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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107화 (107/303)

107화

10부 : 시험의 탑 등장 (1)

게임 속 전장의 안개 같은 뿌연 기운이 옅어지고 나타난 그것은.

“탑……?”

유주연이 멍하니 중얼거렸듯 거대한 탑이었다.

아니, 탑이 여기에서 왜 나와?

있을 수 없는 구조물이 갑자기 말 그대로 ‘발생’했다.

생긴 것은 언젠가 텔레비전의 여행 프로그램에서 봤던 피사의 사탑을 연상시킨다.

다만 그렇게 기울어지지 않았고, 높이도 훨씬 높았다. 꼭대기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만큼.

‘하필 해가 딱 가려지네. 꼭 일식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일식.

이 단어를 무심코 떠올렸다가 곱씹었다.

“일식, 일식…….”

왜 이렇게 불길하게 느껴질까?

그러자 갑자기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이번 메시지창은 여러 개가 겹쳐진 채 마구 흔들리고 내용도 깨졌다.

<경고! 금지된 코드에 접근했습니다.> -코드 이?##는 인위&&& %정된? 프^^램입[email protected]! $$과 ##을 불??다.

-방어 작용으로 능력이 일시적으로 봉인 및 하락합니다.

뭐? 왜 이래?

게다가 능력이 일시적으로 봉인 및 하락한다고? 하필 이런 때에?

과연, 전신에서 힘이 쭉 빠졌다.

레벨이 오르고 각성한다는 것은, 체내에 마력이 흐르면서 그 마력에 의해 전신 세포가 활성화하고 기운이 솟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활력이 넘치며 점차 그 상태에 익숙해진다.

그 상태가 갑자기 해제되면?

마치 오래 병으로 누워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수천 배 심한 슈가 크래시(카페인이나 단 음식을 먹은 뒤, 효과가 사라지면서 급격하게 닥치는 피로감) 같달까.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탑 자체도 음침한 기운을 풍기는 데다, 주위를 날개 달린 인베이더들이 날아다니고 있어서 딱 봐도 기괴하고 불길했다.

“저게 뭐야?”

“어느 틈에 저런 게…….”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탑에 잠깐 정신 팔리고, 내가 무기력감에 헤롱대는 사이.

“오, 옵니다!”

군필 청년이 비명을 질렀다.

‘아차!’

소형보다 더 아래의, 가장 작은 등급인 초소형 인베이더 떼가 나와 생존자들을 덮쳤다.

‘맹독 말벌.’

덩치가 어른 주먹 두 개를 합친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런 만큼 야수형 인베이더 가운데 가장 빠르게 나는 놈.

말벌이라는 이름처럼 생김도 벌과 흡사한데, 다만 몸 색깔이 말벌처럼 노랗지 않고 검은 줄무늬도 없다. 또 침으로 찌르지도 않는다.

대신 집게 모양의 날카로운 주둥이로 물어뜯는데, 그 주둥이에서 지독한 독이 흘러나온다.

보통 사람은 물리고 나서 몇 분 내에 십중팔구 사망한다.

놈의 전신은 핏빛처럼 붉었다. 그 새빨간 맹독 말벌들이 생존자들에게 어지러이 날아들었다.

마치 허공에 살아 있는 붉은 선이 그어지는 것 같다.

서둘러 그레이하운드로 마력탄을 쏘고 블링크를 발동하여 사람들을 지키려 했으나, 다 막아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단, 놈들은 잠자리처럼 허공에서 급정거, 급선회가 가능했다.

아무리 내 속도 수치가 높아도, 기본적으로 몸집에서 민첩성이 차이 난다.

정상적인 상태라도 막기 까다로운데, 방어 작용 어쩌고 하는 이상한 메시지창이 뜬 뒤에 움직임이 현저하게 느려져서 더 그랬다.

“오지 마, 이놈들!”

그나마 군필 청년이 남은 폭뢰의 구슬을 던져가면서 분전하고, 유주연도 로키의 단검을 열심히 휘둘러댔지만 역부족이었다.

“으아악!”

결국, 한 여성이 맹독 말벌에게 어깨를 물렸다.

나는 즉시 블링크를 발동했으나,

<금지된 코드에 접근한 부작용으로 일시적인 방화벽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코드 접근이 임시 차단됩니다.

이따위 메시지가 나타나면서 스킬이 발동하지 않았다.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무슨 개소리야?”

