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6 「23-5 : 어둠이 사라진 뒤……. (5)」 =========================
야만족은 어느 마을이나 수도에도 속해있지 않은……일종의 ‘무리’였다. 그들은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구하는 것 외에는 그들의 숲에서 나오지 않았다. 좀처럼 알려지지 않았고 그들 또한 자신들의 정보 등을 제공하지 않았기에 꽤 수수께끼에 쌓여 있었다.
배가(倍加) 능력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뱃속에 있는 태아의 생명 에너지를 끌어다 써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법내성을 가진 청록색 촉수괴물한테 이길 수 없었으니까.
당시 숲을 점령하던 청록색 촉수괴물은 참으로 짜증나는 생물이었다. 마법내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괴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했기에 야만족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제1순위 문제였다.
그런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내가 납치됐었고……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것이다. 사람들이 무참하게 죽어나가는 숲에서 허겁지겁 도망쳤던 건 웃으며 할 이야기가 못 되니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죽음의 숲’이라 부르곤 했지만……더 이상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괴물한테 죽은 사람들도 되살아났으니 이곳은 다시금 ‘야만족의 숲’이 된 거였다.
야만족의 숲 근처에 텔레포트를 시켜달라고 했는데 정말 정확히 해줬네. 텔레포트 시켜준 사람도 이 근처에 와봤던 적이 있었던 거 같았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해야겠다.
녹음이 우거진 이곳에 다시금……그것도 내 발로 찾아오게 될 줄이야. 웃으면서 고개를 젓던 나는 가볍게 발을 내딛었다. 괴물이 없다는 걸 깨달으니 참으로 편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걸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위협이 될 것도, 목숨을 잃을 걱정도.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었으니 이 얼마나 편하단 말인가?
예전이었다면 주변에 괴물이 없나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숨죽이고 가야 했을 길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다니. 평화란 이렇게 소중하고 즐거운 것이라 생각하며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숲 안쪽에 있을 테니 거기까지 부지런히 걸어야겠군.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니……음, 여전히 넓군. 너무 넓어서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라면 ‘훗, 이곳은 예전에 내가 왔을 때 표시를 해놓은 곳이야’ 따위의 대사를 지껄이며 아는 척을 하는 게 클리셰지만……내가 여기에 내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 생각하시는 분? 없지? 없지? 다 알잖아. 내가 납치당했던 거.
납치당해서 강간에 가까운 섹스를 4~5일간 당했었지. 아,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살이 벌벌 떨린다. 그건 사랑이고 뭐고 없이 오직 아기 씨앗을 얻기 위해서만 했던 행동이니까. 진짜 두 번 다시 안 당하고 싶다.
“으, 응……?”
난 발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어, 있잖아. 정말 만약. 진짜 만약의 이야기인데……내가 이 숲에 들어왔다고 ‘헤헷, 생명의 씨앗 + 아기의 씨앗! 이 숲을 야만족으로 가득 채우는 그 날까지 좆물을 제공해줘야겠어!’라며 이상한 짓을 당하면……?
“……나 어떻게 도망치지?”
도망칠 능력? 없다. 마법이고 뭐고 간에 다 없어졌다. 홀로그램 윈도우조차 열 수 없게 된 무능력자인데 도망을 쳐? 어떻게 치는지 내가 물어보고 싶었다.
싸워? 너님 제 정신? 대가리를 생각하려고 달으셨어요, 어깨 위가 허전해서 다신 건가염? 괴물은커녕 마을 경비대원한테도 못 이기는데 걔들이랑 1:1? 영혼의 맞다이? 좋은 정신과 소개시켜드려요?
고개를 힘껏 저었다. 에이,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지. 괴물은 더 이상 없고 싸워야 하는 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기를 원한다면 ‘생명의 씨앗’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나를 잡아둬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치만 가능하면 여기서는 빨리 나가자.’
그렇게 다짐한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니 주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람은 아니다. 바람은 불지도 않았거니와 만약 불었다 쳐도 엉뚱한 방향에서 소리가 났다. 괴물일 리는 더더욱 없었다. 모두 다 없애버렸으니까. 그렇다면…….
“……거기 누구 계세요?”
꽤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본래라면 ‘크큭……거기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나오시지!’라고 해야 했지만……그랬다가 적인 줄 알고 공격하면, 책임은 누가 져!? 내 몸은 누가 지켜주고!? 당장 적으로 오인 받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중2병 철철 넘치는 대사를 읊을 용기는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묻기로 했다.
