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환영단의 선두에 선 것은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소녀였다.
아름다운 얼굴이나 얼굴 아래 휘날리는 흑발도 눈에 띄었지만, 그보다 인상 깊은 건 따로 있었다.
소녀의 복장이었다.
가죽 갑옷을 입고 도끼를 찬 것은 여전사의 복장이라면 문제될 것 없었다.
하지만 소녀가 머리에 쓰고 있는 생가죽은 정말 눈에 띄었다.
아마도 늑대일 것이다.
소녀의 얼굴을 완전히 뒤덮고도 남은 늑대 가죽의 머리만 봐도 보통 큰 늑대를 잡은 게 아니다.
저 정도면 보통 늑대가 아닌 몬스터의 한 종류가 아닐까.
사울은 책에서 본 이 지방의 독특한 풍습을 떠올렸다.
아주 중요한 손님을 맞이할 때, 환영 사자는 자신의 기준에서 가장 격이 높은 복장을 차려입는다.
또 이 땅의 전사들에게 가장 격이 높은 복장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사냥한 첫 번째 사냥감의 생가죽으로 만든 복장이라고 했다.
왕국 수도에서는 비단이나 잘 다듬은 최고급 모피, 혹은 양모 복장을 최고로 친다.
하지만 이 지방의 전사는 직접 잡은 사냥감의 생가죽을 최고의 복장으로 친다.
이 소녀는 사울 왕자에게 싸움을 걸거나 불만을 표한 게 아니라 최고의 예우를 갖춘 것이다.
‘들은 대로군.’
상대가 예의를 갖추었다면 그에 맞게 반응하는 게 도리다.
사울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그대의 이름은?”
“제 이름은 아이나 홉킨스. 홉킨스 가문의 장녀입니다.”
“아. 영주께서 귀한 따님을 보내 주셨군. 잘 부탁해요.”
“네. 전하. 귀하신 분을 맞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울에게 인사를 한 아이나는 사울 뒤에 서 있던 카스텔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카스텔 님이시지요.”
끄덕.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 영지를 구해 주신 은인을 맞게 되어 영광입니다.”
끄덕.
언뜻 보면 아이나는 반듯하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왕자로 태어난 덕분에 예의범절과 몸가짐을 살피는 안목이 높아진 사울의 눈에는 부족한 부분이 보였다.
인사할 때의 몸의 각도나 걸음걸이 등 모든 면에서 사울의 눈에는 부족한 느낌이었다.
대놓고 무례하지 않는 한, 굳이 따질 필요가 없어 잠자코 있을 뿐.
게다가 아이나는 사울을 제쳐 두고 카스텔에게 아낌없이 선망의 시선을 보냈다.
카스텔보다 윗사람인 사울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전하를 모셔라!”
아이나의 호령에 병사들이 절도 있게 움직였다.
사울을 맞이할 때 다소 어색하고 부족한 모습과는 달리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익숙해 보였다.
곧 아이나가 데려 온 홉킨스 가문의 병력이 왕실 병력과 섞였다.
사울 역시 다시 마차에 올랐고, 아이나는 직접 말에 올라 그런 사울의 마차 근처에 붙었다.
사울은 마차 창문을 통해 그런 아이나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저 소녀, 꽤 흥미로운데.”
그레이는 사울의 말에 동조하는 대신 혀를 찼다.
“저게 이 지방 풍습이고 예절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에잉. 마음에 안 듭니다. 어린 소녀에게 야만인처럼 생가죽을 뒤집어씌우고 왕자님을 맞이하게 하다니.”
반면에 카스텔은 그레이와 보는 시각이 달랐다.
“저 소녀, 나이에 비해 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나도 느꼈어요. 마나를 쓸 줄 아는 것 같더라고요.”
“도끼도 의장용이 아닌 실전용이었습니다. 사용한 흔적도 보았습니다.”
“맞아요. 이런 일 보다는 군대를 움직이거나 싸우는 데 더 익숙해 보이더군요.”
영주의 딸, 아이나와의 첫 만남은 강렬했지만 그 뒤로 특별한 일은 없었다.
