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5 「23-4 : 어둠이 사라진 뒤……. (4)」 =========================
피곤함이 극에 달하면 사람은 깊은 수면에 빠지게 된다. 사람들은 보통 7~8시간을 자지만 매우 피곤한 사람들은 12시간 이상을 잠으로 소비하기도 한다. 주위에서 ‘나 12시간 넘게 잤다!’라며 외치는 사람들 중에는 그만큼 잠을 많이 잤다고 자랑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많이 잤다는 것에 놀라워서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루이의 집에서 아침을 먹고 이야기를 한 후 일어난 것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어슴푸레 보이는 햇빛을 보고 3~4시간 잤나 싶었지만……그게 이른 아침부터 보이는 햇빛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아침부터 식사를 준비하는 아루아 씨한테 인사를 하니 그녀는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라며 웃었다. 그녀 말로는 이루이가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 두 차례에 거쳐 큰소리로 부르고 몸도 흔들며 깨웠지만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숨 쉬는 것 외에는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기에 불안을 호소했고 아루아 씨는 이게 극도의 피로로 인한 수면 상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경비대원 중에서도 극심한 전투 후, 과다한 수면으로 휴식을 대신하는 경우가 있다고 대답하니 이루이는 마지못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먹고, 마을도 안내하고 싶었는데 그걸 못 해서 안타까워했다나…….
하루 종일 걸어서 어제 도착했기에 걷는 걸 썩 달갑게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밥을 먹고 간단한 산책 겸 마을 안내 정도라면 갈 수도 있었기에 왠지 모를 죄악감이 가슴을 파고든다. 아니, 이건 내 탓 아니라니까? 자고 일어난 나조차 내가 얼마나 잤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나한테 책임을 묻냐?
그렇다고 몸한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내 육체는 지금까지 마을을 찾느라 무리한 여정을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띌만한 문제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마을을 찾기 전까지는 긴장을 풀 수 없었던 몸은 안식처를 찾자마자 지금까지의 피로를 풀기 위해 많은 수면을 취했다.
육체의 주인인 나를 위해 자동적으로 행한 일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애초에……나무란다고 쳐도 누구한테 책임을 물으면 좋단 말인가? 몸한테 ‘야, 육체! 왜 잠을 이렇게 많이 잤냐!?’라고 물으면 육체는 뭐라고 할까? 대답도 못 하겠지만 만약 할 수 있다 쳐도 ‘시발, 지 생각해서 이렇게 해준 건데 존나 떽떽거리네……’라며 투덜거리겠지.
얼마 안 가 이루이가 일어났고 나는 두 번째 아침 식사를 맞이하게 됐다. 어제 아침 먹고 잤는데 또 아침을 먹게 되다니. 이건 이거대로 신기한 느낌이 들었기에 웃음밖에 안 나왔고, 이루이는 뭐가 즐거운지 웃음을 띠운 채 흥얼거리고 있었다. 좋을 만도 하겠지……어머니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셨으니까.
죽었던 사람이 돌아오는 예시에 대해 이전에 말했었지만……그건 어디까지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돌아왔다’ 혹은 ‘죽었던 사람이 좀비로 변해 돌아왔다’라는 거였다. 지금처럼 죽었던 사람이 아무런 이상 없이 멀쩡하게 살아난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것이었다.
드래곤볼에서 죽은 사람들의 경우 드래곤볼로 부활시키면 된다지만 지구의 드래곤볼로는 죽은 사람(동일인물)은 한 번밖에 부활시킬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연사(自然死)한 사람도 부활시킬 수 없었고. 나메크 성(星)의 드래곤볼로 그 점을 만회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손오공이 소년 시절이었을 때는 피콜로 대마왕과 싸웠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이 때문에 사이어인이 지구를 강습(强襲)했을 때는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라는 긴장감을 가지게 됐다. 이러한 긴장감은 캐릭터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긴장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미 한 번 죽었으니 여기서 죽으면 끝장.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포감과 긴장을 주기에는 참으로 적절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봐라. 기껏 죽음에서 살아났는데 정체 모를 외계인이랑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니? 나 같으면 ‘시발, 장난 빠냐? 내 목숨이 중요하지 지구가 중요하냐?’며 튀었을 거 같다.
하지만 내가 만약 손오공의 동료들. 흔히 말하는 ‘Z전사’였다면 그럴 수도 없었을 것 같다. 라데츠가 왔을 때를 생각해보라. 당시 최강이었던 손오공과 피콜로. 2명을 상대로 싸우면서 라데츠는 전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전투력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며 고전하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주인공과 라이벌인 손오공과 피콜로를 가지고 놀다니! 그야말로 코즈믹 호러가 아니겠는가?
