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가멜다 왕국]
다르센 왕국이 아닌, 영혼의 조국이라 할 수 있는 가멜다 왕국에 대한 부분을 먼저 펼쳤다.
[흉악무도한 가멜다 왕국의 만행이 계속되는 가운데…….]
[가멜다 왕국의 간계에도 불구하고 다르센 왕국 군의 영웅적인 항쟁으로…….]
[가멜다 왕국의 더러운 술수에 넘어간 어리석은 배신자들이…….]
다르센 왕국에서 쓴 사전이라 가멜다 왕국에 대한 내용은 철저히 부정적인 논조로 작성되었다.
다행히 사울에게는 부정적인 논조 속에서 ‘진실’을 찾아낼 머리와 안목이 있었다.
사울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지식과 사전을 통해 얻은 지식을 정리해 보았다.
가멜다 왕국과 다르센 왕국은 여전히 적국이다.
마지막으로 큰 전쟁이 있었던 건 5년 전이다.
이후 불안정한 휴전 상태에서 서로 잡아먹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 가멜다 왕국에 충성하던 마법 장교 롤랜드는 다르센 왕국의 사울 왕자로 환생했다.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다 있나.’
운명의 장난일까.
아니면 신이 내려 주신 선물 혹은 저주일까.
고민하던 사울은 퍼뜩 생각했다.
분명 롤랜드는 죽었다.
‘검은 흉성’ 카스텔에게 패해 죽었다.
그럼 가족들은?
‘아버지… 형님…….’
롤랜드의 아버지와 형 모두 다르센 왕국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가멜다 왕국에서는 그런 형과 아버지의 공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족에게 별다른 혜택을 주거나 지원해 준 게 없었다.
하지만 롤랜드 역시 아버지와 형처럼 전장에 나갔다.
기울어 가는 가문을 살릴 방법이 그것뿐이었다.
그런 롤랜드의 능력을 알아보고 손을 내밀어 준 후견인들도 있었다.
후견인들과 왕실은 롤랜드에게 말했다.
큰 공을 세우면 영광이 올 것이라고.
롤랜드 본인은 물론 가문 전체가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롤랜드는 그 말을 믿고 최전선이었던 볼페르트 요새로 향했다.
몇 차례 공을 세우고 인정받아 현장 책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처럼 전장에서 부끄럽지 않게 죽었다.
‘어머니와 아리엘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족 중 남은 건 롤랜드의 어머니와 여동생 아리엘뿐.
몸이 약한 어머니, 선량하지만 마음 여린 여동생 아리엘이 마음에 걸렸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멜다 왕실이나 롤랜드의 후견인들이 남은 가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을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아버지나 형님이 돌아가셨을 때와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말이다.
‘어머니와 아리엘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사울은 서재에서 전생의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서재에 있는 책들 중 찾는 정보가 있을 만한 책들을 여럿 뒤져 보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전생의 가족들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이에 사울은 그레이를 불렀다.
“그레이, 보고 싶은 책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구할 수 있는 서적이라면 가져오겠습니다.”
사울은 가멜다 왕국에 대한 책을 요구하려다 멈칫했다.
머리 부상을 입었다 깨어난 어린 왕자가 난데없이 적국에 대한 책을 요구하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전생에 하급 귀족이었던 사울은 처세술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변한 자신의 모습에 의아해할 그레이에게 더 의심을 사는 일은 피해야 한다.
“보고 싶은 책이 여러 권이야. 구할 수 있을까?”
“금서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나뭇잎을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고 했다.
책을 많이 주문하면서 그 사이에 원하는 책 몇 권을 끼워 넣는다면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울은 여러 가지 책들을 다량으로 주문했다.
그 중 지금 당장 보고 싶은 건 단 몇 권에 불과했다.
가멜다 왕국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을 만한 책들 말이다.
주문을 받은 그레이는 의심 없이 명령에 따랐다.
* * *
다음 날.
상아 궁 서재에 사울이 주문한 책 수십 권이 배달되었다.
대부분은 관심이 없거나 나중에 볼 책들이다.
지금 사울의 관심은 오직 ‘롤랜드’에 관한 것이었다.
10여 년 전 사망한 롤랜드는 가멜다 왕국에서 꽤 촉망받는 인재였다.
당연히 다르센 왕국 입장에서는 경계 대상이었다.