왕국에서 파견된 호위 병력과 영주가 파견한 호위 병력이 사울을 철통같이 호위하며 영지 중심까지 이동했다.
사제타.
갈레트 지방의 중심이며 영주가 사는 도시다.
사제타는 왕궁이 위치한 다르센 왕국의 수도 레디아와 비교하면 ‘도시’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곳이었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과 성문이 있고 갈레트 지방에서 가장 번화가지만 규모나 화려함, 인구에서 레디아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레디아의 성벽과 비교하면 반도 안 되는 높이의 성벽과 성문을 지나치니 낯선 풍경이 이어졌다.
레디아와 비교하면 대부분의 집들이 작고 초라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모습도 차이가 컸다.
복장이 검소하기도 하지만 종족 자체가 달랐다.
다르센 왕국의 수도 레디아는 철저히 인간들의 도시였다.
‘이종족 레디아 거주 제한법’이 규정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불문율로 존재했다.
그래서 이종족이 레디아에 용무가 있어 잠깐 방문하는 것 정도는 허용되었지만, 정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오래 머물거나 거주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건 레디아, 아니 다르센 왕국 전체와 옆 나라 가멜다 왕국까지 통용되는 불문율이었다.
따라서 엘프나 드워프 같은 이종족들은 두 나라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중립 지대, 혹은 왕국 변방에 살았다.
이 갈레트 지방처럼 말이다.
사울의 눈에 아름다운 얼굴에 귀가 길고 뾰족한 청년이 덥수룩한 수염에 보통 사람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키를 가진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아름다운 쪽은 엘프, 수염이 덥수룩한 쪽은 드워프다.
전생에서는 몇 번 봤지만, 현생에서는 처음 보았다.
사울은 이종족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말을 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이종족들인가?”
그레이는 정말 이종족을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신기하군요. 이 지방이 이종족들과 교류가 많은 곳이란 말은 들었지만…….”
이 지방을 다스리는 홉킨스 가문이 이종족과 교류가 많고, 그들을 상대하는 데 능하다는 것.
그것이 왕실에서 홉킨스 가문의 자치권을 인정해 준 이유 중 하나였다.
어설프게 이종족을 다루다 문제가 생기느니 홉킨스 가문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고 대신 이 지역의 이종족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일임한 것이다.
정말 수도와는 많이 다른 곳이다.
“이곳 사람들과 친해지도록 노력해야겠어.”
카스텔도 동의했다.
“그게 좋을 겁니다. 홉킨스 가문은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한 자들이니 그들을 무시하면 원한을 살 테니까요.”
“맞아요. 멀리까지 와서 일부러 적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러는 사이 마차가 영주의 저택에 도착했다.
영주의 저택은 규모는 꽤 컸지만 투박했다.
석재로 튼튼하게 만들고 실용성과 거리가 있는 장식품 등은 최대한 배제한 모양이었다.
거기에다 곳곳에 불타거나 부서지고 수리한 자국도 보였다.
아마 6년 전쟁 당시 잠시나마 가멜다 왕국에 점령당했을 때의 흔적일 것이다.
‘역시 이곳 주민들도 가멜다 왕국에 원한을 품고 있겠지. 나처럼.’
생각하며 마차에서 내린 사울의 눈에 마중 나온 영주 일가의 모습이 보였다.
선두에 선 건 조금 큰 키에 머리가 희끗한 남성이었다.
나이를 먹었지만 탄탄한 몸과 얼굴의 큼지막한 흉터, 등에 찬 도끼는 이 남성이 단련된 전사임을 보여 주었다.
이 지방의 영주, 던칸 홉킨스가 분명했다.
“어서 오십시오. 왕자 전하.”
던칸이 먼저 이야기하며 허리를 숙였다.
재빨리 던칸 곁으로 간 그의 딸 아이나, 그리고 아들 칼랜드를 비롯한 가신들과 병사들도 저마다 허리를 숙였다.
첫 인상이 나쁘면 안 된다.
사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주님의 따뜻한 환대 고마워요.”
“안으로 드시지요. 식사를 준비해 뒀습니다.”
그렇게 저택으로 들어서는 사울에게 한 남자가 접근해 왔다.
