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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258화 (258/303)

258화

19부 : 멀리건 (9)

진짜 싸움은 던전에서 나간 후부터라니.

타워형 던전을 공략하는 일만 해도 힘겨웠는데, 이건 시작에 불과하단 말인가?

레이저가 한 뜻밖의 말에, 내 가슴은 차갑게 식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마 정우 님이 여기에 들어오신 이유는, 정우 님의 세계에 갑자기 거대한 건축물 같은 것이 나타났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죠?”

“……맞아요.”

“그게 바로 신호입니다.”

“신호?”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때 정아의 뒤를 따라 부모님까지 나왔다.

“뭐, 신혼? 방금 신혼이라고 했지?”

잘 못 알아듣고 흥분하시는 아버지에 이어.

“정우야, 그래도 순서는 지켜야지. 여기서 나가면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어머, 외국에 계셔서 바로 뵙기는 어렵겠네.”

상상 속에서는 손자까지 보신 것 같은 엄마까지. 왜들 이렇게 오버를…….

나는 다급히 말을 돌렸다.

“아니에요.”

“응? 뭐가 아니야?”

그때, 정아가 다시 나와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와, 오빠. 그러는 거 아니다. 나 방금, 저 언니가 오빠 좋아한다고 하는 말 분명히 들었는데!”

“아니, 그건…….”

“가뜩이나 멀리 타국에서 와서, 이 위험한 곳까지 오빠를 따라왔건만 인제 와서 버리겠다고?”

저 말에, 나를 보는 부모님의 눈빛이 나빠졌다. 엄마가 말했다.

“난 너 그렇게 안 키웠다, 아들.”

누가 누구를 버려, 미친 혈육아.

그리고 저 여자가 - 아니, 여자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한데.

아무튼, 저게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나 아냐?

마음 같아서는 입을 틀어막고 싶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좀…….”

“언니!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

진짜, 빨리 집으로 보내야지.

레이저는 정아의 질문에 잠깐 당황하다가 말했다.

“저는, 독일……에서 왔어요.”

“아하, 독일분이시구나! 와, 저 독일 사람 처음 봐요.”

정아의 텐션에 쩔쩔매는 레이저와 나를 수상쩍게 바라보는 부모님을 보자니 맥이 풀렸다.

뭔가 긴장감이 없어서 실소가 나온다.

그래, 이런 것도 나쁘진 않아.

“자, 복도에서 이러지들 말고 다 들어갑시다.”

나는 부모님의 방으로 다 같이 들어가,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방은 마치 호텔 스위트룸처럼 거실이 따로 있었다. 방 안에 또 세 개의 방이 있는 구조다.

방문이 현관문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가족들은 꼭 아파트나 호텔 같다고 좋아했다.

밤이 깊어 오자, 정아는 연신 하품을 하면서 일어섰다.

“으하암, 졸려. 전 먼저 잘게요. 잘 자, 언니랑 오빠.”

“그래, 제발 자라.”

“칫.”

정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제 침실에 들어간 뒤.

그 방문을 가만히 보던 레이저가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스러운 인간이네요.”

“사랑스럽긴 무슨. 웬수죠.”

부모님은 레이저의 특이한 단어 선택에 조금 당황하다가, 외국인이어서 그렇다고 알아서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아버지가 먼저 말했다.

“날 밝으면, 뭔가 위험한 일 하러 가는 거냐? 여기서 나가려고?”

“……어떻게 아셨어요?”

“명색이 부모인데 눈치 보면 안다.”

아버지의 말을, 엄마가 받았다.

“너도 아버지 닮아서 그렇지. 네 아버지가 뭐 심각하거나 중요한 일 있으면, 꼭 전날 밤에 가족들하고 시간 보내려고 하잖아. 평소보다 더 오래.”

“아…….”

그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닮아 있었나 보다. 엄마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몸조심하고. 너한테 무슨 일 있을 바에는, 그냥 여기에서 다 같이 계속 사는 게 낫다.”

“네, 알겠어요.”

뒤이어, 엄마는 갑자기 레이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레이저는 조금 놀란 듯했으나, 다행히 손을 뿌리치거나 잡아빼지는 않았다.

