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12부 : 열사의 제국에서 (8)
네 명의 이클립스는, 여전히 이과수 폭포를 구현한 하이퍼 홀로그램 위에 머물러 있었다. 원탁을 가운데 둔 채였다.
“푸하하하!”
센시는 얼굴이 붉어진 마고를 가리키며 박장대소했다.
“당했대요! 무려 200년 전부터 키워온 크래커가, 버그한테 당했어! 크하하학!”
늘 마고한테 눌리던 센시는 신나서 조롱해댔다.
마고는 거기에 반응하기보다, 자신의 크래커가 패배했다는 사실에 더 충격받은 듯했다.
“설마 레이저가…… 정말로 지다니?”
보다 못한 포르투나가 센시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만해, 센시. 네 크래커인 스키드 로우도 엉뚱한 곳에서 헛다리 짚었잖아. 못 잡기는 마찬가지라고.”
“크헤헤! 스키드 로우는 그래도 머리만 남진 않았거든?”
“어휴, 못 말려…….”
그때, 심각한 표정으로 수염을 어루만지던 서포터가 입을 열었다.
“이건 웃을 일만은 아니네. 센시 군.”
“왜? 난 완전 웃긴데?”
“크래커가 버그에게 당했네. 아무리 변이성 버그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 사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네.”
센시가 원탁 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솔직히 저것 때문이잖아. 갑자기 나타난 에너지 차단 수식. 저것 때문에 레이저의 연산이 멈추고 수식도 파훼되었다고.”
센시는 말끝에 또 마고를 놀리기를 잊지 않았다.
“물론, 저런 변수에도 대응하지 못한 레이저의 잘못이 크지. 푸흡!”
“으음, 그게 크긴 했지만…….”
웃던 센시가 비로소 정색했다.
“뭐야, 왜 그리 심각해, 영감? 설마, 정말로 변이성 버그들 따위가 우리 크래커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의 몸에서 은은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서포터는 부드럽게 손을 휘저어 그 기운을 흩어냈다.
“아서라. 자네의 투기를 받아내기에는 내 몸이 너무 노쇠했네. 내 기우였다고 하세.”
“흥.”
센시는 팔짱을 끼고 원탁 주변,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염려하지 마. 이제 곧 스키드 로우가 놈들을 따라잡아서 박살내줄 테니까.”
포르투나가 그에게 대꾸했다.
“그런데 스키드 로우, 방향치 아니야?”
의기양양하던 센시가 입을 다물었다.
“…….”
“그거 왜 수정 안 해?”
“……초기 데이터가 그렇게 설정되어 있어서 못 고친다고. 하나의 페널티에 하나의 강점. 몰라?”
“하긴, 세계를 창조하고 파괴하는 우리조차 섭리…… 뉴트리노 입자의 작용에서는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
“그래서 레이저도 결함을 가졌잖아. 오만함.”
마고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오만함이 발목을 잡았네. 그렇게나 버그들을 진짜 벌레처럼 여기고 방심하지 말라고 했는데.”
포르투나가 마고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도 소멸하지 않았으니까 다행이잖아. 뭐, 소멸해도 다시 만들면 그만이긴 하지만, 오래 축적해온 데이터가 사라지는 건 손해니까.”
“……재도전 가능해?”
“가능은 하지. 그런데 레이저가 몸을 재구현하기 전에, 나의 크래커가 먼저 놈들을 박살 낼걸?”
포르투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레이저보다 좀 느리긴 해도, 어쨌거나 그 아이는 나를 닮아서 원거리에서도 놈들을 처리할 수 있으니까.”
“……흥, 행운을 빌어.”
마고의 눈이, 원탁의 5좌 가운데 비어 있는 자리 - 카발리어의 의자를 잠깐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놓치지 않은 센시의 눈빛이 음울하게 변했다.
곧, 이클립스는 다시 원탁 위의 상황에 집중했다.
*
레이저와의 전투 끝에, 우리는 사막 가운데의 캠프에서 충분히 쉬어가기로 했다.
치유 스킬은 엄청나게 유용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마력을 이용해 생명력을 급격히 촉발하는 것이므로, 사용자에게도 받는 이에게도 부담이 온다. 그 치유가 강력할수록 더욱 그렇다.
‘윤성이 어머니 같은 분들의 난치병을 치유 스킬로 못 고치는 이유지. 차라리 사지 절단의 외상이면 몰라도, 난치병일수록 지속성 피로도가 너무 커지거든.’
자칫 병을 고치려다가 극심한 피로감으로 폐인이 될 수도 있다.
