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헉… 헉…….”
고된 훈련에 체력과 마나에 동시에 한계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내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으음…….”
몸이나 마나의 변화를 감지하고 시선을 돌리면 언제나 무심한 표정으로 사울을 바라보는 카스텔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체력과 마나의 한계를 맛보고, 그때마다 마법으로 회복 받고 수업을 반복했다.
‘정말 힘들지만……. 효과적인 교육 방법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네.’
특히 사울 같은 사람에게 더없이 효과적인 교육 방법이었다.
우연이겠지만, 전생의 기억 덕분에 마법 이론에 밝고 아직 실기에 약한 사울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교육 방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으로 절묘한 우연이었다.
철저히 카스텔 본인의 상식과 방식대로 가르칠 뿐인데 사울의 특별한 환경 덕분에 잘 따라간다.
기막힌 우연의 조합이라고 할까.
“휴,,,,,”
무사히 오늘 수업을 마친 사울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누웠다.
마법으로도 회복이 어려울 만큼 혹사당한 터라 왕자의 체면이고 뭐고 따질 수가 없었다.
카스텔이 그런 사울에게 말했다.
“전하께서 저와 마법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는지 기억하십니까?”
사울은 이제 익숙해 진 거짓 미소와 함께 되물었다.
“음… 보름 정도 되었지요?”
“정확히 16일이 지났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네. 전하께서는 그동안 배운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마법사에게 물어도 대답은 비슷할 것이다.
상당히 진도가 빠르다고 말 하겠지.
물론 마법에 입문하고 며칠 만에 원소를 다루는 천재도 있다고 들었다.
그 정도면 책에 기록될 만큼 천재거나, 지나치게 조숙한 인물이거나 둘 중 하나다.
지금 사울의 기록도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이 기세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다면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기세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어릴 때만 영민했던 조숙한 마법사’ 취급이나 받고 끝날 수 있다.
카스텔이 질문을 해 온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내 배움이 빠르다고 방심할 때가 아니란 말이지요?”
사울의 말이 정답이었다.
“그렇습니다. 제 수업을 제대로 따라온 건 전하가 처음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분발하십시오.”
이 정도면 카스텔 기준으로 칭찬이라 할 수 있다.
카스텔의 칭찬에 사울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전생의 자신을 죽인 여자가 이제 자신의 선생님이 되어 칭찬을 하는 상황이라니.
하지만 지금은 선생님과 잘 지낼 때다.
“네. 정말 고마워요. 선생님.”
어린 왕자의 찬사에 카스텔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아주 미미한 미소지만 거짓된 미소는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앞으로도 계속 날 가르쳐 줄 거죠?”
“물론입니다.”
* * *
카스텔에게 마법을 배운 지 한 달 후.
아바마마의 부름을 받은 사울은 카스텔과 함께 일찍 황금 궁으로 향했다.
마법 수업을 받을 때처럼 편한 복장이 아닌, 왕자로서 예를 갖춘 복장을 입고 황금 궁을 찾았다.
한껏 차려입은 사울과는 달리 카스텔은 맨얼굴에 망토 차림이었다.
전생의 원수가 아바마마께 무례를 범했다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 것을 걱정한 사울이 물었다.
“그 복장으로 괜찮겠어요?”
사울의 걱정에 카스텔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항상 이 차림으로 폐하를 뵈었습니다.”
그렇게 황금 궁을 찾아가니 경비병들은 사울과 카스텔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카스텔 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두 사람은 부름을 받았다.
“어서 오너라.”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바마마.”
사울은 어릴 때부터 제대로 배운 예의범절에 따라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자세 탓에 자신 뒤에 서 있는 카스텔의 모습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바마마 앞에서 예의에 어긋나면 안 될 텐데.’
걱정하던 사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마렌이 말했다.
“너무 걱정 말거라. 카스텔이 내 목숨을 노리지 않는 한 어떤 무례도 용납할 테니까.”
“아, 아바마마.”
“후훗.”
뼈가 있는 농담처럼 들렸지만, 농담은 농담이다.
이후 몇 마디 가벼운 이야기를 하던 마렌이 문득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카스텔. 내 아들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잠시 나가 있거라.”
“네, 폐하.”
카스텔은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 안에는 마렌과 사울, 둘만이 남았다.
“사울.”
“네, 아바마마.”
“카스텔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
“그야… 만나기 전에 책으로 읽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의 영웅이자 검은 마녀로서의 카스텔에 대해서만 알고 있겠구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사울은 결국 입을 열었다.
“나이와 명성에 비해 좀 서투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후훗.”
마렌의 미소가 짙어졌다.
근엄한 국왕이 아닌 보통 사람이라면 크게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을까.
“제법이구나, 사울. 그 사고 이후 많이 달라진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카스텔 말이다. 네 말 대로다. 그녀는 보기보다 나이가 많지만 내 눈에는 어린아이로 보일 정도지. 그런 카스텔을 왜 네 선생으로 삼았는 줄 아느냐?”
“그야… 뛰어난 마법사라서 아닙니까?”
“절반은 맞았다. 나머지 절반은 다른 이유가 있었지. 지금까지 카스텔은 몇 번 제자를 들이려 해 보았지만 계속 실패했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어떤 면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서투른 탓이었겠지. 그런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철이 든 너와 만난다면 무슨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결과가 좋았던 모양이구나.”
결국 사울과 카스텔은 마렌의 시험을 겪은 셈이다.
그 시험은 무사히 통과했고 말이다.
“그럼 아바마마. 선생님을 계속 제 곁에 두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하지만 기억해 두거라.”
“……?”
“카스텔 정도의 인물을 곁에 두는 건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어린 너라도 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겠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울이라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검은 마녀 카스텔.