몇 권의 책을 뒤적거린 끝에 사울은 쓸 만한 책을 발견했다.
[6년 전쟁 총론]
그랬다.
롤랜드가 참여하여 전사한 전쟁을 세간에서는 ‘6년 전쟁’이라 불렀다.
롤랜드가 전사한 전투인 일명 ‘1차 볼페르트 요새 공방전’으로 시작되어 휴전 조약이 맺어질 때까지 6년간 이어진 전쟁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1차 볼페르트 요새 공방전’ 이후 아군의 승리가 이어졌다.]
[증오스러운 가멜다 왕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적들에게서 흉악하지만 뛰어난 인재가 나타났다. 일명 ‘가르시아 남매’라 불리는 흉악무도한 자들이었다.]
“가르시아 남매라면…….”
환생 후 언젠가 들어 본 이름이다.
[가르시아 남매, 마검사 ‘베일 가르시아’ 와 마궁수 ‘마리안 가르시아’. 두 적은 연달아 아군을 패퇴시키며 가멜다 왕국의 수명을 늘려 주었다. 6년 전쟁을 사실상 마무리 지은 전투로 평가받는 ‘3차 볼페르트 요새 공방전’에서도 가르시아 남매는 아군 선봉장 ‘검은 마녀’ 카스텔을 패배시키고 전세를 6년 전쟁 이전으로 돌려놓았다.]
“과연. 가멜다 왕국에 구국 영웅이 등장하셨단 말이지.”
[3차 볼페르트 요새 공방전 이후 1년 가까운 소모전 끝에 아군과 적군 모두 휴전 조약에 합의하였다. 비록 6년 전쟁은 아군이 크게 얻은 것 없이 휴전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머잖아 국력을 회복하여 무도한 가멜다 왕국을 멸망시킬 것이다.]
호전적인 논조로 작성된 [6년 전쟁 총론]의 서론을 대충 훑어본 사울이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사실과 큰 차이는 없네.”
전생의 기억은 물론 현생의 기억 속에서도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다행히 이 책은 ‘총론’ 이라는 제목이 무색하지 않게 어마어마한 정보들을 담아 놓았다.
책을 계속 살펴보던 사울은 마침내 ‘롤랜드’를 언급한 부분을 찾았다.
[1차 볼페르트 요새 공방전에서 에드가 마이스터, 롤랜드 제니스타 등 흉악한 적들이 잔꾀를 부리며 맞섰지만 아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카스텔의 활약에 힘입어 에드가, 롤랜드 등 모든 적장이 목숨을 잃었다. 카스텔은 죽은 적장들의 목을 베어 장대에 꽂고 아군의 사기를 드높인 뒤 남은 적장의 시신은 수습하여 간단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
“내 시체에서 목을 베어 내다 건 다음 장례는 치러 줬다고.”
고마워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카스텔에게 죽고 목이 베인 건 화나지만 이후 장례는 치렀다니 다행이라 해야 할 까.
전생에 자신의 최후를 확인한 사울은 전생 가족들에 대해 찾았다.
가족들의 안부 역시 오래잖아 찾을 수 있었다.
이야기의 후일담처럼 짧게 기록된 한 줄의 문장이었다.
[패장 롤랜드 제니스타의 가족들도 모두 사망했으며…….]
사울은 눈이 튀어나올 듯 놀랐다.
믿을 수가 없어 다른 책들도 찾아보았지만 나오는 이야기들이 다 비슷했다.
[제니스타 가문의 토지는 다른 귀족 가문에 편입되었다]
[롤랜드의 어미는 자살했다]
[미모로 유명했던 롤랜드의 동생은 병에 걸려 죽었다]
[제니스타 가문의 생존자들은 전멸했다.]
기록들에서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결과는 하나였다.
롤랜드는 물론 가족들까지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결국 가멜다 왕국의 그 누구도 살아남은 롤랜드의 가족들을 돌봐 주지 않았다.
롤랜드의 후견인들은 롤랜드 가족들을 돌봐 주기는커녕 남은 것마저 빼앗았다.
결국 롤랜드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절망과 비탄 속에서 자살하거나 병을 얻어 죽었다.
툭.
눈물 몇 방울이 책 페이지에 떨어졌다.
“…빌어먹을.”
