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12부 : 열사의 제국에서 (19)
김태훈은 욕조에서 튀어나올 지경으로 펄쩍 뛰었다.
“으악, 시발, 뭐야! 왜 던전에 귀신이 있어?”
그의 머릿속에서 마신 할파스가 비웃었다.
-멍청한 녀석. 귀신 같은 건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인 거 모르뭉?
“아니, 일단 내 머릿속에도 귀신이 있거든.”
-크아아악! 이놈, 몇 번이나 말하뭉? 나는 귀신 따위 저급한 존재가 아니라, 위대한 마신이라뭉!
이 시끄러운 존재는, 차원문의 등장과 함께 김태훈에게 기생했다.
기생, 그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김태훈에게 들러붙어 끊임없이 살육을 요구하고 그의 마력을 흡수해 생존했기 때문이다. 놈은 곧 죽어도 공생이라고 우겼지만.
김태훈은, 처음에는 올 게 왔다고 여겼다.
‘나 드디어 미쳤군. 그래도 예상보다 늦었네, 하하.’
부모의 불화와 아버지의 폭력을 생각하면 자신이 미친 것도 이상하진 않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너는 미친 게 아니뭉. 위대한 마신의 아바타가 된 것이뭉!
‘미쳐도 뭐 이렇게 희한하게 미치냐. 말끝에 뭉은 뭐야?’
-나도 모르뭉. 이곳 인간들의 말로 표현했더니 이렇게 되었뭉!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의 안에 깃든 뭔가가 뚜렷한 의지를 가진 별개의 존재임이 확실해졌다.
처음으로 확신한 날은, ‘그것’을 받았을 때였다.
목검.
김태훈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확인하려고 방에 CCTV를 설치해 놨다.
정말 조현병이거나 귀신 들린 거라면, 뭔가를 하고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여겨서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그때마다 CCTV를 보고 확인할 셈이었다.
-언제까지 나를 부정할 셈인둥?
마신이라는 녀석이 또 뭐라고 칭얼댔지만 무시했다.
그러자 마신은 이렇게 말했다.
-좋둥. 내 너에게 선물을 하나 하겠둥. 그걸 보면 내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임둥.
다음 날 아침.
자고 일어난 머리맡에 문제의 목검이 놓여 있었다.
“하하, 이제 몽유병 증세까지 생긴 건가.”
김태훈은 자신이 잠든 사이, 무의식중에 걸어 나가서 어디선가 목검을 구해왔다고 여겼다.
그러나 방에 설치한 CCTV를 확인한 순간.
이제까지의 생각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곤히 자고 있는 김태훈을 머리맡에서 내려다보는, 붉은 눈의 검은 새 한 마리와.
그 새가 허공에서 목검의 손잡이 끝을 부리로 물고 끌어내는 광경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럴 수가…….”
-킬킬, 이제 내 존재를 믿겠음둥?
김태훈은 그것조차 제 눈이 멋대로 이상한 영상을 상상해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이에 몇몇 사람에게 문제의 CCTV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게 뭐야? 영화 예고편?”
“와, 되게 실감 나게 잘 찍었다.”
“저 새 설마 인베이더는 아니지?”
반응은 각자 달랐으나 그들이 본 것은 모두 같았다.
붉은 눈의 검은 새.
그러고 나서야 김태훈은 비로소 할파스의 존재를 인정했고,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시련은 그때부터였다.
마신은 끊임없이 김태훈에게 제물을 요구했다.
생명체를 죽여, 어둠의 마력을 채우고 욕구를 충족하기를 바랐다.
김태훈은 그것도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점차 거기에 동화되어갔다.
그나마 감정이 어긋난 대신, 비정상적인 평정심과 정신력을 가진 김태훈이었기에 거기까지 버틴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가 염려한 대로 일찌감치 미쳐버렸을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처음에는 쥐나 새, 길고양이 따위의 작은 동물을 죽였다. 그러고 나면 그것들의 생명력이 김태훈에게, 정확히는 마신에게 흡수되었다.
