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118. 변하는 건 없다 2.
118. 변하는 건 없다 2.
작은 광장 같은 공간이다.
국가대표선수들의 체력훈련장 같은 곳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런 정도를 훨씬 넘는 교모의 시설물들이 있다.
기왕의 기준보다 수배는 규모가 큰 시설들이다.
검투사들의 훈련장도 겹쳐 연상된다.
‘채널러들의 집중훈련장, 능력측정소.’
그런 공간이란 걸 장철은 알았다. 시설물들 뒤에서 그들이 다가오고 있다.
채널러들, 소리봉에서 겪은 자들과 비슷한 수준의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들과 다르다. 저들은 총을 지녔다. 칼과 도끼 등의 냉병기도 있다.
‘스물 둘.’
포위하며 좁혀오는 자들, 채널러들의 숫자를 센 장철은 빈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도깨비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 놈들과 싸우느라 작두칼을 버렸다.
이빨이 다 나가서 더는 사용하기도 힘든 터라 놈들 몸에 박아줬다.
무기가 손에 없어도 다를 건 없다. 상대의 숫자가 몇이라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건 없어.”
작은 중얼거림을 흘려낸 장철은 채널러들을 보며 눈동자에 의지를 실었다. 자신을 이곳까지 오도록 한 의지, 갚아주기 위해 목숨을 건 원한.
붉은 빛이 장철의 눈동자에서 흘러나왔다.
그 순간 채널러들이 공격했다.
* * *
b구역에서 시작된 싸움을 보며 한용수는 경직된 숨을 힘겹게 넘겼다. 분노와 충격과 설명하기 힘든 모든 감정을 다스리려 애쓰며 입술을 물었다.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나?’
지금 이 순간 드는 생각은 그거다, 후회라고 하면 맞을 감정이다.
귀신 장철, 저 인간을 건드린 건 실수인지도 모른다.
이 순간 그렇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의 일로 끝내고……!’
복수니 원한이니 외면했어야 했다. 장사꾼의 눈과 마음으로 냉정하게 계산하고 현실을 봤어야 맞다. 그랬으면 귀신은 찾아오지 않았을 거다.
‘무슨 비루한 생각을!’
입술이 째진 것도 모른 채 한용수는 자신을 욕했다.
머릿속의 생각과 가슴속의 감정들을 밀어냈다.
아직 싸움중이다.
귀신에게 당한 것이 아니다.
저놈을 잡아 죽일 수 있다.
저놈이 악마가 아닌 이상 죽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폭발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나온 걸까?
안면이 부들거리는 것도 모른 체, 악문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는 체 한용수는 모니터만을 봤다.
* * *
권총을 겨눈 놈들의 눈이 붉게 빛나는 순간, 그 이전에 장철은 움직였다.
소금쟁이가 수면을 차고 나가는 것처럼 공간을 치고 나갔다.
총탄들이 옆을 스치는 찰나 놈들에게 다다랐다. 권총 잡은 손을 잡고 돌았다.
소용돌이가 된 장철을 따라 돌아간 채널러가 꽈배기처럼 휘어져 튕겨나갔다.
채널러라는 특별한 존재가 뭔지 모를 허무한 최후.
장철은 다른 놈에게 붙었다. 놈이 권총을 버리고 칼을 휘두르는 모습 그대로 휘어버렸다.
휘말려 짜부라진 캔처럼 돼 피를 터트리는 최후, 그 곳으로 다른 놈들의 총탄이 빗발처럼 날아왔다. 하지만 장철은 이미 회오리의 흐름으로 이동했다. 중세기사의 검 같은 걸 잡은 놈에게다. 그런데 놈이 외친다.
“우왁!”
움찔, 장철은 그 자리에 못 박혔다.
순간 깨달았다, 기억했다.
소리봉에서 자신을 이렇게 잡던 놈, 속박자다.
그런 명칭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능력의 채널러다.
그런데 한 놈이 아니다. 다른 놈도 소리쳐 잡는다.
“죽여!”
누군가의 격렬한 외침, 속박자들의 힘에 잡힌 장철을 향해 죽음들이 날아왔다. 총구화염에 밀려 날아오는 총탄들, 염동력이 더해진 날붙이들이.
* * *
스토퍼 둘이 귀신을 잡았다. 역시 이곳에도 저 능력자가 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른 채널러들이 일제히 공격한다. 이제 죽음의 순간이다.