비록 작위는 없다지만 이 왕국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거물이다.
그 정도의 거물이 갑자기 지금껏 왕실의 곁가지 취급이나 받던 사울 왕자와 친해진다면?
사울의 의도와는 별개로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정치.
왕자 신분으로 살아가고, 또 활동하려면 마냥 멀리할 수만은 없는 것.
그런 의미에서 마렌의 지금 언급은 참으로 시의적절했다.
사울은 새삼 아바마마께 고개를 숙였다.
“아바마마의 말씀,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 * *
현재를 살아갈 때는 잘 모른다.
하지만 현재가 지나가고 과거가 되면 깨닫게 된다.
시간은 화살보다 빠르다는 것을.
사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덧 전생을 떠올린 지 5년이 훌쩍 지났다.
내일은 사울의 열여섯 번째 생일이다.
동시에 사울의 성인식 날이기도 했다.
사드온 대륙의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사울 역시 성인식을 치르면 말 그대로 성인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성인식 전날 아침을 맞이한 사울은 새삼 묘한 기분이 되었다.
전생 때도 성인식을 치렀지만, 그 때는 정말 조촐하게 치렀다.
성인식을 제대로 치를 만큼 가정 형편이 윤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처지의 하급 귀족 몇 명이 함께 조촐한 성인식을 치른 기억이 났다.
이번 삶은 다르다.
내일은 사울의 성인식을 기념하는 무도회까지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죽은 후궁 소생이지만, 왕자의 성인식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성인식이라.”
중얼거리며 사울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뒤로 묶은 옅은 금발 머리에 아직까지는 ‘청년’보다 ‘소년’에 가까운 앳된 얼굴.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이 성장했지만, 절세 미녀로 불린 어머니를 똑 닮은 탓인지 여전히 선이 가는 외모였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도 꽤 성장했다.
키도 또래만큼 자랐고 작고 허약했던 몸도 꽤 탄탄해졌다.
다만 예전에 비해 탄탄해졌을 뿐 대단한 몸은 아니었다.
물론 ‘전투 마법사’를 지망하는 사울에게 있어 나쁜 몸은 아니다.
힘이 좀 더 세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마법사를 꿈꾸던 사울이기에 몸을 만들기보다 마법을 배우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전투 마법사로서 나쁜 육체는 아니다.
지금은 이 정도의 몸에 만족하기로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감상하던 사울은 두 손을 뻗쳤다.
한 뼘 간격으로 벌린 양 손 끝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순수한 마나의 흐름이었다.
지난 몇 년간 마법 수련에 열중한 사울에게 이 정도 마나 소용돌이를 만드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마나 소용돌이에 이어 사울은 4대 원소를 만들어 보았다.
불, 물, 바람, 땅.
4대 원소가 저마다 뚜렷하게 덩어리진 채 양 손에 네 개의 형상으로 떠올랐다.
처음 이 몸으로 다시 마법을 배우고, 원소를 만들 때와 비교하면 훨씬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마법사로서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성장한 것이다.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는 마법 지식을 모두 몸으로 펼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어 사울은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벽 한 쪽에 눈에 잘 띄게 놓인 검 한 자루.
검집 곳곳에 보석이 박혀 있고, 검의 손잡이 끝에 계란만 한 크기의 푸른 수정이 박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일명 ‘마법 검’이라 불리는 무기다.
사울 같은 전투 마법사들이 흔히 쓰는 무기로서, 검의 역할과 마법 지팡이 역할을 모두 할 수 있는 범용 무기다.
검집에서 검을 빼 들면 가느다란 레이피어가 된다.
그리고 검집에 검을 넣은 채 거꾸로 들고, 혹은 검을 빼 든 채로 검 손잡이 끝의 푸른 수정 부분을 이용해 마법 지팡이처럼 쓸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마법 지팡이는 마법 시전을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며, 사울의 마법 검 역시 그러한 역할을 했다.
사실 마법 지팡이나 마법 검은 어중간한 마법사나 쓰는 도구로 평가 받기도 했다.
마법 시전을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동시에 마법 시전 효율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마법 지팡이나 마법 검의 도움 없이 100의 마나로 100의 위력을 낼 수 있다면, 도움을 받을 경우 100의 마나로 80의 위력밖에 못 내는 식이었다.
사울의 마법검은 마법 효율이 8할 정도였다.
마법 효율 8할이면 명품에 속한다.
어설픈 마법 지팡이나 마법 검은 효율이 5할도 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효율 문제 때문에 뛰어난 마법사는 마법 지팡이나 마법 검을 쓰는 것을 기피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선생님’ 같은 분 말이다.
“전하.”
드래곤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사울이 카스텔 생각을 하기 무섭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울에 카스텔이 다가오는 광경이 비쳤다.
“선생님.”
“수업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네.”
카스텔이 상아 궁에서 머무른 지도 5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검은 마녀’ 카스텔이 상아 궁에 5년 동안 머무르면서 이런저런 소문이 있었다.
카스텔이 사울 왕자의 측근이 되었다는 소문부터 왕자와 카스텔이 심상찮은 관계라는 괴상한 소문까지.
정작 카스텔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성격은 물론 외모까지도 말이다.
위대한 마법사는 세월마저 거스를 수 있다더니, 카스텔 역시 그런 모양이었다.
잔주름 하나 없는 얼굴을 보면 20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사울이 카스텔이 서로 대하는 자세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울은 카스텔을 선생님 대접하며 존대했고, 카스텔도 사울을 제자이자 왕자로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사울은 자신의 원한도 잊지 않았다.
지금은 착한 제자 노릇을 해 주겠지만, 언젠가는 등에 칼을 꽂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의 일.
아직은 배울 게 많으니 착한 제자 노릇을 그만둘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