그걸 알면서 이 변방까지 왔다는 말인가? 영지에 도움을 준다는 이상한 이유까지 대면서?’
피에르는 자신의 의문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사울 역시 오늘은 피에르에게 더 할 말이 없었다.
“용무가 있으면 부르도록 하지요. 감찰관, 이만 물러가도 좋아요.”
“네, 전하.”
“그레이도 돌아가도 좋아.”
“네, 전하.”
그레이와 피에르 등 물러갈 사람은 다 물러갔다.
방에 남은 건 사울과 카스텔뿐이었다.
“선생님은 이 지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죠?”
“마지막으로 찾아온 지 10년이 지났습니다만.”
“10년이라.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지요.”
확실히 10년은 길다면 길겠지만,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눈앞의 카스텔이 적으로 나타나 자신의 목숨을 빼앗던 일이 아직 생생한데, 그것은 15년도 더 지난 일이 아닌가.
사울은 미소로 속내를 감추며 물었다.
“선생님은 내가 이곳에 오는 걸 찬성했지요.”
“전하의 실력 향상을 위한 실전의 필요성에 공감했을 뿐입니다.”
“아무튼 찬성은 찬성이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사울의 계획을 반대하고, 나아가 말리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스텔은 사울의 계획을 들은 순간부터 반대하지 않았다.
정말 이 일이 사울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냥 생각이 없는 것인지는 사울로서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카스텔은 자신의 편이라는 점이다.
언젠가 이 쪽에서 뒤통수를 치기 전 까지는 말이다.
“선생님도 이만 돌아가 쉬어요. 나도 슬슬…….”
그때 바깥에서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실례합니다!”
“무슨 일인가요?”
“아이나 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영주의 딸 아이나가 직접 찾아왔다면 중요한 용무가 있을 것이다.
“들어오라고 해요.”
“네, 전하.”
곧 문이 열리며 아이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에 들어온 아이나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절도 있고 예의 바르지만, 귀족 영애의 인사법 보다는 군인의 인사법이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에요. 무슨 일이지요?”
“네. 아버님께서는 전하의 계획에 협력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맙군요. 그리고요?”
“허락하신다면 제가 전하와 동행하겠습니다.”
“…….”
이건 예상치 못했다.
영주의 딸이 직접 동행하겠다고 할 줄이야.
물론 사울의 계획을 위해선 길잡이나 안내자는 필요했다.
그 역할은 영지에서 병사나 기사를 차출해 맡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영주의 딸이 그 역할을 맡겠다니.
‘어쨌든 왕자인 날 잘 대접해 주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울은 자신이 무모한 인간처럼 보인다는 것을 잘 알았다.
무모한 왕자의 행동을 말릴 수 없으니 영주의 딸을 안내원으로 붙여 준다.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단 두고 볼까.’
따로 속셈이 있는 듯하지만, 어쨌든 상대는 예의를 갖추었다.
그렇다면 받아 주는 게 왕자의 도리 아니겠는가.
“알았어요. 홉킨스 경의 호의에 감사한다고 전해 주세요.”
“네, 전하.”
그렇게 아이나도 물러가고, 이어 카스텔도 물러갔다.
홀로 남은 사울은 간단하게 명상을 한 뒤 침대에 누웠다.
“영주가 날 마냥 반기지는 않는 것 같은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굴러온 돌도 이렇게 굴러온 돌이 없을 것이니까.
당황할 일은 아니다.
다 각오했으니까.
* * *
이후 사울은 며칠간 조용히 수련과 휴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카스텔은 엄한 선생님답게 남의 영지에서도 사울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늘은 최대한 마나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가능한 많은 공격 마법을 시전하는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왕궁에서도 사울을 힘들게 굴린 카스텔이 다른 곳에서 훈련을 소홀히 할 리 없었다.
오늘도 체력과 마력을 무제한에 가깝게 공급하고, 최대한 굴리는 무지막지한 수련을 거쳤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왕궁에서보다는 수련 시간이 짧았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벌써요?”
“언제 실전에 나가실지 모르니까요.”
전생 때 실전을 남부럽지 않게 겪은 사울은 카스텔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실전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부상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문제의 실전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영주의 딸 아이나가 안내원 역할을 맡았고, 며칠 안으로 실전을 치를 만한 곳을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이제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아무튼 수련을 마친 사울은 목욕이나 할 겸 저택 욕실로 향했다.
그 도중 아이나와 마주쳤다.
“전하.”
“아이나.”
아이나는 땀에 젖은 사울의 모습을 흘긋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귀족 영애라기보다는 군인에 가까운 몸가짐이었다.
“힘든 수련을 하신 모양입니다.”
“괜찮아요. 수도에서 매일 하던 일이니까. 그래, 무슨 일이지요?”
“영지의 한 마을이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 보시겠/습니까/?”
“그래요? 언제 출발할 수 있지요?”
“왕자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든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럼 씻고 바로 출발하는 것으로 하지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가 흠칫했다.
사울이 이렇게 빨리 행동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 했다.
“정말이십니까?”
사울은 아이나의 진의를 알아볼 겸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네. 문제될 것 있나요?”
“으음…….”
아이나가 또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그 모습에 사울은 하마터면 크게 웃을 뻔 했다.
아이나는 나이에 비해 훌륭한 전사로 보였지만, 20년 넘게 살아온 전생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사울이 다루지 못할 상대는 아니었다.
한참 생각하던 아이나가 결론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물러나는 아이나의 모습에 사울은 생각했다.
‘나이에 비해서는 야무지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건 어쩔 수 없지. 실력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한데.’
어쨌든 왕국 수도에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실전 기회다.
사울도 곧장 준비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