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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287화 (287/303)

287화

21부 : 어스의 탄생 (4)

“잘 생각했어. 하나도 안 아프게 한 방에 끝낼게. 응?”

김태훈이 귀혼을 치켜들고 내 목을 겨눌 무렵.

짧은 순간 무수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가족에 대한 거였다.

나는 리더기에 꽂힌 하이퍼 메모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저 안에 가족들을 이루는 모든 데이터가 담겨 있다. 기억은 물론 형태까지. 내가 아는 체취와 감촉, 목소리, 성격 등 모든 것들이.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애초에 만들어진 데이터였다는 건가.

‘모처럼 되살릴 방법이 생겼는데, 이렇게 포기해도 될까.’

망설이는 한편에서는 또 다른 생각이 귓가에 속삭이듯 속살거렸다.

‘되살리면 뭐 해. 진짜 사람도 아닌데. 고르카 말대로 게임 속 NPC나 마찬가지라고. 앞으로도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겠어?’

이제 고르카의 말이 사실임은 명백하게 증명되었다. 메모리의 데이터로 내가 아는 인간을 되살렸다는 자체가 그 증거다.

어스와 그 안에 사는 인간들의 탄생 비화를 알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게 허무해졌다.

어차피 나도 가족들과 마찬가지다. 만들어진 세계에서 탄생한, 빅데이터 인공지능.

그중에서도 자신이 인간이라고 가장 강하게 믿은 개체가 나라고 할 수 있다. 세계가 가상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 안에서 아등바등한.

순간,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된 이유를 깨달았다.

잊고 싶은 거다. 알아버린 진실을. 그리고 내가 인간이라고 확신하는 상태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은 거다.

즉,

‘눈감고 달아나려는 거지.’

이런 나 자신이 한심했지만, 망각은 때로 좋은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원치 않게 기억난 진실이 너무 버겁다.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래, 그 세계에는 되도록 기사며 마법 따위는 없었으면 좋겠다.

그때,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포기하지 마세요, 멀린 님. 아니, 이정우 씨!”

이건, 레이저의 목소리다.

“당신이 아는 세계는 절대 가짜가 아니에요. 저들이 아는 세계가 전뇌성인 것처럼 1,000번 차원은 복제 차원 가운데 처음으로 나타난, 주 차원이 될 가능성이 충분한 세계입니다. 그게 두려워서, 가장 개연성을 많이 만들어내는 정우 씨를 제거하고 1,000번 차원도 소멸하려는 거라고요!”

쾅! 콰앙!

그 말과 함께, 김태훈을 향해 일제 공격이 쏟아졌다.

최혜인의 화살, 레이저의 모노와이어, 손태준의 낫까지.

모두가 나를 살리려고 한다.

왜 그러지?

어차피 나도, 당신들도 데이터의 일부일 뿐인데?

어째서 내가 그걸 사실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하지?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뗐다.

“하지만, 레이저. 우리는 어차피 실체가 없잖아요. 모두 진짜가 아닌 허상 같은 거…….”

내 앞을 막아선 레이저가 말했다.

“그게 뭐요?”

“네?”

“인간들은 직접 눈으로 본 적도, 겪은 적도 없는 아득한 옛날의 일들을, 역사라는 이름 하에 진짜라고 믿고 배우죠. 역사를 증명하는 문헌이나 유적도 데이터의 일부일 뿐인데, 그럼 역사는 가짜인가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건…… 너무 논점 일탈이에요.”

“정우 씨. 당신이 어떤 게임을 하고 있다고 쳐요. 그리고 당신이 조작하는 캐릭터는 사실 자아와 이성이 있죠. 그 캐릭터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기 행동과 움직임이 결정됨을 알지만, 그 존재를 볼 순 없어요. 모니터 너머에 있으니까.”

“…….”

“대신, 자기한테 주어진 환경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 퀘스트를 성실하게 수행하죠. 그럼 그 시간들은 다 무의미한 가짜인가요? 그렇다면 애초에 게임을 왜 하나요? 아무 의미도 없는 행위일 뿐인데.”

“음…….”

김태훈이 이를 갈며 레이저를 공격했다.

