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 * *
진민호는 걸어 나오는 신재욱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다음은 재욱이 너구나. 재밌게 붙어보자.”
“예.”
인사는 반갑게 했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진민호의 표정엔 결연함이 드러났다.
‘얘가 그렇게 잘한다고 했지?’
신재욱에 대한 이미 충분히 들었다.
제작진들은 신재욱이 잘하는 것을 넘어서 천재고, 축구천재 FC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고 말했다.
다만, 진민호는 제작진들의 이야기에 거품이 끼어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너무 평범해 보여. 내가 봤을 땐 제작진들이 착각을 좀 한 것 같아. 얘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이택현보다 잘할 리가 없잖아?’
조금 전에 상대했던 이택현의 실력이 너무 충격적이었으니까.
진민호가 본 이택현은 머지않아 국내 프로팀에 입단하는 건 물론이고, 더 높은 곳까지도 나아갈 수 있는 재능이라고 느꼈다.
진짜 천재는 이택현이라고 생각했기에, 신재욱이 아무리 잘한다고 한들 그보다 나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진민호는 다짐했다.
‘재욱아, 미안하지만 너를 제물로 자존심 회복 좀 해야겠다.’
신재욱을 철저하게 압도하겠다고.
“제대로 간다. 긴장해.”
그렇게 말하며, 진민호는 공을 몰고 전진했다.
일대일 대결의 시작을 알리는 움직임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버린다.’
진민호는 신재욱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자신감이 훤히 드러나는 움직임이었다.
이어서 화려하게 다리를 휘두르며 스텝오버를 구사했다. 헛다리 짚기라고도 불리는 이 기술은 그가 현역 시절에 수비수들을 효과적으로 괴롭혔던 기술이었다.
휘익!
오른쪽으로 한 번.
휘익!
왼쪽으로 한 번.
다리를 휘두른 지금.
진민호는 급격히 속도를 높이며 오른쪽으로 공을 치고 달렸다.
비록 현역은 아니지만, 현재의 몸으로도 어지간한 선수들은 제칠 수 있다고 자신했었기에. 진민호의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었다. 얼굴에도 자신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신재욱이 발을 길게 뻗었다.
거의 넘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하게 중심을 잡으며 뻗은 발.
그 발로 공을 쳐 냈다.
투웅! 퉁! 퉁!
신재욱이 쳐낸 공이 바닥에 튕겼다.
이어서 굴러갔다. 아웃라인 밖으로.
대결에서 승리한 신재욱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반면, 패배한 진민호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려 신재욱을 쳐다볼 뿐이었다.
촬영장의 분위기 역시 비슷했다.
모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감히 입을 열 생각도 못 했다. 너무 놀라서 신재욱과 진민호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볼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제작진들이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지금 신재욱이 이긴 거 맞죠?”
“그런…… 것 같은데……?”
“이게 맞는 거예요? 어떻게 진민호 감독님이…… 질 수가 있죠?”
“내가 어떻게 알아? 나라고 국가대표였던 선수가 중학생한테 질 걸 알았겠어? 이건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야.”
“이렇게 되면 편집을…… 아니지, 이거 오히려 대박 아닌가요? ‘첫 만남에서 전 국가대표 출신 진민호를 이긴 축구천재!’ 너무 좋지 않아요? 시청자들 관심 제대로 끌어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지.”
“근데…… 진민호 감독은 괜찮은 걸까요? 충격이 큰 것 같은데…….”
“괜찮을 리가 있나. 진민호 감독이 자존심 얼마나 센지 모르지? 저 양반, 현역 시절엔 지고는 못 사는 싸움닭이었어. 아무리 은퇴했어도 그때의 성격이 어디 갔겠어? 충격일 거야. 이택현한테는 거의 질뻔하고, 신재욱한테는 진짜 져버리고. 멘탈이 정상일 수가 없지. 자, 자! 그만 얘기하고 우리라도 빨리 가서 분위기 환기하자.”
짧은 대화를 끝으로 제작진들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움직였다.
“잠시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 * *
촬영이 중단된 지금, 제작진들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노력했다.
중학생 선수들은 어린 나이답게 금방 웃음을 되찾았다. 모두 신재욱을 찬양하며 대단하다는 칭찬을 날렸다.
하지만 진민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중학생한테 졌다고? 그것도 1학년한테?”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후우! 실수야. 다시 하면 다를 거야.”
뭔가 실수가 있었을 거라고.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진민호는 신재욱에게 제안했다.
“재욱아, 나랑 한 번만 더 해보자.”
그리고.
신재욱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예. 또 해요.”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런데, 방금은 내가 실수를 좀 했거든. 이제 제대로 할게.”
“알겠습니다.”
대답은 한 신재욱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표정을 들킬 것 같았으니까.
꿈틀!
신재욱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는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달콤한 꿀이 알아서 굴러들어오네.’
진민호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이겼을 때.
신재욱의 눈앞엔 메시지가 떠올랐었다.
[태클이 좋아집니다!]
[태클이 좋아집니다!]
[대인방어가 좋아집니다!]
…….
…….
아주 많은 양의 메시지였고.
심지어 능력치까지 오른 순간.
[태클이 1 올랐습니다!]
[대인방어가 1 올랐습니다!]
신재욱은 깨달았다.
‘이택현과의 일대일 훈련에서 이겼을 때보다 능력치가 훨씬 더 빨리 올랐어. 이건…… 상대가 진민호여서라고밖에 설명이 안 돼.’
비록 다른 사람들의 능력치를 볼 순 없지만, 중학교 1학년 선수인 자신보다 높은 능력치를 지닌 선수를 이길 때 능력치가 훨씬 더 잘 오른다는 것을.
자신과 진민호의 능력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을.
