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카스텔이 누구인가.
전생의 자신을 죽인 마법사가 아닌가.
전생에 카스텔에게 손도 못 쓰고 죽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렸다.
사울의 원한은 다르센 왕국이 아닌 자신을 배신하고 버린 가멜다 왕국을 향했다.
하지만 다르센 왕국에서 사울의 원수를 찾는다면, 그 첫 번째가 카스텔일 것이다.
검은 흉성만 아니었어도 전장에서 죽지 않을 수도 있었고, 가문과 가족이 살아남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저 죽일 계집이……’
생각 같아서는 전생의 원한을 담아 이 자리에서 목을 베고 싶다.
하지만 전생의 자신도 손쉽게 처리한 ‘검은 흉성’ 이다.
하지만 사울은 일단 진정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전생의 원한 운운할 수는 없다.
사울은 표정을 고치고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내가 말실수를 했네요.”
사과를 한 보람이 있는지 카스텔은 사울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사울은 다시 말했다.
“얼마 전에 가멜다 왕국과의 전쟁에 대한 책을 읽었어요. 가멜다 왕국 놈들이 ‘검은 흉성’을 두려워 한다는 부분이 너무 재미있어서 여러 번 읽은 나머지 그만 말실수를 했어요.”
“…….”
“카스텔 맞지요? 검은 마녀.”
말없이 사울을 바라만 보던 ‘검은 마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말실수는 무사히 넘어간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인간이다.
왕자를 보러 오면서 저런 복장에 가면까지 쓰고 오다니.
국왕의 명을 받고 온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복장을 입고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불경죄로 감옥행이었을 것이다.
카스텔은 대체 왜 전장에 나서는 것처럼 철 가면을 쓰고 망토까지 두르고 왔을까.
설마 사울을 적이라 생각한 것일까.
생각해 보면 가멜다 왕국에서 ‘검은 흉성’ 카스텔은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어쩌면 카스텔은 악명만큼 제정신이 아닌 인간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지금은 카스텔에게서 적의나 살기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울은 다시 대화로 풀어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검은 마녀?”
“…….”
검은 마녀라는 별칭을 들은 카스텔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면 때문에 표정은 알 수 없지만 썩 기분 좋은 반응은 아닌 것 같다.
“선생님?”
“…….”
역시 카스텔은 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거린 것 같다.
좀 더 나은 반응일까.
“선생님이라 부를까요?”
끄덕.
카스텔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마녀보다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사울은 카스텔의 경계심도 늦출 겸, 어린아이처럼 귀엽게 말해 보기로 했다.
“알았어요. 선생님. 내게 마법을 가르쳐 주러 온 것 맞죠?”
끄덕.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울은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카스텔은 전생의 자신을 죽인 장본인에게 예의를 갖춰야 하다니.
하지만 지금은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아바마마께서 직접 보낸 사람이니까.
그 때 문득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 무슨…….”
시선을 돌리니 상아 궁 정리 문제로 잠시 자리를 비웠던 그레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레이는 겁도 없이 카스텔에게 언성을 높였다.
“전하 앞에서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당장 가면과 망토를 벗으십시오!”
사울은 그레이를 말렸다.
“그레이, 그만둬.”
“전하?”
“어쨌든 내 마법 선생님으로 오신 분이잖아? 그것도 아바마마께서 직접 뽑아 보낸 선생님이야.”
‘생각 같아서는 죽여 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죽일 힘도 없으니까. 참아야 해.’
사울은 그레이를 말리며 자기 자신도 다잡았다.
그리곤 다시 예의 바른 어린 왕자를 연기했다.
“카스텔 선생님.”
사울의 부름에 카스텔이 미미하게 반응했다.
‘카스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당신 같은 뛰어난 마법사가 내 선생이 된다면 감사한 일이에요.”
“…….”
“가면을 쓴 선생님에게 뭘 배우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실례가 아니라면 가면을 벗어 주세요.”
카스텔 정도의 실력자라면 자부심도 대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명령’보다는 ‘부탁’으로 은근히 압박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사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네.”
처음으로 카스텔이 입을 열었다.
카스텔의 목소리는 사울이, 정확히 말하자면 전생의 롤랜드가 들었던 목소리 그대로였다.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중성적인 목소리.
묘하게 금속성으로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다소 부자연스러웠지만, 그만큼 무시무시했다.
곧 카스텔이 가면에 손을 댔다.
기계 장치 같은 것이 되어 있는지 철컹 소리와 함께 철 가면이 떨어졌다.