“아가씨, 보통 사람이 아니네. 엄청나게 강하죠?”

“……!”

엄마가 저런 걸 어떻게 알지?

문득, 무르의 말이 떠올랐다.

마계에서 한 달 가까이 보내면서,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해졌다던.

기사로 각성해야만 얻을 수 있는 스킬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엄마에게도 서번트 정도의 능력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상대의 역량을 감지할 수 있는.

마음이 복잡하네. 인간형 인베이더도 있는 만큼, 위험해진 세상에서 생존 확률 자체는 높아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귀찮은 일에 말려들 확률도 높아졌다. 어느 영화의 유명한 대사도 있잖아.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그래서 이게 잘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레이저는 엄마의 물음에 딱히 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응시하기만 할 뿐.

그 행동을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엄마는 레이저에게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까지 함께 온 걸 보니까, 우리 애와 친분이 상당한 모양인데……. 정우 좀 잘 부탁해요. 쟤가 소심한 듯 보여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앞뒤 안 가리고 나서거든.”

아, 엄마는 아무래도 예전에 정아가 지수 패거리한테 학교폭력 당했던 일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전에, 아버지 일하시던 현장 문제도 있었고. 저런 생각 하실 만도 하네.

그런데 모두 올해 벌어진 일인데, 몇 년은 지난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레이저는 엄마의 그 말에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같이 다녀 보니까 확실히 그렇더라고요.”

“에휴, 그럼 그렇지.”

저기, 레이저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확실히 지키겠습니다.”

엄마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고마워. 그리고 아가씨도 꼭 같이 돌아와요. 우리랑 같이 집으로 가요.”

“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다가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뭔가 또 뭉클하신 모양이다.

이윽고 부모님도 주무시러 들어갔다. 계속 함께 있겠다는 걸, 나 출발할 때 일어나서 보시라고 말렸다.

남은 방이 하나뿐이라 거기서 레이저가 자고, 나는 거실의 긴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가족들과 한집에서 자는 것도 한 달만이네.’

그때, 레이저가 살며시 나와 소파 앞에 앉았다.

문을 여닫고 걸어오는 움직임이 어찌나 조용한지, 나도 바로 앞에 올 때까지 못 느끼고 있었다.

어우, 깜짝이야.

나는 얼른 일어나 앉아서, 속삭이듯 잔뜩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잠이 안 와요?”

“전 잘 필요가 없어요.”

“아, 저도 그렇긴 한데……. 그냥 정신적 피로를 줄이려고 자는 거죠.”

“무의미하게 분리되어 누워 있느니, 옆에서 정우 님과 얘기라도 하려고요.”

“무슨 얘기……. 그보다 그냥 정우라고 해요. 님이라고 붙이지 말고.”

“하지만…….”

“내가 뭐 멀린이라느니 뭐니, 그 얘기 때문에 그러죠? 아서나 당신 주인들과 비슷한 존재여서. 정작 나는 하나도 기억 안 나고,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계속 이정우로 살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정우라고 불러요.”

“그럴게요.”

레이저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좋은 사람 같아요, 다들.”

“아, 우리 가족이요? 나야 가족이니까 그런데, 레이저도 그렇게 느꼈다니까 기분 좋네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내 가족을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해 주는데 기분이 좋을 수밖에.

“처음이었어요.”

“뭐가요?”

“내가 다쳤을 때, 걱정해주고 업어준 사람.”

아마, 하크 제국에서 함정에 빠졌던 때를 말하는 것 같다.

“음……. 그때 발목이 거의 절단되어서 덜렁거렸다고요. 알죠?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냥 두고 가요.”

“이제까지는 쭉 알아서 살아남았어요. 기억 안 나요? 처음에 우리가 싸웠을 때…….”

그 일이 떠오르자 겸연쩍었는지, 쩝 하고 입맛을 다신 레이저가 말을 이었다.

“머리 부분만 남은 채로 도망쳤었잖아요, 저.”

맞아. 그런 일도 있었지.

당시를 떠올려 보니, 지금 이렇게 둘이 속삭이고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그때, 레이저가 같은 말을 하는 바람에 흠칫했다.

