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176화 (176/303)

176화

14부 : 진짜 적은 누구인가 (4)

뫼비우스 등급 아이템!

이걸 여기서 보다니.

이건 말하자면 갓 등급과 위력은 같으면서 배치되는 지점에 있는 아이템이다.

갓 등급이 양이라면 뫼비우스 등급은 음이랄까.

천족과의 전쟁에서 패한 악마들이, 지옥의 용광로에서 이를 갈고 벼려낸 병장기.

그중에서도 마신들을 위한 것이 뫼비우스 등급이다.

‘인신 공양의 클럽……. 최악이네.’

무기 설명부터가 꺼림칙하다. 마신 모락스가 산 제물을 때려죽여 원혼이 깃들게 한 사악한 무기라니.

‘모락스의 산 제물이라면 당연히 아이들이잖아.’

그러니까, 저 곤봉으로 아이들을 때려 죽게 한 것이다.

원혼이 켜켜이 쌓여, 곤봉에 깃들어 귀물이 될 때까지. 몇인지 다 셀 수조차 없는 아이들을.

저 곤봉에 깃든 아이들은 상대가 선인지 악인지도, 곤봉을 쓰는 자가 자신들을 죽인 자라는 것도 모른다. 그저 두려움과 증오에 휩싸여, 또 자기들을 해치려고 공격해 오는 대상을 저주할 뿐.

말하자면 아이들은 죽어서도 모락스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내 뼈가 왜 부러졌는지도 알겠다. 방어 관통, 저 옵션이 사기네.’

대상의 모든 방어구와 지구력, 실드 등의 방어 스킬을 무시한다니.

맨몸으로 깡대미지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내 몸이 기사의 그것으로 바뀐 덕에, 갈비뼈가 부러지는 정도에서 그친 것이다.

‘안 그랬다면 곤봉에 맞은 순간 물풍선처럼 터져 나갔을지도, 윽.’

나는 다급히 몸을 데굴데굴 굴려, 하산이 마구 내리치는 곤봉을 피했다.

“반역자…… 죽인다…….”

투구에서 여전히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저러는 꼴을 보니 무섭다.

건물을 통째 뚫고 나가는 괴력과 뒤로 뛰어넘는 운동 능력.

턱밑에서부터 검에 찔려도 죽지 않는 생명력.

거기다 혈관에는 피 대신 맹독이 흐르고, 흑마법을 써대며, 뫼비우스급 아이템을 가진 적이라.

‘어쩐지 세파시에서 등장했을 때보다 더 강한 것 같은데?’

이거, 갑자기 난이도가 확 올라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지금까지는 어려운 듯하면서도 그럭저럭 클리어할 만했다. 크래커라는 것들만 아니었다면 더 수월했을 터였다.

뭔가 던전에 변화가 생겼나?

‘이런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지.’

무릎 꿇고 엎드려 있는 김태훈이 너무 신경 쓰인다.

이제 아예 미동도 안 하고 신음도 내지 않는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까 성 미카엘의 창으로 공격받은 게 인상적이었는지, 하산이 좀처럼 나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는다.

거의 숨 쉴 틈도 안 주고 공격해대고 있다. 저놈은 지치지도 않나?

‘헉, 후우, 숨쉬기가 왜 이렇게 힘들지?’

단순히 숨이 찬 것과는 다르다.

이거, 혹시 그건가?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고 어쩌고 하는?

‘치유 물약을…….’

쨍그랑!

‘먹어…… 망할 놈!’

하산은 내가 치유 물약을 소환하기가 무섭게, 곤봉을 휘둘러 깨뜨려 버린다.

정확히는 내 손을 노리는 건데, 안 맞으려다 보니 물약이 깨지는 것이다.

역시, 실제 적과 싸우는 것은 게임 캐릭터와 다르다. 세파시였다면 간단히 물약을 빨았을 텐데.

‘슬슬 때가 됐는데…….’

숨이 턱 막힌다고 느끼는 순간.

피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입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억누르기 어려운 토혈이었다.

“쿠웩!”

하산이 콧김을 내뿜으며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후욱, 선혈……. 폐에서 나온…… 피다. 오래 버텨봐야…… 고통스러울 뿐이다. 금방…… 편하게 해주마…….”

“으윽…….”

저놈, 턱에 구멍이 났는데 대체 왜 멀쩡한 거야?