‘헉!’
조중건은 다시 경악에 사로잡혔다. 귀신이 속박을 깨고 움직인다.
‘한명도 아니고 두 명의 스토퍼를!’
그들이 힘을 발휘했다. 영락없이 잡혔다. 단단히 속박됐다.
그런데, 그런 줄 알았는데 찢고 나온다.
그렇다, 저건 속박의 그물을 찢어발긴 거다.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귀에 안 들리는 귀신의 포효다.
* * *
흐르고 넘쳐서 뒤집어엎어.
울림을 쫓아 장철은 흐르고 넘쳤다.
뒤집어엎기 위해 태풍의 핵이 됐다.
육신을 뚫기 위해 날아온 총탄들의 결을 따라 흘러, 살을 비집으려는 칼날들을 맞아 휘돌았다. 그것들을 품고 태풍이 되어 다시 뿜어냈다.
* * *
“저게 뭐야!”
길한수의 경악 옆에서 최길준은 얼어붙었다.
지금 본 걸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귀신은 총탄이 빗발치는 속에서 휘돌았다.
그 회전으로부터 칼날들이 터져 나왔다. 그걸 던진 채널러들에게 날아갔다.
‘미친……!’
눈으로 봤지만, 보고 있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광경이다.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다.
어떠하든 그 결과로 채널러들이 반격당하고 있다.
귀신은 흐르는 바람처럼 물결처럼 움직이며 채널러들을 공격한다.
‘저대로는……!’
길한수가 경비원들에게 지원공격을 외치는 걸 들으며 최길준도 지시했다.
“귀신을 잡는다!”
이미 움켜잡고 있던 권총을 버린 최길준은 문밖에 대기 중이던 부하에게서 무기를 넘겨받았다.
‘XM25.’
25m 반자동 유탄 발사기다. 하나의 탄창에 5개의 25mm 탄을 탑재할 수 있다. 무게는 6.35kg, 돌격소총보다는 무겁지만 25mm 탄이 상대적으로 가벼워 40mm 유탄보다 많은 탄약을 휴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프간 전에서 위력을 발휘한 무기.’
대 엄폐(counter deflade)라는 명칭처럼 이 무기의 가장 큰 특징은 공중에서 폭발해 살상하는 능력이다. 파편을 주변으로 효과적으로 비산시켜 적을 제거한다. 사정거리도 40mm 유탄 발사기 대비 훨씬 길어서 직사의 경우 500m, 차폐된 목표물의 경우 최대 700m 까지 발사가 가능하다.
‘레이저 조준기로 겨누고……!’
귀신을 잡을 생각에 최길준은 전율을 삼켰다.
그렇다, 그 시간이 온 거다.
‘이젠 목숨을 걸 때다.’
모시던 한대건회장을 지키지 못한 책임, 이제 갚아야 할 때가 됐다. 귀신을 잡아 전략기획실장으로서의 책무를 다 하는 거다. 모든 것을 걸고.
“가자!”
전략기획실 부하들과 최길준은 b구역으로 달려갔다.
* * *
초조를 삼키며 황철현은 연구소를 지켜봤다.
폭발진동 이후에 별다른 변화는 없지만 내부가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건 당연하다.
도대체 어떤 상황일까.
g6에서 오는 동료들은 어디쯤일까, 답답하고 가슴만 뜨겁다.
“낯선 차량이 접근 중입니다.”
팀원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고개 돌린 황철현은 자동차 불빛이 다가오는 걸 봤다. 연구소 정문을 비켜 좌측편 담장 아래 정차한 자신들 옆으로 굴러와 멈춘다. 검정색의 벤츠다. 뒷자리 차문을 열고 누군가 나온다.
‘고초희!’
황철현은 눈을 치뜨고 경직했다. 연구소를 향해 호텔에서 본 그 미소를 흘려내고 있는 여자는 분명 고초희다. 그녀가 이쪽 편을 돌아본다.
* * *
열여덟, 쓰러뜨린 채널러의 숫자를 막 넘긴 장철은 바람의 노래를 들었다.
저편 통로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그 속에 담긴 숨소리와 냄새들, 다른 자들의 달려온다.
그런데 정말 위험한 것이 있다. 바로 폭발해 온다.
통로로부터 터져 날아오는 것을 인지한 순간 장철은 잡고 있던 채널러를 방패로 돌렸다.
