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77화 (177/200)

[외전] 종말전야. 27. 타깃.

27. 타깃.

주민센터를 등지고 선 한건은 잠시 고민했다. 미니세탁기를 사서 빨래를 해야 할지 아니면 새 옷을 사야 할지다. 그러다 발길 닿는 대로 정했다.

‘새 옷이네.’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타난 건 의류전문점이다. 윈도우에 신상품들이 멋지게 전시 돼 있다. 보고 있으니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 가격을 확인하고 바로 나왔다. 그냥 미친 가격이다.

‘몇십만원씩이나 되는 옷을 입는 건 나한테 안 맞아.’

다시 걸음을 옮긴 한건은 마석 역 인근 거리를 분주히 걸었다. 역에서 제법 떨어진 아파트주변으로 가니 작은 상가거리가 형성돼 있다. 그 속에 구제의류매장이 있다. 대형창고매장은 아니지만 옷이 알차게 걸려 있다.

‘겨울옷도 준비해야겠다.’

이제 11월이 시작됐다. 아직은 날씨가 가을에 머물러 있지만 겨울은 곧 닥친다. 의정부집에 모든 짐을 두고 나왔기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그렇다고 필요한 모든 걸 사들일 상황이 아니다. 필요한 것만 사야 한다.

‘돈 걱정은 안 하지만……’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 사억도 거액이지만, 돈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니 행동에 나서면 구할 수 있다.

‘돈이 필요하게 될 거야.’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그렇다. 우선은 이종수씨의 부탁을 이루는 일이다. 그다음은 친구 이응삼과 약혼녀 송미진을 해친 청록원 놈들을 상대하는 일이다. 그 다음이 북극에서 실종된 친구 최병철의 생사확인이다.

‘하나씩.’

매대를 무섭게 노려보던 한건은 후 하고 숨을 내쉰 후 바구니에 옷을 담았다. 상하의와 외투와 점퍼와 모자와 신발까지 다양하게 구매했다.

큰 비닐봉투로 두 개나 되는 그것의 계산을 치르고 양 손에 들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에 힘을 주던 한건은 거리와 이질적인 자들을 목격했다.

‘나를 찾는 놈들.’

청록원이거나 현중이다.

20여미터의 거리가 있지만 저 걸음과 눈빛의 기세는 확연히 알 수 있다.

이제 보니 청록원은 아니고 현중놈들이다.

청록원보다는 조금 더 사제의 느낌이 나는 놈들, 그 차이를 놈들은 알까?

‘군출신은 없는 거야.’

두 놈을 스쳐지나가며 한건은 확신했다. 태연하게 걸음을 내는 자신을 응시하며 폰을 확인하는 놈들, 사진과 비교하는 거다. 그런 행동이 아니라 더 디테일하면서도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것들이 군과 다른 거다.

‘시선과 몸짓과 걸음에서 알 수 있는 것들, 군대만이 만들어준 버릇, 그런 게 청록원놈들에겐 있지만 현중놈들은 없어. 현중그룹은 군출신들을 구해 조직을 만든 게 아니야. 저런 자들은 양성하는 곳이 있는 거지.’

윤지희는 전략기획실이라고 했다. 그 조직 아래 있는 게 확실하다.

‘청록원은 군에 기반을 둔 정보요원들이 조직을 구성했고.’

윤지희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 국정원 출신들을 비롯해 다른 정보기관출신들을 데려와 조직을 이룬 거다. 가장 근원의 바탕은 역시 군이다.

‘최근 놈들은 그렇지만 처음 날 노린 하청업자 놈들은 많이 달라.’

하청업체이기에 그렇겠지만, 그들은 진짜 청록원이 아니었다.

이젠 그런 자들이 아닌 진짜 청록원 요원놈들이 움직이고 있다.

친구 이응삼을 해친 놈들에게 제대로 갚아줄 것이다.

어제 한방을 멱이며 시작했다.

‘심인구 회장.’

생각을 그자에게로 돌리며 한건은 현실적인 문제를 떠올렸다.

이종수씨의 유언을 이루자면 심인구 회장에게 접근해야 한다.

이젠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다. 원거리와 근거리, 되고 안 되고의 차이가 무엇인지다.

‘피를 토하고 뒈져버리라고 녹음하거나 기록해도 되지 않아.’

그러기 위해선 심인구 회장에게 접근해야 됨을 안다.

그를 시야에 두고 있거나 그에게 영향을 미칠 조건이 마련돼야 하는 거다.

그게 명확하게 뭔지 몰라도 그렇다는 걸 이제는 안다.

운석은 요술방방이가 아니다.