어쩔 수 없이 나는 물린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이보세요!”

“으으…….”

나이나 분위기가 근처 대학교의 학생인 것 같다.

오프숄더 상의를 입어 드러난 어깨가 검게 변색되며 부어오르고 있다.

그나마 살과 근육이 많은 부위인 어깨를 물려서 진행이 느리긴 했으나, 이대로라면 1분 내로 사망한다.

“인벤토리, 치유 물약!”

<금지된 코드에 접근한 부작용으로 일시적인 방화벽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코드 접근이 임시 차단됩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고!

인벤토리조차 제대로 작동이 안 됐다. 인벤토리 화면은 뜨는데 아이템이 구현되지 않는다.

쇼윈도에 쭉 상품이 진열되어 있지만 꺼내지 못하는 기분.

눈앞에 빤히 보이는 것을 못 꺼내니까 더 답답했다.

‘아, 이건 아니지!’

문득 이상한 기시감이 든다.

생각났다. 이것은 기사도 뭣도 아니고, 당연히 지금 같은 능력도 없던 과거의 나.

아니, 미래의 나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회귀해 오기 전의 내가 걸핏하면 느끼던 감정이다.

바로, 무력감과 좌절이라는 감정.

그래, 돌이켜보면 불과 석 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런데 뭐라도 된 것처럼, 어느새 내 능력과 인맥에 취해 있었다.

스킬.

다른 기사들에게도 없는 게임의 능력.

초월적인 매니저니 CEO니 하는 클래스의 능력과 부모에게 50억을 증여하고, 지인을 위해 30억짜리 집도 턱턱 계약하는 어마어마한 재력.

모두 100여 일 전까지는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이 사라진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구나.’

겨우 이 정도로 미래를 바꾸고 세계를 구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니.

‘역시, 사람이 더 필요해. 최소 다섯은…….’

그러다 퍼뜩 뭔가가 떠올랐다.

아까부터 계속 머릿속이 복잡하다. 무수하게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는 것처럼.

여기까지 생각은 길었으나, 실제로 걸린 시간은 1초 정도밖에 안 되었다.

황급히 인벤토리 맨 아래 오른쪽 구석을 확인해보았다.

있다! 작은 포장마차 모양의 아이콘이 희미하게 반짝인다.

지금까지는 왜 이걸 못 봤을까?

아마,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기에 생각조차 안 한 것이겠지.

나는 낭비와 비효율을 극혐한다.

따라서 이미 내가 가진 아이템을, 귀한 다크 스톤을 지불하고 살 확률은 한없이 0에 가깝다.

나는 잡템까지 포함하여 세파시에 등장하는 아이템 대부분을 가졌다. 그러니 저 아이콘에 눈길이 갈 리가 없다.

대개 게임에서 상점 아이템은, 드랍 아이템은 물론이고 조합 아이템이나 유저가 만든 아이템보다도 못했으니까.

나는 이렇게 망각을 합리화했다.

그렇다.

인벤토리 구석의 그 아이콘은, 세파시 게임 속 ‘상점’을 불러내는 아이콘이었다.

‘될까?’

이런 의문을 품을 여유가 없다.

능력치와 스킬이 봉인되고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못 꺼내는 지금, 다른 방도가 없다.

일시적인 현상이라고는 하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명이 죽어 나갈지 모른다.

그나마 가능성은 크다. 상점은 나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라, 유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공되는 거니까.

‘상점 오픈.’

그러자 눈앞에 웬 커다란 동그라미가 나타났다.

잘 보니,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운영체제에 렉 걸렸을 때처럼 뱅글뱅글 돌고 있다.

마치 허용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다.

설마, 이것도 안 되는 건 아니겠지?

이제 맹독 말벌에게 물린 학생은 입가에 거품이 생겼다.

약하게 경련도 일으키는 모양새가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

‘조금만 더 버텨줘요.’

나는 다른 생존자들, 특히 유주의 상황을 곁눈질했다.

로키의 단검이 뿜어내는 기운 때문인지, 맹독 말벌들이 그녀 주위로는 가깝게 다가오지 않고 있다.

그렇게 영겁 같던 몇 초가 또 지난 뒤.

<금지된 코드에 접근한 부작용으로 일시적인 방화벽이 생성되었습니다.>

“야, 이 미친!”

