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18부 : 마계 통일 대전의 층 (18)
“내가 직접 통로로 가서, 변이성 버그와 레이저를 제거하겠다.”
센시의 선언에, 마고가 제일 먼저 반발했다.
“네가 뭔데 레이저를 없애?”
“통제 불능인 크래커는 제거한다. 금환일식의 시작도, 멋대로 복제 차원 NPC들에게 감화한 크래커들의 반란이 시작이었다. 잊었어?”
“레이저는…… 그런 거 아냐!”
“이미 조짐이 보이던데? 계속 변이성 버그를 지켜주고 돕고 있잖아.”
“이익! 그건…….”
마고는 더 설명하지 못했다. 사실을 밝히려면 일부러 폭주 상태인 것처럼 위장했음을 말해야 하는데, 이는 무거운 죄였다.
폭주와 통제 불능은 다르다. 폭주는 일시적인 현상이어서 가라앉을 수 있으나, 일단 통제 불능이 되면 이클립스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진짜 폭주가 아니라고. 내가 직접 손을 못 쓰니까, 그분이 위험해질까 봐 레이저에게 맡긴 거지만…….’
센시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의혹이 일었다.
‘레이저는 정말로, 그냥 내 지시를 따르기만 하는 걸까?’
마고는 이미 엄청난 배신을 맛본 적이 있다.
약혼한 사이라고 믿었던 아서가, 하다못해 전뇌성의 백성도 아닌 복제 차원의 NPC에게 홀려 자신을 저버린 일.
그 사건은 마고의 정신체에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누구도 좀체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분을 대하는 레이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
육체를 버리고, 정신만 남은 상태로 영생하길 택하고서도 없애지 못한 것.
질투와 의심암귀가 마고의 무의식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이는 알게 모르게, 그녀가 센시를 더 적극적으로 막지 않게 만들었다.
‘내가 직접 나서지 않고, 레이저를 제거할 수 있다면…….’
만약, 누가 마고의 생각을 알고 따진다면 그녀는 펄쩍 뛸 것이다.
실제로 마고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는.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일 뿐.
대신, 의외로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한 포르투나가 센시를 제지했다.
“강림하겠다고? 그거야말로 개연성을 완전히 위배하는 거 아닌가? 마계에 갑자기 너 같은 강자가 뚝 떨어지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내 모습 그대로 가겠다는 게 아니야. 최대한 개연성 수치 제한에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마계에 어울리는 형태로 가겠다는 거지.”
“……마족?”
“그것도 선택지의 하나고.”
“흐음…….”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고민하던 서포터가 말했다.
“뭐, 그것도 한 방법이겠네만. 강림하면 자네의 원래 힘보다 턱없이 약해지네. 그 상태로 크래커와 변이성 버그를 감당할 수 있겠나?”
센시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영감,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서 새끼 때문에 한동안 조용히 지냈더니, 잊었나?”
“아니, 늙은이의 기우라고 생각해 주게.”
포르투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애초에 우리에게 나이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대체 왜 노인 코스프레를 하는 거야?”
“자네가 소녀 코스프레를 하는 것과 같은 이유지, 포르투나. 그렇게 따지면 성별도 무의미하긴 마찬가지 아닌가? 진짜 성(性)을 구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각 개체의 취향이나 개성대로 정할 뿐이니까.”
“……죽고 싶어, 영감? 그 얘기 하지 말라고 했지?”
“정체성 화제를 먼저 꺼낸 건 그쪽이네만.”
센시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그 서슬에 궁전이 웅 하고 울려서, 서포터와 포르투나는 싸움을 멈췄다.
“자, 됐고. 그럼, 내가 타워형 통로에 강림하는 거로 정하지. 이 정도면 충분히 지켜봤고, 다들 한두 번씩 실패했잖아. 마왕 강림 시나리오까지 실패했으니, 버그들이 이미 10층에 다다른 만큼 나설 이유로는 충분해.”
“…….”
“마고, 여전히 반대인가?”
“당연하지! 난…….”
“그럼, 다수결로 하지. 내가 통로에 강림하는 방법, 찬성하는 사람?”
