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47. 또 다른 살인.
47. 또 다른 살인.
“으, 개운치 않아.”
가슴보호대를 만지며 홍인구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병원에만 있기 갑갑해서, 그럴 수 없기에 다시 출근을 했지만 괜히 나왔다는 생각도 든다.
2주는 확실하게 쉴 수 있었는데 스스로 차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야, 홍형사, 요새 벌크업하냐?”
지나가며 던지는 동료의 농에 홍인구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걸로 답했다. 그러며 새삼 거울로 다가가 모습을 비춰봤다. 점퍼 안에 가슴 보호대를 착용해서 부해 보인다. 이 꼴이니 서류작업이나 할 밖에.
‘합수부로 가서 신나게들 돌아다니는데……’
최재우팀장과 송치호와 유지건을 생각하며 홍인구는 인상을 구겼다.
그게 고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부럽고 샘이 난다.
자고로 강력계형사란 그래야 해서다. 책상 앞에 앉아서 자판이나 두들기고 있는 건 정말 아니다.
“쓰바.”
가볍게 심정을 뱉은 홍인구는 믹스커피를 타서 책상으로 돌아왔다.
달달한 맛을 음미하며 밀린 서류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놈의 파일을 봤다.
남규덕, 홍인구 자신을 R병원에서 받아버린 놈이다. 그냥 풀어줬다.
‘이 새끼……!’
그날을 떠올린 홍인구는 분노가 치미는 걸 다스렸다.
남규덕 이놈만 아니었으면 윤완규 사건을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귀신 장철은 그래도 해버렸을 거라고 확신하긴 하지만, 아쉬움과 화가 치솟는다.
‘분명 현진이나 윤진에 끈이 있는 건데.’
남규덕이 그날 우연하게 홍인구 자신을 들이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계획된 액션이었다. 윤완규를 태운 앰뷸런스가 병원을 빠져나가는 순간, 장애가 될 요소를 제거하는 역할인 거다. 하지만 못 밝혔다.
‘그럴 틈도 없이……’
귀신이 만든 사건들에 정신이 없었다.
파헤쳐야 했던 현진은 박살났다.
윤진건설도 이젠 윤종대회장이 죽어버렸다. 두 회사에 요청했던 직원명부와 협력업체 자료 등을 검토했지만 남규덕과의 연관성은 입증 못했다.
‘교통사고로 밖에 처리하지 못했으니 그 개새끼를……!’
이가는 숨을 입술 사이로 흘려내며 홍인구는 작정했다.
‘남규덕, 어떻게든 모양을 내버린다.’
그래야 한다. 귀신이 만든 엄청난 사건들에 밀려나 방치된 것과 같은 상태지만 그놈을 그렇게 둘 순 없다. 사건과의 연관성을 밝혀내고 은팔찌를 선물해야 한다. 그놈도 지금 놀란 상태일터, 도주해 숨기 전에다.
‘체포영장만 발부 받아도 쉬운 일인데.’
사건과의 직접적인 관련성 입증이 안 된다는 이유로, 주거가 확실하다는 내용으로 영장은 기각됐다. 남규덕 그놈 건은 단순한 교통사고인 거다.
그런데 그게 아닌 걸 서로 알고 있다.
놈은 지금 충격 속에 있을 터다.
‘현진이 개박살 나고 윤진건걸 윤회장까지 당한 결과.’
귀신 장철이 그린 엄청난 그림에 입을 벌리고 다릴 후들거리고 있을 게 보인다. 이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터, 놈은 움직일 것이다. 자신 따위는 이제 사건의 곁가지에도 못 끼는 거지만 그래도다.
‘일단 움직이지 못하게 경고하는 차원에서라도.’
마음을 정한 홍인구는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 * *
새벽에 들어와서 두 시간을 채 못자고 다시 나가는 남편 최재우를 바라보며 유인주는 한숨을 소리 없이 내쉬었다. 자신 역시 경찰이었기에 저 생활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안쓰럽고 미안하다. 남편만 고생해서다.
