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137. 사악한 숨결.
137. 사악한 숨결.
한강을 내다보는 야경에 취한 채 김호는 술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복분자주가 든 와인잔은 향긋한 주향을 풍겨내며 붉은 빛 색정을 흘려낸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도 이 빛깔에 아직도 홀리는 이유는 살아 있어서다.
‘함인건.’
국정원을 장악한 기조실장, 그놈과 손을 잡은 건 현명한 결정이었다.
고종환의 누만금 재산을 이제 가지게 됐다.
고종환이 죽은 결과는 정말 놀랍고 충격이었지만 결론적으론 잘됐다.
그 늙은이는 눈엣가시와 같았다.
‘어떻게 해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던 늙은이.’
그런 존재가 고종환이었다.
그런데 망했다. 자멸한 것이나 같다.
귀신이란 놈을 잡겠다고 설치다가 그 놈에게 죽었다.
딸년도 마찬가지다.
제 아비를 닮아 참혹한 짓을 저지르던 년이었다.
그년 목이 뽑히는 걸 봤다.
“허.”
다시 떠올리고 생각해도 황당한 충격, 김호는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를 냈다. 감탄인지 뭔지 모를 반응의 숨소리, 등골에 전율의 소름이 돋는다.
‘귀신이란 그놈이 죽었기에 망정이지 살아 있었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 거야.’
두고두고 계속해서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을 거란 생각이다. 그러니 죽은 건 정말 잘된 일이다. 고종환의 빈소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건 칭찬한다.
‘흡혈귀영감, 죽어서도 좋은 꼴을 못 보는 거지.’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피워내던 김호는 다시 미간을 찌푸리듯 좁혔다.
함인건의 뒷배인 선생님, 그렇게 부르는 존재가 누군지 아직도 모른다.
이건 정말 좋지 않다.
상대는 날 속속들이 아는데 나는 모르는 거다.
‘누군지 전혀 감이 안 잡혀.’
함인건 같은 놈을 만들어 낸 자인 거다.
오래전부터 계획을 그리고 실행해온 거다.
나이는 아마 김호 자신과 비슷한 노년으로 확신한다.
계획을 실행할 만한 재력이 있는 자다. 나라의 모든 곳에 손을 걸친 자다.
‘그럴만한 인물이……’
하나씩 떠오르는 자들이 있다가가 구체적으로 대입해보면 아니다. 그런 자들을 은밀히 뒷조사해봤지만 전혀 매치가 안 되는, 짐작과 예상에 모자라는 결과였다. 그래서 의문과 궁금증은 더 커지고 가슴이 무겁다.
‘함인건을 미행하거나 조사하는 건 불가능 해.’
국정원을 장악한 놈이다. 지금도 그놈이 붙인 국정원 놈들이 김호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터다. 그렇다고 확신한다. 정말 제대로 잘해야 한다.
‘그놈이나 선생님이란 놈 손에 안 놀아나려면.’
흔들던 와인잔을 멈춘 김호는 강한 눈빛을 흘려내며 복분자주를 넘겼다. 그 순간 비서실장이 다가왔다. 서늘한 눈빛의 그가 나직하게 말한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미간을 좁힌 김호는 비서실장을 응시하며 되물었다.
“손님, 이 밤에?”
찾아올 자가 없으니 의문이다. 동시에 드는 생각은 함인건의 눈들이 이 상황을 인지할 것이란 거다. 과연 누가 김호를 밤늦게 찾아온 것인지.
“외부에선 알지 못할 겁니다.”
비서실장이 이어낸 말에 김호는 미간을 더욱 깊게 좁혔다.
‘모른다? 국정원 놈들이?’
분명히 그 의미다. 비서실장의 저 눈은 그렇게 말한 거다. 그래서 더 강한 의문이 드는 거다. 비서실장 저놈의 눈빛이 원래 저랬는지, 지금 한 말의 진정한 배경이 뭔지, 찾아왔다는 손님은 누군지, 이 일이 대체 뭔지.
“김실장 너……”
김호의 말을 자르고 비서실장은 결론을 뱉었다.
“CIA에서 오셨습니다.”
김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직했다.
* * *
느껴진다.
적들의 숨결이 변화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일본내각조사실 산하의 정보요원들, 채널러들은 장철 자신이 오는 걸 알고 있다.
‘2팀이 감지했다면 그들도 감지했을 수 있지.’
그런 결과로 여겨진다.
일본은 국정원이 온다는 걸 예상하고 있던 거다.
그러니 오늘 밤 일은 기습이 아니라 적이 만든 함정, 기다리는 호굴로 들어가는 거다.
저들은 결국 충돌이란 결론으로 대적하겠단 거다.
