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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231화 (231/235)

00228 「23-7 : 어둠이 사라진 뒤……. (7)」 =========================

안즈는 까놓고 말해 직설적인 성격이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투덜거리고 능글맞게 웃으면서도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곤 한다. 리더에 적합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특유의 성격과 카리스마는 다른 사람들을 이끌기에는 충분했다.

청록색 촉수괴물과 싸워야 했던 때는 모두를 통솔하고 관리할 리더도 필요했던 때라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쉽게 리더가 될 수 있었다.

키리와 다툼이 있곤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의견 상의 충돌일 뿐이지, 리더나 권력욕에서 비롯된 싸움이 아니었다. 누구든 간에 야만족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키리가 온건파(穩健派)에 속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안즈보다 덜한 과격파(過激派)라고 해야 옳겠지. 괴물을 상대로 온건해질 수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밖에 없으니까.

괴물로부터 도망치다 죽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옛날이야기. 현재는 대부분의 야만족이 소생한 것 같았다. 괴물을 없앴으니 더 이상 배가(倍加) 능력을 쓸 일은 없다. 이 말인즉슨……더 이상 괴물 때문에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더 이상의 전투가 없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녀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마음 놓고 임신을 할 수 있다는 거지. 태아의 에너지를 소스 삼아 발동하는 배가 능력은 어디까지나 괴물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들은 아기를 죽이는 걸로 쾌감을 얻는 변태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섹스와 아기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유린이 그렇게 만들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이 세상을 자세히 파고든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에는 전쟁이나 기아, 질병 등이 없다. 치안이 나쁘거나 범죄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건 어느 세상이든 같았으며, 이곳에서 일어나는 범죄라고 해봤자 납치나 살인 정도. 그런 일은 내가 살던 세상에서도 일어났던 일이다. 이제 와서 ‘왜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가’라는 토론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전쟁이나 기아, 질병이 없고 화폐 가치의 급증이나 몰락도 존재하지 않았다. 경제나 사회에 문제가 없으니 그들은 자신의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남자가 없는 이 세상에서는 ‘생명의 씨앗’으로 임신을 해 아기를 만들 수 있었고, 아기를 낳기까지는 길어도 5-6개월이 걸렸다.

자기의 몸에서 낳은 아기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자연히 가족관계(자식)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자기 배 아파하며 낳은 자식인데 안 귀할 리가 있겠냐?

뭐……로라의 경우에는 정서적 학대를 했으니 ‘자식을 무조건 귀하게 여긴다’라는 것은 너무 일반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만. 그런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식을 귀하게 여겼다.

괴물의 습격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사망률은 지금까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프레그넌트 숲에 있는 놈들을 토벌하며 그 사망률은 조금 내려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프레그넌트에 한해서의 이야기. 전체적인 사망률은 여전히 높은 편이었고, 카인(유린)이 손을 대면서 사망률은 거의 100%를 찍게 됐다. 참으로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카인 입장에서는 자기와 말이 통하지 않는 여자들이었기에 아무런 죄책감이나 거리낌도 없이 괴물로 만들어버렸지만……당하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끔찍한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함께 지내던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이 괴물로 변해버리다니……생지옥이 따로 없었겠지.

괴물 투성이인 루인에서 이루이가 살아남았던 걸 생각하니 용케도 그런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걔 베어 그릴스 친척 아닌가? 어휴……이루이 생각을 하니 또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를 모두의 은인(恩人)이라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보던 걸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고.

원래라면 좀 더 오래 있어야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 야만족의 숲조차 최우선 목표인 프레그넌트에 오래 있기 위해 잠시 들른 것일 뿐. 필요한 대화가 끝난다면 프레그넌트로 주저 없이 발길을 옮길 생각이었다. 안즈가 싫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단지 모두가 보고 싶으니까 가는 것일 뿐.

귀여운 이루이한테 많은 지식을 주입해주신 현자(賢者) 어머님께 언젠가 제대로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안즈한테로 시선을 돌린다. 아, 얘도 참 많이 변했다. 옛날에는 나를 병신, 도구, 노예, 무능한 놈으로만 봤었는데……내가 어쩌다 얘랑 결혼하게 됐을까?

