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6부 : 기사들을 키우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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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6부 : 기사들을 키우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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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6부 : 기사들을 키우다 (13)
2022.10.15.
마치 이진욱의 죽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땅에 떨어져 있던 그의 나이트 기어, 임프로누스가 홀연히 사라졌다.
이 결과는 내게도 예상외였다.
정면으로 싸웠다면 패하는 쪽은 십중팔구 차윤성이다.
아무리 윤성이가 미래의 광마이자, 팔왕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해도.
이진욱은 엄연히 각성한 기사고, 차윤성은 각성 전의 기사 지망생이니까.
그 차이는 엄청나게 커서, 정면 대결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다.
흥분한 이진욱의 주의가 고스란히 내게 쏠려 있던 것.
또, 차윤성이나 조설아가 자신을 공격하리라고 상상조차 못 한 것.
4미터에 달하는 장창을 들고 있었음에도 윤성과의 거리를 유지하지 않은 것.
마지막으로, 기사라도 충분히 참살 가능한 발뭉이라는 에픽 아이템을, 하필 광기 상태의 차윤성이 들고 있던 것 등.
이런 총체적인 상황이 이진욱의 죽음을 불렀다.
불운이 겹치면 커다란 짐승도 기생충 때문에 죽듯이.
……자, 앞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상당히 복잡하지만, 벌어진 일은 벌어진 거고.
당장 나는 분노에 차서 돌진해오는 손태준을 가로막아야 했다.
나 아저씨 팬이었다고!
“잠깐만요.”
“비켜라.”
한마디 했을 뿐인데 무섭다.
그나마 최혜인이, 충격과 슬픔에 빠진 가운데서도 손태준을 말리려고 애써줬다.
“안 됩니다, 사부님. 진정하십시오. 상대는 일반인, 그것도 미성년자들입니다.”
크흑, 천사. 최혜인은 찐천사다.
“네 사형이 죽었다.”
명왕이 내뿜는 압박감에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심장이…….
잠깐, 설마 이게 공황 장애 증상은 아니겠지? 지금은 곤란하다고.
“민간인을 해치려는 건 아니죠?”
시험 삼아 말해봤는데 다행히 목소리는 잘 나온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라서 그렇지. 공황 장애가 발동하진 않은 모양이다.
내 물음에, 손태준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뻔뻔하게 잘도 말하는구나. 저놈이 사신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내 제자인 이진욱을 죽였다. 기사는 법에 따라, 자신의 신변을 해한 자를 즉결 처분할 권리가 있다. 더구나 반성의 기미조차 없지 않은가!”
나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조설아가 여전히 으르렁대는 차윤성을 붙잡느라 울면서 쩔쩔매고 있다.
“흑, 아, 가만히 좀 있어. 미친놈아! 너 어쩌려고 그래! 흐흑, 저 사람들, 사신 기사단이라잖아!”
“크흐흐, 이거 놔. 사신이고 뭐고 저놈까지 죽여버릴 테니까.”
응, 반성의 기미 없어.
나는 손태준에게 차분히 말했다.
“그건 저기 이진욱 씨의 권리고. 손태준 씨가 복수할 권리까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법대로 해요.”
“뭐라고!”
손태준이 낫을 내게 겨눴다. 그의 나이트 기어, 블랙 사이드다.
나의 우상이 날 위협하는 상황이라니, 슬프구만.
원래 그는 무뚝뚝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동료애와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끔찍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최혜인과 이진욱을 향한 애정은 맹목적이다. 내가 윤성이와 설아에게 그렇듯.
그리 생각하니 반쯤 이성을 잃은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손태준에게 주목받길 원하진 않았는데.
“너,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막아서겠다는 거냐. 비켜라.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지금 손태준이 최대의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거기에 대고,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요.”
아저씨에게 최혜인과 이진욱이 소중하듯, 내게도 차윤성과 설아가 소중하거든.
아, 눈물이 난다. 피눈물.