전장에서는 항상 가면을 쓰고 다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카스텔의 맨얼굴.
마침내 드러난 카스텔의 얼굴을 본 사울이 생각했다.
‘뭐야. 미인이잖아.’
항상 얼굴을 가렸기에 못생겼거나, 흉터 등으로 심하게 망가진 얼굴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드러난 카스텔의 맨얼굴은 멀쩡하다 못해 아름다웠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검정색 머리.
부드러운 눈매에 검붉은 핏빛 눈동자.
오뚝한 콧날에 남들보다 조금 더 붉은 입술.
특별히 차갑거나 날카로운 인상도 아니다.
큰 눈에 다소 멍한 표정은 날카롭기 보다는 순진해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 속에 타오르는 듯 이글거리는 핏빛 눈동자가 이질적일 뿐이었다.
무시무시한 철 가면 아래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예상과 다른 진실에 사울은 허탈한 기분이었다.
‘전장에서 시체로 산을 쌓고 다니던 여자가 저렇게 멀쩡하게 생겼을 줄이야.’
가면까지는 벗겼는데 이제 어떡한다.
꼴 보기 싫다고 쫓아낼 수도 있지만, 그건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카스텔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신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관계를 이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카스텔과 가까워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울은 일단 전생의 원한을 잊기로 했다.
“검은 마녀라 불리시는 분이 이렇게 아름다운 분일 줄 몰랐어요.”
“…….”
카스텔의 눈빛이 미미하게 변했다.
조금 기분이 나빠진 것 같다.
외모를 칭찬했다고 왕자 앞에서 불쾌한 눈빛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호칭이 문제일까.
“미안해요. 카스텔 선생님이라고 부를까요?”
호칭에 이름, 그리고 경칭까지 붙이니 카스텔의 눈빛이 한결 나아졌다.
“네.”
“좋아요. 카스텔 선생님.”
“네.”
“어흠!”
보고 있던 그레이가 헛기침을 하며 카스텔에게 눈치를 줬다.
그제야 카스텔도 자신이 말을 너무 짧게 했음을 깨달았다.
“…전하.”
인사를 마저 한 카스텔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말이나 행동이 ‘왕자와 처음 하는 정식 인사’치고는 상당히 무례했다.
그렇지만 원수에게 마법을 배울 마음을 굳힌 사울은 대범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선생님.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요??”
“계획이요?”
“그래요. 날 가르칠 계획 말이에요.”
“저는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날 가르칠 것인지 듣고 싶어요.”
“왕자님께 마법과 전투 기술을 가르쳐 드릴 겁니다.”
“…….”
마법을 배우기 전에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할 줄 알았다.
전생에 마법을 배울 때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대마법사의 교육 방식은 뭔가 다른 걸까.
“알았어요. 어쨌든 내게 마법을 가르쳐 줘요.”
그런 사울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스텔이 손을 뻗었다.
아무런 제지 없이 사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 카스텔은 눈을 감았다.
동시에 사울은 몸속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으윽.”
이번 생에서는 처음 느끼는 감각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놀란 그레이가 한마디 하려 했지만, 사울이 손짓으로 막았다.
이 기괴한 감각의 정체를 사울은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가 다른 사람의 몸속에 있는 마나를 조사 하는 과정이다.
선천적으로 몸속에 마나가 어느 정도 있는지, 그리고 마나와 얼마나 친한 몸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몸속에 마나의 양이 많고, 또 신체가 마나와 친한 성질을 띨수록 마법사로서 자질이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선천적인 마나와, 마나와 친한 성질의 신체가 전부는 아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자질인 것이다.
“…….”
그렇게 사울의 몸속을 조사한 카스텔이 손을 뗐다.
“전하 신체 조건은 평범합니다.”
“평범하다고요?”
“전하의 몸에 선천적으로 내재된 마나는 거의 없습니다. 마법을 아예 쓰지 못하는 몸은 아니지만, 뛰어난 수준은 결코 아닙니다.”
카스텔은 상대가 왕자라고 아부를 하거나 돌려 말할 생각 따윈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사울도 그 점에는 불만이 없었다.
입에 발린 말보다는 냉정하고 정확한 말이 더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럼 내 육체는 어떤가요? 책에서 보니 마나와 친한 육체가 있다던데요.”
“그 부분은 평균 이상인 것 같지만 대단한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몸속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마나는 거의 없다.
