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12부 : 열사의 제국에서 (20)
목욕하던 김태훈이, 보이지 않는 적의 갑작스러운 습격과 할파스의 배신으로 위기에 처했을 무렵.
손태준도 당혹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아니, 그에게는 당혹을 넘어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몇 분 전.
손태준은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려던 차였다.
본래 그는 거의 수면을 취하지 않았다. 굳이 필요가 없을뿐더러, 자는 시간조차 아까워서였다.
만능 컨테이너에서 쉴 때도, 잠을 잤다기보다는 명상을 한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숙면하고픈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이진욱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피로가 원인이었다. 손태준 자신도 그 사실을 알았다.
기사, 특히 손태준 정도 경지에 오르면 자신을 관조할 수 있다.
물론, 마력이라는 기운 자체가 인간이 쓰기에는 워낙 불안정한지라, 관조가 필요한 상황에서 곧장 정확하고 단호하게 행해지진 않는다.
애초에 한순간에 자신을 들여다보고 문제를 파악한다는 것은 관조라기보다 깨달음에 가깝다.
어떤 문제로 고민이나 괴로움이 길어지면, 시간을 두고 찬찬히 돌아본 뒤 정확한 원인을 찾아낸다.
손태준은 공략이 길어지면서 계속해서 우울하고 피로한 자신을 발견했고, 그 원인이 이진욱의 죽음임을 확신한 것이다.
‘후우…….’
이는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니까.
이진욱은 성격에 다소 문제가 있긴 하나, 손태준이 아끼는 제자이자 사신 기사단의 창립 멤버였다.
가장 오래 곁에서 함께 활동한 동료였으며 따로 피붙이가 없는 손태준에게 가족이기도 했다.
그런 이가 죽었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게 더 큰 문제다.
다만, 지금이 던전 공략 중이라는 게 문제였다.
우울함과 슬픔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큰 차질을 빚게 만든다. 이는 길어질수록 더욱 그렇다.
이에 손태준은 관조를 통해 천천히, 이진욱의 죽음이 가져다준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잊지는 않되 슬픔이라는 감정에 매몰되어 마냥 허우적거리지도 않는다.
이게 손태준이 내린 결론이었다. 기본적으로 그가 몸도 마음도 강한 인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극복의 첫 단계가 숙면이었다.
‘자야겠다.’
잠은 단순히 휴식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그렇게 자려고 누운 지 얼마 안 지나, 작금의 황당한 사태에 맞닥뜨린 것이다.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엄한 투로 말하는 손태준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그 동요를 놓치지 않고, 갑작스러운 침입자가 대꾸했다.
“왜 그러십니까. 제가 못 올 데라도 왔습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혜인아.”
최혜인은 어디서 났는지, 속이 비치는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채였다. 얼굴에는 은은하게 홍조를 띠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너 왜 이러는 거냐?”
말한 직후, 최혜인이 별안간 손태준에게 달려들어 안기려 했다.
“사부님!”
“!”
손태준은 차마 최혜인을 뿌리치지는 못하고 팔을 들어서 막았다.
그러나 그녀도 최상위의 기사인지라, 힘도 속도도 손태준에게 뒤지지 않았다.
최혜인은 손태준의 팔을 교묘하게 피해서, 침대에 일어나 앉은 그를 기어이 끌어안았다.
‘이 움직임, 속도……. 훌륭하게 성장했구나.’
이 와중에도 손태준은 무심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목을 안아 당기는 최혜인의 팔을 느끼고 기겁하여 그녀를 밀어냈다.
“잠깐만! 너 정말 왜 이러냐?”
“몰라서 물으십니까, 사부님?”
“그래, 모르겠다.”
최혜인은 촉촉해진 눈빛으로 손태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는, 전…… 오래전부터 사부님을 좋아했습니다. 처음, 저를 그 지옥에서 구해주셨을 때부터 말입니다.”
손태준은 황당해졌다.
‘이런 아이가 아닌데?’
그는 혹시 인베이더의 수작이 아닌지 제일 먼저 의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와 최혜인만이 아는 일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둘의 첫 만남.
그 사연을 아는 것은 손태준과 최혜인 그리고 이진욱뿐이었다.
현혹술 같은 스킬에 걸렸을 가능성도 크지 않다.
최혜인은 기사로 각성하면서, 정신계 스킬 면역이라는 강력한 능력을 얻은 까닭이다.
‘……백번 양보해서 이게 혜인이의 진심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적절하지 않다.’
마음을 정한 손태준이 말했다.
“지금은 던전 공략 중이고, 게다가 네 사형이 죽은 직후다. 이럴 때가 아니다.”
“……지금, 저를 거절하시는 겁니까?”
“거절이 아니라, 때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손태준이 그 말을 내뱉은 직후였다. 최혜인이 갑자기 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진저리치며 화들짝 물러났다.
“아악! 저, 저기…….”
“음?”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뒤를 돌아보려 한순간.
푸슉!
“커헉!”
손태준의 명치로 굵직한 창날이 튀어나왔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쿨럭, 너, 네가…….”
그를 찌른 것은,
“이야, 이러시면 섭하죠, 사부. 나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사매한테 손을 뻗습니까? 언제는 딸 같다면서요?”
다름 아닌 죽은 이진욱이었다.
이진욱은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미간에 구멍이 뚫려 피와 뇌수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입에서도 검붉은 체액이 흘러나왔다.
“지, 진욱아. 네가 어떻게…….”
손태준의 이성은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부정했다. 불가능한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과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죽은 이를 언데드로 되살린다는 마신급 인베이더에 대해 이미 보고받은 바 있었다.
더구나 이곳은 던전 내부다.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렇다면, 이진욱은 어디부터 보고 들은 것일까?
