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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284화 (284/303)

284화

21부 : 어스의 탄생 (1)

김태훈은 내 귓속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하다, 아서!”

뭐야, 이건. 누구 목소리지?

분명히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 같은데, 어째서 꾀꼬리 같은 여자의 음성이 -

아, 이건 멀린일 때의 나로구나.

그럼 지금 내가 보는 건 그건가?

주마등 같은?

아니, 난 아직 죽지 않았다.

죽기 직전의 상황도 아니고.

그 증거로, 천천히 다가오는 김태훈도, 그런 김태훈을 저지하려고 애쓰는 손태준과 이진욱도.

당황해서 연신 화살을 날리는 최혜인도, 날 감싸듯 앞을 막아선 레이저도 똑똑하게 보인다.

어째서인지 다들 너무 느리다.

심지어 김태훈도 느려.

그런 동시에, 그 위에 환영 같은 광경이 보이고 소리도 들린다.

꼭 허공에 프로젝터로 쏜 영상 같다고 해야 하나.

다만, 그 영상은 1인칭 시점이다.

즉, 내 시야로 보는 형태라는 거다. 그렇다 보니 다소 혼란스럽다.

현재의 광경과 시야가 겹쳐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디오는 겹치지 않아서 소리가 잘 들린다는 거다.

멀린의 목소리는 그런 소리 가운데 하나였다.

뒤이어, 남자의 음성도 들려왔다.

“굉장한 건 너야, 멀린.”

“내가 뭘…….”

“전뇌성 주민들의 전자 타우에서 복제 차원이 발생한다는 원리를 가지고, 무(無)에서부터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다니. 이건 마더 브레인도 못 할 일이야.”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멀린과 아서는 다정해 보였다.

최소한 저 때는 그랬다. 둘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내 시야에 비치는 아서의 모습도 멋지고 늠름해 보인다. 이건 아마, 멀린의 연인 필터가 작용해서겠지.

멀린이 따스하면서도 걱정 어린 투로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대로 바꿔버려도 되는 거야? 이 세계는 원래 아서와 모드레드 씨가 함께 만든 거잖아.”

“그 녀석의 권능인 시나리오도 확실히 대단하긴 한데, 어디까지나 틀을 짜는 것뿐이야.”

“그 시나리오에서 퀘스트 개념도 생겨났는걸.”

“시나리오든 퀘스트든 실행되려면 배경과 주체가 필요해. 그걸 우리가 만들어낸 거고.”

“모드레드가 알면 화낼 거야. 가뜩이나 나를 싫어하는데…….”

“신경 쓰지 마. 나는 곧 원탁의 일원이 돼. 그러면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니까.”

그리고 시야가 바뀌었다.

거기에 펼쳐진 것은 -

‘……어스.’

너무도 익숙한, 세계 파멸 시뮬레이션의 배경. 그 일부인 필드였다.

잊을 리가 없지. 이 특유의 분위기. 늘 안개가 감도는 듯하고, 도시에는 중세 유럽 분위기의 성과 건물이 빼곡하다.

직후, 영상이 또 변했다.

어딘가 아늑한 실내 같다.

“정말, 이 코드를 내게 복제해줘도 괜찮겠어?”

으음, 이건 좀 그런데.

어째 멀린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눈앞에 살색이 가득하다.

……그렇군. 멀린과 아서가 사랑을 나누고 있나.

“그럼. 너도 내게 창조 코드를 줬잖아.”

“하지만, 나와 똑같이 사용하기 어려울 텐데……. 어스를 개량하기 쉽게 하려고 준 거고.”

“피차 마찬가지야. 오리지널 형태의 무한은 나밖에 쓸 수 없어.”

“아아, 아서…….”

코드 복제는 서로의 정신과 육체가 이어진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인 것 같다.

물론, 현재의 세계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전뇌성의 주민들에게만 통용되는 방법이다. 그리고 -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터놓은 상대에게만 할 수 있는 행위.’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어두침침하고 불안했다.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배경이 펼쳐졌다. 여긴 아마도 멀린의 방.

정확하게는 어스 안에 그녀가 - 아니, 내가 만들어 놓은 ‘집’의 방이다.

멀린의 초조하고 두려워하는 심경이 나한테까지 전해졌다. 하긴, 내가 멀린이었으니까 당연한가.

멀린은 허공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빛의 키보드로 뭔가를 타이핑하는 듯했다. 그 글은 일기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아서는, 인제 그만 애착을 버리고 어스를 파괴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더 브레인에게 발각되기 전에 삭제하는 편이 좋다고.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이 세계의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까지 내가 만들어낸 거다. 이전까지는 어떤 흥분도, 감동도, 분노나 슬픔도 없이, 그저 마더 브레인의 통제하에 살기만 했다.

