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 * *
이택현.
그는 드리블 하나만큼은 자신이 최고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그의 드리블 돌파는 한국의 고등학생 선수들에게도 잘 통했었고, 심지어 한국의 프로선수들에게도 꽤 잘 통했었으니까.
더군다나 신재욱과의 일대일 훈련에서도 돌파 훈련에서만큼은 여러 번 승리를 거뒀을 정도였으니까.
당연하게도 독일의 어린 선수들 따위는 손쉽게 제쳐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택현에겐 있었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던가!”
이택현이 공을 짧게 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움직이며 눈으로는 상대 수비수를 지켜봤다.
이어서 상체와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미끼를 던졌다.
수비수가 발을 뻗게끔 만드는 미끼였다.
휘익! 휙!
현란한 이택현의 발재간에 상대 수비수는 참지 못했다.
인내심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이택현이 정말 돌파를 시도할 것만 같은 고급 페인팅을 썼기 때문이었다.
“에잇!”
결국엔 수비수가 발을 뻗었다. 중심도 한쪽으로 쏠렸다. 발을 뻗은 이상 중심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걸렸네!”
이택현은 상대가 미끼를 문 것에 기뻐했다.
동시에 상대 수비수의 무게중심이 쏠린 곳의 반대편으로 공을 치고 나갔다.
중심이 흔들린 수비수는 그런 이택현의 움직임을 쫓을 수가 없었다. 이택현의 스피드가 느렸다면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이택현의 스피드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더구나 수비수는 다급하게 방향을 바꾸느라 중심이 더욱 흔들렸다.
“일단 한 명!”
그렇게 외치며, 이택현은 멈추지 않고 드리블을 이어갔다.
왼쪽 측면에서 풀백을 제쳐낸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자주 겪었던 이택현이었다. 그러한 경험 덕에 지금도 의도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수비수 하나만 더 끌면 되겠네!”
상대의 중앙수비수 하나를 끌어내는 것.
그걸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좋은 상황을 만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와라. 네가 안 나오고 버틸 수 있을 것 같냐?’
그러나 상대는 바이에른 뮌헨 U13의 주전 센터백이었다.
재능이 뛰어난 선수였기에 쉽게 움직이지 않고 들어오는 이택현을 뚝심 있게 지켜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택현이 페널티박스 안쪽까지 파고들자 센터백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위험한 슈팅각을 내주게 될 테니까.
“그래, 나와야지.”
이택현은 중앙수비수를 앞에 둔 채, 오른쪽으로 공을 밀었다. 이어서 다리를 휘둘렀다. 슈팅 페인팅이었다.
상대 수비수는 혹시 모르는 마음에 다리를 뻗었다. 페인팅을 의심하고 있긴 했지만, 위치가 페널티박스 안쪽이었다.
만약 진짜 슈팅이면 곧바로 골을 허용할 수 있기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툭!
센터백이 발을 뻗는 것을 본 이택현이 공을 오른쪽으로 한 번 더 쳤다. 그러자 이번엔 골키퍼가 튀어나왔다.
수비수가 뚫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과연 바이에른 뮌헨의 유소년 골키퍼다운 빠른 반응속도였다.
그러나.
이택현의 반응이 더 빨랐다.
툭!
발로 공을 옆으로 밀어낸 이택현의 눈빛엔 깊은 신뢰가 담겨있었다.
‘연습할 때보다 더 빠른 타이밍에 보낸 패스이긴 하지만……신재욱이라면 무조건 받을 수 있을 거야.’
같은 시각.
수비수 하나를 달고 다니던 신재욱은 앞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뒤로 고개를 돌린 상대 수비수와 눈이 마주쳤다.
‘봤구나?’
자신의 위치를 상대 수비수가 알아채는 것.
신재욱이 바라던 바였다.
상대 수비수는 신재욱이 침투하고 있는 것을 눈으로 봤기 때문에, 계속 침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돌려 이택현의 발밑에 집중했다. 공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이때 신재욱은 갑자기 뒤로 빠졌다.