“흥, 뜨밤은 무슨.”
일부러 냉소를 던지는 시늉으로 유인주는 잔을 내밀었다. 과일주스를 먹인 후에 또 내미는 잔, 홍삼이 들어간 음료다. 최재우 얼굴에 들이민다.
“뭘 또 마셔?”
“군소리 말고 마시라고. 늙은 남편 체력이라도 받쳐 줘야 할 거 아냐.”
“그건 그런데, 그게 누굴 위해선데?”
“헛소리 할래?”
“네, 알았습니다요, 마님.”
군말 없이 잔을 받아든 최재우는 얼굴을 찡그리고 잔을 비웠다. 그사이 유인주는 점퍼를 펼쳤다. 잔을 내린 최재우가 팔을 끼울 때 물었다.
“가평엔 여기 일 보고 다시 가는 거야?”
“글쎄.”
최재우는 모호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자신도 확실한 상황을 가늠하기 어려워서다.
어젯밤엔 귀신 장철의 접근을 예비해 그곳에 있었지만 아무 일 없었다.
오늘도 해가 있는 동안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귀신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계속 그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합수부인원들이 투입돼 있다면서? 가평서에서도 투입됐고? 오빠가 굳이 가야 해?”
불평처럼 들리는 아내 유인주의 말을 최재우는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런데 아내가 말한 냉정한 현실보다도 마음에서 울리는 게 있다.
‘귀신은 안 올 거야.’
그렇다는 예감이다.
귀신이 오길 바라는 자들, 그들이 원하는 시간에는 안 올 거라는 느낌이다.
그가 온다면 그들의 예측을 넘는 때일 것이다.
“상황이 맞춰서 해야지 뭐.”
뒤늦은 대답을 낸 최재우는 아내 유인주에게 돌아서 입을 맞췄다. 쪽 소리 나는 입맞춤과 포옹, 둘은 서로의 체온은 느끼며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순간을 방해하는 수작처럼 폰이 운다.
유인주가 폰을 잡았다.
“이쉑!”
육촌동생 유지건이다. 집밖으로 뛰어나갈 것 같은 아내 유인주를 제지한 최재우는 이마에 급하게 입을 맞추고 폰을 잡은 뒤 나갔다. 아파트 동현관 앞에 차를 세운 유지건과 송치호가 바라본다. 눈빛이 스산하다.
‘저것들이?’
최재우 네가 뭐하고 나오는지 안다는 눈.
“눈들 안 깔어?”
최재우의 한마디에 두 형사는 즉시 눈빛을 바꾸고 쑥덕댄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우린 진거죠?”
“지긴 졌는데 희망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우린 아직 젊잖냐?”
“그렇죠. 팀장님도 결혼했는데 우리라고 못하겠습니까?”
“당근이지.”
대놓고 속삭이는 둘의 수작을 향해 최재우는 출발을 지시했다.
“뒤에서 차 밀고 가는 수가 있다.”
유지건은 네 하며 얼른 출발했고 송치호는 고개 돌려 물음을 냈다.
“명지훈이 형제보육원출신인 게 왜 안 드러났던 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나도 마찬가지라는 유지건의 얼굴이 룸미러에 보인다.
“가족이 데려갔기 때문이다.”
“데려가요?”
운전에나 집중하라는 눈길을 강하게 유지건에게 던진 최재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명지훈은 열두 살 때 광천 시장에서 엄마와 헤어졌지. 원래 발달장애 비슷한 아이였다고 한다. 경찰에게 인계돼 부랑아가 돼서 서산의 형제보육원으로 가게 된 거다. 하지만 이년 후에 어머니가 찾아내 데려갔지.”
최재우는 제반설명을 이어냈다.
박인수 경정으로부터 들은 명지훈의 인생사다.
