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12부 : 열사의 제국에서 (24)
나는 크래커 코덱스가 객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방비 상태의 나를 죽이려다 왜인지 멈춘 듯했으나, 아무 상관없었다.
‘잠깐. 아까 저놈이 버그들의 수를 줄인다 어쩐다고 하지 않았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 크래커는 우리를 버그라고 칭했다. 그렇다면 수를 줄이겠다는 버그는 정황상 파티원들을 의미한다.
‘구해야 한다.’
하지만 곧, 의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왜 내가 그들을 구해야 하지?
‘당장 나 숨 쉬는 것도 이렇게 버거운데…….’
왜 나는, 이렇게 꾸역꾸역 걷고 있는 거지?
한 걸음 내딛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고만 싶다.
그럴 때마다, 내 안의 다른 누군가가 나를 채찍질했다.
정신 차려, 이정우!
네가 수십 년 전의 과거로 되돌아온 이유가 뭐야.
바로, 소중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잖아!
이 목소리는 내 것인가, 멀린이라는 자의 것인가. 둘 다 아니면 해골 가면의 목소리인가.
“귀찮아…….”
어느 쪽이든 내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등을 떠밀었다.
“귀찮아 죽겠네, 정말.”
나는 간신히 문을 열고 객실을 나섰다.
순간, 차가운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군.
역시 사기적인 스킬인 만큼, 제약이 있었어.
바로, 특정 구역 안에서만 지속된다는 것.
‘그래서 잠든 틈을 노린 거구나. 놈의 스킬이 꿈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자는 동안에는 이동하지 않으니까.’
복도로 나온 직후, 어디선가 비명이 울렸다. 여성의 목소리다.
“아아악!”
이 목소리는…… 이혜림!
우리 중에서 제일 약한 전력이다.
그런 동시에 절대 잃으면 안 되는 멤버이기도 하다. 사실상 보급 주체나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그래서 전원 개인실을 쓰기로 했지만, 그녀만은 설아와 같은 방에 묵었다. 설아가 자원하기도 했고.
“나는 혼자보다 언니랑 자는 게 좋아!”
설아는 이렇게 말했지만, 보나 마나 동료들을 위해 자기가 나선 거겠지. 심성이 착해서.
아무튼, 설아가 함께 있는데도 이혜림이 비명을 질렀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다는 뜻이다.
즉, 코덱스 놈이 그리로 간 것이다.
“블링크!”
나는 블링크를 반복하여, 순식간에 복도를 가로지르고 층계를 올랐다. 설아와 이혜림의 방은 3층 제일 앞에 있었다.
“설아야!”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이마를 양손으로 감싼 이혜림이 화들짝 놀랐다.
“이정우 기사님?”
설아는 그녀와 마주 보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옹? 정우야, 무슨 일이야?”
나는 얼른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둘 다 핫팬츠에 민소매 셔츠 차림이라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멀쩡해 보였다.
“……방금 비명은 뭐야?”
“아, 죄송함다. 2층까지 들렸습니까? 설아와 게임 해서 딱밤을 맞았는데, 그게 너무 아파서 그만…….”
설아가 변명하듯 얼른 말했다.
“최대한 살살 때렸어!”
머리가 안 터진 게 다행이네.
설아는 기사로 각성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힘 조절이 약간 서툴다. 보통 사람일 때의 감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까닭이다.
나는 빠른 투로 말했다.
“숙소에 적이 들어왔어.”
“엥? 진짜?”
“어, 어디에 말임까?”
두 사람이 놀라서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글쎄, 나는 비명을 듣고 여기로 온 줄 알았는데…….”
“확실한 겁니까? 이정우 기사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기습을 대비해 숙소 전체에 마력 감지기와 침입 방지 센서를 설치했지 않슴까.”
이혜림의 아공간에 보관하고 있던 장비들이다.
만능 컨테이너는 자체 보안 장치가 있는 데다, 어차피 원거리에서 공격받은 터라 별 효용이 없었다.
하지만 숙소에서는 상당히 쓸모 있으리라 여겼는데.
거기에 더해, 이 도시에 도둑이 많으니 조심하라는 악투샤의 조언도 있었고.
기사의 감각으로 도둑이 침입하는 낌새를 못 채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던전 내부니까.
“자는 사이에 꿈을 이용해서 공격해오는 놈입니다. 그런 보안 장치는 소용없어요.”