내 생각대로 저 멀리서 누군가 불쑥 나왔다. 가슴을 붕대로 감고 빨간색 훈도시를 맨 걸 보니 살아나면서 기본적인 복장까지 함께 갖춘 채 소생(蘇生)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소생은 둘째 치더라도 복장에 대해서는 신경을 못 썼군. 그냥 살리는 데에만 급급했으니까.
……헉!? 서, 설마. 설마 내가 비싼 돈 주고 샀던 코스튬도 모조리 날아갔다는 건가!? 어헉!? 으, 큭!? 뒤, 뒷목이 막히는 느낌이다! 씨발! 설마! 아니겠지!? 내가 그걸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데……다 날아가다니!? 그, 그럴 리가 없지……그럴 리가 없을 거야!
내가 이런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 뒤에 저 앞에서 나타난 사람. 옆에서도 걸어오는 사람을 보니 총 세 명인가. 세 명한테 포위당하는 줄도 몰랐다니. 누가 보면 자기가 포위당하는 줄도 모르는 눈치 없는 놈일 수도 있겠지만……이 경우에는 저 야만족 여성들의 실력이 너무나 뛰어난 거라 해야 옳았다.
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목표물을 감쌌으니 퇴로(退路)는 없다. 그들의 신체적 능력에 이길 수 없으니 이미 이 단계에서 내 포획이나 죽음은 확정 상태였다. 한 명이랑 싸우긴 커녕 도망도 못 치는데 세 명이라니. 내가 괴물이었다면 지금쯤 지옥에서 럭키짱 만화나 읽고 있겠지. 왜 럭키짱 만화냐고? 지옥에 가서 읽을 만화는 럭키짱이 대표적이다. 그냥 그렇게 알아 놔라.
“응? 너는……?”
먼저 입을 연 것은 저쪽이었다. 응? 날 아는 건가?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나는 그녀들 중 눈에 익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여성들한테 아기 씨앗을 주입할……어, 아니다. 주입하는 것을 강요당한다고 해야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내 뜻으로 한 건 아니잖아.
그녀들한테 아기 씨앗 주입을 강요당할 때 모든 여성과 관계를 가지긴 했지만……그녀들은 나를 거의 도구나 노예처럼 취급했기에 얼굴을 익힌 적은 거의 없었다. 하아……옛날 생각하니 기분이 또 우울해진다. 나도 참 미친놈이라니까? 자기 발로 여길 또 찾아오다니. 이 사람들은 나에 대해 영 좋지 않은 감정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날 노예나 도구처럼 취급했던 사람들밖에 없는 곳에 왜 왔냐고 묻는다면……첫째로는 안즈를 만나고 싶었으니까. 안즈는 ‘자지의 맹세’를 쓸 수 없게 된 내가 처음으로 만든 아내였으니까. 성격이나 가치관은 달랐지만 그녀와 함께였기에 나는 수도로 올 수 있었다. 카인한테 지배당했던 걸 생각하면 가슴이 좀 아프다만.
둘째로는 모두가 소생한 것인지에 대해 확인하고 싶었다. 마을이라면 모를까 야만족의 경우 괴물한테 살해당한 사람의 수가 99명을 넘은 상태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소생시키는 것까지는 할 수가 없었기에 청록색 촉수괴물과 결전을 벌이던 날을 기준으로 소생을 시도해야만 했다.
루인에 가서 직접 확인한 결과……카인이 활동을 하기 전에 죽은 사람들이라면 또 모를까, 카인 때문에 죽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살아난 상태였다. 그건 수도나 프레그넌트. 다른 마을도 같을 것이다. 내가 돌아다니며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마을이나 수도는 그러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 이 야만족의 숲은 사정이 달랐다. 마을이 위험하거나 어려울 경우 그 사태는 수도의 왕궁으로 전달된다. 마리아는 위기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며, 필요하다면 물자도 지급받을 수 있었다. 내가 한 때 만들었던 ‘좆물캡슐’도 그러한 물자에 속했다.