그 대신 육체적으로는 마나와 어느 정도 친밀한 성질이 있다.
일반적으로 마나의 양은 마법을 얼마나 강하게, 또 지속적으로 쓰는가와 관련이 있다.
육체와 마나 사이의 친밀성은 마법을 얼마나 세세하고 정교하게 쓰느냐, 즉 마법 기술과 관련이 있다.
선천적으로 둘 다 갖춘 사람은 일명 ‘마법의 육체’를 가졌다고 평가되며,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마법의 재능이라는 건 여러 종류가 있다.
선천적으로 마법을 잘 다루는 신체가 분명 유리하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제아무리 마법을 잘 다루는 신체라 해도 머리가 따라 주지 못하면 한계가 있는 것이다.
머리로 빠르게 마나를 배치하고 계산하는 능력.
직관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조정하는 센스.
이런 것들도 마법을 잘 쓰는 데 꼭 필요한 재능이었다.
그러니 신체적인 능력이 대단하지 않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둔재만 아니라면 괜찮다.
왕자의 권력과 재력으로 신체적인 능력을 보완하는 방법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카스텔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빨아먹으면 되지 않겠는가.
“좋아요. 그럼 이제는 뭘 하죠?”
사울의 상식 대로라면 다음은 명상 차례다.
명상을 통해 체내에 마나를 쌓는 건 마법 교육의 필수 과정이니까.
“그 다음에 필요한 건 마나를 몸속에 쌓는 방법을 익히는 것인데……. 책을 가져왔습니다.”
카스텔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마법 명상의 기초]
사울도 익히 아는 책이다.
다르센 왕국은 물론 가멜다 왕국에서도 가장 널리 읽히는 마법 입문서 중 한 권이다.
그만큼 마법 입문자가 어떻게 명상을 해서 마나를 쌓을지 입문자도 알아보기 쉽게 적힌 책이지만…….
“이 책을 보고 독학하라는 말인가요?”
“네, 전하.”
“…….”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다른 사람도 아닌 왕자를 가르치러 온 선생이 첫 날부터 독학 운운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마디 하려던 사울에 앞서 카스텔이 말했다.
“저는 명상에 대해 잘 모릅니다.”
“뭐라고요?”
비상식적인 소리였다.
명상은 마법에 입문할 때 꼭 필요한 기본 중 기본인데 말이다.
마법을 쓸 때 몸속에 쌓아 둔 마나만을 활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몸속에 가능한 많은 마나를 쌓아 두는 게 여러모로 유리했다.
따라서 마법에만 집중하는 전문 마법사부터 무술을 주 무기로 쓰고 마법은 보조 수단 정도로 쓰는 일명 ‘마법 전사’에게도 명상은 일종의 ‘필수 과정’으로 통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검은 마녀’가 명상에 대해 잘 모른다고?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마법을 쓰는 거죠?”
“저는 몸속에 마나가 충만한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만들어졌다고요?”
“그렇습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라는 뜻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말일까.
설마 명상을 가르치기 귀찮아서 저런 소리를 꾸며 내는 건 아닐 것이다.
카스텔의 눈빛이나 표정을 봐도 진심인 것이 느껴졌다.
일단 사울은 참기로 했다.
“알았어요. 선생님.”
‘왕자 사울’이 혼자서 마법 명상을 하는 건 버거운 일이다.
하지만 ‘마법 장교 롤랜드’는 명상 전문가였다.
일단 사울은 [마법 명상의 기초]를 훑어보았다.
명상 하는 법은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럼.....”
사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카스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뭐라고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하지만 폐하와의 약속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
아바마마와의 약속시간이라는데 사울이 제지할 방법은 없었다.
“그럼 이 책은?”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혼자서 가능한 익혀 보십시오.”
“알겠어요. 그럼.”
카스텔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사울 곁을 물러났다.
그렇게 카스텔이 떠나자 그레이가 뒤늦게 화를 냈다.
“저런 무례한 여자가 다 있나!”
“관둬. 그레이. 아바마마께서 총애하는 사람이잖아.”
“검은 마녀가 예의범절의 ‘예’ 자도 모른다는 말을 익히 들었지만……. 에잉.”
예의범절에 까다로운 그레이와는 달리 사울은 크게 화를 내지 않았다.
전생의 자신을 죽인 상대에게 예의범절은 기대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럼 독학이나 해 볼까?”
사실 명상이라면 잘 알고 있다.
사울은 책을 대충 훑어본 뒤 혼자서 명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