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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전, 신재욱은 여러 개의 언어를 습득했다.
여러 국가의 선수들을 만나며 자연스레 습득했고, 개인과외까지 받아 가며 언어를 공부했다.
물론 몇 개의 언어를 제외하면 수준이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회를 나누는 것엔 큰 문제가 없을 정도는 됐다.
“반가워요. 잠은 잘 잤어요? 오늘 멋진 경기 만들어봐요.”
아르헨티나 선수들과의 대화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사용하는 스페인어는 신재욱이 꾸준히 공부해오고 있는 언어.
유창하게 대화할 수 있는 언어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에게 스페인어를 써가며 여유 있게 다가와 인사를 나누는 한국인.
이런 신재욱의 행동에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얼굴엔 당혹감이 드러났다.
‘얘 뭐야? 스페인어 되게 잘하네……? 근데 왜 이렇게 여유가 넘쳐?’
‘이 자식 뭐지……? 자신감이 넘치는 거야, 아니면 경기를 포기해버려서 마음이 편한 거야?’
‘우리한테 이렇게 다가온다고? 물론 신재욱은 대단한 선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받아줘야 하지? 경기 얼마 안 남았는데, 웃으면서 받아주는 게 맞는 건가? 리그 경기도 아니고 월드컵인데……?’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당황스럽고,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로 신재욱의 인사를 받아줬다.
심리전으로 무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이미 팀의 에이스인 리오넬 메시가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던가.
메시가 받아준 이상, 다른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신재욱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본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역시 월클은 다른 건가? 방금 봤지? 메시랑 반갑게 인사하고, 아르헨티나 선수들이랑도 편하게 이야기하는 거?”
“미쳤다…… 재욱이가 우리보다 어린 거 맞죠? 분명히 나이는 어린데 어떻게 저렇게 포스가 넘치지?”
“여유가 넘치네…… 이야…!”
“아르헨티나 애들이 오히려 당황한 것 같은데?”
신재욱은 아르헨티나 선수들 모두와 인사를 나눈 뒤에야 대표팀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여러 질문이 쏟아졌다.
질문의 숫자는 다소 많았지만, 신재욱은 미소를 지으며 전부 대답해줬다.
“선수분들, 입장하세요!”
경기장으로 들어가라는 관계자의 말이 나오고 나서야 질문도 끝이 났다.
신재욱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긴 하네.’
조금이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느껴졌다.
너무 많은 사람과 많은 말들을 했기 때문이었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건 그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랬음에도 아르헨티나 선수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동료들의 질문에 전부 대답해준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하면 경기 전부터 분위기를 먹고 들어갈 수 있거든.’
철저한 계산하에 상대 선수들,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이런 행동으로 인해서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위축되고, 한국 선수들은 기세가 좋아진다.
이 또한 많은 경험으로 얻어낸 심리전 중 하나였다.
‘이런 심리전이 은근히 잘 통해. 특히 이렇게 큰 대회에서는 더 잘 통하지.’
피곤하긴 했지만, 얻을 건 충분히 얻어냈다.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재욱과 대화를 나누기 전까진 찾아보기 힘들었던 긴장감이 그들의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다.
―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 아르헨티나! 이 두 팀 중 한 팀은 4강에 올라가게 됩니다!
― 우리 대한민국 선수들이 강팀 아르헨티나를 만났습니다. 사실상 지금까지 만났던 팀 중 가장 강한 팀이죠?
― 맞습니다. 전에 만났던 벨기에도 굉장히 강한 팀이었지만, 아르헨티나는 그보다 더 강팀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유력한 우승 후보로 평가받는 팀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도 강력한 화력으로 8강에 오른 팀입니다! 선수들이 자신감 있게 맞붙으면 4강이라는 기적을 또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리라 믿습니다!
― 신재욱 선수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힙니다! 대한민국의 에이스이자, 이제는 세계적인 선수가 되어버렸죠!
―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선수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지녔는데, 성실하기까지 한 놀라운 선수입니다! 그런 놀라운 선수가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오늘 경기,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8강전.
4강에 오르기 위한 경기.
이 경기가 지금 시작됐다.
삐이이익!
선제공격은 한국이 펼쳤다.
경기 전부터 기세를 탔기 때문일까?
한국의 첫 공격은 날카로웠다.
― 기석용의 패스가 좋았습니다! 이택현에게 정확히 연결됩니다!
기석용의 패스를 받은 이택현은 공을 끌지 않았다. 곧바로 측면에 있던 이청영에게 공을 건네줬다.
툭!
이청영은 공을 잘 잡아둔 뒤, 조금 뒤에 있던 김국영에게 패스했다. 템포는 꽤 빨랐지만, 실수는 나오지 않았다.
한국 선수들 모두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만, 이어진 김국영의 패스는 부정확했다.
애초에 패스가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준수한 패스 능력을 지닌 선수였는데, 월드컵 8강이라는 큰 무대는 그에게 부담감을 줬다.
퍼엉!
최전방에 있던 신재욱을 보며 과감하게 뿌려낸 로빙패스였다.
문제는 신재욱보다 아르헨티나의 수비수 에세키엘 가라이가 더 받기 좋은 위치로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이때, 신재욱은 에세키엘 가라이와 몸싸움을 펼쳤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위치를 잡아서 공을 받아내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신재욱은 환생 전부터 이런 경쟁에 매우 강한 선수였다.
― 오오오오! 신재욱 선수가 공을 받아냈습니다! 놀라운 움직임입니다! 분명히 에세키엘 가라이 선수가 더 좋은 위치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몸싸움이 벌어지더니 기어코 신재욱 선수가 공을 받았습니다!