-어스를 만들고 이 안을 여행하면서 느꼈다. 그건 사는 게 아니었다. 다시는 그런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놀랍다. 나의 창조 코드와 아서의 무한 코드를 융합해서, ‘무한히 창조되는 살아 있는 것’이라는 코드를 만들어보았다. 처음에는 정해진 형체조차 없는 뭔가가 탄생했다. 그것은 금세 죽었고, 다음에 태어난 것은 좀 더, 그다음은 더 오래 살았다.

-나는 환경 변수를 적용했다. 온도를 바꾸고 산소와 물을 추가했다. 그러면서 점점 형태가 변했다. 식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참고한 고대의 자료에서 본, 날개와 팔다리가 달린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저것들은 정말 살아 있는 생명체일까, 아니면 저것 또한 아서의 주장대로 데이터 덩어리일 뿐일까? 그럼, 어스도 전뇌성과 다를 게 없는 걸까?

-친구가 생겼다. 시뮬레이션 상으로 수만 년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 드디어 인간의 형체를 한 생명체가 탄생했다. 나는 그들 중에서 가족을, 친구를, 동료를, 적을, 타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절대로 이 세계를 파괴할 수 없어.

-아서는 여전히 내 행동과 계획을 못마땅해하지만, 그의 경고는 현실적이다. 전뇌성에서는 머지않아 유희라는 미명하에 주민들을 보내올 거다. 복제 차원 파괴는 그들의 유일한 놀이이자, 중요한 사명이기도 하니까.

-내 세계의 생명체들은 약해. 이대로라면 일방적으로 당하고 만다. 나는 유전자 단계에서 무수한 코드를 삽입하여, 성장에 따라 특별한 힘을 갖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기사라고 불리는 인간들이다. 그들이라면 전뇌성의 주민을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여기서 잠깐 배경이 바뀌었다.

날짜가 바뀐 건가. 그리고 일기 같은 기록은 계속 이어졌다.

멀린의 어조가 좀 더 다급해져 있었다.

-마침내 침공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기사들은 파이오니어나 트레일 블레이저 등급은 충분히 막아냈다. 그리고 그들, 전뇌성의 주민들에게 ‘인베이더’라는 별칭을 붙였다.

-침략자라니, 딱 맞는 별칭이다. 아마도 전뇌성의 주민들이 어스로 넘어올 때는, 코드의 변화로 인해 기괴한 형체를 띠게 되므로 침략자라는 인식이 확실해진 것 같다.

-문제는 공격대와 길드원들이다. 복제 차원 파괴에 도가 큰 자들. 그들이 공격해오기 시작하면, 현재의 기사들로는 감당해내기 어렵다.

거기에 더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클립스가 나서기라도 하면 어스가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다. 그들의 별칭대로 일식이, 어둠의 시간이 이어진다.

-아직은 전송 데이터 용량의 부족으로, 이클립스는커녕 길드원들도 넘어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어스가 개연성을 갖출수록 전송 데이터 허용량도 커져서, 더 강력한 인베이더가 넘어오게 될 텐데…….

-게이트가 발생했다. 거기에 휘말린 내 연인이 죽었다.

응? 연인……이라고?

문맥상 아서를 가리키는 건 아닌 듯하다.

그렇군. 곧 떠올랐다.

멀린은 새로운 연인을 만들었다.

바로,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그 연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랬겠지. 그 무렵, 아서와는 어스에 대한 의견 차이로 매일 싸웠다.

아서는 백번 양보해서 어스를 소멸하지 않는 데까지는 찬성하나, 멀린이 지나친 애착을 갖는 걸 경계했다. 어디까지나 복제 차원 소멸의 시뮬레이션 용도로 사용하길 원했다.

하지만 당시에 멀린은 이미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와 그 세계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 마음은 이어진 내용에서 절실히 느껴졌다.

-용서할 수 없어. 나의 정호를, 내 가족을, 우리 동네를 파괴한 것들. 전뇌성, 마더 브레인……. 모두, 내가 없애버릴 거야. 그쪽에서 이리로 넘어올 수 있다면, 여기서도 그리로 갈 수 있겠지.

정호? 어쩐지 익숙한 이름인데.

