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16부 : 다음 층을 향하여 (3)
김태훈이 무기 교체를 가볍게 거부하자, 코넬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강제로 같은 조건으로 만들어줘야겠네. 장군, 괜찮겠지요? 이건 장군에게 유리하도록 손쓰는 게 아니니까요.”
잠깐 생각해 본 가르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저자가 제안을 거절했으니. 둘 다 평범한 무기를 사용해야 정당한 대결이 되겠지.”
뭘 하려는 거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가만, 그러고 보니 코넬리아가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한 번도 없었어. 필요할 때 나타나 항상 뒤에서 지시만 할 뿐.’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는 무기도 들지 않고 있다. 옆구리에 검을 착용하지도, 등 뒤에 활을 메지도 않았다.
대신, 손에 든 것은 30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 하나가 전부다. 언뜻 지휘봉처럼 보이지만, 저것은 -
‘스틱!’
마법을 발동할 때 쓰는 막대 형태의 도구다.
마법 발동 도구는 짚고 다니는 큰 지팡이처럼 생긴 ‘스태프’, 중간 길이에 수정 구슬이나 보석을 박은 완드(홀) 그리고 스틱이 있다.
스틱은 크기가 작고 가벼우며 소매 안에도 넣을 수 있어서, 특성상 전투 마법사가 즐겨 사용한다.
바로 저 코넬리아처럼.
여기까지 순식간에 떠올린 나였지만.
‘안 돼!’
내가 뭔가 해보기도 전에, 코넬리아가 한발 앞서 마법을 발동했다.
“마력 운용 금지!”
팟!
파르스름한 빛이, 바람 불듯 일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나와 파티원들은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팔을 내리자마자, 분노한 최혜인이 활을 겨눴다.
“암습하지 않기로 한 거 아닙니까?”
코넬리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서두르지 말라고. 암습이 아니라 공평하게 만든 것뿐이니까.”
뒤이어, 그녀의 시선이 김태훈에게로 향했다.
“너도 마법 무기를 가진 모양인데, 그걸 써봐. 마력이 반응하지 않을 테니.”
“뭐?”
김태훈은 살짝 놀라 귀혼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 사실은 스킬을 발동한 것이다.
잠시 후, 그가 내게 울상이 되어서 말했다.
“정우야. 큰일 났다. 귀혼이 반응이 없는데?”
“반응이 없어?”
“응. 정확히는, 시동어를 말해도 스킬이 발동을 안 해.”
“귀혼은 형의 나이트 기어니까 심상이 연결되어 있을 거 아냐. 그건 어때?”
“으음……. 뭐라고 해야 하지? 잠든 것 같다고 할까. 존재 자체가 사라진 느낌은 아닌데, 내 생각이나 시동어에 반응이 없어.”
그렇구나.
나도 방금 살짝 아이템을 소환해보고 스킬도 써 봤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
아무래도 일종의 결계를 펼친 듯하다. 그 범위 안에서는 마력이 반응하지 않는.
‘세파시의 원리상, 스킬도 마력에 의해 발동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마력을 운용할 수 없으니 스킬도 반응이 없는 거야.’
일 났네. 이러면 유사시에 탈출하기도 어려워지는데.
게다가, 김태훈은 정말 순수한 검술만으로 가르바를 상대하게 된 것이다.
이 던전 안에서 얼마의 시간을 전장에서 굴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일국의 장군이자 검귀가 된 사내를.
내가 대략 상태를 설명하자, 김태훈은 가볍게 한마디 했다.
“그래?”
“그래라니. 그게 다야? 진짜 큰일 났어.”
듣고 있던 류경재 총경도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내 생각에도 이건 위험한 상태인 것 같네. 교대하는 게 어떤가?”
“교대요? 누구랑?”
“나지. 기사로서의 능력은 자네들보다 떨어지네만, 오직 검술만으로 승부해야 한다면 내가 나서는 편이 나을 걸세.”
“왜요?”
“그야, 나는 검술 특채로 수경총에 들어왔고……. 수경총 내에도 검술 심화 과정이 있어서 계속 수련해 왔거든.”
김태훈은 피식 웃고 앞으로 나섰다.
“김태훈 기사!”
