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169화 (169/303)

169화

13부 : 밝혀지는 비밀들 (7)

나는 잠시 망연해서 스키드 로우를 바라보았다.

놈은 ‘통곡의 벽’을 거둬들이고 나서 제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쓸 만한데?”

손태준의 스킬을 자유로이 사용하는 스키드 로우라.

이제까지 상대한 적 가운데 최고의 난적이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라.

‘저거 혹시, 저 상태로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 아니야?’

겉모습은 손태준이지만 알맹이는 정체불명의 괴물인 스키드 로우가, 던전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활보한다면?

서울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상대해본 느낌에 따르면 그냥 무식하게 강하기만 한 놈이 아니다.

교활함까지 갖췄으니, 반드시 사달을 낼 것이다.

마침,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류경재 총경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저자는 반드시 쓰러뜨려야 하네, 정우 군. 저런 걸 내보내면 큰일이야. 최혜인 기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설령 손 단장을 잃게 되더라도 말일세.”

……다른 인베이더는 몰라도 저놈은 반드시 죽여야겠네.

이래서 필수 퀘스트였던 건가?

내부의 적이라고 표현한 걸 보면, 꼭 손태준이 스키드 로우에게 몸을 빼앗길 것까지 예측한 듯한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는 데다, 퀘스트 창을 띄우고, 내게 정보를 보여주기도 하는 시스템의 정체는 대체 뭐지?

애초에 내 능력은, 기사로서의 힘이라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우선, 세파시 캐릭터의 능력을 그대로 쓸 수 있다는 점부터가 말이 안 된다. 하다못해 유저가 나 혼자였던 것도 아닌데.

어라?

그러고 보니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팔이 멀쩡해졌다.

분명 안에서 타오르는 듯 뜨거웠는데 이제 잠잠하다.

금강불괴 스킬 덕은 아닌 듯하고.

혹시, 내부를 공격하는 스킬이어서 만독불침이 작용한 건가?

불꽃을 일종의 해로운 물질로 판단해서?

어쨌든 운이 좋았다.

스키드 로우는 아직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굳이 드러내지 말아야겠다. 이게 비장의 한 수가 될 수도 있으니.

휘리리릭!

순간, 내 그림자가 솟아올라 덩굴처럼 몸을 감쌌다.

손태준의 또 다른 스킬 가운데 하나, ‘고난의 수호’다.

“이런!”

류경재 총경이 놀라서 제독검으로 덩굴을 내리쳤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림자 덩굴은 그의 검을 튕겨냈다.

블링크를 쓰려고도 해봤는데 발동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이 안에서는 모든 스킬이 작동 안 한다고 했던가?

김태훈이 꼼짝도 못한 이유를 알겠다.

“이런 것도 되네?”

스키드 로우가 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리고 비릿하게 웃었다.

손태준의 얼굴로.

그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가슴 속이 들끓었다.

이전 생에서부터 나의 우상이었던 사신 손태준.

나는 단순히 그가 강해서 좋아한 게 아니다.

그는 자기 능력으로 훨씬 더 편하고 부유한 길을 갈 수 있었음에도, 가시밭길을 택한 남자였다.

미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가서 기사단을 만들었다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조건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에 남았다. 엄청난 타국의 견제를 뚫고 사신 기사단을 창설하여, 국내의 인베이더와 범죄자를 무수히 멸하고 던전을 소멸시켰다.

그 남자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약자를 보호하려는 정의감과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다.

그 손태준을 저렇게 만들다니.

“……마시죠.”

“뭐?”

“웃지 말라고, 개새끼야.”

내 욕설은 감정의 분출 반, 스키드 로우의 주의를 끌려는 목적 반이었다.

내가 갇힌 상태에서, 류경재 총경 혼자 놈과 싸우기에는 무리다.

“하, 제법 감정 구현이 잘되는 버그네?”

다행히 스키드 로우는 내게 반응해줬다. 딱히 화도 안 내고 재미있다는 듯 싱글거린다.

여유가 방심을 부르고 있다.

이 김에 정보나 캐내 보자.