‘윤기훈은 그렇게 했는데 심인구회장은 안된 차이가 뭘까?’

어느새 집에 다다랐다. 빌라계단을 올라가며 한건은 그 생각에 집중했다. 그러던 한순간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어지럽다. 휘청하며 계단 벽에 몸을 기댔다. 그 순간 눈앞에 영상이 떠올랐다. 이종수씨가 한 일이다.

[윤기훈, 죄책감을 느낀 적이 있냐? 너 때문에 어린애들이 스물셋이나 불속에서 타죽었다는 걸, 그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는 숨 쉬는 거냐?]

[개소리 마! 법원에서 무죄라고 판결이 난일이다!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협박전화를 하려는 거라면 사람 잘못 봤다!]

이종수씨가 윤기훈에게 전화를 건 기억이다.

[윤기훈, 너는 이제 스스로 죄값을 치러야 한다. 네 부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베란다에 서서 소리쳐라.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할 거라고 외쳐라. 그리고 몸을 던져라, 네 몸뚱이가 박살나는 걸 느끼면서 죽어라.]

[무슨 개소…… 어, 나는……]

한건은 이제 알았다.

이종수씨는 윤기훈에게 전화를 걸어 투신하도록 명령했다.

그것이 먹혔다. 운석의 의지가 윤기훈을 제압했다.

그런데 심인구회장은 안된 거다. 그것이 안 이뤄진 기억이 바로 이어져 나온다.

[심인구, 갈아 마실 놈아……! 너는 네 집에 불을 질러 가족들을 태워죽이고 그 속에서 타죽을 것이다……! 죽어가면서 아이들에게 속죄해라!]

[으…… 나는, 나는……]

이종수씨의 명령은 분명 먹혔다.

심인구 회장의 저택은 화재로 소실됐다. 그 속에서 가족들도 타 죽었다.

그렇지만 심회장은 살아남았다.

그렇다는 건 운석의 힘이 끝까지 작용하지 않았다는 거다.

이건 차이다.

‘개별적인 차이.’

결과를 깨달으며 한건은 눈을 떴다.

이종수씨의 기억이 떠올라 휘청거린 계단에 서서 이 깨달음을 곱씹었다.

윤기훈에게 재대로 끝까지 통했지만 심인구회장에겐 그렇지 못한 결과의 차이, 이건 적용대상의 차이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듯이.’

사람들은 차이가 있다. 외모의 차이 성향의 차이 사상과 가치의 차이 등, 많은 조건들이 한 인간의 의식과 정신상태를 이룬다. 그 속엔 본래의 기질적인 차이를 포함해 얼마나 악하고 선한가의 차이도 있을 거다.

‘심인구회장은 운석의 의지가 끝까지 통하지 않은 의식의 소유자.’

그래서 결과가 달랐던 거다.

여기엔 이종수씨가 선택할 수 있었던 방법의 한계도 원인제공을 했다.

심인구회장에게 접근할 수 없기에 전화로 했다.

하지만 그랬기에 심회장은 운석의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접근해서, 눈앞에서 했다면 달랐을 거야.’

그랬다면 방법도 달랐을 테지만, 어쨌든 이종수씨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던 거다. 운석이 가진 힘을 알게 돼 그것으로 복수하는 방법이다. 그가 운석을 어떻게 손에 넣은 건지 궁금하지만, 그는 두려워했음이다.

‘운석을 가진 것에 대해서, 그렇게 복수하는 것에 대해서.’

여리고 착한 사람의 선택은 끝내 가족을 잃은 복수였다.

그 통한을 외면할 수 없음이다.

혼자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괴로워했음이다.

어쩌면, 이종수씨의 그런 마음으로 인해 심회장이 살았을지도 모른다.

‘운석의 의지가 반감돼서.’

그렇지만 윤기훈의 경우엔 지근거리에서 했기에 완벽히 이뤄졌다. 남양주 마석으로 이동해와 윤기훈의 아파트를 바라보며 전화를 한 것이다.

‘전화.’

한건은 그 의미를 새롭게 삼켰다.

이것으로 운석의 의지가 전류나 전파를 이용함의 예측은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한건 자신을 살렸고 외모까지 바꿔놨다.

상식으로 가늠하는 게 바보짓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밖에.’

한건은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 * *

-청록원의 정보를 공개하라는 여론이 비등함에도 해양수산부는 끄덕도 않고 있습니다. 경찰은 부도난 공장에서 사체로 발견된 두 명의 남자가 신원을 알 수 없는 상태라며, 확인을 하는 중이라는 답변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건과 별개로 놀라운 일이 확인됐습니다. 북극기지……

얼굴 흉터를 꿈틀거리며 유한기는 tv를 응시했다. 차체 중앙 천장에 매립된 소형 액정tv는 화질이 선명하다. 앵커의 얼굴주름까지도 보인다.