부담은 주로 피로의 형태로 오기 때문에 휴식하면 해결되었다.
이를 마력 피로라 하는데, 이런 형태의 피로는 물약으로도 회복하기 어렵다.
“이게 만능 마력 컨테이너구나!”
설아와 윤성이가 텐트 대용의 컨테이너를 보고 감탄했다.
파티원들은 모두 이혜림이 소환한 컨테이너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내부는 겉에서 본 것보다 훨씬 넓었다. 주방과 거실은 물론, 두 개의 욕실과 소파, 테이블 같은 가구까지 갖춰져 있다.
미흡하나마 아공간 기술이 적용된 듯했다.
확실히, 이 정도면 만능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부끄럽지 않다.
이거 탐나네. 하나 사야겠다.
“최대 12인까지 휴식 및 숙박할 수 있슴다. 식사와 용변, 샤워도 물론 가능합니다.”
설명하는 이혜림에게, 김태훈이 불쑥 물었다.
“응가는 어디로 가는데? 설마, 계속 담아서 다니는 건 아니죠?”
“아, 특수한 기술을 써서 소량의 물과 분자로 분해됨다!”
“똥 분자라…….”
“분해하면 배설물이 아님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냄새 맡아 봤어요?”
“분해하면서 암모니아 성분도 사라지기 때문에 냄새가 나지 않슴다!”
김태훈의 짓궂은 말에도 끝까지 성실하게 대응하는 이혜림을, 류경재 총경이 치하했다.
“참, 혜림아. 아까는 정말 잘했다. 네가 정확하게 벼락틀을 써준 덕에, 적을 제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에헤헤.”
덕분에 긴장이 풀린 이혜림이, 평소와 다름없이 씩씩하게 말했다.
“거미 여자를 제압한 것은, 총경님의 제독검으로 실을 태워버린 덕이지 말임다!”
김태훈이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결정타를 먹인 건 난데…….”
그의 말에 이진욱이 끼어들었다.
“야, 솔까 그건 아니지. 결정타는 우리 사부님의 검은 죽음이었지! 그거, 몸통에 빵꾸나고도 아물어 붙는 거 못 봤냐?”
그의 말에 김태훈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내가 몸통을 아작냈으니까 목을 벨 찬스가 난 거죠. 그전까지 낫 들고 손가락 빨기밖에 더 했나.”
“뭐? 손가락을 빨아? 이 쉐키가…….”
상극인 속성상, 금세 아웅다웅하는 둘을 최혜인이 말렸다.
“그만하십시오. 모두 힘을 합친 결과입니다.”
소파에 앉은 차윤성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그거 정말 정체가 뭐였을까요?”
이진욱이 여전히 김태훈을 흘겨보면서 불퉁하게 답했다.
“뭐긴 뭐야? 사람은 아니니까 당연히 인베이더지. 던전 안에서 나타날 게 그것밖에 더 있어?”
“어쩐지 느낌이 달라서요.”
“무슨 느낌?”
“기사님들처럼 경험이 많진 않지만, 남산타워에서도 그랬고, 저도 어느 정도 인베이더를 가까이에서 접했거든요. 그런데 뭐라고 할까……. 느낌이 전혀 달랐어요. 인베이더는 확실하게 이질적인 생명체라는 게 와닿았는데, 그 여자는…….”
윤성이가 잠깐 말을 멈췄다가, 천천히 이었다.
“아무리 봐도 사람 같았어요.”
“야, 잘린 머리통에 다리가 돋아나서 도망치는 사람이 어딨냐?”
“그야 그렇죠.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게 더 무서웠어요. 전.”
“으음…….”
계속 농담처럼 받아치려던 이진욱이 무거운 신음을 토했다.
나는 최혜인의 옆에 앉아서 물었다.
“저, 기사님. 혹시, 크래커 아세요?”
“크래커? 과자 말입니까?”
“아뇨, 음……. 해커, 크래커 할 때 그 크래커요.”
“아, 그런 크래커라면 압니다만……. 그들은 온라인상에서 활동하는 이들 아닙니까? 지금 우리의 상황과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되묻는 최혜인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냥. 어쩐지 이번 공략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간 게 아닌가 해서요.”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그 말을, 류경재 총경이 알아서 해석해줬다.
“실은 나도 이정우 기사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네.”
이진욱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건 또 무슨 얘기죠?”
“그 여인 말이오. 혹시, 우리가 모르는 타국의 기사는 아닐까?”
“기사요?”
