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 * *
리더가 쓰러진 무리는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5명의 청소년 대표팀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리더 격인 김준기가 쓰러진 이후로, 나머지 4명 모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중 2명은 나름 용기를 내서 덤벼봤지만, 신재욱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 결과.
“으어…….”
“으윽……!”
“으…….”
쓰러져서 신음하는 사람이 3명이었고.
“…….”
“…….”
기절한 사람이 2명이었다.
신재욱은 먼저 기절한 사람들을 깨웠다.
침착하게 5명 모두 정신을 차리게 도와준 뒤, 이들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은 얼굴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앞으로 잘합시다. 선배님들은 몰랐겠지만 제가 말보단 주먹이 먼저 나가는 성격이거든요.”
도발적인 말이었지만, 5명 중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신재욱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 그리고 제가 직접 해결하긴 귀찮으니까 선배님한테 부탁 좀 드릴게요. 대표팀 선수들이 저한테 텃세 부리지 않고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게끔 이야기 좀 잘해주세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신재욱은 이제는 아무도 막고 있지 않은 화장실 문을 나섰다.
“앞으론 나아지려나?”
문제가 가장 많아 보이던 선수들이 알아서 찾아와주는 바람에 대표팀에서의 생활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야, 개념 없는 거 봐선 이 정도로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나.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근데 뭐, 나아지지 않으면…… 귀찮긴 하지만 강제로 나아지게 만들면 되지.”
신재욱에겐 어떤 상황이든 돌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니까.
“너무 늦었나?”
화장실에서 나온 신재욱이 훈련장에 모인 선수들이 바라봤다.
자신과 나머지 5명을 빼고 전부 다 모여있었다.
그때였다.
“막내! 빨리 안 오고 뭐 해?”
안기혁 감독이 호통을 쳤다.
그와 동시에 신재욱은 달리기 시작했다.
‘늦은 거 맞구나…!’
훈련장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막내인 신재욱이 훈련에 늦었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 늦게 나타난 5명의 선수 때문이었다.
팀에 모범이 되어야 할 고참 선수들이 훈련에 지각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너희들 얼굴이 왜 그러냐?”
이들의 얼굴이 전부 터져서 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의료진이 다급하게 들어와서 다친 선수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고, 안기혁 감독은 이들을 추궁했다.
왜 얼굴이 죄다 터져서 왔냐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그러나.
선수들은 끝까지 입을 닫았다.
감독을 무서워하긴 했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21살 먹고 17살짜리한테 쥐어 터졌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5명이 몰려가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가 없었다.
있었던 일을 솔직하기 말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할 수 있는 건 그냥 자신들끼리 다퉜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그때였다.
“막내!”
안기혁 감독이 신재욱을 불렀다.
그는 강렬한 눈빛을 쏘며 질문했다.
“너도 화장실에서 늦게 나왔잖아. 본 거 없어?”
“전혀요.”
신재욱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5명 모두 숨기려는 상황에서 굳이 먼저 나서서 밝힐 생각은 없었다.
오늘 처음 청소년 대표팀에 합류한 막내 선수가 직접 선배 5명을 패버렸다고 말한다?
‘말을 해서 좋을 게 없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좋은 시선을 받긴 힘든 일이지 않겠는가.
‘넘어가실 생각인 건가?’
다행히 안기혁 감독은 선수들이 다친 걸 가지고 크게 문제 삼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꾹 참고 넘어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U―20 월드컵이 개최될 때까지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았고, 다행히 크게 다친 선수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안기혁 감독은 알지 못했다.
‘적당히 패주길 잘했네.’
선수들이 크게 다치지 않은 건 신재욱이 의도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들 씻고 식당에서 보자.”
훈련이 종료됐다.
예정되어 있던 청소년 대표팀 연습경기는 취소됐다.
안기혁 감독의 판단하에 결정된 일이었다.
‘아쉽네.’
성장에 욕심이 있는 신재욱이었기에 연습경기가 취소되었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다만 이해는 됐다.
비록 심각한 부상은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대표팀 주전 선수 5명이 다쳤는데 경기를 진행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무리해서 연습경기를 진행했다가 선수들의 상태가 안 좋아지기라도 하면 그땐 감독이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아…… 그러니까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걸고 난리야.”
신재욱이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전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오르며 짜증이 났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아마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해도, 신재욱은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어차피 그런 애들이랑은 월드컵에 참여할 동안 한 번은 부딪쳤을 거야.”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신재욱은 식당을 향해 걸었다.
훈련 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밥이라도 맛있었으면 좋겠네.”
* * *
청소년 국가대표팀의 식사 시간.
선수들은 각자 친한 선수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짠 것처럼 신재욱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물론 당사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여기 밥 너무 맛있는데?”
신재욱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청소년 국가대표팀 식당에서 나오는 뷔페식 요리들이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종 고기류, 나물, 찌개, 샐러드, 국, 김치 등.
어느 것 하나 맛없는 게 없었다.
“내가 먹어왔던 영국의 음식들은 대체 왜 그랬던 거지?”
당연하게도 여러 명과 함께 밥을 먹는 것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왜 밥을 혼자 먹냐?’라고 묻는다면, 이게 음식에 집중할 수 있어서 더 좋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놀랍다, 놀라워.”
신재욱은 식사 시간을 즐겼다.
원래도 잘 먹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음식을 먹었다.
“하나라도 놓칠 수 없지.”