목이 부러져 죽은 채널러, 그 앞에서 폭발이 터진다.
채널러의 육신이 뭉개지며 날아간다. 그런데 폭발은 연속해서 날아온다.
‘유탄발사기.’
그것의 공격임을 장철은 알았다.
그런데 자신이 알던 무기가 아니다. 동남아의 정글을 달리며 겪고 사용했던 것과 다르다.
그보다 훨씬 진화된 무기가 분명하다.
세 명이 미친 듯이 난사하고 있다. 사방이 화염이다.
흘러 돌아.
울림과 하나가 된 혼으로 장철은 움직였다.
수면을 차고 오르는 돌고래처럼, 수중보를 뛰어넘는 열목어처럼, 바람을 타고 나는 수리처럼, 태풍 속을 휘젓는 뇌전의 작렬처럼, 유탄의 폭발 속을 흐르고 돌아나갔다.
* * *
“뭐?”
충격의 광경을 눈에 담은 채 조중건은 눈썹을 곤두세웠다.
황철현이 걸어온 전화내용이 그렇게 만들었다.
지금 연구소 밖에 고초희가 있다는 거다.
상황을 어떻게 알았는지 달려온 거다. 아마 한용수가 알려준 것 같다.
‘아까 화장실에서……!’
그때의 한용수 표정에 기묘한 위화감이 있었다. 그게 이거다. 한용수와 고초희간에 뭐가 있는지, 그게 언제 이뤄진 건지 모르지만 있는 거다.
‘이것들이?’
그 내막이 뭐든 한용수는 귀신을 잡을 거란 자신으로 알려준 게 맞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게 아니다. 그래서 한용수는 넋이 나가 있다.
최길준 실장과 부하들의 공격가세로 b구역은 아수라장, 아무것도 안 보인다.
“고초희가 움직이지 못하게 해, g6에서 곧 도착한다.”
폰을 내리며 조중간은 한용수를 봤다. 전신을 부들거리고 있는 모습을.
* * *
철컥거리는 유탄발사기에 다시 탄을 채워 넣으며 최길준은 화염 속을 봤다.
자신과 부하들이 난사한 공격으로 인해 b구역은 초토화됐다.
이곳의 특성상 스프링클러는 없다.
불바다로 변한 저곳에 귀신이 아직 있다.
‘아직 안 죽었어!’
확신을 삼키며 최길준은 다시 유탄발사기를 겨눴다.
그런데 그 순간 화염 속에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오른쪽 부하의 발사기를 잡고 목을 친다.
콱, 하는 기음은 뒤늦게 인지했다. 그보다 먼저 목이 떨어져 나갔다.
‘이!’
본능적인 반사반응으로 최길준은 유탄발사기를 돌렸다. 그런데 귀신이 총구를 잡아 올렸다.
천정을 향해 날아간 유탄이 폭발하는 순간 느꼈다.
가슴을 파고 든 귀신의 손, 심장을 잡은 그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변하는 건 없다.”
귀를 파고든 귀신의 목소리, 그 찰나에 터진 심장의 울음을 최길준은 들었다. 그리고 쓰러지며 봤다. 귀신이 남은 부하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 * *
“어디서 오신 분들인가요? 국정원?”
단번에 정체를 꿰는 여자, 고초희의 사악한 미소를 보며 황철현은 소름을 삼켰다.
“우리 구면이죠? 호텔에서 봤어요. 날 살펴보던 분이네요?”
고초희는 색정적이면서 섬뜩하게 아름다운 미소를 어둠 속에 퍼트린다.
“경찰은 아니란 걸 알았어요. 그럼 어딜까, 답은 국정원?”
차갑고 낭랑한 고초희의 목소리와 미소 앞에서 황철현은 입을 열었다.
“무슨 용무로 이런 시간에 여길 온 건지 모르겠지만, 통제에 따라주십시오.”
“왜죠?”
바로 튀어나온 고초희의 물음에 황철현은 움찔했고 고초희는 웃었다.
“아 그래야 활 상황이란 거군요? 국정원의 통제에 따라야 할 대단히 위험하고 무서운 상황? 그렇죠? 연구소 내부에 지금 그런 일이 생긴 거죠?”
악의 꽃처럼 웃는 고초희를 보며 황철현은 자신도 모르게 권총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