“꾸, 꿈을 말임까?”
“그러고 보니 둘은 왜 안 잤어?”
내 물음에, 설아가 답했다.
“그냥, 어쩐지 내가 잠이 안 와서. 내가 못 자는 걸 보고 이혜림 순경님도 혼자 주무시기 좀 그렇다고, 같이 놀아주신 거야.”
“그랬구나.”
결과적으로 그게 둘의 목숨을 구했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네. 사람들 방에 차례로 다 들러보자. 설아는 이혜림 순경님과 같이 여기, 3층 확인해. 나는 2층을 싹 훑어볼게.”
“아, 알았어.”
나는 계단으로 돌아가려다 마음을 바꿨다.
“설아야. 여기 바닥 부술 수 있지?”
“어, 으응.”
“그럼 뚫어.”
콰앙!
설아는 객실 바닥을 힘껏 내리쳐서 커다랗게 구멍을 냈다.
그 아래에서는 김태훈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와, 태훈 오빠. 천장이 부서졌는데도 안 깨네?”
설아가 신기한 듯 말했다. 옆에서 이혜림 순경이 안절부절못했다.
“이, 이래도 되겠습니까? 확실히 훨씬 빠를 것 같긴 하지만…….”
“이동 시간도 시간인데, 문이 잠겨 있을 수도 있고. 적이 문이나 창문 쪽을 경계하거나 뭔가 해뒀을 수도 있어요.”
“아!”
마침 이 여관은 객실이 샛길 쪽의 한 방향으로만 위치했다. 한국의 구형 복도식 아파트처럼.
그러니 설아도 일직선으로 쭉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설아는 어쩐지 신나서 말했다.
“좋아. 그럼, 여기서부터 끝까지 돌진한다?”
“그래. 조심하고. 순경님도 설아한테 바짝 붙어서 떨어지지 마세요.”
“넵. 이정우 기사님도 조심하십쇼.”
나는 설아가 뚫은 구멍으로 훌쩍 뛰어내려 김태훈의 침대 옆에 착지했다.
방 안은 부서진 천장의 잔해로 어지러웠지만, 침입자의 흔적은 없었다.
‘여기에는 아직 안 온 건가.’
김태훈은 여전히 곤하게 자고 있었다. 아무리 피곤했어도 명색이 기사인데, 이렇게까지 안 깬다는 게 이상하다.
어쩌면 꿈속에서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는 서둘러 그를 흔들어 깨웠다.
“형! 태훈 형! 일어나!”
“으음…….”
“아 좀! 깨어나라고!”
나는 김태훈을 흔들다가, 나중에는 뺨도 철썩철썩 때렸다.
그러다 뒤늦게 파티챗 기능이 떠올랐다.
‘맞아, 그게 있었지!’
코덱스 놈에게 워낙 호되게 정신 공격을 당한 데다, 최면에서 풀려난 직후라 정신이 없었다. 파티원들이 위험할까 봐 마음도 급했고.
-여러분, 들리세요? 적입니다. 매우 위험한 적이 숙소에 침입했어요. 자는 중이라면 즉시 일어나시고, 깨어 있다면 최대한 빨리 근처의 파티원과 합류하세요.
그때, 김태훈이 눈을 번쩍 떴다.
파티챗이 전달된 건가?
그런데 나를 보는 시선이 영 불길하다. 그저 잠을 깨워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어.”
“형, 얼른 정신 차려. 적이…….”
나는 말하다 말고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죽어!”
김태훈이 갑작스러운 외침과 함께 손을 뻗어 왔기 때문이다.
손가락 끝이 아슬아슬하게 내 눈가를 스쳤다.
뭐야, 진심으로 눈이라도 찌르려고 한 거야?
그게 다가 아니었다.
“죽어! 내 눈앞에서 사라져!!”
김태훈은 벌떡 일어나 발악하듯 주먹을 휘둘러댔다.
기사, 그것도 장래 특급 기사가 될 인물의 주먹인지라, 마구잡이로 휘두를 뿐인데도 한 대 한 대가 돌풍을 일으킨다.
나야 금강불괴 스킬이 있으니까 맞는다고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만, 물리력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는 게 문제다.
즉, 자칫하면 저만치 날아가 처박힐 거라는 뜻이다.
‘한시가 급한데 말이지.’