애초에 앞으로 침투한 건 상대 수비수를 속이기 위함이었다.
뒤로 빠진 건 이택현과 약속된 컷백 패스를 받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여러 번 호흡을 맞추며 연습해둔 패턴 중 하나였고, 성공률도 상당히 높았다.
더구나 패스의 타이밍이 연습 때보다 더 빨랐다.
바이에른 뮌헨 U13의 수비수들은 신재욱과 이택현의 패턴을 눈치채지 못했고.
당연하게도 대각선 앞이 아닌, 대각선 뒤로 뿌려진 이택현의 패스를 끊어내지 못했다.
이 순간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퍼엉!
발의 안쪽으로 슈팅을 때리는 신재욱의 움직임을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
그게 전부였다.
* * *
철렁!
골망이 흔들렸다.
골키퍼는 골대 구석으로 파고든 슈팅을 막아내지 못했다.
선제골을 허용한 지금.
신재욱과 이택현을 상대한 U13의 수비수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속았다!’
완벽하게 속아버렸다고.
또한, 이들 모두 얼굴을 붉혔다.
한국에서 온 신입생들에게 당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젠장! 오늘 처음 온 녀석들한테 당했다고? 우리가?’
‘어이가 없네…… 너무 방심했나?’
‘끝까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앞으로 침투하는 움직임이 속임수였다니…… 저 허약해 보이는 놈을 너무 얕봤어.’
‘운이 좋네! 하지만 이제 절대 안 당한다. 너희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실력인지 깨닫게 해주마!’
그리고.
자존심이 상한 선수들은 신재욱과 이택현의 상대 팀 선수들만이 아니었다.
같은 팀으로 뛰는 선수들도 짜증을 내고 있었다.
“에잇! 쟤네 뭔데? 미친놈들이 태클로 같은 편 공을 뺏더니 이젠 둘이 골도 넣어버렸네.”
“아…… 짜증 나네. 다들 정신 차려! 오늘 새로 들어온 놈들이 저렇게 나대는 거 볼 거야? 공도 못 만지게 해줘야 할 거 아니야?”
“조심해! 특히 ‘리’인지 ‘이’인지 잘 모르겠지만, 쟤는 같은 팀한테도 태클하는 놈이니까, 덤벼들면 절대 방심하지 마.”
“여기서 적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확실하게 알려주자고!”
그러나 이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이들의 의도가 성공하기엔 한국에서 온 두 선수의 실력이 너무 뛰어나다는 것을.
“방금 골 넣은 ‘신’은 놔두고 ‘이’만 조심해. 태클이 꽤 날카로웠어.”
“그래, 미친놈이 고민도 없이 바로 태클하더라. 정상이 아닌 놈 같으니까 특히 조심하자.”
“이름이 신인지 뭔지, 쟤는 딱 봐도 허약해 보여서 태클도 못 할 것 같으니까 그냥 공만 못 만지게 하자.”
태클 실력은 이택현이 아니라 신재욱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을.
그리고.
‘패스를 안 주는 동료들의 공을 태클로 뺏어온다…… 이택현이 발상의 전환을 잘했네. 나도 그렇게 해야겠어.’
신재욱도 동료들에게 과감하게 태클을 하겠노라 마음먹었다는 것을.
삐이이익!
경기가 재개됐다.
골을 넣었지만, 여전히 신재욱과 이택현에겐 패스가 오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간단한 패스조차 오지 않았다.
‘예상했어.’
신재욱의 표정은 덤덤했다.
이럴 거라는 걸 예상했으니까.
다만, 움직임은 전혀 덤덤하지 않았다.
“어어?”
“쟨 또 왜 저래?”
빨간 조끼를 입은 레드팀 선수들의 눈이 커졌다.
같은 팀인 신재욱이 팀 동료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야! 너 뭐 해!”
이제 막 패스를 받은 레드팀의 미드필더 토니가 신재욱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신재욱이 독일어를 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위협적인 말과 표정으로 겁을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통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신재욱의 눈엔 어린 소년이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으니까.