“너무 오래된 구닥다리 인공지능이라, 정말로 미쳤구나. 레이저!”

레이저는 온 힘을 다해 김태훈을 막으며 외쳤다.

“그걸 확장해 봐요. 우리가 그런 캐릭터이고, 보이지 않는 손들이 전뇌성이었다고. 그러다, 이제 완전히 우리 스스로 움직이고 판단할 기회를 얻었다고요. 배경이 어디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거죠!”

나는 레이저의 진심 어린 설득에, 조금씩 마음이 흔들림을 느꼈다.

그래, 듣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그저 내게 주어진 세계를 충실하게 살았다.

레이저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예전의 지구는 여름에는 기온이 80도까지 올라가고, 겨울에는 영하 60도에 육박해서 더는 생명체가 살기 어렵다고 들었어요. 그런 세상에서 살아야지만 의미가 있는 건가요? 그래요, 우린 선조가 남긴 거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전기 신호와 데이터만으로 이뤄진 존재들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제 세계 자체가 그 네트워크뿐이라고요! 그렇다면 그 세계야말로 유의미한 진짜인 거죠. 우주 밖으로 나가서 목성과 금성을 직접 딛지 않아도, 그것들이 있음을 아는 것처럼요!”

나는 가족과 친구들을 대했던 내 마음을 되새겨보았다. 그 마음은 늘 진짜였고, 그들도 내게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뭐로 이뤄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닐까?

이제야 내게 정보창이 보이고, 인벤토리와 아이템을 쓸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런 일이 가능하도록 조작된 캐릭터였던 거다. 나는.

일종의 해킹이라고나 할까.

신경증은 그런 해킹에서 오는 일종의 부작용이었던 거겠지.

게임 하면서 캐릭터 데이터를 조작하다가, 이상 현상이 나타나거나 캐릭터를 날려 버리기도 하는 것처럼.

‘하하, 정보창과 아이템은 아무 의심 없이 믿었으면서, 사실을 알게 되자 정작 내 주변의 것들을 죄다 부정하려 하다니.’

내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자, 레이저는 절망 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정우 씨…….”

쾅!

나는 레이저를 노린 김태훈의 검격을 막았다.

“이제 괜찮아요. 마음이 바뀌었으니까.”

“정우 씨!”

김태훈은 나와 반색하는 레이저를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니…… 진짜라니까? 너, 지금 상태에서 1,000번 차원에 개연성을 부여하잖아? 그럼 다시 개기일식이 일어나서, 너의 세계가 또 한 번 파괴될 뿐이야. 두 번이나 겪고서도 모자라?”

“네가 파괴한 거잖아.”

“응?”

“그 세계들, 네가 파괴했던 거잖아. 내가 있을 곳을 없애려고. 네 입맛에 맞는 세계를 만들어서, 마더 브레인의 통제를 피해 너만의 세계를 만들려고 한 거 아니야?”

“으음, 그렇게 말하면 서운한데.”

김태훈의 기세가 일변했다.

설마, 지금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는 거야?

“나만 잘 살자고 그런 게 아니잖아. 네 데이터는, 물론 조금씩 조작하긴 했지만, 꼬박꼬박 백업해뒀다가 다시 되살려 줬고.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그 기세를 감지한 전원이 나를 둘러싸고 김태훈과 대치했다.

“뭔가 굉장한 걸 들은 것 같은데, 살아 돌아가서 나중에 얘기하자.”

정면에 방패를 내밀고 선 손태준을 비롯하여.

“난 그런 어려운 얘기들은 모르겠군. 그냥, 내가 아는 세상을 지키려고 할 뿐이네.”

전신에서 불길을 피워올리며 각오를 다지는 류경재 총경.

“어쩐지 이상하더라, 시발. 나를 좋아하는 여자가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돼? 이건, 내게서 악의적으로 호감도를 제거한 거라고.”

의외로 빠르게 적응하여 투덜대는 이진욱 부단장.

“저자는 이상한 말로 우리를 현혹하려는 겁니다. 제가 겪어온 25년의 시간과 세계는 제 안에 똑똑하게 살아 있습니다. 누구도 그 시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늘 그러하듯, 올곧게 자존감을 드러내는 최혜인 기사까지.