가까이에서 하산을 본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투구의 질감과 틈새였다.

투구는 은빛이 감도는 거무튀튀한 색이었다. 좀 떨어져서 봤을 때는 당연히 금속이거나 무두질한 가죽일 줄 알았다.

그런데 곁에서 보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거, 아무래도 피부 같은…….’

뭔가 썼다고 하기에는 투구가 머리와 너무 밀착해 있었다.

하산이 아무리 움직여도 흔들리는 낌새조차 없다.

게다가 관자놀이 부위의 뿔은, 이 세계관의 세공 기술을 고려하면 따로 만들어서 덧붙인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음새가 없이, 마치 투구에서 그대로 솟아난 듯했다.

목과 턱 사이의 틈새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틈새라고 여긴 부분은 투구를 써서 생긴 공간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 부위에 틈이 있을 뿐이었다. 마치 아가미처럼.

‘그러니까 저거, 투구를 쓰고 있는 척하지만, 사실 저 투구 자체가 머리였던 거네? 우웩!’

그러고 보니, 아만에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하산의 얼굴을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나는 이질감을 느낄까 봐 얼굴을 감추고 지낸다고 여겼다.

한데 사실은 늘 드러낸 채였던 거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당하다.

쾅!

“으악!”

큰일이다. 출혈 탓인지, 블링크뿐만 아니라 스킬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마력은 혈액에 섞여 몸 전체를 돈다. 따라서 피를 지나치게 많이 흘리면 마력도 빠져나간다.

그 바람에 하산의 발차기를 배에 제대로 맞아버렸다. 몸이 붕 떴다가 바닥에 엎어지듯 떨어졌다.

내장이 끊어질 듯한 격통이 덮쳐왔다. 아무리 높은 등급의 방어구를 착용해도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니까 저 뫼비우스 등급 몽둥이 - 아니, 클럽인 ‘인신 공양의 클럽’은 직접 때려야 효과가 발동하는 게 아니다.

‘방어 관통’이 기능이 아닌, 스킬인 까닭이다.

한마디로 인신 공양의 클럽을 장비한 상태에서는, 모든 공격이 방어 관통으로 들어간다는 말.

맞을 때마다 랜덤으로 디버프 형태의 저주에 걸리는 건 덤이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출혈 디버프에 걸린 것 같다.

‘하필…….’

목으로 넘어오는 피의 양이 조금 줄어드나 했더니 더 많아졌다.

인정한다. 이 정도면 근위대장 하산이 일인군단이라 불리며 하크 제국의 수호신처럼 여겨질 만하다.

아마 전장에서 일기당천의 힘을 발휘했으리라.

소지한 것만으로 금강불괴 같은 방어 스킬까지 무시하는 아이템.

엄청난 운동 능력으로 내 공격은 모두 회피하거나 반격.

게다가 부적, 물약 등 모든 소모성 아이템까지 미리 눈치채고 쓸 수 없게 부숴버린다.

한마디로 내 강점이 모두 봉인되다시피 하는 적이다.

‘크래커가 제일 강적이라고 생각했더니…….’

그보다 더한 적이 나타났다.

역시, 마신의 화신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1층의 키마리스처럼 말빨이나 머리싸움이 통할 상대가 아냐. 어설프게 말 걸려고 하다가는 그 틈에 공격이 들어올 거다.’

순간적으로, 그냥 죽어서 리셋할까 하는 유혹이 스친다.

그러나 이곳이 던전 내부, 그것도 이상할 정도로 사실적인 곳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만에 하나, 리스타트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끝이다. 그런 인생을 건 도박은 할 수 없다. 나 혼자의 인생도 아니고 말이지.

여기서 내가 죽기라도 하면, 10층에 갇혀 있는 가족들은 누가 구해주느냐고.

‘이진욱이 죽었을 때 리스타트 기회가 왔다면 확신했겠지만…….’

안타깝지만 이진욱은 이전 생에서도 그랬듯,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줄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다.

‘리스타트에 기대는 건 포기하자.’

마신 소환 스킬도 지금은 어렵다. 강한 마신을 소환하기 위한 절대 마력이 부족한 탓이다.

하산으로 위장한 모락스는 가뜩이나 호전적이고, 계급을 중시한다. 바알과 루시퍼 이외에는 가깝게 지내는 악마나 마신이 거의 없을 정도.