“총경님. 저도 유서 깊은 한세대 검도 동아리의 부장이라고요. 그러니까 한번 믿어보시죠.”
“하지만…….”
못내 걱정스러운 기색의 류경재 총경에게.
나도 김태훈의 편을 들었다.
“놔둬 보세요, 총경님.”
“이정우 기사, 자네까지 그러면 어떡하나?”
“음, 보기에는 미덥지 않아도, 빈말은 안 하는 인간이거든요. 자신이 있으니까 나섰을 겁니다.”
“으음……. 알겠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렇게 해서 가르바와 김태훈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가르바는 철검을, 김태훈은 귀기를 잃은 귀혼을 들고 마주 섰다.
귀혼을 힐끗 본 가르바가 말했다.
“목검 같은데 그거 가지고 되겠냐?”
“아이고, 걱정을 다 해 주시고. 너 따위 상대하는 데는 목검으로 충분하거든.”
“후후. 도발하려는 모양인데, 시도는 좋았으나 안 통한다.”
“아닌데? 진심인데?”
“그래, 그 정도면 됐다.”
다혈질처럼 보이던 가르바는, 대결에 임하게 되자 냉철하고 진지하게 변했다.
코넬리아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여유롭게 물러나 병사들 틈에 섞였다.
“그런데 야만족. 하나만 묻자.”
“응, 야만족 아니고. 뭔데?”
“호빗이 정확하게 무슨 뜻이냐?”
“아, 그게 궁금했어? 뭐, 한마디로 말하자면 난쟁이 똥자루 같은 놈이란 뜻이지.”
“크흐흐.”
웃는 가르바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음, 딱히 냉철해진 것도 아닌가.
그래도 나는 살짝 불안해졌다. 눈에 보이지도 않던 가르바의 검격이 떠올랐다.
스킬을 썼거나 마력에 의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순수한 육체적 능력과 검술이었다면?
정말 김태훈이 가르바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내 안에서, 어떤 예감 같은 것이 김태훈을 믿어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검도 동아리 회장이라는 스펙에 믿음이 간 건 아닐 테고……. 끙,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 생각은 결투가 시작된 지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쾅!
가르바의 내려치기 한 방에, 김태훈이 피떡이 되어 나뒹군 것이다.
역시 가르바의 검술은 진짜였다.
마력에 의한 것도, 스킬도 아닌.
사선을 무수히 넘나들며 몸에 새긴 혈투의 흔적이었다.
원래 기사의 육체를 가진 자가 수백, 수천 번의 실전으로 단련한 것이다.
“크윽……. 쿨럭!”
일어나려고 애쓰며 경련하는 김태훈의 앞에 서서.
가르바는 여유로운 태도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있는 것처럼 호기롭게 말하더니, 겨우 이 정도냐?”
김태훈은 겨우 고개를 들고 힘겹게 말했다.
“ㅎㅂ…….”
“뭐라고?”
“ㅎ……비…….”
“유언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가르바는 허리를 굽혀, 김태훈에게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순간, 가르바도 나도 김태훈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호빗.”
“…….”
아오, 저 꼴통.
“시간 끌 거 없지. 죽는 게 소원이라면 죽여주마.”
쓰러져 있는 김태훈의 허리로, 가르바가 철검을 힘껏 내리쳤다. 그대로 일도양단할 기세였다.
“악!”
“꺄악!”
이혜림 순경과 셀리나가 비명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최혜인도 흠칫 몸을 떨었고, 차윤성과 조설아는 저도 모르게 뛰어나가려 했다.
나는 두 사람의 가운데 서서, 양팔을 각각 어깨에 걸쳤다.
“스탑.”
“정우야, 이거 놔! 태훈 형이…….”
“김태훈 멀쩡해.”
“……응?”
“멀쩡하다고.”
둘은 그제야 앞을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김태훈이 오른손을 내밀어, 가르바의 철검을 붙잡고 있었다.
‘맞아, 저게 있었지.’
신의 잘린 오른손.
착용하고 있으면 점점 착용자의 신체 일부로 변하기에, 어느새 나도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다.
보아하니 코넬리아가 쓴 마법은, 마력이 외부로 유출되는 현상을 차단하여 운용을 막는 방식이다.