더 심각한 문제는, 죽었다가 돌아온 자는 대개 사악해지고 악의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 몸을 차지한 영혼은 이미 그 자신의 것이 아닌 까닭이다.
“진욱아, 오해다. 나는…….”
“크큭, 변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사부가 혜인이를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는 걸.”
“뭐? 그게 무슨……. 크악!”
이진욱은 손태준의 등을 찌른 장창 임프로누스를 돌려 비틀었다.
“그렇게 추악하게 살지 말고, 그냥 나랑 같이 지옥으로 갑시다. 단장.”
“으으, 너…….”
원래라면 손태준은 이런 상황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창대 앞쪽을 부러뜨려 빼낸 다음, 적절한 방어 스킬을 써서 이진욱을 밀어내면 된다.
그러나 죽었던 이진욱이 되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에게 최혜인과의 이상한 상황을 들켰다는 수치심과 당혹감이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 탓에 손태준은 제대로 스킬도 못 쓰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옆으로 물러선 최혜인이 기이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원탁을 내려다보던 센시가 말했다.
“역시, 확실해. 우리 중에서 제일 음험한 건 서포터 영감이야.”
서포터 노인은 사람 좋게 웃었다.
“허허, 그리 말하면 서운하지.”
이클립스들은 또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이번에는 끝이 안 보이는 거대한 정글 위였다.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원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원탁과 의자는 투명한 선반 위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수평으로 떠 있었다.
단, 평소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포르투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고가 드물게 센시를 거들었다.
“솔직히 좀 음험하긴 해요, 영감님. 휴면 상태의 메모리를 강제로 읽어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방식이라니. 바이러스랑 너무 비슷하잖아요.”
“이거, 마고 양까지 이러긴가? 내가 스킬을 쓴 게 아니잖은가. 내 크래커, 코덱스의 작품이지.”
서포터 노인이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어느 정도는 변이성 버그의 자업자득이기도 하고. 코덱스도 아예 없는 취약점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니 말일세.”
“하긴, 자업자득이든 자영업자이든 버그들 일은 내가 알 바 아니고.”
심드렁하게 내뱉은 센시가 말했다.
“미친……. 아니, 포르투나는 어디로 간 거야? 설마, 진짜 버그들 잡겠다고 강림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야. 포르투나가 애완견을 많이 귀여워하긴 했어도, 그 정도까지는…….”
“그건 그냥 애완견이 아니잖아. 죄악의 증거이기도 하니까. 비록 복제이기는 해도, 마지막 남은 종이 또 하나 사라져버린 거잖아. 어쩌면 포르투나는 거기에 더 분노했는지도 모른다고.”
그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센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만약 정말 포르투나가 그리로 간 거라면, 최소한 변이성 버그들이 싹 지워지기는 하겠네. 유희가 빨리 끝나버리는 건 아쉽지만.”
“멍청아. 유희가 끝나는 게 문제가 아니야. 모처럼 만든 타워형 연결 통로가 통째 사라져버릴 거라고. 한창 동조화 중인데.”
“멍청이라니, 말이 심하네.”
“7 곱하기 6은?”
“45?”
마고는 손가락을 꼽아보는 센시를 일별하고 서포터에게 말했다.
“차라리 영감이 코덱스한테 명령해서 얼른 버그들을 제거해줘. 그러면 혹시나 포르투나가 그리로 갔어도, 분노의 대상이 사라진 뒤면 헛심만 빼고 오겠지.”
“허허, 그러려나?”
“아, 빨리! 저 타워 던전 만드는 거, 품이 꽤 들었단 말이야. 복제 차원을 몇 개나 갖다 붙였는지 알아? 메모리 데이터 조작도 엄청나게 했다고!”
“엄살은. 마고 자네한테는 쉬운 일이잖은가. 역대 이클립스 중에서도 프로그램 짜고 코딩하는 실력은 자네가 최고이니까 말일세.”
“칭찬은 고마운데, 귀찮아. 저거 새로 만들려면 무지무지 귀찮아. 우리가 따분한 일, 귀찮은 일에 쥐약인 거 알지? 오죽하면 그래서 매일 유희 거리를 찾는 거잖아.”
“무료함은 실제로도 우리에게 쥐약 같은 작용을 하네. 전뇌(電腦)의 회로 말단에 타우 캐시를 축적시켜서 메모리에 손상을 일으키니까 말일세.”
“그건 나도 알아.”
“허허. 내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군.”
그때까지도 부지런히 손가락을 꼽아보던 센시가 말했다.
“알았다, 43! 그런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왜 잡아, 영감? 어차피 온 얼굴이 주름인데.”
서포터 영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마고에게 말했다.
“……아무튼, 너무 염려 말게나. 이미 코덱스가 행동을 개시했으니. 놈들에게 남은 미래는 소멸뿐이라네.”
*
나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시츄에이션이지?
“보고 싶었어, 정우야.”
울먹이며 말하는 서지수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는데, 최소한 내가 아는 애니까 그렇다 치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원망스럽게 나를 노려보는,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로브 차림의 서양 미녀는 아무리 봐도 초면이다.
심지어 이게 다가 아니다.
“설아, 너는 또 왜 이래?”
“히잉, 정우야. 이 언니는 누구야? 지수는 왜 네 방에 있고?”
“아니,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뭐, 소싯적에 내가 인기가 좀 많기는 했다. 그때는 막상 공부밖에 몰라서 연애에 전혀 관심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여자들이 셋이나 침실에 몰려올 정도는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서, 여기까지는 최소한 수용 가능한 범위다.
제일 큰 문제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저 인간이다.
“이야, 우리 정우, 인기 많네?”
바로, 김태훈이었다.
이거야말로 혼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