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 * *
“야 막내! 빨리빨리 안 다니냐? 온 김에 거기 냉장고에서 물 좀 가져와.”
신재욱이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들은 말이었다.
‘물을 가져오라고? 나보고 한 말인가?’
순간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황당한 말이었다.
이어서 들린 말 또한 신재욱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너 뭐하냐? 귀에 똥이라도 처박았어? 물 가져오라니까?”
“저요? 지금 저한테 한 말이에요?”
신재욱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동시에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장호연, 나이는 만 19세에 포지션은 윙어.’
장호연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다른 후배들과는 다르게 말을 듣지 않는 신재욱의 행동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래! 너밖에 더 있냐? 독일에서 왔다던데, 비행기 타고 날아올 때 개념도 놓고 온 거냐? 어엉? 두 번 안 말한다? 뒤지기 싫으면 빨리 물 가지고 와!”
권위적인 표정으로 고함을 치는 장호연의 행동에.
“하하!”
신재욱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어서 나온 웃음이었다.
물론 장호연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웃어? 너 지금 웃었냐? 허! 얘가 진짜 미쳤네? 물 안 가져오냐?”
“니 물은 니가 직접 가져다가 쳐드세요.”
“뭐?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했냐?”
“하…… 귀찮게 두 번 말하게 하네. 본인 물은 본인이 가져다가 쳐드시라고.”
그렇게 대답한 신재욱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터엉!
푹신한 침대가 몸을 받아줬다. 너무 푹신해서 나빠졌던 기분이 다시 좋아질 것 같았다.
그 순간 장호연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감히 선배한테 싸가지 없이! 넌 죽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신재욱에게 달려들었다.
외국물 좀 먹었다고 까부는 후배에게 몇 대 쥐어박아 줄 생각이었다.
그럼 같이 방을 쓰는 내내 기어오르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다만 장호연은 몰랐다.
신재욱이 싸움을 굉장히 잘한다는 사실을.
“여긴 왜 이렇게 덤비는 놈들이 많아?”
그렇게 투덜거리며, 신재욱은 침대에서 누운 상태로 오른발을 뻗었다.
장호연이 덤벼드는 타이밍에 맞춘 발차기.
뻐억!
“커억…!”
턱을 가격당한 장호연은 그대로 쓰러졌다.
단 한 방에 기절해버린 것이다.
“별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신재욱은 침대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다음으로 쓰러져 있는 장호연을 상대로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장호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질문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네…….”
“기절했었어요. 그리고 원래 기절하면 직전에 있었던 일을 까먹기도 해요. 큰일은 아니에요.”
“뭐? 기절했다고? 내가? 왜?”
“저한테 맞았으니까요.”
“이런 미친? 내가 너한테 맞았다고?”
바닥에서 몸을 벌떡 일으킨 장호연이 눈을 부라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말해드릴까요?”
“빨리 말해봐.”
“저보고 물을 가져오라고 하더라고요. 부탁도 아니고, 명령조로. 그래서 싫다고 직접 가져다가 쳐드시라고 했더니 위협적으로 덤비시더라고요. 그래서 재워드렸어요.”
“……너 미친놈이냐?”
“그런 말은 가끔 들어요. 근데 제 생각엔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선배랍시고 물 가져오라고 화낸 사람이 더 미친놈인 것 같은데요?”
“이……!”
장호연의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가 끓어올라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
그러나 조금 전처럼 덤벼들지는 않고 있었다.
“아까랑은 다르게 덤비진 않네요? 한번 기절하고 나니까 무서워졌나 보죠?”
“너 이 새끼……! 감히 선배를 때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어딜 버릇없이…….”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감히’라는 말을 쓰고 그래요? 까불지 말고 축구나 열심히 해요. 축구 잘하면 굳이 센 척 안 해도 후배한테 대우받을 수 있어요.”
“……진짜 죽고 싶냐?”
“경고할게요. 앞으로 말 예쁘게 안 하시면 바로 손 나갑니다.”
신재욱은 진심으로 경고했다.
더는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장호연이 또다시 덤비려고 하면 제대로 교육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이가 없네.”
장호연이 시선을 피하며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꼬리를 내린 것이다.
“잘 생각하셨어요. 앞으로 방을 계속 같이 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함께 쓰는 동안에는 잘 지내봐요.”
“……그러던지.”
* * *
“으어! 잘 잤다.”
잠에서 깬 신재욱은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마찰이 일어난 이후 같은 방을 쓰는 장호연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덕분에 개운함이 느껴질 정도로 푹 잘 수 있었다.
잠을 잘 잤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루를 보내며 시차에 적응이 된 것일까?
신재욱은 어제보다 몸이 훨씬 가볍다는 느낌을 받았다.
‘장호연은 아직 자네.’
어젯밤에 일어난 일 때문에 잠을 설쳤던 것일까?
장호연은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신재욱은 장호연에게서 관심을 끊고 샤워실을 향해 움직였다.
“아직 아무도 없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샤워실엔 사람이 없었다.
텅 빈 샤워실은 유난히 넓어 보였다.
“되게 상쾌하네.”
신재욱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훈련장을 향해 걸었다.
잠도 잘 잤고, 아침 샤워도 개운하게 마쳤다.
그야말로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모든 게 완벽한 상황.
이럴 때 신재욱이 할 건 하나였다.
‘아침밥을 먹을 때까지 시간도 남는데 몸이나 풀자.’
바로 훈련이었다.
[체력이 좋아집니다!]
[드리블이 좋아집니다!]
[트래핑이 좋아집니다!]
허공에 뜬 메시지들.
한 시간가량 훈련을 한 결과였다.
훈련을 더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밥을 먹으러 가야 할 시간이 됐다.
“오늘은 어떤 음식들이 나올까? 되게 기대되네.”