전부터 궁금했다. 저 크래커라는 것들은, 왜 자꾸 우리를 버그라고 부르는지.

‘뉘앙스로 봐서, 처음에 생각한 것처럼 멸시의 뜻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짐짓 기죽은 척하며 말했다.

“후, 이제야 누군지 알겠네요. 분명 죽은 줄 알았는데……. 손태준 기사의 능력까지 쓰다니.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군요. 욕한 건 사과할게요.”

“별로 신경 안 써. 의미가 없으니까. 기사라. 그래, 너희는 버그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더군.”

언제부턴지 저 버그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울컥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애써 그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우리를 왜 공격하는 거죠?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미안. 난 딱히 유감은 없는데, 주인이 너희를 소멸시키라고 명했거든.”

“죽기 전에 왜 죽는지나 알고 싶은데……. 그 주인이라는 건 누굽니까?”

“그건 말 못 해.”

“그럼, 왜 우리를 버그라고 부르는 건지는 말해줄 수 있나요?”

“음?”

나는 일부러 더 궁금한 것을 나중에 물었다.

크래커를 부리는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려주지 않으리라고 예상한 까닭이다.

스키드 로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이거, 말해줘도 되는 건가? 섭리나 개연성의 충돌이…….”

섭리? 개연성?

세파시에서 쓰던 용어를 스키드 로우가 말하고 있다.

우연인가?

원래 있는 단어이기는 하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굳이 저 단어를 사용할 확률은?

“아, 그렇습니까? 네.”

갑자기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하던 스키드 로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 그것도 안 되겠다. 그냥, 너희는 버그니까 버그인 거야. 기사라는 존재 자체가 잘못된 존재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다.”

“…….”

기사, 버그. 잘못된 존재.

이것만으로는 정확히 모르겠다.

원하는 답은 못 들었으나 그래도 한 가지 수확을 얻었다.

푸확!

스키드 로우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여전히 설아의 멱살을 붙잡고 있던 팔이다.

팔이 크게 베이면서 힘줄이라도 잘렸는지, 스키드 로우가 설아를 놓쳤다.

“어라?”

얼떨떨하게 팔을 내려다보는 스키드 로우를 향해.

“손태준. 돌았냐? 뭔 짓이야?”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를 기습한 김태훈이 으르렁댔다.

공격받은 여파인지 고난의 수호가 풀렸다. 덕분에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블링크!

나는 그러자마자 블링크를 발동하여 설아에게 다가간 다음.

그녀와 접촉한 상태에서, 재차 사용해 김태훈의 옆으로 이동했다.

그야말로 몇 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스키드 로우도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놈은 여전히 김태훈에게 당한 것이 어리둥절한 듯했다.

손태준이 엄청난 힘과 방어력을 가진 대신, 속도가 좀 떨어지는 편이라 다행이다.

나는 설아에게 치료 물약을 퍼붓고 먹이면서 김태훈을 채근했다.

“형, 어디 갔다가 온 거야? 멋대로 자리를 비우면 어떡해!”

“아, 그게, 손태준도 있고, 최혜인도 있고 해서 잠깐 시장 구경 좀 다녀온 것뿐인데……. 이 난리가 났네?”

김태훈은 머쓱해서 말했다.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환전하러 다녀온 것도 몇 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최혜인이나 설아는 상대가 손태준의 모습으로 덤벼들었기에 무방비 상태로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여간, 지루한 건 잠시도 못 참지. 그래도 덕분에 도움이 되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혜림 순경은 어디로 갔지? 설마…….’

나는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고 말했다.

“혹시 이혜림 순경은 어떻게 됐나 몰라?”

“내가 나갈 때까지는 멀쩡했는데.”

취소. 도움이 안 되는군.

“후, 참고로 저거, 외모는 손태준 기사지만 알맹이는 아니야.”

“뭔 소리야?”

“아까 우리를 공격해온 놈 있잖아. 형 한쪽 팔을 불태운. 그게 손태준 기사의 몸을 차지한 거야.”

“헐?”