아무리 감정 회로가 어긋난 김태훈이라도,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그 규칙을 지키는 이유는 윤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귀찮아지고, 들키기라도 하면 행동을 구속받거나 최악의 경우 사형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할파스의 요구는 점점 커지고 집요해졌다.
-넌 천살성의 운명을 타고 났음둥. 내가 깃들게 된 것이 그 증거임둥. 그러니까 어차피 미래에 대학살을 저지르게 될 것임둥. 내 예언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음둥. 그러니까 무의미한 저항은 관두고 지금이라도 편해지는 것이 좋을 것임둥.
24시간 내내 머릿속에서 떠들어대는 할파스의 목소리는 둘째 치고.
김태훈은 점차 살육의 욕구에 시달리는 자신을 깨달았다.
급기야 밤마다 꿈속에서 누군가를 죽이기에 이르렀다.
그 대상은 매번 달랐다. 때로는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하던 아버지일 때도 있고, 때로는 학과 동기나 선배일 때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그나마 증오심 때문이라도 해도, 후자는 아무 이유도 없었다.
김태훈의 이런 욕구는,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냉정함에서 생겨났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그들이 굳이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때로는 모조리 치워버리고픈 충동을 느꼈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유혹하는 여성들에게서는 아무 매력을 못 느꼈으며, 교수들의 학식은 자신보다 부족했다.
아프질 않으니 의사도 불필요했고, 정치인들은 그야말로 분리수거도 안 될 쓰레기였다.
김태훈이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는, 어릴 때 엄마와 들렀던 추억이 있는 국밥집의 주인 할머니가 유일했다.
김태훈은 그 추억의 맛을 재현하지 못할뿐더러, 할머니는 어쩐지 죽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살의가 정수리까지 솟구칠 때면, 김태훈은 종종 국밥집을 찾았다. 주인 할머니를 보고 살의를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죽임둥, 죽임둥.
“시끄러워.”
-저 늙은 것을 갈가리 찢어 죽임둥. 그러면 너는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음둥.
“아, 좀 닥쳐.”
“뭘 그리 혼자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고 있누? 얼른 국밥이나 먹지 않고. 식기 전에.”
“네, 할머니. 하하.”
그렇게 버티던 어느 날 밤.
김태훈은 할머니마저 죽이는 꿈을 꾸었고, 자신이 한계에 달했음을 깨달았다.
그때, 처음으로 절망이나 좌절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던 김태훈에게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하나는, 귀찮게 따라다니던 학과 후배와 겉모습은 분명 똑같은데, 전혀 다른 냄새를 풍기는 수상한 존재.
다른 하나는 김태훈밖에 부수지 못한 동아리방의 더미를 파손한, 아무 냄새도 없는 동시에 할파스가 몹시 경계하는 소년이었다.
그렇게, 얼굴 도둑이라는 인베이더와 이정우가 김태훈의 앞에 나타났다.
김태훈은 전자를 죽여 없애 욕구를 가라앉히고.
후자를 따라다니면서 집착하여,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함둥? 주마둥?
“주마등이겠지……. 네 말버릇과 현존하는 단어를 편한 대로 합성하지 말라고.”
-주마둥이든 주마등이든, 그거 인간이 죽기 직전에 보이는 거 아님둥?
김태훈은 할파스의 비웃음 어린 목소리를 들으면서,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거의 내장이 튀어나올락 말락 한 지경의 깊은 상처가 나 있다.
귀신의 그것 같은 오싹한 웃음소리를 듣고 욕조에서 나오자마자, 뭔가가 그를 기습하여 상처를 냈다.
아무리 반쯤 무방비 상태였다고는 해도, 김태훈의 속도와 신체의 강도를 고려했을 때 적은 엄청나게 강한 존재였다.
김태훈은 배를 누르고 중얼거렸다.
“와, 벗고 있는데 공격하는 건 상도가 아니지.”
그는 나이트 기어를 소환하려 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뭐지? 이건…….”
그리고 곧 이유를 알았다.
마신 할파스가 검의 소환을 방해하고 있다.
김태훈은 기사로 각성하면서, 목검 소울 블레이드의 진명 - ‘귀혼’을 알아내 소유권을 가져왔다.
할파스는 그것을 다시 빼앗아 가려 하고 있다.