야만족의 숲은 그 조치와 물자의 공급에서 제외되는 지역이었다. 이곳은 여왕이나 수도의 지배 영역에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그걸 알 수 있는 사람은 야만족밖에 없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모두 소생이 됐는가 어떤가를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확인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야만족이 나한테 뭔가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기에 들어왔냐고 묻는다면……이유가 따로 있겠냐.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거지. 모두 소생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가, 안즈는 잘 지내고 있는가. 그걸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저 여성들이 나한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까놓고 말해, 나쁜 감정을 가지든 말든 나는 상관없었다. 확인할 것만 확인하면 됐으니까. 아아, 옛날 생각난다. 키리는 나를 영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지. 안즈는 능글맞게 굴었지만 꽤 강압적인 태도였고. 지금은 달라졌지만 역시 그때를 생각하니 위축되는구먼…….
“혹시……세린님?”
……내 귓구멍이 에러에 걸린 건가? 난 귀를 후볐다. 날 응시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세 명 중 한 명이 날 방금 불렀는데……뭐? 세린‘님’? 어, 응. 잘못 들은 거겠지. 난 내가 들은 이상한 환청을 무시했다.
“예, 그……예전에 잠시 신세 좀 졌던 세린 맞아요. 어,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거 같아 다행이네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어? 그러고 보니, 살아남았던 야만족은 안즈밖에 없었잖아? 안즈가 아닌 야만족이 세 명이나 있는 것을 보니 소생 자체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만약 안 그랬으면 세 명이나 되는 야만족이 날 보고 수군거리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완벽한 건 아니지만 소생 확인의 목적 중 일부는 이룬 거나 다름없군.
내가 인사를 하자 빠르게 이야기를 나누던 세 명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부탁이니 때리거나 욕하는 것만큼은 하지 말아다오. 장난 아니라……진짜 저항이나 도망, 둘 다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으니까.
“그, 어……여기에 오신 이유가……?”
이상하다. 내 청각(聽覺)이 드디어 맛이 갔나? 이번에도 존댓말을 한 거 같은데. 정확히는 ‘오다’를 ‘오시다’로 표현했으니 높임 표현이라 해야 옳지만……저 사람들이 나한테 높임 표현을 써야 하는 이유가 있나? 내 청각이 벌써부터 맛이 간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입을 연다.
“어, 안즈랑 다른 분들 잘 계시나 확인 좀 하려고 왔어요. 안즈랑 키리 씨는 잘 있으세요?”
세 명은 답이 없었다. 어? 왜 그러냐, 니들? 왜 나를 보고 가만히 있는 건데? 렉 걸렸냐? 이 ‘하렘 어드벤처’는 서버에서 데이터를 내려 받아 진행하는 온라인 게임이 아닌데 왜 렉 걸린 것처럼 가만히 있냐, 불안하게…….
세 명은 날 놔둔 채 쑥덕거리더니 다시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 참, 밀담(密談)도 많으시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한담? 그냥 대답 한 번 하면 될 것을, 뭘 그렇게 애간장 타게 만드는지 원……. 그냥 여기 나가서 바로 프레그넌트로 갈까? 프레그넌트로 바로 가도 저녁쯤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사실 내 진짜 목표는 프레그넌트였다. 생명의 소생과 터전의 복구, 괴물의 배제. 신에 필적하는 업적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자기 자신은 어디 있는지 몰랐기에 루인에 도착하게 됐었지. 들러야 하는 곳은 프레그넌트와 루인 외에도 존재했다. 수도에 있는 마리아나 아테나, 헬레나도 만나고 싶었다.
최우선 목표는 프레그넌트였지만 야만족의 숲이 계속 마음에 걸린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다. 수도나 여왕인 마리아한테 전해지는 자료가 전혀 없으니 수도에 간다 쳐도 야만족의 상세한 정보나 현황은 알 수가 없었다.
마리아나 아테나, 헬레나가 나를 여전히 증오하고 있다면 야만족 이전에 내 목숨부터 걱정해야겠지만……만약 그렇지 않다면 수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확률이 매우 높았다. 프레그넌트가 내 제2의 고향이라 친다면 수도는 일종의 별장 비슷한 거였으니까.
아, 착각하지 마라. 내 거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난 더 이상 왕도 아니었고 임금도 아니었다.
그녀들이 나한테 여전히 호의를 가지고 있다면 수도에서 보낼 시간이 많아질 테니 수도부터 가는 것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따라서 루인 다음에 가야 하는 곳은 야만족의 숲밖에 없었다. 마리아한테는 미안하지만……수도는 아마 맨 마지막에 가게 될 거 같았다.