그래도 일단 윤성이를 보호해야겠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이야 손태준이 반쯤 이성을 잃어서 앞뒤 안 가린다고 해도.
머리가 좀 식으면 윤성이를 죽이겠다고 날뛰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는 거다.
“저, 정우야. 어떡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조설아에게 말했다.
“윤성이 데리고 피해.”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해야 한다. 조설아는 내 말대로 차윤성의 손을 잡아끌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애썼다.
“아, 이리 와, 차윤성. 좀!”
하지만 제대로 광기 상태가 된 윤성은 손태준에게까지 덤비려 했다.
“적……. 죽인다!”
아무래도 이게 첫 번째 임계점 돌파인지라, 정도가 더 심하고 제어도 안 되는 것 같다.
이제까지 평생 쌓아온 분노가, 이진욱의 행동을 트리거 삼아 폭발한 것이다.
원래 윤철진에게 향했어야 할 것을, 내가 개입하여 해결하는 바람에.
윤성이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어디 쳐봐. 개X끼들아. 다 죽자!”
아이고, 윤성아.
평소 조용하던 애들이 눈 돌아가면 더 무섭다더니.
저거 손날로 뒷목이라도 쳐서 기절시켜야 하나.
결국 조금 가라앉는 듯하던 손태준마저 재차 폭발하고 말았다.
“오냐, 소원대로 죽여주마!”
그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아니, 당신까지 왜 이래!
나는 손태준 앞에 몸을 내던지다시피 했다.
쩡!
블랙 사이드의 날이 내 어깨를 묵직하게 내리찍었다.
이진욱을 해친 장본인은 내가 아니므로 죽일 마음까지는 아니라도.
방해한다면 팔 하나 정도는 주저 없이 날릴 셈이었던 모양이다.
어차피 최혜인이 치료해 주리라 여겼을 수도 있지만.
낫에 맞은 어깨가 찌르르하다.
이거, 진심인데?
내 팔이 멀쩡한 것을 본 손태준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놈, 그 창도 그렇고 제법 좋은 아이템을 가졌구나.”
손태준은 내가 베이지 않은 게 당연히 아이템 덕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긴, 금강불괴 같은 스킬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하겠지.
“저기, 좀 진정하시고…….”
“너 같으면 눈앞에서 동료가 살해당하고도 진정하겠느냐! 더구나 그 당사자가 날 우롱하는 판에!”
퍽!
나를 쳐내버린 손태준이, 차윤성에게 수직으로 블랙 사이드를 내리찍었다. 그 위로 검은색 벼락이 떨어졌다.
헐, 저거 스킬이네?
검은 죽음.
손태준의 10대 스킬 중 하나로, 독문무공 비슷한 필살기다.
어쩔 수 없다. 또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내가 이를 악물고 블링크 스킬을 써서 ‘검은 죽음’을 받아내려던 찰나.
“……윤성아!”
조설아가 차윤성을 안은 채 돌아서면서 온몸으로 그를 감쌌다.
서걱!
오싹한 소리와 함께, 조설아는 등을 휘며 경련했다.
“아!”
그녀의 몸이 목 뒤 바로 밑에서부터 척추를 따라, 등허리까지 세로로 서서히 갈라졌다.
놀랄 정도로 많은 피가 그 틈새에서 쏟아졌다.
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입에서 바보 같은 소리가 새 나왔다.
“어허……?”
조설아를 처음 만난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안 돼!”
차윤성과 최혜인이 거의 동시에, 피를 토하듯 외쳤다.
꼭지가 돌았던 손태준은 비로소 크게 낭패한 기색을 보였다.
“이, 이, 이런…….”
그는 잠깐 머릿속이 하얘진 듯했다. 명색이 기사단장이자 시민들을 수호하는 선봉장인데 애꿎은 소녀를 죽인 꼴이 됐으니.
그래, 혼란스럽겠지.
나도 그렇거든.
