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다행히 사울로 살아가던 기억은 고스란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이래저래 기억이 뒤죽박죽이지만 당장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환자가 아닌가.
어린 왕자님이 다쳐 누워 있는데 주변에서 필요 이상으로 귀찮게 하진 않을 것이다.
“그레이.”
“네, 전하.”
“머리가 아파. 그리고 피곤해. 잠시 나가 주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혼자서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다는 롤랜드, 아니, 사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밖에서 시종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국왕 폐하 들어오십니다!”
“……!!!”
다르센 왕국의 국왕.
마렌 다리우스의 행차였다.
아들에게 무심하던 아버지도 아들이 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다는 소식에 찾아올 마음이 생긴 모양이었다.
사울은 크게 당황했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되었는데 난데없이 적국 국왕과 대면하게 생겼다.
머리와는 별개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무리 어린 왕자가 부상을 입었다지만, 상대는 국왕이다.
왕자라도 아버지이자 국왕을 향한 예의는 지켜야 한다.
뼈가 부러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면 퍼질러 누워 국왕을 맞을 수는 없었다.
사울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고, 그레이가 그런 사울이 가능한 꼿꼿이 몸을 세울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는 사이 사울의 아버지이자 국왕, 마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바마마.”
몸이 기억하는 대로 사울은 고개를 숙였다.
기억대로 마렌은 위엄 넘치는 중년 남자였다.
짧게 자른 갈색 머리에 풍성한 수염, 짙은 적갈색 눈동자.
보통 남자보다 한 뼘은 더 큰 키에 화려한 국왕의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장대한 체구.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눈빛.
왕의 옷을 입지 않았다면 장군이나 용병 대장처럼 보일 만큼 위압적인 외모.
10여 년 전 롤랜드가 활약하던 시절부터 다르센 왕국의 왕좌를 지키고 있는 남자.
마렌 다리우스.
사울의 몸은 위대한 아버지에게 절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영혼은 달랐다.
아버지지만 한편으로는 적국의 국왕이 아닌가.
이 자리에서 저자의 목을 베어 가멜다 왕국에 가져가면 어떻게 될까.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형님과 아버지의 원한을 갚을 수 있지 않을까?
형님과 아버지처럼 전장에서 죽은 자신의 원한 역시 갚을 수 있을 테고.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적국 국왕의 목숨을 거두고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둘째 문제다.
지금 이 연약한 열 살 소년의 몸으로 저 장대한 남자를 공격해 죽일 수가 없었다.
또 사울의 기억과 정체성이 ‘롤랜드’의 적대감을 가로막았다.
기억을 떠올리기 전 사울은 아버지를 크게 원망하지 않았었다.
좀 더 자신을 사랑해 주고 관심을 보여 주길 바랐지만, 아버지를 증오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이며 친척조차 없기에 배경도 세력도 없는 초라한 왕자.
그런 왕자에게 국왕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세상 물정에 대해 잘 모르는 어린 왕자도 그 정도는 깨닫고 있었다.
따뜻한 부정을 느낀 기억은 많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버지다.
또 난세를 잘 이끌어 나가는 존경할 만한 왕이다.
원망한 적은 있어도 증오한 적은 없다.
그런데 지금 전생이 생각났다고 아버지를 적대할 수 있을까.
결국 사울은 마음을 정했다.
지금은 착한 아들이자 왕자 노릇을 하기로.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아바마마.”
사울의 말에 마렌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편히 있어도 괜찮다.”
“감사합니다.”
마렌의 허락이 떨어진 뒤에야 그레이는 사울을 좀 더 편한 자세로 침대에 기대 앉혔다.
“몸은 어떻느냐?”
“머리가 조금 아프지만, 괜찮습니다.”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다. 상처가 크지 않고 단순한 사고라고 들어서 안도했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고개를 숙인 채 이야기를 하는 사울을 바라보던 마렌이 문득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
아바마마가 무언가 위화감이라도 느낀 것일까.