여전히 날 싫어한다면 영원히 갈 일 없는 곳이 되겠다만……나를 발견하는 즉시 연락 혹은 정중하게 이송하라는 명령이 있었기에 그녀들이 나를 싫어하고 있지는 않다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지. 예전에 말했잖냐. 싫어하는 놈을 정중하게 모시는 놈이 어디 있어?
프레그넌트에 도착하면 엄청 오래 있을 거 같아 먼저 여기에 왔는데……이런 식으로 대우를 받으니 기분이 좀 그랬다. 찬양이나 칭송받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런 식으로 이상한 놈 취급이나 대우받기를 원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여기서 나간 후에 아이라랑 나중에 같이 올까? 아이라는 텔레포트를 쓸 줄 아니까 도착하는 것도 순식간이겠지.
앗, 이런. 어느새 ‘아내들은 나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잊은 상태다’라는 걸 전제로 생각해버렸군. 하아……나도 참 속 편한 놈이라니까. 자기가 필요하다 싶으면 아내들의 능력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쓰려 하니까. 이기적인 가치관이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냥 가자. 그게 제일 편할 것 같다.
“저……바쁘신 것 같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혹시나 안즈랑 키리 씨가 있다면 안부 좀 전해주세요. 그럼…….”
인사를 한 뒤 뒤를 돈다. 프레그넌트로 다시 가야겠군. 지금까지 걸어온 게 좀 아쉽지만……어쩔 수 없지 뭐. 여기서 나간 후 조금만 걷다가 점심을 먹도록 하자. 아루아 씨가 도시락으로 뭘 준비했을지 궁금했다. 왜 미리 안 뜯어봤냐고? 도시락을 미리 뜯는 건 좀……. 무슨 음식일지 몰라야 더 식욕이 돌잖아. 반대도 있겠지만. 과연 뭐가 들어있을까?
“……응?”
어떤 도시락일까 기대하던 나를 제정신으로 되돌린 것은 손목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내 손목을 조금 전의 세 명 중 한 명이 잡고 있었다. 어, 왜 그러지? 인사는 했는데? 안부 좀 전해주는 거야 문제도 아니잖아. 왜 내 손을 잡은 거지?
“세, 세린님……그, 저, 저희가 사는 숲 쪽으로 와, 와주셔야……겠습니다…….”
세 번째. 세 번이나 존댓말을 들으니 듣는 내가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놀리는 건가? 장난? 장난삼아 존댓말 쓰는 건 좀 그런데. 듣는 사람이 바보 같아지잖아. 한 번 따질까 싶어 그녀들의 얼굴을 보던 나는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세 명은 하나 같이 나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어……이 사람들 왜 이러지?
“어, 괜찮으세요?”
뭔가 이상하다 싶어 괜찮냐고 물어보자 그들은 매우 정중하게 대답했다. 정중한 대답이야 다른 마을에서도 들었지만, 야만족한테 존댓말과 경칭을 듣기는 또 처음이었다.
“괘, 괜찮습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 아, 안즈와 키리는 숲 안쪽에 있으니 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뭐야, 이 사람들? 대체 왜 이러지? 혹시 나를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그들의 태도와 분위기로 보건대 결코 장난은 아니었다. 장난이라면 웃고 넘겨야지, 저렇게 긴장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이 사람들을 때리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안즈와 키리가 숲 안쪽에 있다고? 그럼 소생에 성공했다는 거네?
뜻하지 않은 대답 덕분에 키리가 부활했다는 걸 깨닫자 가슴이 두근거린다. 다행이다. 안 그래도 이루이를 볼 때마다 머리가 날아간 채 죽어버렸던 키리가 생각나서 찜찜했는데 마침내 그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게 되는구나. 나도 좋고, 본인도 되살아나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Win-Win 전략이 아니겠는가?
“저, 근데……저한테 존댓말 쓰실 필요 없는데요.”
