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사울은 두 왕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 성인식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을, 당연히 참석해야지.”
실베스터가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5년 전보다 조금 더 지적이고 침착한 사람이 되었지만, 꽤나 차가운 느낌이었다.
“그래, 너도 어느덧 성인이 되었구나.”
카리스도 사울의 인사를 잘 받아 주었다.
실베스터보다 좀 더 따뜻하고 친근하지만, 역시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실베스터와 카리스 주변에는 시종들은 물론 몇몇 귀족 자제들도 있었다.
이미 편을 정한 귀족들이었다.
빨리 편을 정한 만큼 자신들의 ‘주군’이 국왕이 된다면 그만큼 대가를 받겠지만, 주군이 아닌 왕자가 국왕이 된다면 대가를 치러야 할 자들이다.
실베스터와 카리스는 이미 장성하였고 자신들의 세력도 어느 정도 만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기 국왕은 실베스터와 카리스 둘 중 한 명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실베스터와 카리스 곁의 젊은 귀족들은 사울을 소 닭 보듯 했다.
겉으로는 예의를 차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것도 어디까지나 왕실의 중요 행사라 참석한 것 뿐, 사울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왕자라도 약한 녀석은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일까.’
분명 자신에게도 왕위 계승권은 있다.
그 계승권을 사용할 뜻을 내비치지 않았을 뿐.
혹시 이 자리에서 왕위 계승권을 쓸 뜻을 비친다면 이 자리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만으로도 흥미로웠지만, 무모한 상상이기도 했다.
일단 사울은 착한 소년 왕자를 연기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그 분이 오셨다.
“국왕 폐하 드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오늘의 주인공, 사울 왕자보다 더 많은 관심과 시선을 받으며 들어오는 건 바로 마렌 국왕이었다.
위엄 넘치는 국왕의 예복은 물론, 이런 자리가 아니면 잘 등장하지 않는 왕의 지팡이, 왕홀까지 쥔 채였다.
그런 마렌 뒤에 루시아 왕녀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들 허리를 숙여 국왕에게 인사했다.
이어 모두를 대표하여 오늘의 주인공, 사울이 나서 아버지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아바마마. 오셨습니까.”
“그래, 고개를 들어라.”
“네.”
사울이 고개를 들자 마렌의 입가에 미소가 띠어졌다.
5년 전에는 젊음이 많이 느껴지는 장년의 얼굴이었지만 5년 사이 좀 많이 늙은 것 같은 아버지의 얼굴.
하지만 그 위엄은 5년 전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다.
마렌은 사울의 손을 잡고 파티장 중심으로 향했다.
이미 성인식 준비는 다 끝났다.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은 가운데 마렌은 쥐고 있던 왕홀을 뻗어 자신의 앞에 선 사울의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모두들 내 아들의 성인식을 축하해 주러 온 것에 국왕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내 아들 사울 다리우스는 오늘로서 성인이 되고 나아가 이 나라의 기둥이 될 것이다. 여기 모인 모두들 각자의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라. 내 아들과 함께 이 나라를 지탱하고, 올바르게 이끌며 가멜다 왕국을 비롯한 왕국의 적 모두가 다르센 왕국의 깃발 앞에 무릎을 꿇을 그 날이 올 때까지 충성을 다하라.”
왕자의 성인식이란 원래 이런 자리다.
왕자가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자리.
동시에 이 나라 왕실과 귀족의 단결을 도모하는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사울은 고개를 숙인 채 큰소리로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오늘의 주인공인 사울의 뒤를 이어 파티장에 모인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마렌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사울의 허리에 찬 마법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길을 선택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폐하.”
성인식을 맞이하는 사람은 자신이 결정한 미래를 상징하는 물건을 가져오도록 되어 있다.
마법사라면 마법 검이나 지팡이.
무술의 길을 걷는다면 창칼.
학문의 길을 걷는다면 책.
사울이 선택한 마법 검을 바라보던 마렌은 시선을 올려 사울 뒤에 서 있던 카스텔에게도 한마디 했다.
“그대에게도 감사를 전해야겠군. 훌륭한 선생 덕분에 이 아이가 제대로 마법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
“네, 폐하.”
“그래, 모두들 들었겠지. 사울 다리우스는 마법사의 길을 걷기로 하였다. 부디 이 아이의 앞날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마렌의 말에 파티장에 모인 모두가 화답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 * *
사울은 파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파티에 참석하는 것이 왕자의 의무니까 참석할 뿐이었다.
무도회에서 귀족 영애들과 춤을 추는 것도 어디까지나 왕자의 의무에 가까웠다.
“레이디, 나와 함께 춤을 추실까요?”
“영광입니다, 전하.”
파티에 참석한 귀족 영애들은 대개 사울보다 나이가 많았다.
아름다운 귀족 영애들과 춤을 추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크게 의미 있는 시간도 아니었다.
보통 성인식을 치르고 몇 년 뒤 결혼을 하는 게 율렌 섬의 관습이다.
사울도 더 나이가 차면 결혼을 생각해 봐야겠지만, 아직 서두를 필요는 없다.
춤을 출 만한 사람과는 모두 추었다.
혹시 카스텔이 원한다면 한번 춤을 출 생각도 해 봤지만, 카스텔 쪽에서 거절했다.
이렇게 슬슬 무도회가 끝나는가 싶더니 한 귀족, 아니, 왕족이 다가왔다.
“누님?”
드레스 차림의 루시아였다.
루시아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사울은 작게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추시지요, 누님.”
형제자매 통틀어 가장 밝은 루시아의 머리카락은 거의 은빛으로 빛났다.