아직 남자의 정체를 모르는 호위 병력이 경계하자 남자도 자기 정체를 밝혔다.
“전하. 저는 감찰관 피에르라고 합니다.”
“감찰관?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네. 전하께서 이곳에 머무르시는 동안 조금의 불편함도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사울은 자신에게 인사를 해 온 감찰관 피에르를 살폈다.
반쯤 벗겨진 머리에 뚱뚱한 체구, 마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볼 때 전사나 마법사 부류는 아니다.
겉보기에 피에르는 먹고살기 위해 자리나 지키려는 흔한 관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만만한 남자일 리 없다.
홉킨스 가문은 왕국에서도 몇 남지 않은 영주 가문이다.
자치권은 물론 영주군이라는 이름의 사병도 보유하고 있다.
그런 홉킨스 가문과 왕실의 연락망이 되고, 더불어 감시를 책임지는 게 감찰관이다.
아바마마께서 그런 중요한 일을 맡은 감찰관을 아무나 찍어 보냈을 리 없다.
지금으로서는 이 홉킨스 가문의 저택에서 사울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인물일 것이다.
사울은 피에르에게 다시 한번 인사했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세요.”
“물론입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전하.”
* * *
갈레트 지방에 도착해서 연회 자리에서 이르기까지 사울은 왕자로서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홉킨스 가문의 누구 하나 사울 왕자를 불편해하는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며 비위를 맞춰 주었다.
사울 역시 가능한 첫인상이 좋게 남도록 태도와 몸가짐에 신경을 썼다.
덕분에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갔다.
어느새 밤이 늦었지만 영주와 그의 자녀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지켰다.
사울은 슬슬 본론을 꺼내도 될 때라 여겼다.
“홉킨스 경.”
“네, 전하.”
던칸 영주는 술을 열 잔도 넘게 마셨는데 거의 취기가 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강해 보이는 것만큼이나 술도 강한 남자라는 것일까.
이 몸으로는 아직 술을 배우지 않은 사울은 마법으로 차갑게 식힌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내가 비록 어리지만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놀러 오거나 영주에게 폐를 끼치려고 온 것이 아니에요. 영주와 왕국 모두를 돕고 싶어서 온 것이지요.”
던칸은 침착하게 물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이 지방은 왕국 수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 왕자님께서 도와주실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내가 도울 일은 다 있을 테니.”
“왕자님이 직접 저를 도와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영주도 내 마법 검을 보았지요?”
“네, 전하.”
“나는 여기 카스텔의 제자로서 실전을 익힐 겸 이 영지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싶어요.”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다.
감찰관에게 사울이 카스텔의 제자라는 것을 듣긴 했지만 말이 잘못 전달되었거나 과장된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이 왕자가 ‘검은 마녀’ 카스텔의 제자라는 말인가.
던칸은 놀라움을 감추며 물었다.
“하지만 전하. 제 말이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제 영지는 실전 경험을 쌓기에 좋은 곳이 아닙니다.”
“위험하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왕국 수도 주변에는 몬스터들이 사라진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만 제 영지에서는 몇몇 안전한 곳을 벗어나면 늑대 같은 야수는 물론 몬스터까지 출몰합니다. 거기에 도적들, 반역자들, 왕국 말을 잘 듣지 않는 이종족에 영지 어디엔가 분명 존재할 가멜다 왕국의 첩자들까지……. 이곳은 수도보다 훨씬 위험한 곳입니다.”
던칸으로서는 가능한 한 좋게 충고를 해 준 셈이다.
하지만 사울은 던칸의 충고를 들을 마음이 없었다.
“경의 말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도와주고 싶어요.”
던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왕자의 말을 면전에서 거절할 수는 없다.
사울의 태도는 분명 예의 발랐고 말투도 부드러웠지만 고압적인 태도로 명령을 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국왕의 허락을 받고 여기까지 왔다면 일개 영주인 던칸이 싫다고 해서 함부로 거부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도움, 감사히 받겠습니다.”
“고마워요.”
본론을 마친 사울은 얼마 후 인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울이 데려온 카스텔이나 그레이는 물론 감찰관 피에르도 그런 사울을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