안내하겠다며 앞장 선 그들한테 굳이 존댓말을 쓸 필요는 없다고 했다. 반말 찍찍 듣는 걸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다만, 괜히 어색한 존댓말을 쓰며 묘한 분위기를 만들 바에야 그냥 마음 편하게 반말 듣는 게 몇 배는 나았다. 내가 저 사람들한테 존댓말 들을 정도로 위대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 아닙니다! 그……저, 저희를 되살아나게 해주신 분한테 그, 예의를 지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방금 저 여자가 뭐라고 한 거지? 내 앞과 양측(兩側)에 선 여자들은 나를 호위하는 것처럼 둘러싼 채 마을로 나를 안내해주고 있었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 어? 방금 저 여자, 뭐라고 했지? 자기들을 되살아나게 해준 분한테 예의를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묻자 그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라는 표정 같았기에 더욱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난 어제 아침, 겨우 루인에 도착해서 이루이를 만날 수 있었다. 모두를 소생시킨 후 처음 들른 곳이 루인. 텔레포트를 부탁해 오게 된 곳이 이 야만족의 숲이었다.
인터넷은커녕 전화기조차 없는 이 세상에서 정보가 가지는 위치는 높을지 몰라도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정보 하나 전하는 데에 아주 많은 시간이 들었고, 그 정보가 달라지거나 쓸모없게 되어도 그걸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어보션에서 비앙카가 어떤 내용을 종이에 적자 그 내용이 빛과 함께 사라졌었다. 일종의 문자나 카톡처럼 어떤 내용을 누군가한테 빨리 전하는 도구가 존재하긴 했지만……그건 어보션의 마법사 양성소. 혹은 레이프 같은 수도에서나 볼 법한 마법 도구였다. 마법보다 신체적 능력에 중점을 둔 이들이 그런 도구를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니, 백 보 양보해서……그래, 가지고 있다 치자. 그치만 정보는? 도구가 있어도 정보가 들어오지 않으면 쓸모없는 도구일 뿐이다. 내가 모두를 소생시켰다는 정보는 루인에 퍼진 상태였다. 내가 잠들어있는 동안 아루아 씨가 퍼트렸으니까. 본의 아니게 그런 소문의 주인공이 되긴 했지만……어차피 사실이기도 하니 큰 문제는 없었다.
그치만 그 정보는 어디까지나 루인에만 퍼진 것이었다. 도구를 써서 전달해줄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이들이 그걸 알고 있지? 어떻게 내가 그들을 소생시켰다는 걸 알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관심법이라도 쓰는 건가 싶었지만……그건 아니겠지. 응, 그건 아냐. 이건 내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 생각할 가치도 없는 바보 같은 생각.
“아, 안즈가……모두가 되살아나고 숲이 평화로워진 건 전부 세린님 덕분이라고……했습니다.”
……내가 지금 몇 번이나 통수 맞았는지 아는 사람? 통수를 맞았다고 표현해도 좋을지 어떨지는 제쳐두고……뭐? 안즈가? 모두가 되살아나고 숲이 평화로워진 게 내 덕분? 어, 음……그래. 맞아. 맞긴 맞겠지. 내가 했으니까. 그래, 내가 아니면 할 놈도 없었지, 이런 짓. 맞아. 내가 한 것은 맞아. 문제는……어떻게 알았냐, 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뭐지? 안즈는 야만족의 리더 비슷한 거라 생각했는데 언제 걔가 무당으로 직업을 옮겼을까?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 신앙을 가지고 있다 보니 신내림을 받은 건가? 족집게 미녀 무당 같은 건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뭘 어떻게 하면 그런 걸 남들한테 말할 수 있는 건데? 그 근거는 대체 뭐고?
모두가 무사한 것만 보고 가려 했던 내 마음은 어느새 변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안즈는 내가 한 짓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한테 말했기에 이 여자들이 나를 정중하게 대하는 거겠지. 물론 내가 볼 때는 ‘정중하게 대한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어렵고 거북하게 대하고 있다’라고 표현해야겠다만…….
그녀들이 나를 어렵고 거북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이딴 병신한테 존댓말을 써야 한다니’인지, 아니면 ‘예전에 우리가 했던 짓 때문에 화가 난 거 아닐까?’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들은 안즈한테 그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거였다. 기분? 솔직히 말해서……별로였다. 내가 이런 대접 받자고 그런 짓을 한 건 아니었잖아.
난 나를 칭찬하거나 숭배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시발놈 개새끼라며 비판이나 비난을 받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행복해지기만을 바랐다. 그들이 나에 대한 증오나 분노를 가지고 있다면 용서를 빌고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었지,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유린과 싸운 건 아니었다.
