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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224화 (224/303)

224화

18부 : 마계 통일 대전의 층 (5)

‘파리의 바게뜨’는 매우 오래된 제과 프랜차이즈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대폭발 이후, 사람들이 빵이나 디저트를 즐길 여유가 없어진 탓에 급격히 쇠락했다. 그 결과 정현식, 그러니까 고르카의 본체가 30대일 때 사업을 철수했다.

그게 갑자기 피의 황무지 구석에 나타나 있었다.

더구나, 게임의 설정과는 다르게 한글 간판을 달고.

‘갑자기 웬 세계관 파괴? 이벤트인가?’

하지만 이제까지 세계 파멸 시뮬레이션 게임은 이런 이벤트나 프로모션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현실의 요소를 조금씩 반영해가며 가상의 세계를 펼쳐 보일 뿐.

그때였다.

어리둥절해 있던 고르카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이고, 고새 봐 버렸네.”

고르카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헐, 시발. 어느 틈에?’

세파시에서 그의 클래스는, 우람한 겉모습과는 달리 레인저다.

레인저는 민첩함과 은밀함을 바탕으로 사냥, 추적, 저격 등을 장기로 하며 활이나 단도를 주무기로 쓴다.

고르카가 레인저 클래스를 택한 이유는, 강한 야수를 길들여 파트너로 데리고 다니기 위해서였다.

‘세파시 유저놈들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파티원들끼리도 PK가 되는 미친 게임이니……. 오죽하면 별명이 통수 치는 게 진리라고 해서 통파시겠냐고.’

실제로 고르카도 두어 차례 호되게 당한 후로는 다른 유저를 믿지 않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파시 유저 대부분이 비슷한 이유로 솔로 플레잉을 즐겼다.

어차피 파티 플레이를 하기에는 인원 자체가 너무 적기도 했고.

‘게다가 난 투자할 절대 시간까지 부족해서 좋은 아이템을 얻기가 어려워. 그러니까 믿을 수 있는 아군이 필요하다.’

소환사는 초반이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고, 시체를 일으켜서 부리는 네크로맨서는 음침해서 싫었다.

험악한 외모며 큰 덩치와는 달리, 고르카의 본체는 꽃과 식물을 사랑했다.

여기까지 들은 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고르카 님, 집에 화분이 많다고 했죠. 그 피규어도 식물의 마신이어서 화분들 사이에 두고 싶다고.」

「커험, 기억력 좋으시네. 서론이 좀 긴데 일단 더 들어보쇼.」

그런 까닭에 고르카에게는 자연을 무대로 하는 레인저가 적성에 맞았다.

오늘 피의 황무지 이 자리에 찾아온 이유 또한, 희귀한 야수를 사로잡아 길들이기 위해서였다.

‘여기는 알려지지 않은 장소일 텐데. 더구나 내 뒤를 잡다니?’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선수필승이다.

고르카는 돌아서는 동시에 ‘단검 던지기’ 스킬을 발동했다.

“에잇!”

단검 던지기는 극히 짧은 시차를 두고 단검 세 개를 차례로 던지는 회심의 기술이다.

첫 번째 단검을 피하면 두 번째가 눈으로 날아오며, 그걸 막거나 피할 때는 이미 세 번째가 급소에 꽂힌다.

지금까지 한 번도 빗나간 적 없는 비장의 기술.

“어허.”

그게 모조리 빗나갔다.

상대가 아예 사라진 까닭이다.

“뭐, 뭐야?”

직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고르카의 바로 옆에 나타나, 그의 팔을 가볍게 꺾었다.

“으악!”

“거참, 너무 설치지 말라고.”

“죽이지 마, 아서.”

지금 보니 뒤에 나타난 인물은 일남일녀의 두 명이었다.

‘아서?’

한 사람은 아서.

늘 랭킹 10위 근처에 머무르고 있으며, 세파시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있던 초 고인물이다.

“하하, 알았어. 멀린.”

다른 하나는 멀린이라는 여자 마법사로, 언제부터인지 아서와 늘 짝을 이뤄 다녔다.