“뭐 하긴, 공 받으러 왔지.”
신재욱은 달리는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토니와의 거리를 계속해서 좁혔다.
“공을 받으러 왔다고? 웃기고 있네! 누가 준대?”
“내놔.”
짧은 대답과 동시에.
신재욱이 어깨로 토니를 들이받았다.
토니의 몸은 신재욱보다 훨씬 컸지만, 신재욱의 차징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충분해.’
낮은 중심을 이용한다면 상대의 중심을 흔들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더구나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꾸준히 해왔으니까.
퍼억!
두 선수가 부딪친 순간.
“커헉!”
토니가 깜짝 놀란 얼굴로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 자식, 뭐야?!’
몸싸움에 자신감이 있던 그가 크게 밀려났다. 분명 신재욱의 힘이 강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중심이 흔들렸다.
그때였다.
토니가 미처 중심을 잡기도 전에.
툭!
신재욱이 공을 빼냈다.
“아오! 야! 너 이 자식! 같은 팀한테 뭐 하는 짓이야!”
뒤에서 토니가 소리를 질러대며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신재욱은 듣는 척도 안 했다. 그냥 공을 몰고 상대 진영으로 나아갈 뿐.
‘패스도 안 하는 놈들이 팀은 무슨.’
신재욱은 덤벼드는 상대 선수들을 보며 계속 전진했다.
날이 갈수록 드리블에 자신감이 붙고 있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머릿속에 있는 움직임을 현실에서도 조금은 구현할 수 있게 됐으니까.
게다가 상대는 U13 선수들이었다.
그가 독일에서 상대했던 U15의 선수들보다도 어린 선수들이다. 무려 2년 밑의 선수들이다.
당연히 수준도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뚫어볼까?’
신재욱은 과감하게 드리블을 했다.
물론 단순한 돌파를 시도하진 않았다. 어린 유소년 선수들은 당할 수밖에 없는 세밀한 심리전을 섞어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헉! 뭐야?!”
상대인 블루팀의 유소년 선수는 당황한 얼굴로 신재욱의 옷을 잡아당겼다.
반칙을 사용해서라도 끊어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신재욱은 여기서 멈춰줄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넘어지면 의미 없지.’
반칙을 얻어냈을 때 좋은 위치가 있는 반면에 좋지 않은 위치도 있다.
지금은 좋은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버텨냈다. 상대의 힘은 센 편이었지만 무게중심을 낮추고 버티면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몸을 쓰는 요령도 베테랑 수준인 신재욱이 아니던가.
어린 선수가 옷을 잡아끄는 것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타앗!
신재욱이 상대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며 압박을 이겨냈다. 그 순간 다른 선수 하나가 덤벼들었다.
여기서 또다시 돌파하려면 많은 체력을 소모하게 된다. 하지만 신재욱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쉬운 길을 선택했다.
툭!
신재욱은 근처에 온 이택현에게 공을 넘기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이택현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공을 넘겨줬다.
동료와의 호흡으로 선수 하나를 제쳐낸 지금, 신재욱은 다시 속도를 냈다.
‘조금만 참자.’
체력을 최대한 아꼈지만, 소모되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법.
호흡이 가빠왔다. 하지만 체력을 쓸 땐 써야 한다.
“이택현! 침투!”
신재욱은 이택현에게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자신은 덤벼드는 선수 하나를 또다시 제쳐냈다. 어렵진 않았다. 조급해진 상대의 태클을 피해낸 것뿐이었으니까.
‘이제 좀 뚫렸네.’
신재욱이 속도를 끌어올리며 앞을 바라봤다.
텅 비어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중앙수비수 한 명을 뚫어냈고, 나머지 중앙수비수 하나는 이택현이 끌어냈으니까.
지금 해야 하는 것은 하나였다.
앞으로 나아가 골대와의 거리를 좁히고 골키퍼가 막기 어려운 슈팅을 때려내는 것.
그리고.
‘간단하네.’
그건 신재욱이 가장 자신 있는 것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