존중의 마음도 없는데 저렇게 대하니……내가 참으로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옛날)는 미안했다며 웃어넘기면 차라리 낫지. 나도 그 사람들의 마음이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근데 이건 또 뭔데? 내가 바보인가? 빌어먹을! 어떻게 된 게 여긴 올 때마다 트라우마나 기분 나쁜 생각만 하게 만드냐?
내가 언짢은 표정을 짓자 그들은 혹시 자기들이 무엇인가 잘못했냐며 물었다. 난 아니라고 한 뒤 안내를 부탁한다고 했고 그 이후에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사람들이 소생한 거야 가서 보거나 물으면 되니까. 나와 대화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한테 억지로 말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의 능숙한 안내 덕분에 나는 눈에 익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오두막 같은 형태의 집들이 모여 있는 걸 보니 옛날 생각이 물씬 난다. 별로 좋은 추억은 아니지만 이왕 겪은 경험이니 그걸 토대로 옛날 내 모습이나 떠올려볼까 싶었다. 난 옛날에 여기서……그만두자. 그건 떠올릴 필요가 없는 추억이야. 응, 잊어버리자. 그게 더 나아.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 그런지 꽤 많은 야만족이 보였다. 얼핏 봐도 40명 정도는 훨씬 넘어 보이는 그들을 보니 안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금 좋아진다. 다행이다. 소생은 성공했다. 예전에 죽었던 사람들이 저렇게 활발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걸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 저기 저 사람……혹시 세린님 아냐?”
“뭐? 세린님? 어, 어? 진짜네?”
……또 속이 쓰려온다. 너흰 대체 뭔데!? 왜 내 이름에 ‘님’자를 붙이는데? 임금님 드립은 됐거든요? 저 마누라뿐만 아니라 왕의 자리도 NTR 당했거든요? 그게 언제 적 드립인데 지금 써먹어!?
날 보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니 당장에라도 등을 돌려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지만……저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는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없애기에는 충분했다. 오랫동안 들은 목소리였기에 가슴이 쿵쾅거렸으니까.
“세린! 세린이야? 정말 세린 맞아?”
숲 중앙에 있던 야만족들이 옆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갈라진 바다처럼 텅 빈 공간의 끝에는……카미유로 강제 텔레포트를 당하기 전까지 늘 함께 있었던 15번째 아내, 안즈가 서있었다.
안즈의 옆에는 키리도 서있었다. 다시 살아난 걸 보니 좋긴 좋은데……사람들이 모두 쳐다봐서 그런지 긴장감이 장난 아니다. 그렇게 뜨거운 시선으로 쳐다봐도 나오는 건 없거든요?
목표는 이뤘지만 여기서 당장 벗어날 수는 없겠구나 싶었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오락 매체에서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재회할 때 엄청 감동적인 말이나 행동을 하기 마련이지만……난 그런 멋진 놈이 아니었기에 간략하게 인사하기로 했다. 안즈도 나한테 그런 분위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온갖 마음을 담아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
성의가 없다 못해 어제 만난 친구한테 인사하듯이 날린 말이었지만……안즈는 울며 대답했다.
“……응. 정말 오랜만이야.”
내 간략한 말에 울음을 터뜨린 안즈는 날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으음, 설마 때리려는 건 아니겠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가 고작 그 따위냐면서 때릴 위인은……될 지도 모르겠다. 다른 건 몰라도 안즈만큼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내 걱정은 기우(杞憂)로 끝났다. 그녀는 날 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나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모두가 보는 가운데 겨우 다시 만난 우리는 그렇게 30분을 쓴 후에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12월입니다. 2016년 11월 말에 연재를 시작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나가버리다니. 그뿐입니까? 1년이 지남과 동시에 이 소설도 점점 완결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작가로서 처음으로 장편소설 겸 노블레스를 연재하게 됐기에 엄청 두근거렸는데……지금 생각하면 참 그리운 추억입니다.
물론 제 취업도 나날로 어려워졌기에 아주 좋은 추억이라고는 말하기 좀 그렇네요. 날 내쫓았던 주제에 아직까지 신입을 모으고 있던 걸 보니 기가 막히더군요. 네이버 블로그에 적었지만 3개 국어 + 무역 지식 + 문서작업 우수를 조건으로 달다니. 지금 생각해도 미친 회사였습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여초 회사라 그랬던 것도 있지만 여자랑 얽혀서 좋았던 적은 진짜 한 번도 없네요. 여자랑 얽혀서 진짜 박살나고 잃어버린 게 너무 많아서 여자랑 일하는 건 좀 피하고 싶습니다. 물론 부하는 없었기에 주로 여자 상사겠죠.