소심하고 겁 많은 설아가, 윤성이를 대신해 공격을 받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를 향한 두 사람의 호감도만 알았지, 둘의 서로를 향한 호감도는 몰랐던 게 실수다.
둘 또한, 깊은 유대감으로 맺어져 있었던 거다. 상대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만큼.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까?
손태준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됐다.
강력한 스킬을 사용한 직후의 딜레이가 더해지고, 방패도 없는데 그 특유의 강철 같은 의지마저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헤 벌어진 입에서 침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다.
강철의 벽은 민간인, 그것도 소녀의 목숨을 빼앗음으로써 긍지를 잃었다.
한마디로 그는 기사가 된 이래 - 아니, 모르긴 해도 사춘기를 지난 이후로 가장 약해졌을 것이다.
내가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설아를……죽였겠다?’
우상이고 뭐고,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강렬한 살의가 치솟았다.
순간, 눈앞에 해골 기사의 환영이 나타났다. 늘 꿈속에서 보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다.
아니. 이제 그게 내가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 해골의 입이 움직이며 머릿속에서 말했다.
‘뜻대로 행하라.’
푸확!
창날이 손태준의 목을 꿰뚫은 것은 그 직후였다.
설아의 죽음을 인지하고 해골 투구의 환영을 본 순간,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찌르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번 생도 제대로 망했군.
갓 등급에 스피어 마스터까지 적용된 신창 롱기누스는, 현시점 한국 최강의 인간에게도 가차 없었다.
목젖을 통해 들어간 창날이 그의 덜미를 뚫고 튀어나왔다.
<‘타고난 행운’ 특성이 발동했습니다.>
-급소에 치명타가 발동했습니다.
이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차라리 빗나가서 가슴이라도 찔렀으면 좋으련만, 이럴 때 꼭 치명타가 터지지.
이건 빼박 사망이다.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걸로 난 평생 도망자 각이구나.
그나마 부모님께 목돈을 드려서 다행이다, 등등.
그래도 단언컨대 후회는 없다.
손태준이 뭐라고 했더라?
너 같으면 눈앞에서 동료가 살해당하고도 진정하겠냐고 했던가?
못 했네. 도저히 못 하겠어.
눈을 부릅뜬 손태준은, 뭔가 말하려다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창대를 타고 피가 흘러내리다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아, 아아……. 사부님!”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질 치던 최혜인이 그대로 돌아서서 달아나려 했다.
그녀가 기사단이나 수경총에 보고하면 모든 게 끝이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죽여야…… 할까?
문득, 김태훈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너도 나와 같은 부류라니까.
나는 최혜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세상이 회색빛으로 변하며 모든 것이 멈췄다.
설아를 얼싸안고 오열하는 윤성이도.
스승의 죽음으로 패닉에 빠져 달아나려던 최혜인도.
모두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굳었다.
동시에, 한 번 본 적 있는 메시지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미 경험한 엔딩, ‘파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세 기사를 잃은 당신은 대폭주를 막아내는 데 실패하고 결과적으로 먼 훗날 세계의 종말을 불러오게 됩니다.>
<칭호, ‘리스타트 마스터’가 발동했습니다.>
-칭호의 권능으로, 본 이벤트에서 1회에 한해 분기점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와, 슈발. 슈발슈발슈발!
살았다아아아아아!
나는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진심으로 기도했다.
몸이 움직였다면 무릎이라도 - 아니, 오체투지라도 했을 것이다.
하나님, 하느님, 알라, 비슈누, 제우스, 오딘, 부처님, 공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긴 그렇지.
백번 양보해서 이진욱과 설아까지는 그렇다 치고.
손태준마저 죽어버리면 대폭주를 막기는 물 건너간 일이다.
개개인의 무력은 물론, 가장 뛰어난 기사단 하나의 협력을 잃게 되는 셈이니까.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혹시나 제한 시간이 끝날까봐 허겁지겁 선택했다.
“이동! 이동한다!”
팟!
잠깐 시야가 빛으로 가려진 후.
“헐…….”
눈떴을 때는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