숲에서 도망친 당시, 나와 안즈는 매우 흡사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나는 제2의 고향인 프레그넌트와 아내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지만……카인의 육체 및 정신지배로 인해 아내들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쓰던 마법이나 증폭된 마력까지. 진짜 에누리 없이 탈탈 털렸었지.

안즈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를 납치해 아기 씨앗을 모두한테 주입시킨 안즈는 95명이나 되는 동료들을 데리고 싸움에 나섰었다. 승리를 예상하며 동료들과 함께 도전한 결과는……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必要韓紙)?

반수 이상이 죽고 나머지는 병신이 돼서 돌아왔었다. 말 그대로 병신. 신체 일부를 잃어 전투는커녕 일반생활조차 어려운 상태가 됐었지.

아, 착각하지 마라. 난 절대 장애인을 ‘병신’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녀들의 선택이나 행동이 어리석었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지, 절대 장애인이나 신체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놀리려는 게 아니다. 난 그렇게까지 인간쓰레기는 아니거든.

장애인을 비웃거나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장애인의 10%는 선천적이지만 나머지는 후천적이거나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된 사람들이다. 이는 다시 말해 ‘장애인을 보며 [난 저 사람들과 달라!]라며 우월감을 느끼다가 사고나 예상치 못한 일 한 방에 훅 가서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라는 뜻이었다.

이는 정확한 표현이었다. 자신만만했던 안즈는 동료들 태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암군(暗君)이 되어버렸다. 왕은 아니었지만 리더 자리에 있던 안즈는 이 때문에 패닉에 빠지게 됐고, 난 그녀한테 숲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충고를 던졌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큼은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다. 안 하면 진짜 다 죽었을 테니까. 나 포함해서.

물론 우리가 나간다고 해서 괴물들이 ‘ㅋㅋㅋ알았어, 이번에는 봐줄게. 두 번 다시 오지 마라? 이 근처에 오면 죽인다?’라며 놓아줄 리가 만무했다.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동료들을 데리고 갔었지만……놈들의 빔 공격에 의해 살이 녹아들어가며 죽은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었다.

서브 리더나 다름없었던 키리마저 목이 날아가 버렸고 그걸 본 우리는 둘 다 완전히 정신줄을 놓은 상태가 됐었지. 그나마 남아있던 M16A1과 K2 자동소총 덕분에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만……그 두 자루의 총이 자동사격을 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 HP는 당시 수준으로도 절대 낮지는 않았는데 그 HP가 30% 이하로 내려갔다는 소리지. 동료까지 모조리 잃으며 나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된 안즈는 배가 능력을 쓰기 위한 정액을 받으며 섹스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내 연인이 되어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잃은 게 닮은꼴이 되어 그랬다지만……후회는 없다.

그런 안즈가……나를 서방님이라 부를 뿐만 아니라 내가 했던 짓을 모두한테 알리다니.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럼, 도시락도 꿈이게? 내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전부 꿈이었습니다’ 엔딩이나 드립이다. 전부 다 꿈같았으면 진행은 뭐 하러 한 건데?

안즈의 태도와 행동에 난 잠시 이마를 부여잡았다. 으, 음……안즈가 이런 여자였나? 안즈는 나한테 욕도 많이 하고 투덜거리기도 했던 여잔데……지금 내 앞에 있는 안즈는 예전의 안즈와는 조금 달랐다. 묻고 싶은 건 묻고 말하고 싶은 건 당연하게 말하지만……뭐라고 해야 할까? 배려와 마음씀씀이, 태도가 좀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나한테 틱틱대지 않는 건 좋지만 태도가 갑자기 달라진 것에 대해서는 살짝 불안함을 느껴야만 했다. 혹시나 얘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난 마음을 안정시킨 뒤 다시 한 번 물었다. 응, 처음부터 정리해보자. 확실하게. 대화를 정리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다보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 안즈. 있잖아. 이해가 잘 안 돼서 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내가 말한 거지만 참으로 웃겼다. 대화 몇 번 나누었다고 정리가 안 된다는 걸까.

“어, 일단 내 질문에 대답 좀 해줘. 몇 명 정도 되살아났어?”