― 매번 하는 얘기지만, 신재욱 선수는 공중볼에 굉장히 강한 모습을 보여주네요. 공중볼을 따내는 것에 도가 튼 선수처럼 보입니다!
공을 받아내는 것에 성공한 신재욱은 곧바로 에세키엘 가라이를 등지며 주변을 살폈다.
에세키엘 가라이는 아르헨티나 수비의 핵심이었다.
그에 걸맞은 실력도 지니고 있었다.
지금도 에세키엘 가라이는 신재욱이 몸을 돌리지 못하게끔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역시 잘하는 선수야.’
신재욱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대충 상대해서는 이길 수 있는 수비수가 아니었다. 과한 욕심을 부리는 것도 좋지 않았다.
‘슈팅만 하자.’
목적을 슈팅으로 잡았다.
다행히 신재욱은 슈팅의 달인이었다.
어떤 자세, 어떤 타이밍에도 슈팅을 때려낼 수 있는 선수였다.
그래서 딱 한 타이밍이면 충분했다.
휘익!
에세키엘 가라이를 등진 신재욱은 짧은 순간, 바디페인팅을 이용해 여러 개의 심리전을 펼쳤다.
진짜처럼 보이는 신재욱의 속임수.
수비수로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툭! 휘익!
왼쪽으로 몸을 돌릴 것처럼 공을 가볍게 치며 움직인 뒤, 재빨리 발바닥으로 공을 다시 끌어오며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에세키엘 가라이가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움직였다.
“못 지나간다!”
고함을 치며 발을 뻗는 에세키엘 가라이.
신재욱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움직여주네.’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던 신재욱이 엄청난 속도로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뛰어난 드리블 능력을 지닌 선수답게 공은 발에 붙듯이 따라왔다.
이어서 왼발 슈팅을 때려냈다.
몸을 돌리며 때려내는 터닝슛이었다.
퍼엉!
터닝슛은 일반적인 슈팅에 비해서 힘이 덜 실릴 수밖에 없다.
자세에서 나오는 한계였다.
더구나 신재욱 때린 위치는 페널티박스 바깥.
다른 공격수들은 터닝슛을 시도할 엄두도 내지 않는 위치였다.
그런데 신재욱은 망설임 없이 시도했다. 더구나 슈팅에 힘도 꽤 많이 실렸다.
강한 발목 힘을 지녔고, 정확한 임팩트를 주며 때려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헉!”
“엇?!”
“터닝슛이다!”
경기장에 있던 선수들 모두 깜짝 놀라며 공의 움직임을 쫓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 속.
아르헨티나의 골키퍼 세르히오 로메로가 몸을 날렸다.
예상하기 힘든 타이밍에 나온 터닝슛이었지만, 그는 반응하는 것에 성공했다.
몸을 날렸고 팔을 뻗어 공을 쳐 냈다.
터어엉!
세르히오 로메로의 손에 걸린 공은 골대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 오우! 이게 막히네요! 신재욱 선수의 기습적인 터닝슛을 아르헨티나의 세르히오 로메로 골키퍼가 막아냈습니다!
― 세르히오 로메로 선수! 정말 좋은 골키퍼네요. 비록 신재욱 선수의 슈팅이 구석으로 날아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위협적이었거든요? 슈팅 타이밍도 너무 빨랐고요. 그런데 이걸 막아냈습니다.
― 우리로서는 정말 아까운 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유효슈팅까지 만들어낸 우리 선수들의 움직임은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 그리고 아직 기회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코너킥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 선수들은 세트피스에서도 정말 강력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아르헨티나를 상대로도 충분히 골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의 코너킥.
키커는 늘 그랬듯 기석용이었다.
실전이든 훈련 때든 가장 좋은 킥을 보여주는 선수였고, 지금도 아주 날카로운 코너킥을 차 냈다.
퍼어엉!
높고 빠르게 휘어져 들어오는 공.
그 궤적을 주시하며, 신재욱이 움직였다.
훈련 때 여러 번 겪은 코너킥이었다.
당연히 잘 대응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르헨티나의 수비수를 이겨내고 머리에 맞춰야 한다는 것.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신재욱을 마크하며 공중볼 경합을 펼치는 선수는 방금 전에도 상대했던 에세키엘 가라이.
축구 지능이 높고 189cm의 큰 키를 활용한 공중볼 능력도 좋아서 상대하기 어려운 선수였다.
그러나 신재욱이 누구던가.
2m에 가까운 선수들도 이겨버리는 스트라이커였다.
환생 전엔 그보다 더 크고 강한 수비수들을 상대로 승리한 경험도 많았다.
‘내가 이긴다.’
신재욱은 지금도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
꾸준한 훈련으로 다져진 강한 몸싸움 능력과 뛰어난 위치선정 능력, 높은 점프력과 정확한 타점으로 때려내는 헤더.
이 모든 걸 보여주며 에세키엘 가라이와의 공중볼 경합에서 승리했다.
― 우와아아아! 골입니다! 신재욱! 신재욱 선수의 헤더 골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도대체 이 선수의 한계는 어디일까요? 월드컵 8강이라는 무대도 이 선수에겐 긴장감을 줄 수 없나 봅니다!
― 에세키엘 가라이 선수가 190cm에 가까운데, 이 선수를 이겨내고 공중볼을 따내네요! 게다가 헤더도 굉장히 정확했고요! 와…… 신재욱 선수, 괜히 세계 최고 수준의 스트라이커가 아니네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군요!
신재욱의 선제골이 터졌고, 스코어는 1 대 0이 됐다.
전반전 6분에 나온 골이었다.
―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당황스럽겠는데요? 이런 시나리오는 저들의 머릿속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거든요!
그 순간 한 선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현시점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이자 축구의 신이라고 불리는 남자.
리오넬 메시.
그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