‘원하는 건 이미 얻었고.’
길한수의 자료를 훔쳐간 결과, 일본은 역시 제 습성과 장기를 십분 발휘해 성과를 냈다. 심안제조에 관한 자료는 본국으로 넘긴 터, 피하지 않고 마주치겠단 의지다. 종국에는, 차후의 싸움은 다 이렇게 될 테니까.
‘남아 있는 직원들이 다치는 일은 없겠군.’
게임개발자들, 그들은 7층에 있다. 일본요원들은 10층에서 기다린다.
그들의 숨결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볼 터다.
땡,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장철은 걸어 나가며 말했다.
“주인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 *
미간을 거칠게 꿈틀거린 황철현은 리시버를 통해 들린 장철의 목소리를 되뇌었다.
‘기다려?’
의미가 명확한 소리다.
지금 장철과 2팀요원들이 들어간 빌딩, 원소프트 안에는 일본정보국요원들이, 채널러들이 공격대기중이란 이야기다.
‘그런 거라고?’
어떤 상황인지 전후를 찰나에 깨달은 황철현은 무선통신기에 대고 알렸다.
“코드레드, 코드레드. 적들은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다.”
이미 장철의 목소리를 다들 들었을 터, 황철현은 명확하게 상황을 결론 냈다. 일본요원들이 받아치기 위해 기다리는 상황, 그러나 분쇄함이다.
“2팀은 대기, 지원팀들도 대기한다.”
장철로부터 다시 상황인지가 되길 기다리며 대기를 명령한 황철현은 마음을 바꿨다. 차에서 나와 원소프트빌딩으로 향했다. 케이제로소총이 든 가방을 손에 들고서 빌딩 로비로 들어갔다. 김충식등은 긴장 속에 봤다.
* * *
동양인이다, CIA라고 해서 코가 크고 눈이 파란 서양인을 떠올렸는데 아니다. 엷은 미소로 자신을 소개하는 이놈은 한국말을 아주 잘한다.
“빅터 차라고 합니다.”
김호는 눈앞의 인물, 빅터 차와 비서실장을 번갈아봤다. 그렇게 깨달았다.
CIA는 진즉부터 자신에게 끈을 붙여뒀다는 것이다. 비서실장이다.
“용하다고 해야 하겠소. 바깥에 국정원 눈들이 있을 텐데.”
빅터 차가 흐릿한 미소를 또 짓는 가운데 김호는 비서실장을 응시했다. 네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란 눈길, 비서실장은 고개 숙여 보이고 물러간다.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두절미란 말까지 쓰는 놈이네 하는 김호의 눈을 마주 보며 빅터 차는 말했다.
“함인건 실장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 드리겠습니다.”
김호의 눈동자가 응축하는 가운데 빅터 차는 목소리를 이어냈다.
“한국의 미래와 안보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전하며 그 위험을 파훼할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자 합니다. 그럴 대상으로 미국은 김의원님을 택했습니다. 이결정의 의미를 헤아리시길 바랍니다. 역사적인 일이니까요.”
김호는 응축했던 눈동자를, 눈가를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 * *
10층 복도로 나선 장철은 그들을 봤다.
일본도가 내는 날빛 같은 안광을 흘려내고 있는 자들이다.
역시 손에는 일본도를 잡고 있다.
다섯 명, 적이 분명한 장철 자신을 보는 눈매가 기묘하다, 기운을 못 느껴서다.
“채널러가 아니구나.”
분명한 발음의 한국말을 뱉어 낸 자, 오인의 일본 채널러요원 중 중앙의 남자가 강렬히 눈을 빛낸다. 10층에 올라오는 자가 없도록 했는데 올라오는 자를 느꼈으니 적이 맞는데, 정작 채널러는 아닌 것 같아서다.
일본요원들 리더는 다시 말한다.
“무슨 생각이지? 채널러들은 어디가고 너 같은 자가 올라왔나?”
미간에 살기를 드리운 일본요원들의 리더는 일본도를 중단세로 겨눴다.
“애꿎은 피를 보고 싶지 않다. 넌 가고 그들을 올려 보내라.”
살려 줄 테니 너 같은 평범한 자는 돌아가라는 소리, 장철은 되물음을 던졌다.
“여기서 살아나갈 거라고 생각하나?”
일본요원들 리더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피어났다.
“중국놈들이 당한 것처럼 당할 거라고 봤다면 어서 해라.”
무심한 시선을 던지던 장철은 다시 물음을 냈다.
“왜 기다렸지?”
도망가거나 숨지 않은 이유, 한국이, 국정원이 이렇게 공격해올 것을 예상했으면서, 한국 내에서 이렇게 대응접전을 하겠다는 이유가 뭐냔 거다.