홀어머니와 여동생과 살아온 그가 장애인시설에 맡겨진 건 어머니 사후다.
여동생은 장애인 오빠를 돌보며 살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빠를 장애인 시설에 버린 여동생이 돈 때문에 찾아왔다고요?”
송치호는 황당한 분노를 품은 얼굴로 눈썹을 곤두세웠다.
“아니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했데요?”
여동생에게 돈을 보낸 거다. 2억이란 거금을 보냈다.
장애인 시설에 있는 오빠에게서 난 데 없이 거금이 입금되자 여동생은 당장 달려왔다. 오빠에게 엄청난 돈이 있다는 걸 알았고 나눔자리원장을 경찰에 고발했다.
“와, 요새 정말 양심 없는 인간들 천지삐까리네요.”
유지건의 분노에 공감하며 최재우는 박인수 경정을 생각했다.
모든 상황을 점검하고 있는 걸 이번 일로 알았다.
물론 고발이 있었기에 알았겠지만 나눔자리에 그런 분쟁이 생긴 걸 포착했고 여동생과 통화한 거다.
‘오빠가, 명지훈이 형제보육원에 이년간 있었다는 내용.’
박인수가 알아낸 그 내용의 자세한 내막을 이제 최재우 자신이 파헤쳐야 한다.
‘결국 귀신 장철, 조웅과 관련이 있었던 거야.’
조웅이 명지훈을 그냥 무작위로 선택한 게 아니었던 거다.
‘그들은 형제보육원에 함께 있었어.’
차는 어느새 동두천 경계로 진입하고 있었지만 최재우는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 * *
“씨발,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폰에 눈을 박은 채 남규덕은 편의점을 나왔다.
귀신사건을 보도하는 뉴스는 소주병만 늘어나게 하고 있다.
불안하고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
현진은 풍비박산이 났고 윤진건설도 회장이 살해돼 망하기 일보직전이다.
‘귀신……!’
이 모든 게 그 남자가 만든 거다.
뉴스에서 사진으로 본 오십대의 남자,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의 그는 희대의 살인청부업자였던 거다.
그런 존재를 건드린 거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현실에 생겼다.
‘나하곤 직접 관계도 없고 나같이 하찮은 놈은 알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불안하고 두렵다. 무엇보다 끈이 잘린 것이다.
부랄친구 민중태가 현진에 만들어줬던 줄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다, 그는 죽었다.
현진에서 핵심인물이었던 민중태는 삼총사라고 불린다고 했다.
‘보스 오동철과 거의 동급이라고 했는데.’
삼총사, 그중의 한명이었다.
그들은 백운호수에서 죽었다.
세경개발에서 음모와 거짓이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진실이다.
합수부는 그 사건에 대해 밝히지 않고 있다.
언론에 제보한 누군가가 정확한 진실을 밝혔다.
‘그걸 거짓이고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후 하는 소리로 한숨을 내쉰 남규덕은 현진에서 민중태를 다시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직원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했던 날이었다.
전과가 있어도 상관없다는 내용 때문에 지원했었다.
면접관으로 민중태가 앉아 있었다.
어릴 적 함께 구르던 친구, 민중태는 특수부대를 전역하고 현진써큐리티라는 경호업체의 관리자가 돼 있었던 거다. 그런 괴리가 주는 현실인식으로 반가움보다는 부끄럽고 어색했지만, 민중태는 웃으며 반겼었다.
‘중요한 일을 따로 시킨다더니, 그게 그런 일이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남규덕 자신은 입사지원서등의 흔적 없이 현진의 직원이 됐다.
민중태가 시키는 은밀한 일을 하는 역할인 거다.
그 일을 했다. 그런데 결과가 엄청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
“씨발.”
다시 욕을 뱉으며 걸음을 내던 남규덕은 집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봤다.
