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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230화 (230/303)

230화

18부 : 마계 통일 대전의 층 (11)

다행히 오로바스는 설아의 행동에 큰 불쾌감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헤죽 웃으며 호응해주었다.

“예쁜 형아네? 형아의 친구면 형아 맞아!”

“응? 그런데 나는 형아가 아니라 누나인데…….”

설아는 당황했지만, 나는 내심 안도했다.

‘휴.’

오로바스는 분명 인간에게 우호적인 편에 속하는 마신이나,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신뢰하긴 어렵다.

정중하고 신의가 있는 만큼, 대가를 분명히 받아 가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주로 소원을 청한 인간의 영혼이다.

‘나야 게임 속이었으니까, 내 영혼 대신 보물을 대가로 제시했던 거지. 소원 자체가 영혼을 바칠 만한 게 아니기도 했고…….’

그때 내가 오로바스에게 바란 것은,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특정 아이템의 정확한 출현 일시 정보였다.

나는 이미 수집 모드로 들어가 스캐빈저라는 별칭을 얻은 후였다. 그렇다 보니 문제의 아이템을 입수하고 싶어서 혈안이 되었고, 어찌 보면 별것 아닌 목적으로 마신 소환 스킬을 썼다.

그래도 덕분에 오로바스와 친분을 다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고르카와 코커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악마들이 놀란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건 뭔데 마장군과 호형호제하나 싶겠지.

“형아, 반갑지만 잠깐만 기다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 참, 나도 오로바스의 말에 하려던 일이 생각났다.

“그런데 오로바스, 그전에 부탁이 있어.”

“부탁? 계약을 원하는 거야?”

“아니, 아니. 그건 아니고.”

짧은 순간, 오로바스의 금안이 분명 번득였다. 하여간 이 마신들은 방심할 수가 없다.

“계약 정도로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사소한 거야.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에이, 뭔데?”

“저 카르고라는 오십장 말이야.”

“응. 쟤가 왜?”

“아니, 사실은 그 호라시안이라는 악마가, 내 친구인 저 형아한테 집적대서 카르고가 막아주다가 죽인 거거든.”

“헤에?”

“그래서 말인데, 네 조카를 죽인 건 정말 유감이지만 혹시 용서해줄 수 있을까?”

나는 저 형아라고 말하면서 설아를 가리켰다. 설아가 너까지 나를 형아 취급하느냐는 눈빛으로 흘겼지만, 못 본 척했다.

오로바스는 인간의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생물학적 특성이 아니라 추함과 아름다움, 명예와 불명예로 구분한다.

그래서 오로바스에게는 나도, 설아도, 손태준도 모두 형아다.

설아는 얼른 분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막 나를 데려가서 어쩌고저쩌고했다니까?”

오로바스가 고르카를 쳐다보았다.

“그게 사실이야?”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오로바스 님의 조카라고 하셔서. 어쨌든 제가 일족을 해친 건 사실이니까요.”

“흐음.”

오로바스는 명예와 의리를 아는 상대를 좋아한다.

오로바스의 금안이 또 번쩍였다.

마신 특유의, 하위 악마를 꿰뚫어 보는 기본 능력이 발동한 듯했다.

만약, 고르카 님이 내 여성 파티원들을 향한 호라시안의 언동에 조금이라도 불쾌함을 느꼈다면,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게 된다.

과연, 잠시 후 오로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부끄럽지만 우리 일족에, 일족의 명예와 품위를 더럽히는 망나니들이 좀 있어. 너 제법이네?”

“송구합니다.”

“좋아. 형아의 부탁도 있고 하니까 용서해줄게. 사실, 같은 일족일 뿐이지 아주 가까운 조카도 아니었거든.”

오로바스는 고르카를 에워싼 번개 사슬을 선선히 해제했다.

……아니, 애초에 그 정도로 왜 죽이기까지 하려고 든 거야?

“감사합니다, 오로바스 님.”

“그럼, 죄는 이걸로 없어졌고……. 상을 내려야겠네.”

왔다, 왔어!

어쨌든 나서길 잘했군.

덕분에 고르카도 살리고, 퀘스트도 깰 것 같다.

“카르고라고 했지? 너에게는 천마장을 단독으로 쓰러뜨릴 만한 능력이 있음을, 내가 직접 확인했다. 따라서 이제부터 너를 새로운 천마장으로 임명하여, 이 골드 밸리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기마.”