“형이 상대가 손태준이라도 가차 없이 팔을 벨 수 있는 또라이라서 다행이야.”

“그거 칭찬이야?”

“그럼, 칭찬이지.”

내 말은 진심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거라면, 공격부터 하기 전에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했을 것이다.

“아무튼, 저걸 죽이면 되는 거지?”

김태훈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칭찬, 취소하고 싶다.

“되도록 죽이지는 말고.”

“그건 힘들 것 같은데. 재수 없기는 해도, 강한 인간인 건 맞거든.”

“음……. 나와 힘을 합쳐도 어려울까?”

“너랑 저 꼰대 경찰 아저씨까지 다 해도 어려워. 원래도 강한데 네 말대로 아까 그놈이 들어가서 더 강해졌어.”

류경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김태훈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진짜다.

‘설아도 아직 싸울 상태가 아니고.’

어쩔 수 없나.

나한테는 아직 한 가지, 비장의 수가 남아 있다.

‘마신 소환…….’

원래는 최대한 이 스킬만은 안 쓰려고 했다.

1층에는 마신 키마리스가 황제 노릇을 하고 있고, 2층에서는 마신 모락스로 짐작되는 존재가 암약하고 있어서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 타워형 던전에서는 마신들이 자유 의지로 활동할 수 있다는 거다.

어쩌면 무르가 나와 멀리 떨어져서도 우리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즉, 자칫 마신을 잘못 불러냈다가는, 오히려 강대한 적 하나를 늘리는 꼴이다.

‘소환이라는, 스킬에 의한 계약 자체를 무시하진 못하겠지만……. 더 강해진 의지와 힘으로 막무가내가 될 수도 있다.’

더구나 그 마신이 4대 악마 가운데 하나이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최악이 된다.

‘하지만 저놈한테 그냥 당할 바에야, 내 행운 수치를 믿고 도박이라도 해보는 편이 낫지.’

아까 썼던 어둠의 아르카나 스킬에서 행운 특성이 발동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발동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

마신 소환 스킬을 두고 내가 잠시 망설일 때였다.

“일단 붙어보고 죽일지 말지 정하자.”

말과 함께 김태훈이 섬광처럼 뛰쳐나갔다.

어쩐지 더 빨라진 것 같다. 몰입의 차이인가?

“흐응.”

스키드 로우는 김태훈의 쇄도를 보자마자 여유롭게 통곡의 벽을 발동했다.

대상의 그림자를 사용하는 고난의 수호와 반대로, 스키드 로우 자신의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자신을 보호함과 동시에, 공격을 반사하는 사기성 스킬.

김태훈의 찌르기는 강렬하고 빠르다. 모르긴 해도, 저게 반사된다면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잠깐! 그렇게 무턱대고 덤벼들면…….”

“내가…….”

김태훈이 갑자기 방향을 크게 틀었다.

“바보인 줄 아냐?”

콰앙!

김태훈은 도중에 찌르기의 궤도를 급격히 바꿔, 스키드 로우의 발치를 노렸다.

정확히는 그 주변의 바닥이다.

가뜩이나 반파 상태이던 바닥은 그 일격에 무너져 내렸다. 자연히 스키드 로우도 추락했다.

“흐흐, 역시 발밑까지 커버해주진 못하는군. 그 인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조사했다고!”

김태훈은 함께 떨어지면서 낄낄댔다.

저번에 당한 것, 앙심을 품고 있었구만.

어쨌든 잘했다. 스키드 로우에게 허점을 만들었으니.

‘그림자를 기반으로 하는 스킬이라, 바닥이 사라져서 그림자가 흩어지면 해제되는 모양이군.’

나도 함께 떨어지면서, 찰나의 틈을 노려 스킬을 발동했다.

천상의 창!

순수 공격력만으로 따지면, 내가 가진 최강의 스킬이다.

이제 나도 40레벨이 넘었으니, 총 800 이상의 마력에 지능 수치를 곱한 공격 계수가 적용.

거기에 행운 수치가 작용한다.

<크리티컬 대미지가 발동했습니다.>

콰아아앙!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