“……대부분 다 살아났어. 내가 애들 데리고 괴물을 잡으러 갔던 때까지 살아있던 애들은 전부 다. 너를 이 숲에 데려오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없더라고.”

착잡하게 대답하는 걸 보니 그녀도 기대했었던 것 같았다. 나를 납치하기 전에 죽었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되살아나는 것을. 나도 그러한 행동을 하려 했지만……무리였다. 나한테 힘과 지식을 준 사람들은 확실히 대단했다. 죽었던 사람들이나 부서진 터전을 원래대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유린과 싸운 후 남은 능력을 최대한 동원해 사람들을 살리고 했지만……역시 모자라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죽은 사람, 부서진 마을, 괴물의 배제. 그 세 개만을 중점으로 했기에 내가 없었던 때 죽었던 사람들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시간을 거슬러 소생시키는 건 역시 불가능하구나 싶었지.

“세린……혹시나 오해할지도 모르니 미리 말해둘게. 예전에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은 건 안타깝다고 생각하지만……절대 세린을 원망하거나 미워하고 있지는 않아. 그것만큼은 알아줘.”

역시 안즈. 내가 물어본 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 대놓고 말했다. 관심법이라도 익혔냐고 묻고 싶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예전에 죽었던 사람들까지 살려내지 못한 것에 대해 신경 쓰고 있는 걸 눈치 채다니.

“예전에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한 건 아쉬워. 그치만……죽은 사람들이 지키려 했던 숲. 그 사람들의 남은 가족들이나 내 친구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 하더라도 나나 친구들한테는 기적이나 다름없었어. 죽었던 사람들이 되살아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었으니까…….”

앗,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즈 씨! 나도 설마 내가 그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으니까. 그 이전에……너희한테 죽었던 걸 생각하면 부활할 거라는 생각조차 못 했었지. 으음, 그때 생각하니 또 소름이 돋는구만. 무표정한 미인 16명이 나한테 칼을 마구 들이박는 걸 생각하니 호러 영화가 따로 없구나 싶었다.

“나, 친구들이나 키리가 살아 돌아온 걸 보고 꿈을 꾸고 있나 싶었어. 이제야 죽어서 애들을 만났나 싶었지. 내가 그 애들을 죽음에 몰아넣은 거나 다름없었는데……실제로 걔들을 보니 눈물이 나오더라. 하핫…….”

절대 웃으면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와 안즈는 프레그넌트의 숲으로 도피한 후 있는 욕 없는 모독을 해가며 엄청 싸웠었다. 그야말로 꼴불견 콘테스트에서 1등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싸웠었지. 인격모독, 패드립 등. 온갖 걸 다 지껄였던 게 기억난다. 그땐 진짜 시궁창이었지.

“근데……목소리가 들리더라. 니 목소리. 모두 다 세린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걸 듣고 그때야 깨달았지. 아, 세린이구나. 내 남편이 나나 친구들을 다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어줬다는 걸……. 나중에 들어보면 알겠지만, 나 그때 엄청 울었어. 니가 죽어서 슬픈 것도 있었지만……죽으면서까지 나나 친구들한테 신경 써주는 걸 보니 눈물이 막 넘치더라.”

솔직하게 말하는 걸 보니 역시 성격 자체가 아주 바뀐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이야기는 아무나 못 하지. 은채라면 틱틱대면서도 말할 수 있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든다만.

그러고 보니……은채도 은근히 안즈랑 닮은 성격이란 말이지. 걔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으니 자기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실컷 하며 살아왔을 테니까.

자유분방하게 살아왔다는 점은 비슷했기에 둘이 만나면 어떤 대화를 나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인이 나가 있는 동안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그 횟수는 단 한 번뿐이었고, 모두와 동시에 대화를 나누었으니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난 애들한테 용서를 빌었어. 너희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를 용서해달라고. 애들은 내 탓이 아니라고 했지만 난 계속 용서를 빌어야 했어. 그러고 싶었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달라고 하더라. 다 이야기했지. 너희가 죽은 뒤에 도망쳤고, 세린이랑 섹스하면서 여행 하다 보니 결혼도 했다고.”