정신없이 공격을 피하다가 문득 최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코덱스 놈의 특기다.
‘이미 걸려든 건가?’
가만, 그런데 최면은 눈을 마주 봐야 걸릴 텐데?
내가 직접 걸려본 바에 의하면 코덱스의 최면은 강력한 대신, 한 번에 한 가지 사념밖에 심지 못한다.
따라서 ‘자다가 깨어나면 공격하라’라거나, ‘잠든 척하다가 공격하라’ 같은 명령은 할 수 없다.
김태훈은 분명 깊이 잠들어 있다가, 눈을 뜨자마자 나를 공격했다.
‘처음 보는 상대를 공격해라? 아니, 그것도 안 되는데. 무조건 그 전에 눈을 감고 있었거나 자고 있었다는 전제가 붙어.’
그렇다면 혹시, 다른 스킬에 걸린 건 아닐까?
코덱스는 눈을 통해 최면을, 소리 - 그러니까 귀를 통해서는 무기력 전파라는 스킬을 사용했다.
혹시 다른 감각을 통해서도 스킬을 걸 수 있다면?
잠든 사이에도 건드릴 수 있는 감각이 뭐가 있지?
‘냄새?’
생각하느라 잠깐 움직임이 느려진 순간.
퍽!
김태훈의 긴 다리가 쭉 뻗어와 내 허리를 걷어찼다.
“컥!”
나는 몸이 반으로 접히다시피 하며 복도로 날아갔다. 그러고서도 모자라, 여관 벽을 뚫고 나가 어느 집 지붕에 추락했다.
서민들이 사는 골목인지라, 함석 비슷한 약한 자재로 만든 지붕은 내가 추락하는 충격을 못 이기고 부서졌다. 나는 그대로 집 안에 떨어져 내렸다.
“으왁! 이, 이게 무슨 일이야?”
“꺅!”
집 안에 있던 장년인과 소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닮은 생김과 나이 차로 보아 부녀지간인 것 같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골목 정면의 쉼터 여관으로 와서 수리비 청구하세요!”
나는 서둘러 집 밖으로 뛰쳐나가, 김태훈의 방 창문을 바라보고 블링크를 발동했다.
팟!
내가 본 것은 투명한 창문 안쪽이었기에, 내 몸은 객실 안으로 이동했다.
우두커니 서 있던 김태훈이 나를 보자마자 또 덤벼들려고 했다.
‘뭐야, 왜 방 안에 그대로…… 아!’
나는 김태훈이 객실 안에 멍하니 머물러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장소 제한.
코덱스의 스킬은 강력한 대신, 일정 구역 밖으로 나가면 풀린다.
‘좋아, 그렇다면…….’
김태훈에게 접촉한 상태에서 객실 밖을 향해 블링크를 쓰면 된다.
문제는, 접촉을 어떻게 하느냐는 건데.
“에잇, 좀 설치지 말라고!”
양팔을 벌리고 붙잡으려 해봤으나, 돌아온 것은 김태훈의 음속 펀치였다.
퍽!
“와아악!”
고개가 세차게 뒤로 젖혀지면서, 나는 몇 바퀴나 공중을 돌아 여관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포물선을 그리면서 앞서 추락했던 집에 또 떨어졌다.
“어헉!”
“어머낫!”
집 안을 청소하던 아까의 부녀가 또 깜짝 놀라 나를 보았다.
“미, 미안합니다……. 수리 비용은…….”
장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맞은편 쉼터 여관에 청구하지요.”
“네.”
“싸움이 난 모양인데, 치안대를 부르는 게 어떻습니까?”
“그게, 가족 싸움이라서요.”
김태훈 이 자식, 애먹이네.
제정신 차리기만 해봐라.
이번에는 객실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생각했다. 김태훈은 어떤 상태이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가만. 그러고 보니 살의를 품고 덤벼드는 데 반해 목검, 그러니까 나이트 기어를 안 쓰고 있다.
공격도 스킬이 아니라 두서없는 주먹질, 발길질이었고.
‘제정신이 아니다?’
나는 아까 진실의 눈으로 확인한, 코덱스의 스킬을 상기했다.
애착 복제술, 이건 됐고.
파멸의 악몽도 아닌 것 같다.
최면과 무기력 전파도 아니니까, 남은 것은 -
‘착란 발동. 정신착란 상태에 걸렸구나!’
^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