어제 먹었던 밥은 충격적으로 맛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과식을 했을 정도로.
그래서일까?
식당으로 향하는 신재욱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이미 먹고 있는 사람들이 많네.’
식당 안으로 들어온 신재욱의 눈엔 보였다.
식사를 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다만 분위기는 어제와 달랐다.
어제는 시끄럽게 떠들며 식사를 하던 김준기 패거리가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고.
다른 선수들은 그런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물론 신재욱에겐 전혀 관심 없는 일들이었다.
그의 앞에 펼쳐진 화려한 음식들에만 집중할 뿐.
“오늘은 적당히 먹도록 노력해봐야지.”
잠시 후.
신재욱은 접시에 음식을 담은 뒤, 아무도 없는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동료들과 친분을 쌓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음식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청소년 대표팀 선수들이랑은 같이 지내다 보면 친해지겠지. 우선 먹고 생각하자.’
마침내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하려고 할 때.
드르륵!
누군가 신재욱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여기 앉아도 되지?”
“예.”
대답을 마친 신재욱은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앞에 앉은 사람은 어제 식당에서 대화를 나눴던 이찬호였다.
쌍꺼풀이 짙은 큰 눈을 지닌 그였는데, 지금은 그 눈이 더욱 커져 있었다.
“너…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궁금증이 가득 담긴 이찬호의 질문.
그 질문에 신재욱은 바쁘게 움직이던 수저를 멈추며 대답했다.
“뭐가요?”
“네가 어제 나한테 그랬잖아. 김준기 선배와 다른 21살 선배들이 오늘부터 나대…… 지 못할 거라고. 기억나?”
“예. 그랬죠.”
“근데 지금 분위기가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네 말대로 21살 선배들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 이거…… 네가 이렇게 한 거야?”
“그건 모르겠네요. 그냥 아침이라서 조용히 있고 싶은 걸 수도 있잖아요. 근데 이렇게 저한테 와도 돼요? 다른 선배들이 뭐라고 할까 봐 인사도 무시했었잖아요.”
“아, 몰라! 너무 궁금해서 너한테 물어보지 않곤 못 배기겠더라고. 이걸로 혼내면 그냥 혼나지 뭐. 그리고… 선배들 앞에서 전혀 안 쫄고 할 거 다 하는 널 보고 느낀 게 많았거든. 너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선배들 눈치를 너무 보진 않겠다고 다짐했어.”
“그렇군요. 근데 이따 얘기해도 될까요? 저 밥 좀 먹어야 해서요.”
“아… 미안하다. 밥 먹어. 먹고 얘기하자.”
“예.”
대답과 동시에 신재욱은 다시 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조금 식었지만, 음식은 여전히 훌륭했다.
‘진짜 맛있네!’
* * *
식사를 마치고.
신재욱은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장으로 걷는 내내 그의 옆엔 식당에서부터 함께한 이찬호가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질문을 던져대고 있었다.
“재욱아, 그래서 바이에른 뮌헨 애들은 얼마나 잘해? 대체 어느 정도야?”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았으면서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요?”
“아…… 그건 선배들 눈치 보여서 그랬다니까? 다들 너한테 궁금한 거 되게 많은데, 선배들 눈치 때문에 참고 있는 거야.”
“그래요?”
“그러엄! 17살에 바이에른 뮌헨 U19로 월장해서 뛰는 선수가 왔는데, 당연히 궁금한 게 많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 자, 이제 대답 좀 해주라. 바이에른 뮌헨 애들 얼마나 잘해? 우리랑 비교하면 어때?”
“어제 하루 같이 훈련해서 비교하긴 어렵고, 바이에른 뮌헨 유소년팀 선수들은 다들 잘해요. 경쟁도 치열해서 다들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고요.”
“오…… 역시 다들 잘하는구나. 그럼 재욱이 너도 한국에서 축구 하다가 독일로 간 거잖아? 중학교 다닐 때 넘어간 거지?”
“예, 그렇죠.”
“그럼 한국의 중학교 선수들이랑 같은 나이의 바이에른 뮌헨 유소년 선수들 수준 차이는 어느 정도야? 되게 커?”
“평균적인 수준 차이는 꽤 큰 편이에요. 근데 한국에서 잘하는 친구들은 독일에서도 잘할 것 같긴 해요.”
“오오! 평균 수준은 독일이 훨씬 높지만, 우리나라에서 잘하는 선수들은 거기서도 충분히 통할 수도 있다는 거구나?”
“제 생각엔 그래요. 찬호 형, 다 왔어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신재욱은 이찬호와의 대화를 끝냈다.
훈련 때는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집중하는 그였다. 지금도 그랬다.
선수들이 모인 곳으로 걷는 신재욱의 눈빛은 완전히 변해있었다.
‘그래도 딱 맞춰서 도착했네.’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도착한 지금.
훈련장의 분위기가 변했다.
동시에 신재욱을 본 선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신재욱이다!”
“바이에른 뮌헨 소속이라서 그런가? 확실히 뭔가 포스가 있는데?”
“포스는 무슨, 축구는 같이 뛰어봐야 아는 거야.”
“근데 뭔가 다부져 보이긴 하네. 운동을 되게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어제도 혼자 남아서 훈련했다더라.”
“아 진짜? 역시 잘되는 애는 다르네.”
어제와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어제는 신재욱을 애써 무시하는 분위기였다면, 오늘은 신재욱에게 관심을 보였다.
‘뭐지? 김준기 패거리가 뭔가 일을 한 건가?’
신재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곳에 몰려 있는 김준기 패거리를 바라봤다.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패줬던 그 무리였다.
그때였다.
신재욱의 눈엔 보였다.
“어? 재욱아! 왔어?”
친한 척 손을 흔드는 김준기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