쩐다. 역시 얘는 범상치 않은 여자였다. 닮은꼴이라서 결혼했던 것도 있는데 진짜 자기 하고 싶은 말은 그대로 하는구나. 너무 시원시원했기에 듣고 있는 내가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육체나 정신을 지배당하고 있었지만 기억은 남아 있었거든. 다 알게 됐어. 카인이라는 놈이 청록색 촉수괴물부터 시작해 온갖 비겁하고 더러운 짓을 했다는 거. 그거 때문에 야만족 중 태반이 목숨을 잃게 됐다는 것도 알게 됐지. 물론……그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었지만.”

늦어도 보통 늦은 게 아니었다. 수도는 괴물로 넘쳐났고 왕궁에 있는 사람은 거의 최소 인원. 카인과 아내들밖에 없었다. 하아……그거 생각하니 또 가슴 아파온다. 진짜 싫다……트라우마급이라고, 그거. 앞으로 평생 남을 거 같아…….

“이야기를 들은 애들은 좀처럼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난 그 애들한테 말했어. 죽었던 너희가 살아난 것도, 이 숲에 더 이상 괴물이 없는 것도. 모두 다 세린 덕분이라고. 세린이 아니라면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없다고 말이야. 내 남편이기도 하지만 세린은 모두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자……그, 어……야만족의 주인이라고…….”

아, 씨발! 잘 나가다 왜 저 지랄임!? 폐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렇군. 그딴 소리를 하니까 다들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존댓말을 한 거겠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주입시켰다 이거지!? 세상에! 괴물한테서 도망치던 내가 순식간에 야만족의 생명의 은인이자 주인이 되다니! 아, 미친! 뭐가 진짜 이러냐!?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만은 안즈는 얼굴을 붉힌 채 소리를 줄였다. 그 모습은 매우 귀여웠지만……안 속거든요!? 그거 하나로 땡 치고 넘어갈 정도로 상황이 안 심각한 게 아니거든요!?

“야, 넌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그거 때문에 다들 나한테 존댓말 쓴 거였어!?”

내가 어이가 없어 소리를 치자 안즈도 지지 않겠다는 양 소리를 높였다. 으아니!? 이 계집애가!?

“그, 그러면 어떻게 해!? 내 목숨 구해주고, 모두를 살려주고! 우리한테 숲도 돌려주고 괴물까지 없애줬는데! 이걸 목숨의 은인이자 야만족의 주인이라고 말 안 하면,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데!? 이런 건 여왕이라도 못 하잖아! 그, 그러니까 주인이라고 한 거지! 모두를 죽음에서 데리고 왔는데 그 정도 대접은 해줘야 하잖아!”

아, 이 빌어먹을 여자! 멀쩡하다 싶었더니 사실은 초특급 지뢰를 숨기고 있었군! 뭐? 모두의 은인? 야만족의 주인? 너님 중2병 걸렸음? 내가 말하자니 좀 한심한데, 난 절대 그렇게 불릴 정도의 위인이 아니거든요? 호인(好人)도 아니거든요?

“그, 그리고……우리 뜻은 아니지만……나나 다른 아내들이 너를 죽였잖아.”

그 이야기를 꺼내자 내 흥분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젠장. 그 기억까지 고스란히 남기다니. 유린 그 개씨발새끼를 몇 대 더 패줬어야 하는 건데. 육체와 정신을 지배했으면서 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나 장면은 모조리 보여주다니. 악취미도 정도가 있지……그 새끼는 틀림없이 지옥 갔을 거야. 틀림없이.

이루이도 아마 날 죽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만……루인에 도착한 나는 식사, 목욕, 이야기. 이 세 개의 행동만을 한 후 거의 하루에 가까운 시간을 잠에 소비했다. 그렇기에 이루이와는 이런 심도(深度)있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기억해봤자 그녀를 괴롭게만 만들 테니 이야기를 할 생각도 별로 없었다만…….

“널 죽였는데도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 소생시켜준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이 빚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모두한테 그런 말을 한 거고. 그, 그러니까……뭐, 뭣하면 니가 나 외에 다른 애를 아내로 삼는다 해도 전혀 문제될 건 없어.”