‘멀린이 있었구만. 그럼 블링크 마법으로 피한 것도 이해가 가지.’

여기까지 말하던 고르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요, 스캐빈저 님?」

「윽……. 아닙니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서…….」

정말이었다. 고르카의 얘기를 듣던 중,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정확히는 ‘아서’와 ‘멀린’이라는 이름을 들은 직후부터였다.

‘아서와 멀린, 분명 어디에선가…….’

그러고 보니, 그 수수께끼의 해골 투구를 쓴 남자도 나를 그렇게 불렀다. 멀린 - 이라고.

‘그럼, 혹시 그 해골 투구가 아서인…….’

여기까지 떠올렸다가, 나는 못 견디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악!”

어지간한 고통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두통은 정말 못 참겠다. 머릿속을 불에 달군 부지깽이로 휘젓는 것 같다.

‘혹시 그 이름에 대해 생각해서 그런가? 으음……. 다른 생각을 하자. 우리 가족, 아스모데우스, 퀘스트…….’

과연, 그러자 두통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때 천막 밖에서 파티원들이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뭐야, 방금! 비명이 들렸는데?”

“정우, 공격받은 거야?”

다들, 이미 살벌한 기세로 나이트 기어며 무기를 빼들고 있다.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파서…….”

“머리가?”

의심스러운 듯 힐끔거리는 파티원들을 보며, 고르카가 귓속말을 전해왔다.

「이 사람들도 다 플레이어인가요?」

「아뇨, 제 파티원들이에요. 기사요.」

「기사?」

「지금 다들 던전을 공략하려고 같이 들어온 거거든요.」

그 말에, 고르카는 매우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다 다시 카르고로 돌아가서 연기를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허겁지겁 뒤따라 들어온 알파르가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대장님! 전사들이 갑자기 무슨 비명이 들린다고…….”

“별일 아니니 인간……형 악마, 그대들도 진정하시오. 일단 거기 좀 앉지.”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파티원들은 천막 안의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카르고는 나와 귓속말을 해 가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음……. 그러니까, 이자들이 상당히 강한 전사라는 말인가. 우리와 함께 아스모데우스 님을 모시려고 하고.”

“네, 맞습니다요!”

“좋다. 나도 저 이정우라는 자와 얘기해본 결과,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는군. 우리 부대에 편입하도록 하지.”

“아, 대장님. 그런데…….”

뭔가 망설이던 알파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열이 넘게 됩니다요.”

“응?”

“우리 부대원은 모두 열 명, 최대 열둘이 한계입니다요. 그런데 새로운 전사들까지 포함하면 모두 열다섯이 되니까…….”

“열다섯으로 늘리면 되지, 뭐가 문제인가?”

“문제지. 문제가 많지, 카르고. 푸르릉.”

카르고의 말에 대꾸하며 들어온 것은, 반인반마의 악마였다.

그런데 상체가 인간이고 하체는 말인 켄타우로스와 반대로, 상체가 말이고 하체가 인간이다.

“이거, 처음 보는 인간형 악마들이 있기에 따라왔다가,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되었지?”

“호라시안 님.”

카르고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 카르고. 푸르릉. 자네의 상관인 50장, 호라시안이지.”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는 놈이 그러나? 자네는 부하를 열두 마리까지밖에 거느릴 수 없지. 그걸 초과하는 부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호라시안이라는 반인반마의 악마를 따라 들어온, 닭 머리의 악마가 대꾸했다.

“그야, 호라시안 님께 보내야 합니다.”

“그렇지?”

호라시안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우리를 훑어보았다.

그 눈이 설아와 이혜림 순경에게 잠깐씩 멈췄다.

호라시안은 긴 혀를 내밀어 입가를 핥았다.

“귀한 인간형 악마들이지? 역시, 인간형이어서 암컷의 미색이 제법이지?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암컷들은 오늘 밤에 즉시 내 천막으로 오도록 하지.”

“저 말 대가리 새끼가…….”

차윤성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들썩거렸다.

내가 그의 어깨를 살짝 눌렀다. 귓속말로 카르고의 의사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아 왜?”