불안해하면서도 사울은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든 사울의 눈을 바라보던 마렌이 말했다.
“이 아비가 어색한 모양이로구나.”
“아, 아닙니다.”
“괜찮다. 그러고 보니 국정이 바빠 널 자주 보지 못했구나. 앞으로는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널 만날 시간을 가져 보겠다. 몸조리 잘하거라.”
이런 마렌의 말에 사울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롤랜드’의 기억과는 별개로 사울 왕자는 아버지의 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따뜻한 부정.
전생에서는 별로 느껴보지 못한 것.
그것을 적국 왕자의 몸으로 환생한 지금에서야 느끼게 될 줄이야.
사울은 복잡한 심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네, 아바마마.”
잠시 후 마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렌의 뒷모습이 멀어져 가자 사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울의 진심을 알 리 없는 그레이가 말했다.
“역시 폐하께서는 전하의 아버님이십니다. 바쁘실 텐데 직접 찾아와 주시다니.”
“맞아. 감사한 일이지.”
* * *
아들을 보고 나오던 국왕 마렌은 문득 떠오른 듯 발걸음을 멈췄다.
“사울을 돌봐 준 마법사를 불러라.”
“네, 폐하.”
국왕의 명령에 치료 마법사가 즉각 불려 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그래. 사울의 상태를 다시 한번 듣고 싶다.”
“상처가 작진 않았지만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마법과 약을 잘 쓰면 흉터도 남지 않고 깨끗하게 완치될 겁니다.”
치료 마법사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라도 있는 지 긴장하며 대답했다.
“다행이군. 이상하게 사울의 눈빛이나 언동이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다른 것 같아서 말이다.”
“아직 충격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았다. 끝까지 책임을 다하도록.”
“네, 폐하.”
* * *
사울은 며칠 동안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시종 그레이와 마법사 등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울을 정성을 다해 돌봐 주었다.
덕분에 사울은 며칠 만에 혼자 침대에서 일어나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전하, 조심하십시오.”
“괜찮아.”
사울이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그레이는 안절부절못했다.
왕자에게 충성을 다 하는 건 좋지만, 이건 지나친 충성이 아닐까?
하지만 사울은 그런 그레이를 타박 주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사울의 기억이 증명하고 있다.
이 왕궁에서, 나아가 이 나라에서 사울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레이다.
“그레이.”
“네, 전하.”
“그러니까 올해가 몇 년이었지?”
“네? 그야… 521년입니다.”
“대륙 년으로 521년?”
“그렇습니다, 전하.”
롤랜드가 죽은 해는 대륙 년 510년이었다.
아마 롤랜드가 죽은 지 오래잖아 돌아가신 어머니께 잉태되어 다시 태어나고, 10년의 시간이 지난 것이리라.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울이 아는 세상은 롤랜드가 알던 세상과 큰 차이가 없었다.
가멜다 왕국도, 다르센 왕국도 여전히 건재했고 여전히 사이가 나빴다.
하지만 사울의 기억에 따르면 몇 년 전 큰 전쟁을 마지막으로 휴전 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 전쟁과 휴전 조약의 자세한 사항은…….
“으음…….”
사울이 머리를 부여잡자 놀란 그레이가 말했다.
“머리가 아프십니까? 즉시 마법사를 다시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그레이, 그보다…….”
일단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
“그레이, 할 말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머리를 다쳐서인지 뭔가 혼란스러워. 날 좀 도와줘.”
“물론입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래. 책이라도 보면서 머리를 정리하고 싶어. 서재에 좀 데려다 줘.”
기억을 되찾기 전 사울은 책을 좋아했다.
나이에 비해 어려운 책들도 많이 찾아 읽었다.
덕분에 상아 궁의 서재에는 수많은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한 달 쯤 전에 책을 한 무더기 들여온 기억이 났다.
그 책을 통해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서재라고 하셨습니까. 하지만…….”