문제 많거든요!? 존나 많거든요!? 와, 너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건데? 이게 페르마의 정리니? 풀긴 했는데 여백이 없어서 그런 미친 결론이 나온 거야!? 난 정말 눈물을 흘리며 울고 싶었다. 내가 정신 나간 건지 얘가 정신 나간 건지. 아니면 전부 다 사이좋게 마약이라도 빤 게 아닌가 싶었다.

잠깐만. 그럼 설마? 불안한 생각이 떠오른 나는 곧바로 조금 전에 숲에서 있던 일을 말했다. 그 사람들이 나한테 ‘님’자를 붙여 부르는 것부터 시작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존댓말을 쓰거나 행동하는 것까지. 안즈는 당연하다는 눈빛으로 날 본다.

“그야 당연히 그래야지. 목숨도 구해주고, 우리 숲도 되찾아줬는데 반말을 찍찍 해대며 버릇없이 굴 수는 없잖아.”

안즈 씨. 과거회상(過去回想)이라는 말은 아십니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십니까? 너님이 나를 납치해서 정액 뽑는 기계로 만들었던 건 뭔가염? 다른 시공차원에 있는 안즈가 그런 짓을 한 겁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렇군.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듣는 본인조차 그게 말이 되냐고 화를 낼 정도로 한 일을 부풀렸으니 전부 다 그런 태도를 취할 만하지. 누가 보면 내가 신인 줄 알겠다.

예전에 자기들이 나를 납치해서 저질렀던 것도 있고 하니 더욱 더 그들을 긴장하게 만들었겠지. 과거의 죄를 물어오면 어떻게 하나 싶어 긴장했을 것이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나를 신 같은 걸로 착각해 ‘예전의 잘못을 묻는다 → 목숨을 빼앗음으로써 그 죄를 사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런 생각을 한 거라면……안타깝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난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없지만, 힘이 있다고 해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목숨이나 소중한 사람들을 얼마든지 해쳐도 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는다. 할 생각도 없다. 그런 폭군(暴君)짓 하다가 뒤진 놈이 하나 있지 않은가. 유린이라고.

야만족한테 무조건 좋은 감정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그건 결국 과거였다. 이들 또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배가 능력을 써서 겨우 한 명 도망칠 수 있었으니 내가 없었다면 전멸(全滅)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겠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다 죽은 사람들한테 끝까지 책임을 물을 정도로 난 개새끼가 아니었다. 그냥 ‘그땐 그랬지’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들이 나한테 악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런 짓을 다시 할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생각했다. 더 이상 옛날일 가지고 왈가왈부하기도 싫었고.

안즈의 말도 안 되는 포교활동 때문에 순식간에 야만족의 주인이 되어버린 나는 다시 한숨을 크게 쉬었다. 쓸데없는 행동력이 나쁜 쪽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아주 확실하게.

숲의 주인 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숲의 니트(Neet : Not in Employment, Education or Training. 고용이나 교육, 훈련을 받지 않는 사람. 쉽게 말해 잉여인간, 백수를 뜻한다)를 잘못 말한 거겠지!

“그래, 그 이야기를 모두한테 했다……이거지? 내가 모두를 구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증거나 확증 같은 게 없는 상태에서 ‘세린이 모두를 구했어! 앞으로 세린을 주인님처럼 모셔야 해!’라고 말했다는 거지?”

“응! 이런 일, 세린이 아니면 누가 하겠어? 게다가……다름 아닌 우리 서방님이 하신 건데, 아내인 내가 열심히 알려야 하지 않겠어? 헤헤……나 잘했지?”

아아, 떨린다.

심장이 떨리냐고?

사랑스러움에 떨리냐고?

아니! 주먹이 떨린다! 분노와 짜증, 어이없음에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확증도 없이 그런 말 했다가 아니면? 사실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냐!?

“화, 확증도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혹시나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면 친구들이 너보고 거짓말했다고 뭐라 할 수도 있었잖아.”

분노를 간신히 참은 나는 안즈를 위하는 투로 물어봤지만 안즈는 ‘뭔 바보 같은 소리임?’이라는 눈빛으로 날 봤다. 바보는 너다, 이 바보 같은 여자야!!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 죽었던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만난 것도, 이 숲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괴물들이랑 싸운 것도! 전부 다 세린이잖아! 세린 외에 우리를 부활시켜줄 명분이나 이유를 가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마리아 여왕이나 다른 마을 사람들이 야만족의 사정을 알 리도 없고! 그럼 당연히 세린밖에 없잖아, 우리를 위해 이런 일 할 사람?”