“곧 처리할 거야.”

카르고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초과 인원을 상급 부대로 보내는 건, 딱히 마신 규정에 없는 걸로 압니다만.”

“규정에는 없지만 다들 그렇게 해왔지? 관례라는 거지, 관례.”

닭 머리 악마가 말 대가리 악마를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호라시안 님.”

“흐음…….”

네모난 턱을 어루만지던 카르고가 말했다.

“이것과 관련된 정확한 규정이 하나 있긴 있습니다만.”

“그게 뭐지?”

닭 머리의 악마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돌아보는 순간.

쩍!

카르고가 대검을 뽑아 들고 단숨에 호라시안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끼……?”

머리가 세로로 쪼개진 호라시안은 잠시 비틀거리다가 풀썩 쓰러졌다.

쪼개진 머리 사이에서 검은 피와 연기가 새어 나왔다. 곧, 호라시안의 사체는 재가 되어 소멸했다.

파티원들은 그런 광경 앞에서도 모두 태연했다. 이혜림이 잠깐 입을 벌렸다가 얼른 다물었을 뿐.

호라시안의 시체가 사라진 자리에는 울퉁불퉁한 호두알만 한 검은 돌 하나만 남았다. 그 돌은 거무스름한 연기처럼 변해, 카르고에게 빨려들듯 흡수됐다.

‘흠, 악마들끼리 싸우면 저런 식으로 다크 스톤이 흡수되는 모양이군. 여기, 그러니까 마계에서는 화폐의 개념이 아니라 순수한 마력으로 쓰이는 모양이네.’

결국, 상위의 악마와 싸워서 핵을 흡수하면 그만큼 더 강해진다는 뜻이다.

“서열은 일대일 대결을 통해 바뀔 수 있다는 규정 말이야, 호라시안. 아, 이제 내 말을 못 듣겠군.”

천천히 대검을 회수하는 카르고를 향해.

닭 머리 악마가 믿기 어렵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건가?”

“겁……니까?”

“딱히 숨긴 적은 없다. 귀찮아서 안 나섰을 뿐.”

카르고가 닭 머리 악마에게 눈길을 보냈다.

“호라시안의 복수라도 할 건가? 그렇다면 여기서 상대해 주고.”

“아닙……니다.”

닭 머리 악마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호라시안 부대의 참모, 코커스가 카르고 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잠깐. 닭 머리가 참모라고?

어째 영 미덥지 않네.

“이제 호라시안 부대가 아닐 텐데?”

“네. 정정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카르고 부대입니다. 전(前) 호라시안 부대원 가운데 카르고 님께 도전하려는 자가 없을 경우, 카르고 님께서는 부대원을 인계받아 저절로 50장이 되십니다.”

“현재 너희 부대원이 몇 명인가?”

“저 포함 35명입니다.”

“좋다. 가서 도전하려는 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오도록. 한꺼번에 덤벼도 좋다.”

자리에서 일어선 닭 머리 악마, 코커스는 꾸벅 묵례하고 천막을 나갔다.

입을 헤벌리고 있던 알파르가 짝짝 손뼉을 쳤다.

“역시 대장님! 50장인 호라시안을 단숨에 베어버리다니. 대단하십니다요!”

“수선 떨지 마라, 무토.”

“넵.”

나는 카르고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얼~ 힘숨찐? 멋지네요.」

「아, 하지 마요. 여기서는 서열이 올라가 봐야 귀찮은 일밖에 안 생기거든. 십장 정도에서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려고 했더니.」

「그럼, 이걸로 우리는 고르카 님 부대원이 되는 건가요?」

「아마 그럴 겁니다. 호라시안 저놈이 A급 정도인데, 부하들 중에는 더 강한 게 없거든요.」

「이게 시작이네요. 우리는 이제부터 고르카 님을 천마장으로 승진시켜야 하거든요.」

「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묻는 류경재 총경에게, 내가 답했다.

“둘만 있을 때 저와 잘 합의했어요. 우리가 도와서 천마장이 되어보기로.”

“합의한 기억은 없는데…….”

카르고가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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