한국 나이로 17살, 만 16살.
한창 클 때여서 그런지 신재욱의 식사량은 대단했다.
더구나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 잘 먹었다.”
1시간가량 이어진 식사를 드디어 마친 지금.
식당에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신재욱은 자신의 주변에서 얼쩡대는 사람을 바라봤다.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대표팀에서 막내였던 선수. 이름이…… 이찬호였지?’
이찬호.
만 18세, 한국 나이로는 19세.
청소년 대표팀에서 신재욱 다음으로 가장 어린 선수였다.
그런 그가 작은 목소리로 질문해왔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얘기요? 그러시죠.”
신재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귀찮아서 거절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잠시 시간을 내줄 생각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런데.
이찬호는 다짜고짜 사과를 했다.
“미안해.”
“예? 뭐가요?”
신재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찬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기에, 왜 사과를 받는지도 몰랐다.
“아까 낮에 네 인사 씹었잖아…… 그거 미안하다고.”
“아!”
“그리고 그다음에도 계속 일부러 말 안 걸고 무시하고 그랬던 것도 다 미안해.”
“그러셨구나. 근데 왜 사과를 하세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거든. 쪽팔린 말이지만…… 선배님들이 너한테 말 걸지 말라고 해서 그랬던 거야.”
“선배 누구요?”
“오늘 다친 선배님들 알아? 김준기 선배랑 구재윤 선배 그리고…….”
“아~! 알아요.”
신재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직접 패줬던 명단이었으니까.
‘역시 걔들이 팀 분위기를 흐리고 있었던 거네. 뭐 이찬호 얘도 믿을 수는 없지만, 정황상 거짓말은 아닌 것 같으니까.’
김준기 무리를 안다고 대답하자, 이찬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그 선배님들이 청소년 대표팀의 실세거든. 나이도 제일 많고, 실력도 좋고, 심지어 싸움까지 잘해서 나 같은 후배들은 꼼짝도 못 해.”
“싸움은 못 하는 것 같던데.”
“뭐라고?”
“아니에요.”
“……하여튼 그 실세 선배님들이 네가 대표팀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불만이 많았어. 너무 어린 나이에 온다, 바이에른 뮌헨이 대수냐, 낙하산 아니냐?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지.”
“열등감이 대단한 사람들이네요.”
“말조심해!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들어도 상관없어요. 그래서 그 김준기 선배 패거리들이 저한테 텃세를 부리라고 강요했다는 거죠? 인사도 전부 무시하라고 강요했고?”
“……맞아.”
“근데 그걸 저한테 왜 말해주는 거예요?”
“이런 분위기가 너무 싫어서. 나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너와 비슷한 대우를 당했었거든.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너를 찾아온 거야. 솔직히 네가 대표팀에 있는 동안 내가 얼마나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나도 여전히 김준기 선배의 눈치가 보이거든.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어. 힘내라. 그리고 꼭 버텨내라.”
신재욱의 눈이 커졌다.
필요하니까 조사는 했지만, 대표팀 내의 선수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던 그였다.
그러나 눈앞의 이찬호에겐 조금이지만 관심이 생겼다.
‘이 정도로 용기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무언가 특별한 게 있을 수도 있겠어. 아…… 만 18세의 나이에 만 20세 대표팀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거긴 하지.’
그래서 신재욱은 이찬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특유의 여유가 흐르는 미소였다.
“이찬호 선배님, 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근데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앞으로 다 괜찮아질 거예요.”
“괜찮아질 거라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 실세라는 사람들,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나대지 못할 거거든요.”
“뭐? 나댄다고…… 너 말 그렇게 하면 위험…… 아니, 근데 선배님들이 어떻게 못 그런다는 거야…?”
“어쩌다 보니까 제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아마 내일부터 지켜보시면 알 거예요.”
이 대답을 끝으로 신재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들은 이제 숙소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겠지만, 그에겐 추가 훈련을 하러 갈 시간이었다.
‘오늘은 슈팅 훈련 비중을 높여볼까?’
* * *
신재욱이 얼굴의 땀을 닦아내며 잔디 위에 주저앉았다.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현재 시각은 저녁 9시.
평소였다면 더 늦게까지 개인 훈련을 이어갔겠지만.
오늘은 여기서 훈련을 멈추기로 했다.
“괜히 무리해서 다치는 것보단 낫지.”
독일에서 한국까지 장시간 비행을 하고 온 상태였다.
몸이 피로가 쌓여있었고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였기에, 무리한 훈련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오늘은 푹 쉬자.”
이후 신재욱은 샤워를 마친 뒤 숙소로 향했다.
2명이 한 방을 쓰는 시스템이었는데, 이것엔 불만이 없었다.
‘혼자 쓰면 더 좋겠지만, 이곳의 룰이라니까 어쩔 수 없지.’
2명이 같은 방을 쓰는 건 유럽에서도 흔히 겪던 일이었다.
비록 2명이 같은 방을 쓰긴 하지만, 유럽에선 서로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자연스레 불편할 것도 별로 없다.
그런 유럽에서 살던 신재욱이었기에 2인실을 쓴다는 사실에도 큰 불만이 없던 것이다.
그러나.
신재욱이 잠시 잊고 있던 게 있었다.
유럽과 한국의 스타일은 다르다는 것을.
“야 막내! 빨리빨리 안 다니냐? 온 김에 거기 냉장고에서 물 좀 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