코즈믹 호러는 우주적 공포를 뜻하지만……사실 라데츠가 두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엄밀히 말해 코즈믹 호러에 들어갔다. 우주인(외계인)에 속하는 라데츠가 인간이 아닌 존재(피콜로)와 외계인 동생(손오공)을 상대로 싸우니 이게 우주급 공포가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그런 라데츠마저 별을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녔는데 그보다 강한 내퍼와 베지터가 지구에 오다니. 지구 어디에 숨어 있든 간에 사망은 확실했다. 어딘가에 숨을 수 있다 쳐도 지구가 멸망하거나 하면 다 끝장인데 어디로 숨는단 말인가? 놈들과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숨을 바에야 싸워보는 게 그나마 나은 선택지였을 것이다. 결과는 영 아니었다만…….
죽은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나메크 성에 가게 된다만 거기 가서도 일은 순탄케 해결되지 않았다. 베지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프리더 일당이 있었으니까. 뭐……손오공의 각성을 위해 크리링이 희생당하긴 했지만 나중에 다 살아나니 큰 문제는 없게 됐다. 이때부터 ‘죽으면 드래곤볼로 살리면 그만’이라는 풍조가 강해지긴 했지만…….
아루아의 소생은 따지자면 드래곤볼을 통한 부활과 매우 흡사했다. 이상한 약물을 써서 좀비로 되살아난 게 아니라 나한테 많은 것을 준 사람들의 힘으로 되살아난 거니까. 그 덕분에 더 이상은 마법이고 뭐고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됐지만……후회는 별로 없었다. 저렇게 해맑게 웃는 이루이를 보니 역시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혜린이나 다른 애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좀 답답했다. 찾아온 곳이 루인이라 다행이었지만 사실은 프레그넌트로 가고 싶었으니까. 이곳 사람들이 모두 소생했다는 것은 프레그넌트나 다른 마을도 마찬가지라는 걸 뜻했고, 이는 내 마음을 더욱 더 설레게 만들었다.
좋은 일로 가득이라 웃음을 지을 일이 많았지만……그렇다고 불안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에 대한 증오나 분노, 그녀들이 보여줬던 태도는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보니 어지간히 트라우마로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가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그래도 죽이지는 않겠지……?
식사를 한 다음에는 약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프레그넌트에 갈 생각이라 답했다. 이루이는 여기서 좀 있다 가도 괜찮지 않냐고 했지만 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 여기가 싫어서 벗어나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제 아내들이 거기 있거든요. 문제가 많이 생겨서 좋지 못한 형태로 헤어지게 됐지만……그래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요.”
만나고 싶었다. 그녀들이 나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슬프겠지만……만나고 싶다는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들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들한테 많은 것을 숨겨서 미안하다고. 실제로 내가 살던 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고, 나는 거기서 형편없는 삶을 살았던 놈이라고. 지금까지 말 못 했던 것들을 전해주고 싶었다.
물론 이루이도 소중한 아내라는 말은 잊지 않았다. 단지 지금은 그녀들이 무사한지 어떤지를 확인해야만 한다고 했고 이루이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루아 씨는 내 사정을 이해해줬는지 이루이한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좋은 어머니다. 나도 이런 어머니가 있었더라면 성격이 이렇게까지 엇나가지는 않았을 텐데.
나중에 알게 됐지만……아루아 씨는 내가 말했던 것(신과 싸워 모두를 소생시키거나 마을을 복구시킨 것)을 다른 사람들한테 전부 알렸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머리가 새하얘지는 느낌을 받았었지. 아니, 그걸 또 왜 다른 사람들한테 말해!?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해봤자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볼 건데!?
더 큰 문제는 뭐인 줄 아냐?
그걸 모두 믿었다는 거지!
아니, 다들 진짜 왜 그러냐?
너희 ‘의심하다’라는 말을 알기는 아니?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단어를 들어보기는 했어!?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그걸 믿니? 아무런 증거도 없는 황당한 이야기를 믿다니! 너희 진짜 너무 순수한 거 아니냐?
내가 겪은 이야기를 퍼트리는 게 싫냐고 묻는다면……썩 좋지는 않았다. 내가 개고생한 걸 자랑스럽게 여길 생각도 없거니와 누군가 ‘어이구, 너님이 그렇게 위대하고 잘났음? 증거는? 다른 사람 부활시켰다는 증거도 없음?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승부를 걸지 말라는 말 안 배웠음? 해머 가져와?’라고 비꼴 거 같았으니까.
