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72. 귀신의 기억.
72. 귀신의 기억.
“귀신이란 이름이 처음 나오게 된 것이 국제시장파 양기태가 당한 사건부터로 알고 있습니다.”
공손한 목소리, 그렇지만 응시하는 눈동자는 마주보기 힘들게 강렬한, 오성파 보스 전두칠의 이야기를 고종환과 모여 앉은 자들은 묵묵히 들었다.
“12월이 다 가고 새해가 온다고 다들 들떠 있던 시기였습니다. 예, 그때는 그랬습니다. 해가 바뀌면 올림픽을 하니까요. 그 올림픽 때문에 거리를 청소한다고 부랑아며 거지며 모조리 쓸어내던 시절이었지요, 경찰이 하는 그 일에 협조하면서 제법 보람도 느끼던 땝니다. 그때 죽었지요.”
누가, 국제시장파 양기태가. 누구에게, 귀신에게.
“제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봤습니다.”
이어 나온 전두칠의 말에 고종환은 눈썹을 틀어 올렸다. 한걸음 뒤로 물러앉은 김부장도 눈동자를 번득였고, 이십 인의 조폭두목들도 그랬다.
“당시 스무 살이었습니다. 국제시장파에서 심부름을 하던 시절이었지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전두칠은 모두의 시선 속에서 계속 말했다.
“양기태는 국제호텔 룸살롱에서 질퍽하게 놀아나고 있었습니다. 국제시장파 간부들과 주요행동대원들이 같이 있었습니다. 열 명이 넘는 숫자였는데, 아마 열세 명인가 그랬을 겁니다. 전부 귀신에게 당했습니다.”
변함없는 결과, 귀신이 건재하기에, 그가 해온 일들을 알기에 당연한 결과, 전두칠은 고종환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허수아비들을 때려눕히는 것 같았습니다. 귀신 하나에게 난다긴다하던 국제시장파 주먹들이 다 박살났습니다. 그리고 양기태가 목을 따였죠. 그래놓고 귀신은 당당하게 걸어 나갔습니다. 아무도 안 건드리고요.”
당연히 아무도 그의 앞을 막지 않았다. 못한 거다.
“그 다음이 성북동 율재파와 수유리 장사파였습니다.”
바톤을 이어받듯 입을 연 자, 해오름파 보스 구천동에게 고종환은 시선을 돌렸다. 사실상 수도권조직들을 통합한 인물, 눈길을 주는 다른 보스들의 시선이 무겁다. 그러함을 느끼고 즐기며 구천동은 뒷말을 낸다.
“얼마 전에 형사들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어디를?
고종환의 칼날 같은 눈길을 덤덤히 받아내며 구천동은 계속 말했다.
“전도성에게 찾아 왔었더군요.”
전도성이 누군지 다들 안다. 전국회의원, 그렇지만 뿌리는 수유리장사파다.
“회장님께서도 이미 알아보셨을 테지만 귀신은 87년 그곳에서 처음 족적을 드러냈습니다. 희광이란 청부업자의 일에 얽히면서죠. 그게 우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희광이를 그렇게 만나면서 귀신이 생겨난 겁니다.”
고종환은 곤두선 눈빛을 누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천동의 말처럼 알고 있는 내용, 그런데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합수부의 조사가 온누리를 통해 넘어왔어야 할 것인데, 중간에 있던 놈이 그렇게 안했다.
‘박인수 경정.’
그 이름의 중관관리 놈이 수사보고서를 위로 안 올린 거다. 그놈을 합수부에서 잘라내고서야 알았다. 그놈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모르겠다.
“귀신은 희광이와 확실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다시 목소릴 낸 구천동의 미간에선 희미한 흉터가 꿈틀거렸다.
“귀신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사건들, 그것엔 우리의 책임이 있습니다. 귀신에게 청부한 주체들이니까요. 귀신이 어떤 존재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알면서도 청부했습니다. 경쟁 조직을 죽이고 미운 놈을 죽이려고죠.”
오성파 보스 전두칠이 시선을 내리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스무 명의 보스들 전부가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눈빛과 표정을 드러냈다.
그런데 한사람, 남천파 보스 지경호는 뺨을 갈라내려온 칼자국을 실룩였다.
“장을 담갔는데 구더기가 무서우니까 장 담근 게 잘못한 거라는 말 같습니다.”
구천동의 곤두선 눈길이 느릿하게 돌아갔다. 사실상 전국 조직의 제일인자, 그가 던지는 시선을 지경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받아냈다.
“맞습니다. 조직들이 서로를 죽이자고 한 짓입니다. 귀신은 호황을 누린 겁니다. 아주 매력적인 시장, 경쟁자도 없는 블루오션인 거지요. 그 시장을 만들어 준 게 우리지만, 우리가 등신이라서 그런 겁니까? 아닙니다.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귀신이 없었어도 결과는 비슷했을 겁니다.”
구천동이 입을 열려는데 고종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구회장이 말하려는 건 그 의미가 아니잖나?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구천동이 입을 다물고 된숨을 내쉬는 걸 힐긋 보며 지경호는 입을 열었다.