스킬은 대부분 마력을 방출하는 형태이기에 발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잘린 오른손’은 이미 김태훈의 몸이 되어, 체내에서 마력을 운용하고 있다. 따라서 코넬리아의 마법에 영향을 안 받는다.
“이놈, 무슨……!”
가르바는 안색이 변하여 검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손에 잡힌 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신의 잘린 오른손에 붙은 고유 스킬 중 하나. 검을 쥔 손…….’
-오른손은 무기를 절대 놓치는 법이 없으며 추가 내구도를 부여합니다.
그게, 자신의 무기뿐만 아니라 상대의 무기에도 통용된 것이다.
“크흐흐…….”
김태훈은 비릿하게 웃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전신의 뼈가 으스러진 듯하더니 금세 멀쩡해졌다.
‘또 다른 고유 스킬, 초월급 재생!’
그 스킬 또한, 원래는 오른손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오른손은 베이거나 손가락이 잘려 나가도 즉시 재생할 정도로 재생력이 높아진다. 괜히 초월급이란 수식어가 붙은 게 아니다.
그 옵션의 일부가 아무래도 김태훈의 신체 전부로 퍼진 것 같다.
‘저런 현상은 나도 처음 보네. 저걸 오래 부착하고 있던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선빵을 날리셨겠다?”
김태훈이 일어서는 자세와 동시에, 귀혼을 위로 비스듬히 올려 쳤다.
가르바는 잠깐 당황했으나 역시 역전의 용사답게 반응이 빨랐다.
검을 빼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곧바로 놔버리고 물러나면서 검격을 피했다. 크게 젖힌 상체 위로 귀혼의 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윽?”
자세를 바로 한 가르바의 앞에, 김태훈의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뒤이어 그의 정수리가 가르바의 콧등에 꽂혔다.
퍽!
“크헉!”
김태훈 또한, 기사의 육신을 가진 자다. 거기에 더해, 마신의 강림체이기도 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르바가 휘청했다.
“자, 이거 돌려줄게.”
김태훈은 휘청거리는 가르바를, 오른손에 붙잡고 있던 철검의 손잡이로 내리쳤다.
퍽! 퍼벅!
“하하하! 어떠냐?”
정작 검날은 손으로 잡고, 웃으면서 검 손잡이로 상대를 후드려 패는 광경.
그야말로 진정한 광기다.
롬 제국군조차 얼어붙어서 굳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빠득!
결국, 검이 충격을 못 견디고 부서졌다.
“어, 뭐야? 왜 이렇게 약해? 안 되겠네, 롬 제국. 보급품을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어서야.”
김태훈은 철검을 내던지고 다시 가르바에게 달려들었다.
“이 자식!”
날아오는 주먹을 흘려보낸 가르바가, 이를 악물고 김태훈을 걷어찼다.
“켁!”
이번에는 김태훈이 발길질에 맞아 뒤로 나뒹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돌진해 오는 가르바에게, 김태훈이 용수철처럼 일어서면서 오른쪽 팔꿈치를 휘둘렀다. 빠각 소리와 함께 가르바의 턱이 돌아갔다.
곧, 둘은 밀착하다시피 한 상태로 주먹과 무릎, 팔꿈치를 날려대기 시작했다.
퍽! 뻐억! 빠각! 뻑!
아연해진 롬 제국 병사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이럴 수가. 일대일로 가르바 장군님과 호각으로 싸우는 자가 있다니…….”
모두의 시선이 둘의 혈투에 쏠린 사이.
‘이거, 이러다가 진짜 폭망하겠는데?’
나만 외부의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앞쪽은 이미 롬 제국군으로 꽉 차서 길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다.
그런 상황에, 뒤편에서도 큰 무리가 접근해 오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나는 코넬리아를 노려보았다.
‘저 여자의 소행이구만.’
어쩐지, 아무리 롬 제국의 전통이라고는 해도 결투를 순순히 수락하더라니.
다른 군사 한 갈래를 우회시켜 뒤를 막은 것이다.
역시나, 그녀는 김태훈과 가르바의 대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가르바가 이길 거라고 여기는 건지, 아니면 정말 상관없다는 건지.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빠져나갈 테면 빠져나가 보라는 뜻인가?
‘킹받네?’
그렇다면 내게도 방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