“음. 타워 던전의 공략 정보가 외부로 흘러나간 거지. 그래서 우리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던 거요. 아니면, 직후에 몰래 따라 들어왔거나.”
“어, 그러기는 어려울 텐데……. 그리고 그렇게 대가리만 남아서 도망치는 기사도 있어요?”
“거야 모르지. 기사들의 능력은 천차만별인 데다, 비장의 한 수는 일부러 공개하지 않으니 말이오. 더구나 상대가 타국 기사라면 더더욱.”
“흐음, 외국 기사가 입국했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이진욱은 답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확실히, 그 여자가 기사라면 억지로라도 말은 된다.
“인베이더라기에는 너무 인간 같기는 했지……. 강하기도 했고.”
조설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
“같은 기사인데 왜 우리를 다짜고짜 공격해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최혜인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만약 정말 타국의 기사라면, 몰래 들어왔다는 자체가 불순한 의도인 겁니다. 던전은 위험한 장소여서 미리 봉인하는 게 공략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만, 그 안에서 얻어지는 여러 가지 아이템이나 자원들도 중요합니다. 그걸 노리고 일부러 던전에 들어가는 기사들도 있습니다.”
“아, 아이템…….”
“허가받지 않고 침입한 기사가 우리를 봤다면, 제거하려 들 가능성도 없진 않습니다.”
“우리랑 힘을 합쳐서 공략하면 되잖아요!”
김태훈이 피식 웃었다.
“아이고, 우리 설아. 저렇게 해맑고 순수해서 어쩌나?”
“잉, 뭐가?”
“생각해 봐라. 몰래 들어온 자체가, 자기가 던전의 아이템과 자원을 독점하거나,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거잖아. 그런데 힘을 합치자고 하겠어?”
제 이익에 민감한 녀석이라 그런지, 정확하게 알고 있구만.
분위기는 점차 레이저의 정체가 타국의 기사일 거라는 쪽으로 흘러갔다.
뭔가 이해되는 설명이 아니고서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에서 큰 범죄를 저지른 암흑 기사일 수도 있겠지.”
손태준이 마지막에 툭 던지듯 한 말이 결정적이었다.
“아! 확실히 암흑 기사라면, 우리를 먼저 제거하려고 들 수도 있겠슴다!”
“암흑 기사 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강자들도 많소.”
이혜림과 류경재가 맞장구쳤고, 최혜인과 이진욱도 자신들 스승의 말에 토 달지 않았다.
다만,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아직 암흑 기사가 활발하게 활동하기 전의 시기인 데다.
그들과 달리, 진실의 눈으로 레이저에 대한 정보를 확인한 까닭이다.
나는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암흑 기사라고 해도, 어쨌든 기사라면 진실의 눈에 기사 클래스가 표시됐겠지. 어차피 암흑 기사들도 기사이기는 마찬가지여서 세파시 게임과 클래스가 다르지 않고. 그런데 클래스도, 칭호도, 기술도 아예 생소한 게 나왔으니…….’
나의 상념은 갑자기 콧속으로 파고든 맛있는 냄새에 깨졌다.
순간, 엄청난 허기가 밀려왔다.
마력 사용은 대량의 칼로리를 소모한다. 인체가 본래 지닌 것과 성질이 다른 에너지를 대사하는 까닭이리라.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윤성이와 설아가 양념치킨을 뜯어 먹고 있었다.
“쩝쩝.”
“개꿀맛.”
나는 배신감에 떨며 둘을 손가락질했다.
“뭐야, 너네. 어느 틈에…….”
입가에 양념을 잔뜩 묻힌 설아가 말했다.
“정우야, 너도 얼른 이혜림 순경님한테 주문, 아니, 보급 요청해. 너 빼고 다 시켰어.”
과연,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뭔가를 먹고 있다.
심지어 최혜인과 악투샤마저 라면을 흡입하는 중이었다.
“혜, 혜인 씨. 뭡니까, 이것은? 이 황홀한 맛이라니. 신의 음식입니까?”
“라면이라는 수프입니다.”
“라면……. 세상에 이런 맛이!”
“이…….”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내게, 이혜림 순경이 말했다.
“이정우 순경님. 뭐 드리면 되겠슴까?”
나는 서둘러 카탈로그를 펼쳤다.
“짜, 짜장면 부탁합니다. 곱빼기로!”
“옙. 바로 꺼내 드리겠슴다.”
우리는 정신없이 음식을 흡입했다. 그러느라 까맣게 몰랐다.
멀리서 컨테이너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아니, 먹는 중이 아니었어도 몰랐으리라.
당할 때까지도 몰랐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