“옛날얘기나 하고 잘잘못이나 따지자고 서울로 올라온 게 아닙니다.”
고종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지경호는 핵심을 말했다.
“귀신을 잡을 방법, 그걸 찾자고 온 겁니다.”
구천동이 미간을 꿈틀거렸고 오성파 전두칠이 스산한 눈빛을 흘려냈다. 하지만 아무도 지경호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고종환이 동조해서다.
“맞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짓이지만 정말로 해야 할 일이 그거지.”
술잔을 들어 남은 술을 비운 고종환은 스무 명의 보스들을 일일이 응시했다.
“이렇게 모여앉아서 감정싸움이나 하자고 하는 자리는 더욱 아니야.”
쥐고 있던 술잔은 엎어 놓는 고종환을 모두가 바라봤다.
“귀신, 장철이란 그놈을 잡아 죽일 확실한 방법을 찾자는 거야. 내가 부탁하는 자리지.”
부탁하는 자리, 천하의 고종환회장이 부탁하는 자리인 거다. 그렇게 말했다. 그 의미를 보스들은 되새겼다. 저런 말을 하게 된 고종환의 가슴을.
‘한대건회장까지 죽어버린 마당.’
엄혹한 현실을 해오름파 보스 구천동과 오성파 보스 전두칠, 남천파 보스 고래 지경호는 각자 가슴에 새겼다. 다른 보스들 전부 현실을 삼켰다.
* * *
‘곽지호.’
이름을 되뇌는 동안 목적지에 다다랐다. 종암동이다. 이게 기막힌 우연인지 행운인지는 몰라도 종암경찰서 바로 뒷골목이다. 차를 종암서에 댔다.
‘이런 거라도 있어야 짭새하지.’
종암서를 나와 먹자골목에 들어선 최재우는 청룡각이란 중국집을 바로 찾았다. 배달오타바이가 막 출발하는 곳, 안으로 들어가는 데 전화가 운다. 얼른 돌아서 가게 문 옆에 붙어 섰다. 폰 너머 홍형사가 투덜댄다.
-예상대로 건질게 없겠습니다. 도로 중간 중간에 찍히긴 했는데요. 동두천 방향인 것만 확인했지 어디로 샌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번호판 바꿔달고 차색깔로 혼동이 오게 랩핑 같은 걸로 위장했던 겁니다.
조웅의 행적, 그가 타고 건물에 드나든 걸로 확인된 승합차 이야기다. 그러했던 흔적만 찾아냈지 화재를 내고 사라진 경로는 역시 깜깜이다.
-동일 모델 승합차들의 해당시간 경로를 추적중입니다만, 기대하지 마십쇼.
“그래 알았다. 어지간히 하고 쉬어라. 배고프면 뭐 좀 먹고.”
-아 짜장면이 심하게 땡기긴 합니다만.
내가 중국집 앞에 있는 걸 어떻게 알고, 귀신이네 하려던 최재우는 흠칫했다.
귀신이란 말, 그 단어를 쓰는 것도 이젠 예사롭게 안 되는 거다.
“알았다. 나중에 보자.”
-예, 수고하십쇼.
유지건과 송치호의 얼굴까지 그리며 최재우는 통화를 끝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청룡각 안으로 들어갔다. 짜장면 냄새가 확 반긴다.
‘정말 짜장면 생각이 나네.’
침을 삼키는 최재우에게 주방 안의 남자가 반갑게 소리친다.
“어셔옵쇼, 앉으세요, 뭐든 주문하시면 금방 해드립니다.”
정신없어 보이는 주방과 달리 홀은 한가하다. 요즘은 뭐든 배달이니까.
주방 쪽으로 다가간 최재우는 신분을 밝히고 용건을 말했다.
“경찰입니다. 장철과 관련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짜장면 소스가 가득 든 화구를 흔들던 사람, 중년남자가 멈칫하며 돌아본다.
사진으로 인지한 곽지호가 맞다.
합수부가 조사한 형제보육원 출신 중 한사람.
이 남자가 과거 보육원 화재에 대해 잘 안다고 했다.
‘공성훈의 말에 의하면.’
화구를 불 위에서 옮겨놓은 곽지호가 수건으로 손을 씻으며 주방을 나왔다.
“성훈이가 말한 형사님이시군요.”
공성훈이 전화한 모양이다. 형사가 찾아갈지 모른다고. 아니 찾아갈 거라고.
“앉으시죠.”
“괜찮으십니까? 바쁘신데 방해하는 거라면 제가 기다려도 됩니다만.”
“괜찮습니다. 아들놈들이 잘 합니다.”
힐긋 주방을 돌아보는 곽지호의 눈엔 대견함이 들어있었다. 그의 시선을 받는 젊은 두 남자, 곽지호의 아들들인 거다. 일찍 결혼한 모양이다.
“든든하시겠습니다.”
“아예, 뭐 그렇습니다.”
흡족한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곽지호는 먼저 테이블에 앉았다. 마주 앉은 최재우에게 음료수를 주려했지만 적극 만류, 최재우는 본론을 꺼냈다.