-다산기지와 해동기지가 폐쇄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폐쇄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기지 근무자들과도 일체의 연락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해양수산부는 이 일에 대해서도 대답을 안……

주먹을 움켜쥔 유한기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호흡을 골랐다.

결국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단속하던 기밀이 새버렸다.

이 결과가 자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자책하기에 앞서 현황을 되짚었다.

‘한건, 함인호, 이종수.’

운석출현은 세 건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은 북극사태 이 전에 퍼진 거다.

한건에게 친구 최병철이 택배를 보냈듯이다.

그와는 별도의 사례라고 명확히 밝히려는 건 무의미하다. 그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다.

‘운석은 역시 이미 퍼져 있는 거야.’

다른 운석 소지자들이 있는 거다.

그들은 이제까지처럼 드러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운석 소지자들은 비상식적이고 초과학적인 사건을 일으킨다.

그런 존재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러니 이일은 어렵고 힘들다.

‘한건, 세 개의 운석을 모두 가진 놈.’

어처구니없다는 마음이다. 허탈하고 황당하다.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걸로 여긴 자가 한건이다. 그런데 그자는 하청업자 놈들을 해결하고 도주했다.

현중그룹도 물 먹였다. 함인호와 만났고 이종수의 죽음 앞에 있었다.

‘이건 정해진 거야?’

한건에게 세 개의 운석이 모인 결과다. 의문이지만 확신이 든다.

우연이 아니다, 절대로 우연일 리가 없다.

북극에서 퍼져 나온 것이 한사람에게로 모인 거다.

이게 우연이라면 파리가 날다 떨어진 것도 우연일 거다.

‘한건을 잡자면……’

흉터가 일그러지게 이를 물었던 유한기는 전화벨 소리에 흠칫했다. 상체를 세우고 주머니 속의 폰을 꺼냈다. 예상대로 백곰부장의 전화다.

“예.”

-심인구회장 주변을 주시해라.

밑도 끝도 없이 핵심만 던지는 백곰부장, 이게 부장의 특징이지만 유한기는 깨달았다. 아무런 단서도 없는 상황에서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한건이 이종수의 복수를 마무리 한다?’

운석에 대해 아는 정보가 거의 없다고 할 형편이지만 그래도 아는 게 조금 있다. 그런 걸 기반으로 예측함이다. 폭력성을 유발하는 운석의 특징으로 유추한다면, 이종수의 원한이 한건에게 작용할 가능성이다.

-현중에서도 움직일 거다. 머뭇거리지 마라.

통화는 끊겼다. 유한기는 폰을 응시하며 백곰부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보다도 지금 더 바쁘고 화가 날 거다. 그렇지만 할 일을 하는 거다.

“심인구회장 정확한 위치 확인해라.”

지시를 내린 유한기는 차창 밖에 떨어지는 낙엽을 응시했다. 찬바람에 흔들리다가 결국 떨어지는 낙엽, 저 모습을 보노라니 기묘하게 서글프다.

“강남경찰서입니다.”

대답을 들은 유한기는 정말 머뭇거리지 않았다.

“출발해.”

* * *

강남경찰서를 바라보며 최강호는 곤혹을 삼켰다. 저 안에 있을 심인구회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이대로 지켜보다가 한건이 나타나면 기회를 잡을 것인가의 갈등이다. 확보하려고만 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부협력자들이 있으니까.’

그렇긴 한데 그 조건은 청록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쉽사리 움직일 수 없다. 그들도 어딘가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는 가정으로 대응해야 한다. 역시 문제는 한건의 출현이다.

‘교통카메라나 관제카메라들을 회피하는 움직임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데……’

정확한 모습은 포착 못 해도 그건 위치를 잡은 거나 같다. 그런데 한건도 이젠 그렇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래저래 쉽지 않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팀원의 흥분한 반응에 최강호는 현실로 확 돌아왔다.

‘저거 뭐야?’

눈을 크게 뜬 최강호는 대로 맞은편 강남경찰서를 주시했다. 현재 위치는 경찰서 맞은편 빌딩 5층 카페, 창으로 손님들이 와르르 몰려든다.

“어머나! 저거 뭐야?”

“총을 가졌어!”

“왜 저래? 저사람 경찰 아니야?”

놀란 반응으로 흘러내린 마스크를 본능적으로 올리며 경직한 카페 안 손님들, 그들 속에서 최강호는 봤다. 총 든 남자가 심인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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