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14부 : 진짜 적은 누구인가 (6)
“어떠냐, 이게 진정한 초음속 검술이니라! 하하하!”
김태훈의 몸을 차지한 할파스는, 귀혼을 앞세우고 회전하며 급강하와 급상승을 반복했다.
어마어마한 스피드와 체공 시간이다. 분명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움직임이다.
이미 날개가 돋아났다는 자체가 뭔가로 변했다는 증거다.
콰앙!
“흠!”
막아낸 모락스가 휘청할 정도로, 위력도 강력했다. 가속도에 회전력까지 더해졌으니 약할 리가 없다.
두 마신이 든 ‘귀혼’과 ‘인신 공양의 클럽’이 충돌할 때마다, 주변에 오싹한 귀곡성과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순한 효과음이 아니라, 들을 때마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충격파다.
더 큰 문제는, 할파스가 왼팔로 내 허리를 감아서 대롱대롱 매단 채 급강하, 급상승, 급선회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사의 육체인데도 눈이 빙빙 돌고 멀미 날 지경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목뼈가 부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한 가지 묘한 점을 발견했다.
“할파스 님! 이게 먹힐까요?”
시험 삼아 외쳐본 내 물음에, 할파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걱정 말고 얌전히 매달려 있음둥. 쿠쿠, 소 대가리 놈! 맛이 어떠냐?”
역시, 확실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할파스는 내게 말할 때는 거의 끝에 ‘둥’이라는 의미불명의 어미를 붙인다.
하지만 모락스에게 하는 말은 그렇지 않다. 무슨 차이일까?
내가 하릴없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쩌엉!
순식간에 수십 차례의 공방이 오가고, 마침내 팽팽하던 전세에 변화가 생겼다.
위에서부터의 비 오는 듯한 공격을 못 이긴 모락스가 벌렁 넘어진 것이다.
할파스가 이때다 하고 쾌재를 불렀다.
“쿠쿠쿠! 뒈져라, 모락스!”
키이이이잉!
할파스는 초고속으로 치솟았다가, 검날 끝을 아래로 하고 수직으로 거꾸로 섰다.
“검공(劍公) 비전.”
뒤이어, 이제까지 중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르고 강렬하게 회전하면서 내리꽂혔다.
“벼락 찌르기!”
모락스의 드러난 배를 향해서.
“으와아악!”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는 보았다.
투구 - 아니, 투구처럼 생긴 외피 아래로, 모락스가 가늘게 뜬 눈을 번득이는 것을.
“할파스, 이거 함정……!”
내가 다급히 외친 직후, 모락스가 누운 채 입을 쩍 벌렸다.
투구의 입이 위치한 자리가 가로로 귀밑까지 쪼개지면서 이빨과 혀가 드러났다.
저거 봐. 역시, 투구가 아니라 투구처럼 생긴 외피였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쩍 벌어진 입 안에서 시뻘건 불덩어리가 회오리치는 게 보였다.
뒤이어, 화염방사기 수십 대를 합친 것보다 더 강렬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 주의! 적이 지옥 화염 스킬을 발동했습니다.>
할파스는 스스로 불길 안으로 뛰어드는 꼴이 됐다. 덤으로 나까지.
후끈한 열기가 내 정수리에까지 전해졌다.
이대로 타죽나 싶어 아찔해진 순간, 할파스가 히죽 웃었다.
“역시, 갑자기 어색하게 자빠지더라니. 네놈 수법은 백 년이 지나도 발전이 없구나, 모락스. 궁해지면 지옥 화염을 뿜어내는 버릇까지 똑같아.”
할파스는 귀혼의 끝을, 자신이 회전하는 반대 방향으로 머랭 치기 하듯이 돌렸다.
그러니까 몸은 시계 방향으로 맹렬히 돌고 있는데, 검은 그 반대로 회전을 건 것이다.
그야말로 마신이라서 가능한 비상식적인 동작이었다. 그 비상식적인 움직임의 효과는 엄청났다.
화르르륵!
반대 방향으로 걸린 두 개의 회전력 때문인지, 아니면 진공 기류가 형성된 것인지는 몰라도.
모락스가 뿜어낸 불길이 할파스를 덮치기도 전에, 귀혼의 검신을 타고 맴돌다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모락스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102전 40승 62패였지만, 끝에 이기는 자가 승자다. 지옥으로 꺼져라!”