때문에.
‘승부욕이 되게 센 타입이구나? 그렇다면…… 고맙지.’
재대결을 신청하는 진민호의 모습에 신재욱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던 것이었다.
“준비됐지?”
“예.”
“그럼, 간다!”
진민호가 움직였다.
쉬는 시간이었지만, 촬영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어느새 진민호와 신재욱의 대결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있었다.
“이번엔 누가 이길까? 당연히 진민호 감독님이 이기겠지?”
“당연한 게 어딨어. 조금 전에 신재욱이 이긴 거 못 봤어?”
“감독님이 방심해서 졌던 거 아닐까? 진짜 실력으로는 신재욱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이제 겨우 중1짜리인데.”
“그래도 난 이 대결 누가 이길지 모르겠어.”
“엥? 왜?”
“넌 아까 신재욱이 이겼을 때, 표정 못 봤지?”
“표정? 신재욱 표정이 어땠는데?”
“이긴 게 당연하다는 표정이었어.”
“……뭐?”
“말 그대로야. 신재욱은 진민호 감독을 이긴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그 정도로 자신감이 있었던 거야.”
“……!”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민호가 화려한 볼 컨트롤을 보여주며 신재욱을 향해 다가갔다.
반면, 신재욱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자세를 낮추고 뒷걸음질을 치며 진민호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그때였다.
휘익!
신재욱이 앞으로 상체를 숙였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 진민호는 화들짝 놀라며 발바닥으로 공을 컨트롤하며 뒤로 빠졌다.
하지만 신재욱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단순한 페인팅이었던 거냐?’
진민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중학생에 불과한 신재욱에게 너무 긴장해버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쪽팔리게…!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압도해주마!’
진민호는 오른쪽 대각선으로 천천히 드리블했다. 오른발로 공을 컨트롤하는 드리블. 속도를 낮춘 채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 순간 신재욱이 거리를 좁히려는 움직임을 펼쳤다.
타앗!
이때, 진민호는 오랜 경험으로 인해서 눈치챘다. 이번엔 페인팅이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그래서.
씨익!
진민호는 웃을 수 있었다.
‘걸려들었어!’
덫이었다.
일부러 속도를 낮추며 드리블한 뒤, 상대가 덤벼들 때 같은 방향으로 급격히 속도를 높여서 치고 나가는 드리블.
완급조절이 매우 중요한 드리블이었고, 당연하게도 스피드와 볼 컨트롤도 중요했다.
그리고.
진민호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렇게 생각했다.
촤아아악!
신재욱의 태클에 공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 * *
슬라이딩 태클이었다.
상대가 치고 나가는 타이밍을 정확히 노리기만 하면, 안정적으로 공을 뺏어올 수 있는 수비 기술.
반면에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다면 단숨에 옐로카드를, 심하면 레드카드를 수집할 수 있는 기술이기도 했다.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들에게도 제법 잘 통했던, 신재욱의 장기 중 하나이기도 했다.
‘됐다.’
신재욱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태클로 진민호의 드리블을 막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이어서 몸을 일으킨 뒤 공을 아웃라인 밖으로 걷어냈다.
일대일 대결은 그렇게 끝났다.
촬영장은 또다시 조용해졌다.
신재욱은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 경악하고 있는 반응이 재밌게 느껴졌다.
‘다들 입 찢어지겠다. 저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젠 사람들의 저런 반응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즐거운 일은 계속 이어졌다.
[대인방어가 좋아집니다!]
[태클이 좋아집니다!]
[태클이 좋아집니다!]
…….
…….
대인방어와 태클이 좋아졌다는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고.
[태클이 1 올랐습니다!]
[대인방어가 1 올랐습니다!]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까지 떠올랐다.
‘또 능력치가 올랐어. 오늘만 벌써 두 번째야.’
신재욱은 또다시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성장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더구나 시선을 돌려 진민호를 보니, 여전히 승부욕에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신재욱의 경험상 저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이길 때까지 덤벼드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건 신재욱이 원하는 바였다.
‘제발 계속 덤벼주라.’
그때였다.
“으하하하! 너, 대박이다! 제작진들이 괜히 신재욱, 신재욱 한 게 아니었어!”
“감사합니다.”
진민호는 의외로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엔 내가 실수였나 싶었는데, 이렇게 다시 붙어보니까 확실하게 알겠다. 재욱이 너, 엄청 잘하네!”
하지만 신재욱에겐 보였다.
붉게 달아오른 진민호의 얼굴과 충혈된 눈이.
‘이 양반, 열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진민호 감독은 애써 숨기려고 했지만, 그의 얼굴엔 감정이 다 드러나고 있었다.
신재욱은 미소를 숨기며 진민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경기에서라면 모를까, 이런 곳에서 열 받은 사람을 굳이 도발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상대가 성장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많이 배웠습니다.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서 엄청 긴장하면서 했어요. 그리고…… 진민호 감독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응? 부탁이라고? 뭔데?”
“감독님만 괜찮으시다면 앞으로도 감독님과 일대일 훈련 자주 하고 싶어요. 이럴 때가 아니면 감독님 같은 대단한 분과 붙어볼 기회가 없거든요.”
“대단한 분은 무슨, 중학생도 못 이기는 퇴물인걸.”
“부탁드립니다. 승패를 떠나서 배울 점이 너무 많았어요.”
“……어린 친구가 당차네. 그래!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면 너무 속 좁아 보이겠지? 앞으로 자주 붙어보자.”
“감사합니다.”
“대신 다음부턴 안 봐줄 거야.”
“승패에 상관없이 많이 배우겠습니다.”
대화를 끝으로, 신재욱은 다시금 생각했다.
축구천재 FC 프로그램에 참여하길 잘했다고.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