눈물을 닦고 또 닦아도 계속 흘러내렸다.
어떻게 롤랜드의 후견인들이, 나아가 가멜다 왕국이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가문의 모든 남자들이 전장에서 왕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 충성의 대가가 남은 가족들의 죽음이라는 말인가.
몸이 약했던 어머니.
선량하지만 마음 여린 여동생 아리엘.
그들 모두가 죽었다니.
‘가멜다 왕국은 날 버리고, 가문을 버리고, 가족들까지 버렸어.’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충성의 대가를 받지 못한 수준을 넘어 처참히 배신당했다.
처음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을 때는 그래도 영혼의 조국인 가멜다 왕국을 위해 다시 한번 살아갈 생각도 했다.
하지만 전생의 삶이 철저히 배신당했다는 것을 안 지금은 달랐다.
충성을 배신당하고, 삶을 부정당하고, 가족들은 모두 버려지고 죽었다.
가멜다 왕국.
그 나라는 더 이상 롤랜드가 충성할 나라가 아니었다.
사울 왕자의 적국일 뿐이다.
“개자식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다 죽여 버릴 거야. 모두 다.”
눈물 젖은 사울의 눈이 번득였다.
전생의 조국, 가멜다 왕국을 향한 분노를 불태우면서.
* * *
“아니, 전하.”
서재 밖에 있던 그레이는 서재에서 나온 사울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눈물을 닦았다지만 붉게 충혈된 눈을 못 알아볼 그가 아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예상한 질문에 사울은 미리 생각해 둔 대로 대답했다.
“책에서 어머니에 대한 걸 봤어.”
“아…….”
열 살 소년이 책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대목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다.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이야기였고, 그레이도 마찬가지였다.
무사히 서재에서 나온 사울은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가멜다 왕국을 용서할 수 없다.
충성의 대가가 가문의 멸망이라니.
롤랜드에게 가족들을 돌봐 주고 가문의 영광을 약속한 놈들은 살아 있을 것이다.
그놈들은 가멜다 왕국에서 호의호식하고 있겠지.
“용서할 수 없어.”
잊을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적국 왕자로 환생했다는 것 자체가 운명처럼 느껴졌다.
운명이 복수를 원하는 것 아니겠는가.
가멜다 왕국에 복수한다.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전생의 조국이었던 나라.
가멜다 왕국을 배신하고 팔아먹는 것.
생각을 거듭해도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적국 왕자로 환생했으니 나라를 팔아먹겠다.
가문의 영광과 가족들의 안위를 약속해 놓고 저버린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영혼의 매국노가 되리라.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절대로.’
잠이 들 때까지 사울은 몇 번이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 * *
삶의 목표를 정한 사울은 다시 태어난 자신을 돌아보았다.
왕자는 부와 권력을 가진 신분이다.
그렇다고 바로 가멜다 왕국에 복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비록 사울이 왕자라지만, 세력도 배경도 없는 어린 왕자일 뿐이다.
서투르게 움직였다가 전생에 대한 게 밝혀진다면 사울의 진심과는 별개로 다르센 왕국에서 그를 위험인물로 낙인찍을지 모른다.
그러면 유폐된 채로 평생 비참하게 살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게 되겠지.
‘그런 꼴이 될 수는 없지.’
전생 가문의 멸망과 남은 가족들을 전멸시킨 데 책임이 있는 모두에게 복수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하게 움직여야 한다.
결심한 사울은 며칠간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
예전에도 사울은 하루 일과 대부분을 서재에서 보냈기에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먼저 사울은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열심히 공부했다.
5년 전 휴전 조약이 맺어진 이후 두 나라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진 적은 없다.
물론 휴전 조약이 두 나라 간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두 나라 모두 휴전 조약이 영원하리라고는 믿지 않았고, 언제 재개될지 모를 전쟁을 위해 병력을 증강시키고 국내의 질서를 다잡으며 전쟁 준비를 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가멜다 왕국을 상대로 복수할 수 있을까.
나라를 상대로 제대로 싸우려면 필요한 게 많을 것이다.
지위, 능력, 권력, 정보, 재력…….
이에 사울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강해져야겠어.”
강해지고, 똑똑해지고, 보다 많은 것을 손에 넣을 것이다.
충분히 강해진 뒤 가멜다 왕국을 향해 검을 뽑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