“그래서 신기해요. 그렇게 살벌하게 싸운 뒤 그런 흉한 모습까지 봐 놓고…… 날 도우려 하고 이렇게 동료로 대해 주니까요.”

“뭐…… 레이저가 먼저 동료로서 다가온 데다, 실제 행동으로 증명했잖아요. 그럼 된 거죠. 나는 원래 사람 겉모습 별로 안 따져요. 고르카 못 봤어요?”

레이저는 내 말에 쿡 웃었다. 나는 다시 둘이서만 대화한 김에, 아까 못다 한 말을 꺼냈다.

타워형 던전 공략 후부터가 진짜 싸움의 시작이라는 게 무슨 뜻이냐는.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하얗게 잊어버릴 일이 생겼다.

“인간들은, 이렇게 애정을 표시한다죠?”

“?”

레이저가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더니, 내 입술에 입 맞췄기 때문이다.

“!!??”

와, 이게 뭐지?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휘몰아친다.

잠깐, 나 이거 첫 키스 아니었나?

첫 키스를 머리카락이 모노와이어로 된 반 불사의 킬러랑 하다니.

그 와중에 감촉은 엄청 따뜻하고 촉촉하다. 의외다.

그래, 솔직히 싫은 건 아니다. 아닌데…….

뭐랄까, 고리타분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었다고!

레이저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어때요?”

“……동의 없이 하는 행위는 설령 애정 표현이라고 해도 범죄입니다.”

“아, 정말요? 몰랐어요!”

첫 키스 후의 대화가 이렇다니, 이건 이것대로 암울하구만.

레이저는 엄밀히 말해 사람의 형태를 가져왔을 뿐, 사람이 아닌 거로 판단된다.

당연하지. 머리카락을 커터 대용으로 쓰는 사람은 없으니.

그렇다고 기사처럼 마력을 운용해서 초인적인 능력을 갖게 된 것도 아니다.

능력을 쓰는 방식 자체가 다르고,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머리가 잘리면 죽어야 정상이다.

내가 보기에, 레이저는 던전에 서식하는 일종의 돌연변이 생물체다.

다만, 지능이 매우 높고 감정 표현도 점점 인간과 유사해지고 있다. 나를 통해 호감을 배운 것도 그렇고.

분명, 키스에 대한 것도 무슨 자료를 통해서 배웠겠지.

“화났어요?”

“아뇨. 그냥 좀 당황스러워서요.”

“다음부터는 동의를 구하고 할게요.”

“안 해요!”

“내가 싫어요?”

“싫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데…….”

“다 아는 상태에서 교제하진 않잖아요?”

“아니……. 후.”

정작 궁금하던 건 못 물어보고 엉뚱한 일로 티격태격했다. 결국, 이날은 한숨도 못 잤다.

그러는 사이, 날이 훤히 밝았다.

“이만하고 가죠.”

“가족들한테 인사 안 하고요?”

“어젯밤에 다 했어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분명 분위기 이상해질 테고, 눈물 콧물 쏟을 거 같은데 그런 배웅은 사양이다.

어차피 오늘 중으로 결정될 거다. 무사히 돌아온다면 금세 다시 보는 거고, 못 돌아오면 그것으로 끝이니 마찬가지다.

영지 가운데로 나가자, 오늘의 작전을 수행할 결사대는 이미 모두 나와 있었다.

“아스모데우스 님께서 여러분의 공적을 잊지 않고 반드시 치하하실 겁니다.”

오로바스의 짧은 격려 인사를 시작으로, 무르가 강령술을 준비했다.

강령 대상인 두 마신의 시체는 이미 흩어져서 마계의 에너지가 되었다. 그 대신, 둘을 불러내기 충분한 매개체가 있었다.

바로 둘에게서 나온 마력의 핵, 그러니까 다크 스톤이다.

제단에 놓인 오리아스와 보티스의 다크 스톤을 향해.

마신 무르무르는 특기인 강령술을 시작했다. 다크 스톤 자체를 육신의 형태로 바꿔, 거기에 불러낸 혼을 넣는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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