아아, 짜증! 짜아아즈으으응! 근거나 확신은 없는 주제에 논리만큼은 철저해! 씨발! 얘는 머리가 좋은 거냐, 나쁜 거냐!? 자기가 생각한 걸 멋대로 결론지어 모두한테 말한 주제에 그 근거만큼은 착실히 생각해두다니! 너 그렇게 머리 좋았냐?

난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 다 포기하자. 어찌 됐든 모두 다 살아났고 숲은 이들의 것이 됐다. 괴물이 없으니 더 이상 배가 능력 같은 걸 쓸 필요도 없으니까. 찾아온 평화를 만끽하도록 내버려두자. 이거 외에 질문할 것도 있으니까 저녁까지는 대화를 나누도록 할까…….

생각 같아서는 모든 야만족한테 ‘난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니다, 안즈가 개구라 친 거다. 믿지 마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이들한테 있어 소생(蘇生)이라는 영역은 신이나 기적과 동급의 영역이었다. 내가 이들을 소생시킨 것은 틀림없으니 부정해도 대단한 사람이라 오해하겠지. 내 말보다 안즈 말을 더 믿을 테니 말해도 소용도 없을 거고.

나에 대한 오해를 그냥 놔두기로 한 나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된 이상 저녁만 먹고 여기서 나가도록 하자. 괴물이 없으니 그냥 걷기만 하면 날이 바뀌기 전에 프레그넌트에 도착할 수 있겠지. 안즈도 이해해줄 거고.

그러나……안즈는 예상과 다른 행동을 취했다. 저녁을 먹고 하룻밤 쉬고 가라는 것이었다. 모두의 은인인 나를 식사만 먹이고 보낼 수는 없다고 했다. 생각 같아서는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내 팔을 잡은 채 울먹이는 안즈를 보니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내가 어쩌다 얘한테 이렇게 약해진 건지 원. 옛날에는 얘한테 못 할 말, 해서는 안 되는 욕 등 온갖 것을 다 말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패닉 상태에서 용케 욕이랑 패드립, 고인드립만큼은 철저히 쳤구나 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감탄할 부분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뇌의 일부분은 다른 사람을 디스하기 위한 표현 등으로 가득 차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뿐만 아니라 안즈도 나한테 온갖 쌍욕을 했으니 피차일반이군. 저속한 욕이나 표현을 일일이 기록해서 넣어두는 뇌를 떠올리니 피식 하며 웃음이 나왔다. 난 진짜 인간이 왜 이러냐…….

결국 저녁을 먹은 뒤 야만족의 숲에서 잠을 청하게 됐다. 생각 같아서는 안즈와 섹스를 하고 싶었지만……몸을 나누는 것만큼은 프레그넌트에 가서 하고 싶다고 정중하게 거절했으며, 안즈 또한 그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다음날 아침. 빠른 식사를 마친 나는 야만족의 숲을 나와 프레그넌트로 향했다. 안즈는 나를 배웅하려 했지만 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보다는 숲 속의 상태를 파악해서 더 살기 편한 곳으로 만들라는 조언을 했다. 혹시나 아이들을 낳게 된다면 그만한 의식주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니까.

부지런히 걸은 결과 점심을 먹는 시간쯤에 프레그넌트에 도착했다. 날 반기는 주민들한테 가볍게 인사를 하며 경비대 식당에 들어갔고……거기서 밥을 먹고 있던 혜린이와 아이나를 보며 인사를 했다.

“밥을 왜 그렇게 적게 먹냐? 다이어트하냐?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너희는 지금 제일 예쁜데 무슨 다이어트를 한다는 거야?”

혜린이는 생각 이상으로 밥을 적게 먹었기에 걱정이 됐다. 아이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충고 섞인 인사를 날렸다.

“아이나, 너도. 밥을 그렇게 적게 먹어서야 일할 수 있겠냐? 괜히 밥 적게 먹었다가 비실대며 넘어지지 말고 제대로 먹으라고. 그러다 넘어지면 진짜 허당 푼수 된다?”