역시, 아이처럼 보이다가도 공적인 일을 할 때는 언행이 좀 달라지는구만.

나중에 고르카에게 들은 바로, 백장까지는 마장들끼리의 대결로 쟁취 가능하지만, 천마장부터는 상위 악마의 정식 임명이 있어야 가능하단다.

그 순간,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창이 나타났다.

<10층 필수 서브 퀘스트>

1-1. 당신은 아스모데우스의 영역에 들어왔다. 아스모데우스의 세력을 선택할 경우, 아래의 퀘스트를 수행해야 한다.

-십장(十將)인 카르고의 신임을 얻고, 그를 천장(千將)으로 승진시켜라. (성공)

-카르고의 상관인 오로바스의 눈에 들어야 한다. (성공)

-(...)다음 퀘스트 생성까지 시간이 소요됩니다.

“예스!”

파티원들이 나직이 탄성을 질렀다.

천마장 카르고!

하루 만에 단숨에 50장에서 천마장까지 승진이라니. 이거 완전히 초고속 출세다.

예상보다 빨리 깨서인지, 시스템도 추가 시간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네, 기다려야지.

그런데도 어쩐지 고르카의 얼굴은 영 뭐 씹은 표정이었다.

“……감사합니다.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저거, 어디서 본 적 있다.

승진했지만 일하기 싫어서 반갑지만은 않은 부장님 표정인데?

“됐어. 이제 다들 해산!”

오로바스의 축객령에, 모였던 아스모데우스 파의 악마들이 50마리 단위로 각자 흩어져 갔다.

시체를 수습하거나 애도를 표한다는 개념도 없는지, 죽은 아군을 모두 버려둔 채다.

하긴, 어차피 마력의 핵 - 그러니까 다크 스톤을 품은 개체는 자기를 죽인 놈에게 흡수되어 사라졌을 테고.

내 눈길이 향하는 곳을 보고 눈치챘는지, 코커스가 설명해줬다.

“하급 악마의 시체 일부는 대기 중에, 일부는 지면에 흡수되어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진 시체는 마력으로 변해 순환한다. 그러니까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마계로 돌아가는 거다.”

흠, 그래서 죽음에 초연한 건가?

어쨌거나 기구한 운명이다.

“참모님, 이제 어쩌죠?”

내 물음에, 코커스는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신입. 대장님이 갑자기 천마장이 되셨으니, 참모를 늘릴 수 있기는 한데. 나 같은 것이 천마장의 참모 노릇을 할 수 있을지.”

일단, 고르카의 수하 천 마리가 어디서 올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협곡에서 싸웠던 다른 오십장들이 모두 고르카에게 인사하고 떠난 것이다.

저들을 포함, 저들 밑에 있는 50여 마리의 악마도 모두 고르카의 부대로 편입되겠지.

고르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도와줘서 고맙다. 덕분에 살았네.”

“아닙니다, 대장.”

“음, 그 뭣이냐. 오로바스 님과 아는 사이였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냐.”

“저도 긴가민가했습니다. 일단, 저를 기억하실지도 분명하지 않았고요.”

“그랬군. 뭐, 이렇게 돼서 나는 편제 정비 좀 하고 가야겠다. 너와 네 소대는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이제 골드 밸리 전체가 모두 내 구역이 됐으니, 그 안에서라면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좋다.”

“알겠습니다.”

나는 답하면서 귓속말을 보냈다.

「고르카 님. 천마장씩이나 됐는데 왜 그렇게 떫은 표정이에요?」

「제가 그랬잖아요. 눈에 띄고 싶지 않다고. 어차피 스캐빈저 님을 도우려면 승진은 해야 했으니까 각오했는데, 방식이 너무 시선을 끄는 모양새라. 오로바스 저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혼자 온 건지, 에잉.」

「그랬군요. 이후의 퀘스트는 오로바스와 진행해야 하니, 당분간 고르카 님께 폐 끼칠 일은 없을 거예요.」

「아뇨, 폐가 된 건 아니고요. 운영자들 눈에 띌까 무서워서 그러죠. 스캐빈저 님도 조심하세요. 이 상황을 세파시 속이라 믿든, 스캐빈저 님 말대로 던전이라고 믿든 간에 그들은 위험한 존재니까요.」

대화 도중,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생겼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고르카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운영자를 그렇게 겁내실 이유가 있나요? 고르카 님 말씀대로라면 어차피 님을 세파시에 가둔 것도 운영자잖아요. 그것 때문에 무섭다고 하면 이해는 갑니다만, 자기들이 가둬놓고 마주친다고 해코지하면 이상한 거 아닌가요?」

「모르겠어요. 저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꼭 저를 노려서라기보다 놈들이 하는 행위가 무서운 거죠. 놈들은 가끔……게임의 스테이지 일부를 리셋하거든요.」

이때 고르카에게서 분명한 두려움의 기색이 느껴졌다.