“형제보육원에서 일어난 화재에 대해 기억하시는 대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곽지호는 의외란 얼굴을 했다. 지금 온통 뒤흔들어 놓은 귀신 장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어서다. 물론 그와 관련한 거긴 하지만 결이 다르다.
“그게……”
미간을 좁히고 숨을 고르듯 호흡을 내쉬던 곽지호는 입을 열었다.
“그날 다들 술을 마셨습니다. 원장이 술을 사다 줬거든요. 하, 그 악마 같은 원장새끼가 그날은 무슨 마음으로 그런 건지, 무슨 속셈이 있었던 건지 그랬습니다. 물론 술은 형들에게만 줬죠. 그 정도는 했습니다.”
그 정도, 나동의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술을 주는 것 같은 행동은 안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게 원장의 양심에 의한 것은 아니란 소리기도 하다.
그 인간에게 양심 같은 건 없다는 곽지훈이 기억을 더듬는 눈은 거칠다.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일어났습니다. 화장실을 갔다 오는데 별관에서 불이 솟구쳐 나오더군요. 화마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때 깨닫게 된, 무서운 불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속에서 장철, 그 형이 나왔습니다.”
장철이란 이름을 힘주어 말한 곽지훈은 잠시 동안 말을 내지 않았다. 어떠한 감정상태인지를 헤아릴 수 없기에 최재우는 말없이 지켜만 봤다.
“철이 형이 날 데리고 나동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시 입을 연 곽지훈은 두 번째로 침묵했다. 짧은 말을 이어내고 다시 기억 속의 파도에 출렁거리는 모습, 흔들리는 눈동자는 마침내 멈췄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건데……”
결심을 굳힌 얼굴, 곽지훈은 숨겨왔던 진실을 토해냈다.
“겁에 질린 날 달래놓고 철이 형은 다시 나갔습니다. 무서워서 복도에 서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는데, 가동에서 비명이 들렸습니다, 겁에 질려서 무슨 일인지 볼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다 떨면서 내다봤습니다.”
침을 힘겹게 삼키는 얼굴로 곽지훈은 뒷이야기를 냈다.
“가동에 불이 붙었더군요. 불덩이가 된 형들이 튀어 나왔는데, 누가누군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오자마자 다들 쓰러졌습니다. 헤…… 복도창으로 그걸 보면서 바지에 오줌을 쌌더랬지요. 정말, 진짜 무서웠습니다.”
최재우는 느꼈다. 마주 앉은 곽지훈의 공포가 어떠했는지를.
“철이 형이 어딨는지를 보려고 이리저리 창밖을 훑어봤습니다. 그때 원장 사택에서도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창문을 깨고 누군가 나오려고 하는 것도 봤습니다, 하지만 창턱에 걸려 불덩이가 됐습니다. 그게 원장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짐승처럼 사육하던 원장, 벌 받은 거지요.”
두려움 속에서도 피어나는 한줄기 쾌재의 미소, 곽지훈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그 감정을 최재우는 캐치했다. 그러나 바로 어두워지며 굳는다.
“철이 형이 거기 있었습니다.”
목구멍이 아픈 사람처럼 또 침을 삼키며 곽지훈은 남은 말을 토해냈다.
“불이 난 원장 집, 깨친 창턱에 걸려 불타는 시체를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 * *
“한대건은 미국에서 용병들을 불러 들였다.”
차분하지만 뜨거운 것이 꿈틀거리는 고종환의 목소리에 모두가 집중했다.
“전문가들이라고 했지. 사람 죽이는데 이골이 난 놈들이라고. 총알이 빗발치는 분쟁지역에서 살아나온 놈들이라고, 귀신을 잡을 거라고 했어.”
그런데 당하고 만 결과, 고종환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목소릴 냈다.
“한대건은 아들놈하고 같이 귀신에게 죽었다. 귀신 그놈이 애초에 한진수 그걸 숨만 붙어 있게 해 놓은 이유인 거야. 한자리에서 죽이려고.”
그걸, 한진수를 가리키는 말에 든 분노를 모두가 느꼈다.
“귀신 그놈은 이제 나를 찾아 올 거다.”
모두가 안다. 그래서 묻고 싶다.
고초희가 당한 거냐고.
숨만 붙어 있냐고.
그렇지만 물어 볼 수 없다.
구천동도 지경호도 전두칠도 숨만 삼켰다.
“그놈을 잡아야 한다. 죽일 거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고종환은 결론을 뱉어냈다.
“귀신에 대해 원래부터 알던 자들이면 될 거라고 확신한다.”
구천동과 전두칠과 지경호를 비롯한 보스들은 뜨거운 숨을 흘려냈다.
오늘 이 자리의 이유, 고종환회장이 모두를 부른 원천이다.
귀신을 잡는 거다.
그 일인 걸 알고 왔다. 그래서 방법도 가져왔다. 그걸 말할 때다.
“회장님.”
입을 연 구천동을 고종환은 물론 다른 자들 모두가 바라봤다.
“진짜 살인자들을 써야 합니다.”
고종환의 눈이 꿈틀거리는 걸 똑바로 보며 구천동은 남은 말을 뱉었다.
“그런 자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