아이나는 내 정성 어린 충고(라고 적고 어그로라 읽는다)에 일어서며 분노를 표했다.

“누가 허당 푼수라는 거예요!? 진짜 맞을래요!? 예전처럼 한 대 맞고 싶어……서……!?”

오랜만에 날 봐서 그런 걸까? 뒤를 돌아 나를 보는 혜린이. 오랜만에 날 봐서 그런지 멍하게 선 채 멈춰버린 아이나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보고 싶었던 마음과 웃음을 담아 인사한다. 내 사랑하는 아내들한테…….

“……건강하게 잘 지냈냐?”

나는 돌아왔다.

내 고향으로.

내가 그토록 바라던 ‘모두가 있는 곳’으로…….

============================ 작품 후기 ============================

장난 아니게 춥네요. 겨울 치고는 그리 안 춥네 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생각합니다. 세간에서는 이걸 '플래그'라고 부르죠. 그리 안 춥길래 그런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단숨에 동장군이 찾아올 줄이야. 진짜 이 세상은 무서운 겁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2017년의 마지막이 찾아오는데 이 소설은 여전히 절찬리 막장입니다. 아무런 물증이나 확신도 없이 세린이 모두를 소생시켰다고 말하는 안즈도 문제입니다만,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는 야만족도 의외로 순진하네요. 제가 쓰긴 했지만 그래가지고 이 험한 세상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후속작도 조금씩 준비해가고 있습니다만,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조금씩'입니다. 야근부터 시작해 집에 도착하는 시간 + 식사/세면/가사를 생각하면 소설 쓸 시간은 정말 극히 일부분입니다. 후기가 짧아지는 것 같다고 느끼신다면 양해바란다는 말밖에 드릴 수가 없네요.

어쨌든, 야만족의 숲을 나와 마침내 프레그넌트에 도달한 세린입니다. 23-1의 마지막 부분이 23-7에서야 이뤄지다니. 남은 편은 겨우 세 편인데 이걸로 모든 걸 끝내려 하는 제 모습을 보고 뭔가가 떠오른다면 그건 이상한 게 아닙니다.

소드 마스터 신세린!

모든 것을 끝낼 때가 왔다!

덤벼라, 신세린! 이 소설은 사실 세 편으로 끝난……(칼빵)쿠에에에엑!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sckgjjjDrthcjfjdj님, 야만족과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쓰면서 '야만족 외에 마리아나 아테나 일행도 써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용은 길지만 사실 이것보다 더 길게, 더 많은 것을 적고 싶었습니다. 그걸 야만족 부분에 할애해버리니 이렇게 된 거겠죠. 여러 모로 반성 중입니다.

qndyd02님, 스토리가 끝난 후의 외전 부분에서는 물론 난☆교!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세린의 자식들과 '누가누가 아빠를 더 만족시키나 대회!?'따위를 여는 이벤트도 생각했었죠.

아버지와 근친상간을 하면서도 윤리적·도덕적으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만, 사실상 쓰기가 어렵게 됐네요. 지금도 외전을 써야 하나 망설일 정도로 이 글에 많은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장난 아니라, 진짜 지금도 망설이고 있어요.

참고로 외전을 쓰면 백빵 2018년에 나옵니다. 이번 해로는 완성 못 시켜요.

로리콤MK님, 물론 구상은 끝났습니다. 외전을 쓰면 차기작을 쓸 수가 없기에 진짜 장난 아니게 골때릴 정도로 갈등 중입니다. 외전을 쓰면 하렘 어드벤처라는, 지금까지 쌓아온 글의 지속성과 인지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만 차기작은 무조건 늦어지게 됩니다. =_=;

그렇다고 차기작을 쓰자니 잘 될지 어떨지 모르는 글에 몰빵하는 꼴이 됩니다. 복권처럼 꽝은 아니겠지만 하렘 어드벤처로 쌓아온 인지도나 기대는 전혀 기대할 수가 없겠죠. 사실상 외전을 쓸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생각 중입니다. 물론 늦어지긴 하겠지만…….

이상입니다. 이 빌어먹을 추위로부터 얼른 벗어나고 싶네요. 여러분도 감기 조심하시며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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