“여긴 본래 우리 땅이었다.”
일본요원들 리더의 입에서 나온 말, 단호한 자신에 찬 음성이다.
“우리가 되찾을 땅이지. 이 땅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곳에 발을 딛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우린 너희에게 안 죽는다. 죽는 건 너희다. 이곳에 들어온 너희를 모조리 죽이고 우린 걸어 나갈 거다.”
확신과 결의에 찬 음성과 눈동자, 리더를 향해 장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장철은 걸음을 냈다.
그 순간 기세를 풀었다.
바람의 노래와 숨결 속에 숨기고 있던 자신을 드러내고 발산했다.
일본요원들은 눈을 부릅떴다.
* * *
로비를 가로질러 가던 황철현은 리시버를 통해 들려오는 말에 눈썹을 확 곤두세웠다.
일본놈이 뱉은 말, 이 땅이 저희 것이라는 개소리다.
게다가 놈들은 다 죽일 거란 자신에 차 있다.
그럴 수 있는 놈들이란 얘기다.
‘미치지 않고서야……!’
여기서 기다릴 이유가 없다. 그런데 놈들은 미친 게 아니다.
뱉어낸 말처럼 자신 있는 거다.
저희의 채널링 능력에 대한 확신, 그런 놈들인 거다.
어쩌면 놈들은 한국의 능력에 대한 확인을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새끼들이……!’
이가는 숨을 삼킨 황철현은 로비 곳곳에서 대기 중인 2팀과 눈을 맞췄다.
올라가지 못해 몸을 움찔거리는 저들의 시선 속에서 경직했다.
귀신 장철이 싸움을 시작했다. 그 소리가 리시버를 통해 선명히 들린다.
* * *
장철이 보통사람이 아니란 것, 채널러라는 것을 인지한 일본요원들의 눈동자가 폭발하는 것처럼 팽창했다.
그 찰나에 거리를 좁히고 흘러간 장철은 리더의 안면에 주먹을 뻗었다.
반사적인 반응으로 칼이 나왔다.
왁 소리와 함께 일본도를 내리친 리더, 그의 눈이 경악으로 변한 건 정말 찰나의 찰나다. 장철의 주먹은 일본도를 수수깡처럼 부수며 들어가서다.
있을 수 없는 일, 다른 자도 아닌 채널러의, 리더의 힘이 든 칼인 거다.
그렇지만 부서졌다.
휘어지는 것도 아니고 튕겨나가는 것도 아니다.
유리를 박살내는 것처럼 도신의 중간이 파괴됐다.
주먹은 칼 주인까지 쳤다.
콰훅, 리더의 안면이 모래처럼 흩어지는 광경은 허상인 것 같았다.
수박이 박살나 흩어지는 것 처럼이 아니다.
정말 모래로 만든 두상이 흩어지는 것 처럼이다.
리더의 몸은 머리를 잃은 채 휘청거리며 허물어졌다.
리더가 쓰러지기 전, 머리가 흩어지는 찰나에 장철에겐 다른 자들의 일본도가 갈라 들어왔다.
전후좌우의 사방에서 네 자루의 일본도가 섬광을 토했다.
채널러들의 능력이 만들어낸 파워의 푸른빛을 토하는 칼이다.
흩어버려라.
울림의 이전에 장철은 휘돌며 칼날들을 받아쳤다.
주먹과 팔꿈치와 무릎과 발끝으로 도신을 흩어버렸다.
찰나에 수만 겁 동안의 회전을 이뤄내는 것 같은 모습으로, 소용돌이로 일본 채널러들의 육신을 유린했다.
태풍의 회오리가 된 장철에게 휘말렸던 사인의 일본채널러들은 튕겨 날아갔다. 부서지고 휘어지고 박살난 형상으로, 고깃덩이가 돼 경련했다.
움직임을 멈추고 선 장철은 경련하는 자들에게 다가갔다. 무심히 응시했다.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눈, 그러나 붉게 이글거리는 눈이다.
“뜻대로 못하겠구나.”
고깃덩이가 된 자들의 뜻.
빌딩에 침투한 모든 이들을 죽이고 걸어서 나가겠다는 의지였다.
그걸 이루지 못하게 됐다.
저들에겐 죽어가면서도 충격인 결과다.
채널러인 자신들이 종이인형처럼 박살나 죽는 것이다.
“끝났습니다.”
작게 중얼거린 장철은 돌아섰다.
통신을 들은 황철현과 2팀이 맹렬히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그 느낌을 삼키며 비상계단으로 내려갔다.
창밖의 어둠을 보노라니 다른 느낌이 든다. 큰 어둠이 몰려오는 느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