짝 달라붙는 스키니 진이 늘씬한 몸매를 드러내는 여자, 원룸 건물 앞에 서 있다. 저 건물에 저런 여자가 사는 건 못 봤다. 눈이 시원해진다.
‘뭐야?’
호기심에 촉발한 본능의 침을 삼키며 남규덕은 걸어갔다.
때마침 여자가 돌아본다.
마스크 쓴 얼굴 위로 드러난 눈이 예쁘게 웃음을 흘려낸다.
‘어라?’
남규덕은 걸음을 멈췄고 여자는 생글거렸다.
* * *
“아 보호대 정말 불편해.”
운전석대를 돌리며 홍인구는 계속 투덜거렸다.
들어줄 사람도 없이 혼자 차를 타고 가는 중이지만 그랬다.
그거라도 해야 답답함이 덜할 것 같아서다.
그사이 차는 의정부로 들어섰다. 남규덕의 집까진 10분 정도다.
‘새끼가 그래도 가까운데 살아서 다행이네.’
신명시와 서울강북의 사이, 의정부다. 가능역 인근으로 주소가 돼 있는데 아무래도 원룸이지 싶다. 그 동네라면 자주 다녀봐서 어느 정도 안다.
‘집에 있겠지.’
미리 전화를 하지 않은 건 혹시나 해서다.
만일 집에 없다면 어디 있는지 찾아갈 것이고, 근처에 있다면 오라고 할 생각이다.
놈도 상황을 인식하고 있을 테니 섣부르게 도망치진 않을 터다.
하지만 모르는 거다.
‘그럴까봐 움직이는 거니까.’
악셀을 밟아 속도를 더 낸 홍인구는 가능역을 향해 달려갔다.
* * *
“그러니까, 중태가 만일을 위해서 남긴 메시지가 있다 이거요?”
여자를 보며 남규덕은 확인하듯 물었다. 동시에 강한 충동을 느꼈다. 저 마스크와 모자를 확 벗겨버리고 싶다는, 아닌 온몸을 그러고 싶다는.
여자는 생긋 미소만 짓는다. 그 눈을 응시하던 남규덕은 소주를 땄다.
“보다시피 이런 거 밖에 대접할게 없시다. 원하지 않으면 나만 마시고.”
잔에 소주를 채운 남규덕은 여자의 반응을 살피며 단번에 잔을 비웠다. 빈잔에 다시 소주병을 기울여 술을 채운 뒤 여자의 눈을 똑바로 봤다.
“중태하고 어떤 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가 죽은 거 맞는 거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하며 시선을 내린 남규덕은 두 번째로 잔을 비웠다. 바로 잔을 채우며 여자를 다시 응시했다. 그렇게 입을 열었다.
“찾아온 용건 들읍시다. 중태가 나한데 남긴 메시지란 게 뭔지.”
여자는 미소품은 눈으로 바라보다 마스크를 벗었다. 그렇게 드러난 미모에 남규덕이 흠칫할 때, 차갑게 피어오르는 물안개 같은 미소로 말했다.
“죽이래요.”
남규덕은 미간을 좁혔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얼굴, 그 얼굴에 마스크 벗은 얼굴을 가까이 댄 여자는 숨결이 느껴지는 속삭임으로 말했다.
“여자가 남자를 죽이는 게 뭐가 있겠어요?”
옅은 경직을 보이던 남규덕의 얼굴에 깨달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지금 들은 말은 자신이 생각하던, 여자를 보면서 갈망하던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민중태는 이 여자를 자신에게 보냈다.
“중태가……”
남규덕이 다시 입을 벌리던 그 순간이다.
여자의 손에 움직였다.
“컥.”
남규덕은 경직했다.
따끔한 것 같던 목의 감각이 전신에 퍼진다.
‘뭐?’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떨어지는 걸 보며, 여자의 손이 닿았다가 떨어진 목에 박힌 칼을 잡고 남규덕은 깨달았다. 숨 쉴 수 없는 몸을 경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