촥!
그러는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뭔가가 김태훈을 공격했다.
급한 대로 양팔을 들어 급소를 막았다. 그러자 팔 바깥쪽을, 뼈가 보일 만큼 깊이 베였다.
김태훈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공격은 귀혼이 아니고서는 막을 수 없다.
‘정우가 하듯, 아이언맨처럼 방어구를 불러서 자동으로 착용할 수도 없고. 저게 뭐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입을 틈을 안 줄 거란 말이지.’
방어구를 착용하려면 욕실을 나가야 한다.
김태훈은 욕실에서 방어구가 있는 객실까지의 거리가 수 킬로미터는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전에.
‘할파스. 너 미쳤어?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아니, 나는 지극히 정상임둥.
‘그런데 왜 귀혼이 못 나오게 막는 거야? 내 아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는 너뿐이니까, 네가 방해하고 있는 거잖아.’
-그야, 슬슬 네가 죽기를 바라기 때문임둥.
‘……뭐?’
순간, 김태훈은 처음 맛보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굳이 이름 붙이자면 배신감 비슷한 거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김태훈은 자신의 안에 있는 할파스와 이제 제법 긴 시간을 함께해 왔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보다 더 가까워졌다. 아무리 부모라도 자식의 24시간, 일거수일투족을 다 공유하기란 불가능하니까.
할파스는 김태훈 자신의 가장 추한 면은 물론,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바라는 것과 꺼리는 것을 낱낱이 아는 유일한 존재였다. 애초에 할파스에게는 비밀 자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런 존재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자신을 저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나는 네 강림체야. 내가 죽으면, 지상에서의 너도 소멸한다. 그 사실을 알 텐데?’
-한 가지, 그 섭리를 피하는 방법이 있음둥. 바로, 네가 죽자마자 너보다 더 적합한 강림체에게 옮겨가는 것임둥.
‘!’
-넌, 어느 순간부터 나의 통제를 안 따르기 시작했음둥. 처음에는 나의 강림체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라는 존재 자체도 부정했으니까,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줬음둥.
‘…….’
촥!
김태훈은 어깨를 깊숙이 베였는데도 통증을 거의 못 느꼈다. 이상하게 가슴 깊숙한 안쪽이 더 아팠다.
-하지만 전뇌인, 인간들의 언어로는 ‘기사’로 각성했는데도 넌 여전히 나의 요구를 거절했음둥. 아니, 드러내놓고 거부했음둥. 정확히는 그 인간, ‘존재하지 않는 자’를 만나고부터임둥.
할파스가 말하는 ‘존재하지 않는 자’란 이정우를 가리켰다. 분명히 실제로 존재하는데도 묘하게 그리 불렀다.
-나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내 요구를 듣지 않는 강림체는 의미가 없음둥. 오히려 나를 구속하는 봉인일 뿐임둥.
‘그래서, 나를 죽게 하고 옮겨 가겠다고? 너 같은 죽음과 전쟁의 마신을 받아들일 강림체는, 내 동료들 중에서는 없을 텐데?’
-있음둥.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김태훈은 할파스가 웃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자. 그자야말로 나의 강림체로 최고의 그릇임둥. 놈의 육체는 인간 중에서도 최고인데, 안은 텅 비어 있는 데다 최근에는 급기야 영혼이 분리되었던 것도 확인했음둥.
김태훈은 이정우가 가스로 가득 찬 돔 안에서, 이상할 정도로 오래 기절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놈, 그때를 말하는 건가.’
-한번 분리된 영혼은 떼어내기 겁나 쉬움둥. 내가 들어가서 놈의 영혼을 빼내 버리고, 텅 빈 몸을 차지하면 그만임둥.
‘너 이 새끼…….’
이를 가는 김태훈에게, 할파스는 결정타를 안겼다.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둥. 네가 좋아하는 ‘존재하지 않는 자’와도 이미 협의한 사항임둥. 놈은 내 제안을 듣고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음둥.
‘뭐라고?’
-그 몸이 강림체가 되어 내 힘을 얻으면, 인세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될 수 있을 터임둥. 그래서 수락한 것임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