어설픈 마신이 나왔다가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모락스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어차피 마력 때문에라도 안 되겠다. 지금도 마력이 차오르는 속도가 아슬아슬해. 여기서 더 줄여버리면, 자칫 무르와의 연결이 끊긴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래야 물약을 삼키든, 마력을 회복하든 역습의 계기를 만든다.

그나마 내가 새빨간 피를 토하는 것을 보고 여유가 생겼는지, 하산의 공격이 처음으로 조금 느려졌다.

그 덕에 이리저리 머리를 굴릴 틈이 생겼다.

‘어디, 모락스는…….’

나는 필사적으로 세파시 내 마신 사전에서 모락스와 관련된 내용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것은 살아 있는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것.

또, 그 광경을 보며 비통해하는 부모가 흘리는 눈물.

성격은 폭급하고 잔인하며 오만하다.

반대로, 모락스가 제일 싫어하는 건 뭘까? 아예 도발해 볼까?

“으럇!”

남은 힘을 끌어내어 성 미카엘의 창을 휘둘렀다. 가볍게 뒤로 뛰어 피한 하산이 말했다.

“소용…… 없다. 네 공격은…… 통하지 않아…….”

“흥, 글쎄. 그럴까? 이 창에 제대로 맞으면, 네가 모시던 루시퍼도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말이야.”

루시퍼라는 이름에 멈칫하는 하산을 향해, 나는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눈물 나라의 군주, 모락스.”

“…….”

공격이 멈췄다.

그러나 나는 이게 잘한 일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네놈…….”

하산의 기세가 거기서 더욱 흉흉해졌기 때문이다.

“정말로…… 누구냐? 혹시…… 키마리스가 보낸…… 자인가?”

질문은 대환영이다. 그만큼 시간을 끌 수 있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롬 제국의 황제 노릇을 하던 키마리스와 거래하여 2층으로 왔으니까.

하지만 하산은 자기가 묻고 자기가 부정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현 상태는 나와 키마리스…… 둘 모두에게 이익……. 더구나 키마리스는…… 나보다 약하다. 굳이 이 균형을…… 깰 이유가 없다…….”

무투파 주제에 제법 머리를 쓰네?

하긴, 둔하기만 해서는 흑마법사 클래스를 갖기 어렵지.

세파시 설정상, 지옥의 회의에 참여하는 일원이자 루시퍼의 참모이기도 하고.

둘 다 머리가 나빠서는 맡기 어려운 역할이다.

그러나 설정과 역학관계를 다 아는 내가, 여기서 머리로는 더 유리하다는 말씀.

“아닌데?”

“뭐가…… 아니라는 건가…….”

“키마리스 님은 이제 너보다 약하지 않다고, 모락스.”

“…….”

잠깐 침묵하던 하산이 말했다.

“헛소리.”

“헛소리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걸? 키마리스 님은 최근, 어마어마한 양의 검은 마력석을 입수하셨다. 그걸 다 흡수하면 너는 물론이고, 아스모데우스 님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어.”

여기서 핵심은, 키마리스가 모락스보다 더 강해졌다는 부분이 아니라 맨 마지막이다.

즉, ‘아스모데우스’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다는 부분이 포인트다.

아스모데우스는 솔로몬의 마법서에서 32번째 위계로 서술되는 마신이다. 그러나 힘은 오히려 모락스보다 더 강하다.

모락스가 그렇듯, 위계와 무관한 힘을 가진 네 악마 가운데 하나.

이 비밀을 아는 인간은 거의 없지. 최소한 이 던전의 세계관에서는 더더욱.

마신인 키마리스가 황제 자리에 앉아 있고, 모락스는 인간 하산으로 버젓이 근위대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사소한 포인트를 섞었다.

아스모데우스는 물론이고, 모락스와 현재는 비등하거나 더 약한 키마리스에게는 꼭꼭 존칭을 붙이면서 정작 모락스에게는 하대하는 거.

이제 모락스는 조금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그런 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냐?”

“그야, 키마리스 님의 명을 받고 왔으니까. 안 그러면 무슨 수로 네 정체를 알겠어?”

그때, 갑작스러운 변수가 발생했다.

“대장님! 하산 대장님!”

전령으로 보이는 병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