눈치 보던 서포터와 포르투나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이봐! 둘 다…….”
버럭 외치는 마고에게, 서포터가 먼저 말했다.
“아니, 이제 더 꺼낼 패가 없는 게 사실이긴 하지 않나. 저러다 변이성 버그들이 10층마저 공략하면, 기껏 구축한 통로가 흩어질 수도 있고…….”
포르투나는 언제 싸웠냐는 듯 서포터를 거들었다.
“그러니까! 센시가 몸소 위험을 무릅쓰겠다고 하니까, 쉽게 가자고 쉽게.”
“카발리어의 흔적은 어쩌고?”
“음, 그게 걸리기는 하는데, 마고. 솔직히…….”
주저하던 포르투나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번 대(代) 카발리어가 죽을 일은 없잖아? 괜히 무한의 카발리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고. 게다가 자의로 떠난 것…….”
“닥쳐.”
마고의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포르투나는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좋아. 모두의 의견이 그렇다면, 어차피 내가 반대해도 소용없겠네.”
슉!
말을 마친 마고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센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미리 배웅, 고마워.”
“센시. 그럴 일은 없겠네만, 변이성 버그나 레이저에게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또, 늘 개연성 수치를 신경 쓰고……. 행여 욱해서 본신의 힘을 드러냈다가는, 단숨에 수치가 한계를 돌파해 버릴 테니.”
“걱정 마셔. 그보다 마고가 잔뜩 화나서 가버렸으니, 대신해서 어울리는 시나리오나 빨리 짜자고. 개연성 수치 체크해 가면서.”
“그러지.”
“나도!”
곧, 원탁 위에 복잡한 기호와 숫자, 선이 그려진 아이콘 수만 개가 어지러이 나타났다.
센시와 서포터 그리고 포르투나는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엄청난 속도로 아이콘을 조작했다. 거기에 따라, 점차 새로운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갔다.
변이성 버그, 이정우 일행에게는 서브 퀘스트라 불릴 시나리오였다.
*
레이저가 마흡충 무리에게 일격을 당한 뒤.
폭뢰의 구슬로 마흡충을 물리치고 구해준 내게,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돌아가셔야…… 합니다, 카발리어 님. 마스터가……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카발리어? 마스터?
뭔가, 레이저의 상급자와 연관된 얘기 같은데.
카발리어라는 단어에 이상하게 가슴이 수런거린다.
“레이저, 정신 좀 차려봐요!”
“으으음…….”
레이저는 상태가 영 이상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눈을 제대로 못 뜨고 몸을 뒤틀었다.
마치, 기사들이 대량의 마력을 비정상적인 형태로 잃어서 나타나는 마력 소실 증후군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마흡충도 마력을 흡수한다고 했지!’
암흑 기사들은 마력으로 단련된 신체인 만큼, 어지간한 심문으로는 입을 열지 않아서 수경총의 두통을 유발한다.
그렇다고 고문하자니 인권 단체가 가만히 있질 않는다. 자칫, 암흑 기사들에게 역고소를 당할 우려도 있다.
그럴 때, 수경총에서는 해당 암흑 기사를 마력 소실 증후군에 빠뜨리는 방법을 썼다.
다크 스톤에서 마력을 추출할 때 쓰는 제네레이터를 개조하여 마력을 대량으로 뽑아내는 식이다.
마력은 아직 관련법이 미비하고, 혈액처럼 모든 사람이 가진 게 아니어서 신체 일부로도 보지 않는다. 그런 맹점을 이용한 것이다.
마력 소실 증후군에 빠진 기사는 만취하거나 잠든 것 같은 상태가 되어 가벼운 유도신문에도 술술 자백하곤 한다고, 미래에 출간되는 기사 관련 책에서 읽었다.
‘그렇군. 레이저도 마력을 쓰니까…….’
나는 수레 다리 위에 있는 카르고 부대를 살펴보았다.
“우와아아!”
함성이 울린다 했더니, 김태훈과 파티원들이 문제의 파열어를 잡은 모양이다.