할파스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많이도 싸웠네.
자신의 그릇인 김태훈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앙숙이구나. 모락스와 할파스…….
푸확!
불길을 뚫고, 귀혼이 모락스의 배에 깊숙이 꽂혔다.
투둑, 우두둑!
여전히 강한 회전이 실린 상태였기에, 뱃가죽이 검날에 휘감기면서 마구 찢겨 나갔다. 뚫린 배에서 피와 살점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참, 이거 다 맹독이잖아!’
내가 흠칫한 순간, 할파스가 거대한 양 날개로 자신과 나를 푹 덮듯이 감쌌다.
표면에서 치익 하고 타는 소리가 났으나 날개 자체는 멀쩡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방어 관통 옵션이 달린 인신 공양의 클럽을 날개로 막아낸 것도 그렇고.
날개에 특별한 마법이 걸렸거나, 뭔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했다.
“크아아아!”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자, 모락스가 발버둥 치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거기다 할파스는 미친 듯 웃어댔기에, 그 소리들이 날개 안으로 울려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대로 싸움이 끝나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대체 파티원들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파티챗으로 호출한 게 언제인데…….’
내가 기대한 한 수는, 파티챗으로 은밀하게 파티원들을 호출한 것이었다.
이제 최혜인과 조설아는 완전히 회복했으므로, 두 사람이 와주기만 해도 전력에 큰 보탬이 됐으리라.
그런데 어째서인지, 모락스와 싸운 지 30분은 족히 넘은 것 같은데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이거,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잠시 후, 할파스는 날개를 펼쳤다가 등 뒤로 접으며 착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지면에 내려놓았다.
모락스는 배에 귀혼을 손잡이 바로 위까지 꽂은 채, 눈을 뒤집고 대자로 뻗어 있었다.
할파스는 그런 모락스의 명치에 한쪽 발을 얹고 으스댔다.
“꼴 좋구나, 소 대가리야.”
뭔가 맺힌 게 상당히 많은 모양이다.
아무튼, 그 모습만 봐서는 모락스가 확실하게 무력화된 것처럼 보였다.
마신이니까 완전히 죽진 않겠지만, 아마 영혼은 지옥으로 역소환되어 오랫동안 강림하지 못할 것이다.
‘모락스도, 할파스도 분류하자면 무투파. 진짜 무투파 마신은 무식하게 강하구나. 세파시 게임 안에서하고는 비교가 안 되네.’
그러고 보니 현실에서 마신과 직접 싸워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키마리스하고는 싸웠다고 하기 어렵고, 무르무르 때는 마신 소환 스킬을 썼다가 운 좋게 무르무르가 소환되어서 싸울 필요가 없었지.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곤봉 어디 갔어?’
뭔가를 쓰러뜨리고 나니, 습관대로 자연스럽게 드랍 아이템에 생각이 미쳤는데.
모락스가 쥐고 있던 인신 공양의 클럽이 사라진 것이다.
‘마지막 일격을 맞으면서 어디로 튕겨 나간 건가? 아니면……. 설마!’
불길한 예감이 든 내가, 할파스에게 경고하려 할 때였다.
“넌, 그래서 안 되는 거다. 비둘기.”
“응?”
빛이 꺼졌던 모락스의 눈에 붉은 기운이 되돌아왔다.
놀란 할파스가 황급히 발을 내리려는데, 뚫린 배의 구멍 안에서부터 곤봉이 튀어나와 할파스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크헉!”
미친. 설마, 누우면서 등 뒤의 땅속에다 곤봉을 묻어뒀을 줄은.
게다가 그걸 또, 자신의 뚫린 몸을 통해 발사하다니!
미처 날개로 보호할 틈도 없었다. 할파스는 검은 기운을 피처럼 흩뿌리면서 나가떨어졌다.
할파스의 명치에 깊숙이 박혔던 클럽이, 허공을 날아 모락스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클럽을 잡아챈 모락스가 천천히 일어섰다.
“나는 말이다. 너처럼 인간의 몸에 기생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의 몸을 만들어서 이 세계에 강림한 것이다.”
모락스도 할파스에게 말할 때는 나한테 하던 것처럼 말을 느리고 길게 끌지 않는구나.