-나 자신에게 무한 코드와 창조 코드를 조합하여 삽입했다. 이것으로, 설령 아서에게 살해당하더라도 새로운 차원에서 재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요즘 아서의 눈치가 심상치 않다. 정확하게는 내가 정호를 사랑하게 된 뒤부터였다.

어쩔 수 없어. 강력한 마력에 약자를 돕는 순수한 정의감, 내 이상형의 외모까지.

정호는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나의 세계에서, 우성 유전자들이 수없이 조합된 끝에 태어난 기적 같은 존재다. 나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기적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럴 일은 없길 바랐지만, 혹시나 정호와 이별할 경우를 대비하여 리스타트의 영향을 받지 않는 특수한 칩을 만들어 뒀다. 우주의 개연성에서 살짝 비켜 나간 물건이다. 아이템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정호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미러 차원에서 무한히 회귀하게 되며, 그가 새로운 차원에서도 한 번은 반드시 나를 찾게 되는 프로그램이 들어있다. 또한, 헤어지게 될 때는 그 칩을 내가 소지하게 된다.

그가 또 나를 찾아오도록.

이제 그 칩이 우리를 재회하게 해줄 거야.

“…….”

나도 모르게, 주머니 속의 뭔가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솔저 태그. 그러니까 인식표다.

기사의 인식표.

문정호라는 이름이 새겨진 인식표였다.

직전의 생에서 나를 구하고 대신 죽은, 은백의 기사가 남긴 것이다.

강력한 마력.

약자를 돕는 순수한 정의감.

내 이상형의 외모……는 모르겠지만, 은백이라는 말에 걸맞은 백색의 빛.

아니, 지금은 백색의 화염.

‘그랬군.’

나는 류경재 총경을 바라보았다.

이 중에서 솔저 태그를 쓰는 이는 수경총 소속의 류경재 총경뿐이다. 사설 기사단은 솔저 태그를 착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하게 호감이 갔던 건가.’

그는 이번 생에도 나를 따라 회귀한 것이다. 내가 건 저주 때문에.

‘그러고 보니, 류경재 총경…… 자수성가에다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 또, 지금의 부모에게 입양되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고.’

아마 입양되기 전의 이름은,

‘문정호였겠지.’

뭐, 원래의 이름을 썼어도 몰랐을 거다. 직접 보고도 못 알아차렸으니까.

‘기억을 잃어서…….’

아서가 나를 찌르기 전에 한 행위 때문에.

메모리 리스타트.

그는 내가 만든 칩 기술을 훔쳐서, 나에게 인생뿐만 아니라 기억도 재시작하게 되는 칩을 심었다.

내가 그의 무한 코드를 응용하였듯이, 그도 내 기술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다만, 서로의 기술을 쓰는 데는 완벽하지 않아서, 나는 무한 코드를 전투에는 전혀 쓰지 못했다.

아서도 마찬가지로 나의 칩 기술처럼 영구적으로 성능을 유지하게 만들지 못했다.

1회차 리스타트에서 메모리 리스타트 칩의 효과는 완벽.

나는 첫 번째 죽음 이후의 삶을 완벽하게 잊었다.

아마, 그때도 아서는 나를 설득하여 전뇌성으로 데려가는 데 실패한 모양이다.

2회차 리스타트에서는 칩의 성능이 약해졌다. 그로 인해, 바로 직전의 삶은 고스란히 기억에 남았다.

‘……그 마공작!’

내가 일하던 편의점에 갑자기 나타난 마공작 급 인베이더. 나와 문정호를 함께 살해한 존재.

그게 2회차 삶에서의 김태훈 - 아니, 아서였겠지.

이번 3회차에서 아서는 좀 다른 방법으로 내게 접근했다.

기사와 서번트가 아닌, 친구라는 형태를 이용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일을 기억해냈다.

“하하…….”

웃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흘렀다.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편이 나았을까.

고르카의 말이 옳았다.

이 세계는 - 나의 가족과 친구, 동료들은 궁극적으로 모두 내가 만들어낸 어스 안의 존재였다.

‘아니, 고르카 씨. 당신도 내 덕에 탄생한 거라고요. 하하.’

그래도 고르카는 뭔가 감지했다.

이 세계 - 1,000번 차원이 뭔가 비정상적이며 게임처럼 여겨진다는 것을.

그는 어스의 극 초창기 주민이었던 것 같다. 나와 아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으니.

그리고 어스가 현실로 확장되는 분기점에서, ‘던전’이라는 세계 - 전뇌성의 주민들이 어스로 건너오기 위해 만든 통로로 빠진 것이다.

‘이번에는 안 될 거야, 아서.’

나는 본격적인 참전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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