예? 여자 상사와의 썸씽_jpg는 없냐고요?
그딴 거 좆도 없었습니다 시발 ^^
하도 통수를 많이 맞고 여자 때문에 험한 꼴을 보다보니 여자랑 일한다는 환경 자체에 불안함을 느낄 정도로 변해버렸습니다. 여자를 혐오하는 건 아니지만 일 관련에서는 여자랑 만나고 싶지가 않네요. 성인 소설 쓰는 놈이 이상한 말 한다고요?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ㅋㅋㅋ
그치만 어쩝니까. 이상과 현실은 완전히 다른데.
예전에도 적었지만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먼저 여자가 나왔는데 변기 바닥에 똥 묻은 거 보면 절로 인상이 찌푸려집니다. 스캇물도 쓰고 TS강간임신크리 소설도 썼지만 이상과 현실은 몇 광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전 항상 현실을 먼저 보려고 노력합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qndyd02님, 말씀하신 것처럼 아이템을 써볼까도 싶었지만 이번 편을 통해 예전에 소지했던 물건들은 사실상 소지도 안 하고 있기에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걸 나타냈습니다. 물론 다른 여자들의 힘을 빌리면 되겠지만 스토리 진행이 우선이라 이런 형태로 나가게 됐습니다.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신 것에 다시금 놀랐습니다.
sckgjjjDrthcjfjdj님, 개인적으로 저처럼 오덕 냄새 풀풀 풍기면서 그걸 가지고 자세하게 설명, 고찰, 융합시키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패러디를 넣는 거라면 또 모를까, 클리셰나 자주 나오는 장면 가지고 줄줄 풀어 설명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대놓고 패러디를 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패러디니까 별로 안 쓰고 싶습니다. 패러디도 좋지만 클리셰나 특정 상황을 설명하며 주인공이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걸 알려주는 게 더 재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고로……나는 패로부터 스케일 1의 신세린과 스케일 10의 유우키 아스나로 펜듈럼 스케일을 세팅!
이걸로 레벨 2~9까지의 몬스터를 동시에 소환 가능!
나와라, 더 이상 나오지 못하는 소드 아트 온라인 팬픽의 희망, 유우키 아스린!
유우키 아스린의 효과 발동! 이 카드의 성공에 소환했을 때 덱, 패, 묘지로부터 '신세린'과 '유우키 아스나'를 특수소환한다!
나와라, 더 이상 활약할 일 없는 마법 검사 신세린! (펜듈럼 스케일과는 별개의 카드)
나와라, 나이 30줄에 가까운 푼수 미인 아스나! (마찬가지)
두 카드의 레벨은 모두 4! 나는 레벨 4의 카드 두 장으로……오버레이!
강철의 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검사들이여.
지금이야말로 하나가 되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라!
엑시즈 소환! 나와라, 랭크4!「소드갓 세리나」!!
아, 덧붙여 세리나는 세린+아스나를 합친 겁니다. 데헷♡
어, 어어! 데헷 했다고 때리려 하지 맙시다!
사람이 데헷 할 수도 있는 거지!
로리콤MK님, 이해해주셔서 기쁩니다.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지만 집행유예나 심신미약으로 형을 적게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음란물(주로 동인지나 야애니) 소유로 터무니없는 형벌을 받는 분들도 계십니다.
음란물이 성범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말을 1%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만, 현실에서 일어난 일과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 둘 중 후자를 더 엄격하게 벌하다니. 역시 저한테는 이해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아동성범죄를 막자는 취지는 정말 좋은데 그 포인트를 이상하게 잡고 있어요. 그걸 고치려 하지 않는 점이 또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후기만 10분 넘게 쓰네요. 짧게 써도 되지만 즐겁게 봐주시는 분들을 위해 후기도 빵빵하게 채우고 싶습니다. 소설 한 편이 기본 20kb를 넘어가는 건 첫 연재라 그런 것도 있지만 독자분들을 위한 성의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드디어 12월. 가능하면 후회없는 2017년을 보내도록 합시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