거기에 대리석 조각처럼 단정한 이목구비에 안경을 썼지만 감춰지지 않는 싸늘한 눈빛.
귀족들은 이런 루시아를 일컬어 ‘얼음 왕녀’라 부른다던가.
누가 정했는지 몰라도 정말 적절한 별명이다.
사울은 얼음 왕녀 누님과 멋지게 춤을 추었다.
사울이나 루시아나 왕의 자녀들이라 이 정도의 춤은 기본 소양이었다.
그렇게 한 곡이 막바지에 이를 때쯤.
문득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네 앞날을 결정했어?”
“네, 누님. 보다시피 마법사의 길을 걷기로 했어요.”
“마법사가 되어서 뭘 하게?”
춤은 부드러웠지만, 루시아의 눈빛은 싸늘했다.
사울 역시 부드러운 동작으로 춤을 이어 나가면서 부드럽게 받았다.
“더 생각해 봐야지요. 왕국의 영광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래야 할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두 오라버니는 왕위를 노리고 조나단은 장군으로 성공하기를 원하지. 나는 왕국 정보부에서 이 나라의 정보를 책임지고 있고. 하지만 너는?”
“일단 훌륭한 마법사가 될 생각이에요.”
“그 다음에는?”
“많이 생각해 봐야겠지요.”
사울의 대답을 들은 루시아가 경고처럼 말했다.
“명심해. 왕실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면 무엇보다 왕국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해. 네가 무엇을 원하든 왕국의 영광보다 우선이 될 수 없어.”
사울은 새삼 누님에게 경계심이 들었다.
누님이 왕국 정보부 ‘회색 그림자’에 들어간 뒤 뛰어난 능력으로 상급자들을 감탄시켰다더니 헛소문이 아닌 모양이다.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명심하지요.”
“그럼 됐어.”
그렇게 무도회가 끝났다.
어느덧 밤도 늦었고, 마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은 이만 돌아가겠다. 다른 자들은 원할 때까지 즐기도록.”
“네, 폐하!”
그렇게 마렌과 루시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다른 왕자들도 눈치를 보며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주인공인 사울이 가장 늦게까지 남았지만, 오래 남아 있지 않았다.
왕실 가족들끼리 할 말이 있었으니까.
오래잖아 바다 궁을 나선 사울은 마렌이 있을 황금 궁으로 향했다.
황금 궁에 가니 예상대로 마렌과 다른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늦게 도착한 사울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마렌이 입을 열었다.
“사울, 우리가 널 기다린 이유를 알고 있겠지?”
“네, 아바마마.”
“네 미래에 대해 결정한 게 있느냐?”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기나긴 성인식 행사를 치렀다.
스스로 결정한 자신의 미래를 밝히기 위해서.
형님들도, 누님도 같은 일을 겪었다.
이제 사울의 차례인 것이다.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건 알겠다. 그래, 어떤 마법사가 되고 싶으냐? 군에 입대하고 싶으냐? 아니면 마법 연구를 더 해 보고 싶으냐?”
“그와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가능한 빨리 전장에서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소년치고는 패기까지 느껴지는 사울의 말에 마렌의 눈빛이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설마 가멜다 왕국에 선전 포고라도 하고 싶다는 말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럼 어디 도적이나 몬스터 무리라도 토벌하고 싶다는 말이냐?”
“네.”
“자세히 말해 봐라.”
“아바마마께서 허락하신다면 갈레트 지방에서 실전을 치르며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사울과 카스텔을 제외한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갈레트 지방.
다르센 왕국의 변방이며, 다르센 왕국 통틀어 두 명밖에 없는 지방 영주가 있는 혼란스러운 곳이다.
지금 막 성인식을 마친 고귀한 왕자가 그런 혼란스러운 지방에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갈레트 지방에 가겠다고?”
“네, 아바마마. 허락해 주십시오.”
갈레트 지방은 혼란스러운 땅이지만, 사울에게는 그만큼 기회가 많은 땅으로 느껴졌다.
더 강해지고 세력을 모으기 좋은 곳 말이다.
사울의 말에 마렌이 문득 다른 왕자와 왕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울과 단 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아바마마의 뜻을 알아들은 왕자와 왕녀 모두가 밖으로 나갔다.
이제 남은 건 마렌과 사울 둘 뿐이다.
마렌이 말했다.
“너도 왕관이 탐나느냐?”
“네?”
“왕 자리가 탐나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다르센 왕국의 국왕.
율렌 섬의 절반을 다스리는 자리.
가멜다 왕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면 드넓은 율렌 섬 전체를 통치할 수 있는 자리.
왕자의 몸으로 태어난 이상 전혀 탐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사울은 아직 거기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루기 어려운 꿈에 평생을 걸고 싶지는 않다.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생을 망친 녀석들에게 복수한다는 목표에 집중하고 싶다.
그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목표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나라 안에서 권력 다툼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왕위 계승권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강적은 나라 안이 아닌 바깥에 있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사울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언젠가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이구나.”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지금은 왕위를 노릴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갈레트 지방에서 저 자신을 더욱 갈고 닦고 싶습니다. 제가 성공한다면 그 다음에는… 더 높은 곳에 도전해 볼 수도 있겠지요.”
사울의 당돌한 말에 마렌은 대범한 미소로 답했다.
“그게 네 진심이냐.”
“그렇습니다.”
“좋다, 마음껏 강해져 보거라.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강한 왕족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니. 네가 네 형이나 누나보다 더 유능하고 많은 이들의 인망을 얻는다면 왕관을 물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
사울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