-상점 접근이 제한됩니다.

첫 페이지의 상품만 열람 및 구매 가능합니다.

“오.”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제한적으로나마 되긴 된다는 뜻인가?

그래, 아예 안 되는 것보다는 백번 낫지.

상점의 첫 페이지에는 보통 그날의 특가 상품과 물약 종류가 뜨거든.

특히, 많은 유저가 지속, 반복해서 사용하는 치유와 해독 물약 종류는 거의 99% 떠 있다고 봐도 된다.

아니나 다를까.

직후 나타난 상점 첫 페이지의 열 개의 상품 가운데는 치유 물약과 해독 물약 묶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파시 게임 속 상점 주인인 인공지능 NPC, 마녀 ‘모르가나’가 요염하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아서 님. 오랜만에 뵙네요.

“어, 어?”

아서.

정말 오랜만에 듣는다.

그래, 한때는 매일같이 보고 불렸던 이름.

‘나중에는 스캐빈저라는 별명으로도 많이 불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칭 겸 별명이고.’

게임 속에서의 나는 아서였다.

정확히는 ‘킹_아서_나이트’라는, 오그라드는 닉네임이 세파시 게임 속 내 계정 이름이었다.

저 근본 없는 계정명에 대해 변명하자면 - 어쩔 수 없었다.

초스피드로 계정을 생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아서’뿐만 아니라 ‘킹 아서’, ‘원탁의 기사’ 등등의 이름이 모조리 선점됐으니까.

한국인의 주특기랄까.

아니, 그것보다.

어째서 지금까지 내 계정명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따지고 보면 회귀해 오기 직전까지 게임을 했는데 말이다.

‘문정호 기사에게서, 게임이나 하면서 인생을 낭비한다는 소리를 듣고 발끈했었지.’

지난 몇 달 동안, 아서라는 이름을 한 번 떠올린 적조차 없었다. 아무리 회귀 직후라 정신없었다고는 하나, 뭔가 비정상적 -

-원하시는 물건이 있나요?

나는 모르가나의 물음에 퍼뜩 정신 차렸다.

한시가 급한데 이럴 때가 아니다. 그깟 계정이 뭐라고.

“최상급 치유 물약과 해독 물약 패키지, 전량 모두.”

-네, 탁월한 선택입니다. 가격은 각각 5D.S, 총 10D.S입니다. 거래를 수락하시겠습니까?

D.S는 세파시의 자원이자 화폐이기도 한 다크 스톤의 줄임말이다.

즉, 열 개의 다크 스톤이라는 뜻이다.

패키지 하나는 열 개의 물약이 포함되어 있다.

현실에서 다크 스톤 한 개의 시세가 300만 원 정도에 책정되어 있으니까, 치유 물약 10병에 1,500만 원, 한 병에 150만 원꼴.

성능을 고려하면 저렴한 편이다.

“수락한다.”

-네, 바로 교환이 이뤄집니다. D.S 잔고가 부족하지 않게 유의해 주세요.

슉!

곧바로 내 양손에 보냉팩 비슷한 가방이 들렸다. 얼른 뚜껑을 열어보니 물약 열 개가 가득 차 있다.

‘됐어!’

-더 필요하신 건 없나요?

“엉.”

-오랜만의 거래, 감사했습니다. 곧 전뇌성에서 뵐 수 있기를.

모르가나의 작별 인사 따위는 눈에도,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곧 상점 창이 사라졌다.

나는 먼저 해독약인 보라색 물약 한 병을 꺼내, 물린 여학생의 어깨에 반 정도 들이부었다.

그런 다음, 나머지 반은 입가로 살살 흘려 삼키게 했다.

세파시의 해독약은 독에 한해서는 외상약과 먹는 약 역할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헉, 헉.”

곧, 여학생의 숨소리가 점차 편해졌다. 어깨도 원래 색깔로 돌아왔다.

‘다행이다.’

문제는 나머지 생존자들이다.

최대한 빠르게 조치하긴 했지만, 그래도 몇 분이 흘렀다.

몇 분이면 사람 몇이 인베이더에게 죽어 나가기에 충분한 시간.

간간이 외침이나 작은 비명이 들려오긴 했으나, 예상보다 평온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게다가 맹독 말벌의 수도 조금씩 줄어드는 듯한 기분이…….

기분 탓이 아닌가?

주위를 살펴본 나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저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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