귀혼이 꽂힌 파열어가 수레 위로 끌어 올려져서 퍼덕거리는데, 조설아가 단단히 붙잡고 있다.
‘저쪽은 문제없겠네.’
그래도 이쪽 강기슭까지 건너오려면 몇 분 정도는 걸릴 것이다.
어느 정도 안심한 나는, 이 상황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레이저. 나는 너의 마스터다.”
“우웅……. 마스터……?”
레이저는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눈꺼풀만 움찔거릴 뿐 좀체 정신을 못 차렸다.
“그래. 너의 마스터야. 요즘 하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너에게 맡긴 임무를 잊은 모양이구나.”
레이저가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흠칫 놀랐다.
“아……닙니다, 마스터. 절대…….”
된다. 통하는 것 같다.
나는 강을 건너오는 부대원들을 살펴 가면서 점점 질문을 구체화했다.
“잊지 않았단 말이지? 좋아, 그렇다면 임무가 끝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앞으로……11일……입니다.”
11일. 우리에게 남은 공략 시한과 같다. 이게 우연은 아니겠지.
좀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다.
레이저의 주인은, 우리 파티의 목숨줄과 연관이 있는 듯하니까.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렸는데 이 정도 상황을 이용하는 게 대수인가.
‘원래는 레이저부터 해서 페더라이트니, 코덱스니 하는 강력한 크래커들을 보내 우리를 해치려 하더니, 레이저가 다시 돌아온 시점부터는 돕기 시작했어.’
레이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주인의 생각이 뭔지 조금이라도 알아내야 한다.
‘계속 휘둘리지 않으려면.’
또, 레이저를 진심으로 믿으려면.
나는 레이저가 저항감을 느끼지 않도록 조금씩 질문을 좁혀나가다가, 마침내 본질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마. 내가 너에게 맡긴 임무가 뭐지?”
“……표면적……인 임무 말씀입니까? 아니면, 최근에 변경한…….”
“둘 다 말해봐.”
“표면적인, 임무는…… 변이성 버그들을 추적하며, 제거하는 것…….”
역시 처음에는 그랬구나.
그런데 도중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임무의 방향이 변한 거다.
“그래, 잘 아는구나. 그럼, 최근에 어떻게 변경했지?”
“그건…… 마스터, 뭔가 이상…….”
이런. 저항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마력 소실 증후군에서 깨어나려는 것 같다.
‘마력 회복 속도 더럽게 빠르네.’
때맞춰 카르고 부대원들도 상륙하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말했다.
“괜찮아. 어서 말해.”
“그분을…… 마스터의 소중한 분을 지키는 것…….”
말하는 레이저의 눈꺼풀이 심하게 떨렸다. 곧 눈을 뜰 것 같다.
“소중한 분? 그게 누구지?”
“무한의…… 카발리어.”
카발리어.
아까 내게 말했던 이름이다.
입안으로 되뇌자, 구강 세척제를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목이 쓰리고 서늘하다.
그러고 보니, 레이저는 아까 분명 내가 카발리어인 것처럼 말했다. 마스터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절대 돌아가지 않아.
이상하다. 내 안에서 뭔가가 격하게 저항하고 있다.
-너한테는 절대로. 넌 내 소중한 것들을 몇 번이고 파괴했어.
이건, 누구의 생각이지?
마스터라는 게 누군지, 카발리어는 또 누군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절대 그 카발리어라는 자가 아니다.’
어째서인지 그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레이저는 혹시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말이 된다. 갑자기 태도가 바뀌고 나를 지키려고 하는 게.
그때, 마침내 마력을 회복한 레이저가 눈을 떴다.
“정우……?”
“정신이 들어요?”
“내가, 어떻게 된 거죠?”
나는 주위에 까맣게 떨어진 마흡충의 잔해를 가리켰다.
“마흡충에게 마력을 흡수당해서 정신을 잃었어요.”
“……그랬군요.”
“어디 안 좋은 데 있어요?”
“아뇨…….”
레이저는 일어나 앉으며, 어쩐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상한 꿈을…… 꿨어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