「네? 리셋이요?」

「네. 간혹 플레이어도, NPC도 아닌 유저들이 대거 출몰할 때가 있어요. 그게 리셋의 전조예요. 그렇게 되면 해당 스테이지에서 최대한 빨리 달아나야 해요.」

「고르카 님, 계속 여기에 계셨던 게 아닌가요?」

「아,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구나. 저 마계 스테이지에만 있지 않았어요. 여기가 상대적으로 좀 오래되어서 눌러앉기로 마음먹기는 했는데……. 다양한 스테이지를 돌아다녔죠.」

두근!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는데도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우리, 이제 여기도 슬슬 지울까? 복고풍 좀 질리지 않아?

내 상태를 모르는 고르카는 계속 귓말을 보내왔다.

「사실, 저 말고도 다른 플레이어가 몇 명 있었는데, 모두 스테이지 리셋 때 휘말려서 초기화됐어요. 게임에 갇힌 상태에서 플레이 데이터가 사라졌으니, 아예 존재 자체가 소멸해버린 거죠. 전 그게 제일 무서워요.」

고르카는 자신과 말이 통하는 상대와의 대화에 목말랐는지, 기회만 되면 엄청난 양의 귓속말을 보내왔다.

그가 하는 말 중에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것도 있었으나, 대개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 잠자코 들었다.

그러다, 오로바스가 말을 거는 바람에 대화가 멈췄다.

“형아! 뭐해?”

그걸 본 고르카가 대화 중단을 알려왔다.

「오늘은 이쯤 하죠.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를 들어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우실 테니.」

「그럴까요……. 참! 고르카 님, 부탁 하나만 할게요. 이제 천마장이 되셨으니, 부릴 수 있는 부하의 수도 많아진 거 맞죠? 저번에 그 알파르 같은 악마도요.」

「알파르? 아, 무토 말인가? 그렇긴 한데, 왜요?」

「그런 놈들에게 시켜서, 무르무르라는 마신을 좀 찾아주세요.」

나는 가족에 대해 얘기하기보다, 마계에서 더 찾기 쉬울 것 같은 존재를 꺼냈다.

지금 같은 상태의 고르카에게 말해 봐야, 어쩐지 가족도 게임의 일부이니 어쩌니 이런 소리를 할 것 같기도 했고.

가족마저 그렇게 얘기하면 진심으로 짜증이 날 것 같아서다.

「무르무르? 들어본 적 있는 마신이네요. 알겠어요. 그것도 퀘스트의 일부인 모양이죠?」

「맞아요.」

「그럽시다. 이제 나도 궁금하네요. 과연, 그 퀘스트라는 걸 다 깼을 때 스캐빈저 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여기에서 나간다고.

고르카는 여전히 내 말을 다 믿지 않는 눈치다.

어쩔 수 없지. 직접 이 타워형 던전에서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줘야, 자신이 미망에 빠져 있음을 깨달을 테지.

고르카의 말대로라면 실체가 있는 나 자신이 게임에서 나가는 행위는 말이 안 되니까. 내가 내 캐릭터와 같을 수는 없는 거잖아?

“형아는 나랑 놀자. 참, 형아도 천마장 시켜줄까?”

재차 졸라대는 오로바스를 본 고르카는 나와 일별했다. 이제부터 새로운 퀘스트가 뜰 때까지는 오로바스에게 집중하자.

“아니, 아니야.”

나는 혹시나 내게 관직을 내릴까봐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런데, 오로바스 님은 왜 여기에 혼자 왔어? 군단장씩이나 되면서.”

“으응, 부하들 다 끌고 오기에는 좀 번거롭고, 수가 많다 보니까 출진할 때까지 시간도 꽤 걸리거든. 그런데 골드 밸리는 빼앗기면 안 되는 지역이니까, 놔둘 수도 없어서. 그냥 나 혼자 얼른 와서 처리하는 게 빠르겠다 싶더라고.”

“아아.”

“그런데…….”

그때, 오로바스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늘 같이 다니던 다른 형아는 안 보이네? 어디 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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