모두가 자신들의 세계를 부정하려는 김태훈에게 맞섰다.

김태훈이 내뱉었다.

“응, 그래. 다 죽어.”

동시에, 그의 주변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형체가 조금씩 일그러지면서 흩어져 사라지고, 그 자리는 텅 빈 백색의 공간이 나타났다.

“복구 불가능한 삭제를 가동했다. 돌아가면 징계 좀 세게 받겠지만…… 내 비장의 무기였던 완전 자율 인공지능 캐릭터가 내 손에서 벗어나려 하니, 더는 이 계획을 진행하기 어려워졌거든.”

콰직, 푸스스.

‘어스’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광경에서,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끼이익!

차원 너머에서 나타나, 김태훈의 명치를 찌르려던 이레네의 검이 그의 손에 잡혔다.

“너도 적당히 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 그래? 나한테 이기기란 불가능…….”

투확!

순간, 한 자루 검이 김태훈의 명치를 꿰뚫고 튀어나왔다.

“어?”

그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칠고 낮은 음성.

“무슨 개수작이지, 할파스?”

바로 바알의 그것이었다.

“아버지!”

기쁜 듯 외치는 이레네를 보며, 나는 바알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눈치챘다.

그랬군. 통신뿐만이 아니라, 서로 소환도 가능했던 거야.

“이제 별게 다…….”

김태훈은 분통을 터뜨리며 옆구리 사이로 귀혼을 뒤로 찔렀다.

챙!

다른 손에 쥔 소도로 그것을 막아낸 바알이 말했다.

“늘 궁금했지. 우리는 어쩌다 천사에서 악마라 불리는 존재가 됐는지. 완전무결하다는 신은, 왜 정작 수족인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지 못했는지……. 한데 너희의 얘기를 듣다가 보니 깨달아지는 게 있더군.”

“닥쳐.”

아무래도 바알은 이레네를 통해 김태훈과 나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김태훈은 검을 아랑곳하지 않고 상체를 휘둘러, 팔꿈치로 바알의 관자놀이를 찍으려 했다.

쾅!

바알은 팔을 올려, 팔뚝으로 팔꿈치 공격을 막아냈다.

“일찍이, 전뇌성의 운영 방식을 반대한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들이 있었다. 하이퍼 컴퓨터에게 모든 통제를 맡기는 건 위험하다고.”

“닥치라고 했다!”

슈웅!

김태훈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초음파 칼날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큭!”

“아악!”

손태준이 다급히 방패로 막았으나, 바알의 출현에 정신이 팔렸던 이레네는 옆구리를 길게 베였다.

김태훈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바알도 무사하지 못했다. 어깨가 뭉텅 잘리고, 목과 배로도 칼날이 튀어 나갔다.

그러자 바알은 오히려 김태훈에게 더욱 밀착했다.

“갓 킬링, 떨어지는 별의 검 流星劍!”

우윳빛의 새하얀 검신에, 날 부분이 유난히 기다란 검 한 자루가 그의 손에 나타났다.

그러자마자 돌아선 바알은, 등을 김태훈에게 붙이며 파고들었다. 동시에 할복하는 듯한 자세로, 하얀 검을 제 배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크악!”

검은 바알을 관통, 김태훈을 찌르고 그의 등으로 튀어나왔다.

처음으로 김태훈이 고통에 겨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입에서 피가 울컥 솟았다.

“태훈 형!”

나도 모르게 그에게 달려가려 하다가 멈칫했다.

바알이 날 바라보는 눈길 때문이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마음에 걸린다 했더니, 그대가 멀린이었군. 마법사 멀린, 존재를 바꾸고 세계를 조작하는 자.”

“……!”

“어스를 만들면서 마더 브레인에 의해 사라질 뻔한 우리를, 따로 만든 로컬 네트워크로 이전시켜 살려준 동시에…….”

바알은 하얀 검을 뽑아내고 돌아서면서, 그대로 비틀거리는 김태훈의 목을 내리쳤다.

“이 네트워크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게 봉인한 자.”

서걱!

김태훈의 목이 잘리고, 머리 잃은 몸뚱이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누구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일대에 바알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오랜만이다. 솔로몬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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