그레이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불의의 사고였지만, 그래도 서재에서 사고를 당해 다친 게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이에 사울은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탁이야. 데려다 줘.”
과거 롤랜드는 최하급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덕분에 윗사람의 ‘명령’보다 ‘부탁’이 더 힘이 클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을 물려받은 아름다운 왕자의 ‘부탁’은 나이 든 시종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 * *
상아 궁은 처음부터 왕실의 후궁을 위해 지어졌다.
왕궁의 다른 별궁에 비하면 다소 격이 낮은 곳이기도 했다.
국왕이 머무르는 ‘황금 궁’이나 왕비가 머무르는 ‘호박 궁’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검소했다.
하지만 하급 귀족이었던 롤랜드의 눈에는 충분히 크고 사치스러웠다.
‘평생 봐 온 곳인데,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새롭게 보일 줄이야.’
그레이와 함께 상아 궁 서재로 향하던 사울은 새삼 감탄했다.
이름처럼 상아빛 대리석으로 만들어 진 궁은 눈 돌아갈 만큼 화려하지는 않아도 ‘롤랜드’의 시각으로 보면 충분히 으리으리했다.
궁에 딸린 서재 역시 으리으리하고 장서량도 많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울도 서재에 있는 책 중 읽은 것보다 읽지 않은 게 더 많았다.
거대한 책꽂이가 수두룩이 깔린 가운데, 사다리를 쓰지 않으면 손이 닿지 않는 책들도 많았다.
서재를 두리번거리던 사울의 눈에 책 한 질이 눈에 띄었다.
<다르센 왕립 학회 대사전>
분명 저 책은 발간된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비교적 최신 정보와 지식들이 총망라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사전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키가 작은 사울 손에는 닿지 않았다.
사울은 마침 근처에 있던 사다리를 직접 옮겨 책을 집으려 했다.
“전하?”
그레이의 볼멘소리에 사울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차차.’
이럴 때 사울은 결코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종이나 시녀를 시켜 책을 대신 집어 오게 했다.
사울이 당했던 사고도 높은 곳의 책을 집는 것과는 무관했었다.
손이 닿는 위치의 책을 집으려다 순간 중심을 잃어 책장과 부딪쳤고, 이어 책이 떨어지는 바람에 일어난 사고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무르기에는 더 어색한 상황이다.
사울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운동이나 좀 하려고.”
“우, 운동을 하신다고요?”
“그래. 괜찮잖아?”
평생 모셨던 왕자님이 전생의 기억을 자각했다고 생각할 만큼 그레이의 상상력은 풍부하지 못했다.
“이런 서재에서 운동이라니, 위험합니다. 이런 일은 저나 다른 시종, 시녀에게 맡기시는 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기 전 사울이라면 그레이의 말에 수긍했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사다리를 직접 옮기는 대신 그레이나 다른 하인을 시켰을 것이다.
지금의 사울은 달랐다.
고귀한 왕자의 몸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게 편했다.
전장에서 구르던 ‘장교 마법사’의 기억이 떠오른 이상 그동안 누워 있던 것만으로도 좀이 쑤셨다.
어린 왕자라고 너무 응석받이처럼 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울은 더 이상 응석받이 노릇을 하기 않겠다는 점을 확실히 해 둘 필요를 느꼈다.
“그레이, 나는 깨달은 게 있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치고 나서야 깨달았지. 그동안 내가 너무 연약했다고. 그러니 이 정도 일은 스스로 하게 놔둬.”
“…….”
“부탁해.”
윗사람의 명령 보다 부탁이 더 강력할 수 있다는 진리는 이번에도 통했다.
그레이도 걱정스런 눈빛을 하면서도 더는 말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이거야 원, 고작 사다리 하나로 이 난리라니.’
그렇게 사울은 스스로 책을 꺼냈다.
사다리에 올라 두꺼운 사전 몇 권을 꺼내는 것도 이 연약한 몸으로는 쉽지 않았다.
몸이 완전히 낫는 대로 운동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울은 사전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