이거, 마신의 말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뭔가 변화가 생기는 건가.
모락스는 배의 구멍으로 맹독성 피와 내장 같은 것을 줄줄 흘리면서도, 태연하게 할파스에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이 몸은,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어도 움직일 수 있다. 설령 사지가 잘리고 머리가 떨어져 나가도 마찬가지다. 네놈도 그 사실을 알 텐데.”
“크흐……. 쿨럭!”
할파스는 힘겹게 일어나 앉았으나, 치명상을 입은 듯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할파스의 앞에 버티고 선 모락스가 클럽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네놈은 백 년 전, 지옥에서 싸울 때가 훨씬 강했다. 인간의 몸에 깃들면서 거기에 안주해서 물러졌구나, 할파스.”
“……!”
“나야말로 널 지옥으로 돌려보내 주마.”
나는 모락스가 할파스에게 다가갈 때, 이미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성 미카엘의 창.’
창을 소환하여 다시 한번 모락스의 등을 노리려는데, 모락스가 기습적으로 돌아서면서 내게 클럽을 휘둘렀다.
“그전에…… 성가신 날파리를…… 처리해야겠다.”
부웅!
그러나 모락스의 회심의 일격은, 내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갈랐다.
나도, 모락스도, 할파스도 놀랐다.
모락스의 명치 위쪽 부분이 분리되어 허공에 붕 떠올라 있었다.
잘리는 순간에 몸을 틀면서 클럽을 힘껏 휘두른 바람에, 위로 뜨면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로 인해 나를 노린 공격도 빗나간 거고.
“어……?”
우두커니 서 있는 모락스의 나머지 부분.
그러니까 잘린 명치 부위의 단면 위로, 가느다란 선 같은 게 보였다.
원래는 투명에 가까웠을 선에 모락스의 피가 묻어 눈에 띈 것이다.
그것은 몹시 가느다란 줄이었다.
휘리릭!
모락스를 갈라버린 줄이 되감기면서 어디론가 날아 들어갔다.
저 줄은…….
아니나 다를까.
언제 나타났는지, 한편에 줄의 주인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줄의 정체는 머리카락이었다.
“……레이저?”
우리와 혈전 끝에, 머리만 남아서 도망쳤던 첫 번째 크래커.
레이저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기쁘네요. 아직 이 몸의 이름을 기억하다니.”
“아니, 그건 못 잊지. 그런데 어떻게…….”
“머리만 남아 있었는데, 어떻게 몸이 생겼냐고요? 그야 재생했으니까요.”
“…….”
그렇구나, 재생했구나.
거참 몸 만들기 간단하네.
바닥에 떨어진 모락스의 상체 윗부분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여기에 천족이…….”
천족?
마신들은 크래커를 그렇게 부르나? 일단 그 단어를 기억해뒀다.
사뿐사뿐 모락스에게 다가간 레이저가 고상한 어조로 말했다.
“그 정도면 많이 놀았잖아요, 모락스.”
“……움직일 수가…… 없다. 어째서……. 아무리 손상되어도, 내 몸은…….”
“그야, 내 모노와이어로 당신의 핵을 갈랐으니까요.”
나왔다, 단분자 커터!
뭐든 자를 수 있다는 건 알았는데, 마신의 심장까지 절단할 줄은.
“분……하다……. 또, 수백 년을…….”
원통한 듯 웅얼대던 모락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러다 이윽고 눈에서 빛이 훅 꺼졌다.
쉬이이익!
남아 있던 모락스의 몸이 연기와 함께 빠르게 증발하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지옥으로 역소환된 듯했다.
그러니까 지상의 모락스, 하크 제국의 근위대장 하산은 죽은 것이다.
그 증거로, 퀘스트 완수를 알리는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두 번째 필수 서브 퀘스트 완료.>
2) 하크 제국 황실 근위대장, 하산을 쓰러뜨려라. (○)
됐다!
너무 갑작스럽게 클리어해서인지, 잘 실감이 안 난다.
이제 3층으로 갈 수 있게 된 건가?
‘그런데 레이저가 왜 우리를 도운 거지?’
레이저는 나무 둥치에 기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할파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그녀가 저대로 할파스까지 죽이려고 드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이거, 늑대 잡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인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잠시 후, 레이저가 나를 돌아보며 한 말은 너무도 뜻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