소생? 복구? 괴물의 제거? 내가 하긴 했지만 나도 가끔씩은 ‘내가 진짜 그런 짓을 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믿겨지지 않았다. 나도 못 믿는데 그걸 또 믿다니. 역시 이 세상의 사람들은 너무 순수했다. 이런 사람들이 더럽고 타락한 세상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면……으윽,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이들은 이 상태가 제일 좋다. 난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퍼트린 것에 대해서는 좀 그랬지만……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은 것은 나한테 좋은 기회로 적용됐다. 원래부터 카인(당시에는 유린이 아니라 카인이었다)에 의해 비참한 죽음과 공포를 경험했던 사람들이었기에 그 이야기를 단숨에 믿을 수 있었고, 이는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찾아왔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 아루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부탁을 이루어주기 위해 전적으로 협력해줬으며, 어제 부탁했던 ‘텔레포트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찾아둔 상태였다. 그 덕분에 나는 커다란 시간 손실 없이 다른 마을에 갈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멋대로 다른 사람들한테 퍼트린 것은 솔직히 말해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만……그 덕분에 빠른 시간 내로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게 된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듣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간 아루아 씨나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도 들었지만……그런 이야기로 마을 사람을 괴롭히거나 따돌릴 정도로 루인은 삭막한 곳이 아니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참으로 다행이라고 느꼈다.
이루이는 점심이 되기 전까지 마을을 돌아다니자고 했고 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마을 산책을 하며 필요한 것도 구할 생각이었지만……어, 현재 나는 무일푼. 속된 말로 ‘개털’이었다. 돈이라고는 지폐는커녕 동전 하나 없는 내가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산다는 것은 역시 좀 무리인가 싶었다.
이 마을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루이의 의견에 너무 안 따라주는 것도 뭐했기에(머물고 있는 집주인 딸을 너무 실망시켰다간 후환이 있을 거 같다는 공포심도 한 몫 했다. 빌어먹을) 난 산책에 어울리기로 결정했다. 겨우 산책일 뿐인데 이루이는 기뻐하며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원래부터 옷에 관심도 없었고 코디 같은 것에 흥미를 기울일 바에야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요소에 흥미를 가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던 나다. 그냥 입고 있는 옷으로 나가면 될 것을, 산책 하나 때문에 옷을 갈아입는 이루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여자는 옷이나 화장부터 시작해 외부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니 어쩔 수 없나.
아내긴 했지만 이루이와 함께 보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좀비 타입인 붉은색 촉수괴물이 득실거리는 마을에서 만나 수도까지. 길어도 일주일 이상을 같이 보냈을 뿐이었지. 카인과 맞붙을 때 지배를 받게 되어 통수를 친 걸 생각하면 가슴이 쓰라리다. 하아……하필이면 이딴 기억밖에 없냐, 어떻게 된 게?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많은 시간,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큰 죄악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미안하면 지금부터라도 좀 만들지?’라며 타박을 줬지만……우선은 프레그넌트로. 내 사랑하는 아내들이 대부분 모인 그곳에 가서 잘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이기적이라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그래도 내 뜻에 따라 행동하고 싶었다.
방에서 나온 이루이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음, 청순함과 섹시함이 느껴지는 옷이다. 하얀 원피스는 순백의 상징. 그걸 로리 거유가 입었으니 어린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바스트가 눈을 이끄는구나. 입에 침이 고이는 걸 삼킨 후 집을 나갔다. 점심이 되기 전까지 적당히 돌아다니면 되겠지.
아루아 씨의 말에 의하자면 텔레포트를 쓰는 사람은 경비대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경비대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것 정도는 알아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루이 성격으로는 날 배웅하겠지만 어디인지 정도는 알아놔야지. 알아서 나쁠 건 없잖아.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보다 훨씬 더 유리한 거니까.
나랑 나가는 게 그렇게 즐거운지 이루이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녀를 보니 키리가 생각난다. 죽었던 야만족들은 이미 소생을 마친 상태겠지. 키리를 포함해 청록색 촉수괴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니 거기도 빨리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루이랑 키리가 만나면 어떨까?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들을 만나서 뭘 할 생각이냐고? 별로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잘 살고 있나 만나고 싶었을 뿐. 그 사람들한테 ‘내가 너희를 소생시켰으니 나를 신처럼 떠받들어라!’라며 오만을 떨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지랄하다가 유린이 나한테 처발렸는데 그걸 따라하고 싶겠수?
죽었던 사람들이 무사히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그것만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 중 반 이상은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상은 크게 바라지 않았다.
뭐어……내가 한 일을 통해 나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없어지기를 바라긴 했다만, 그 정도 흑심을 품는 것은 허용 범위가 아닐까 싶었다.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해 쓴 건 아니잖아.
죽은 사람을 멋대로 살려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그런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현대의 경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엄청난 문제가 될 것이다. 생물학적인 의미부터 시작해 죽었던 사람의 장례비용, 사망 확인서, 사망 기록 등을 모조리 고쳐야 하니까.
그치만 여기는? 그런 서류 업무가 없다. 애초에……출생신고 같은 게 존재하는지나 의문이었다. 아이나가 하던 서류 업무를 몇 번 보니 비슷한 게 있긴 있었던 거 같은데, 야만족의 경우 서류 같은 걸 두지 않는 것 같았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
중세 시대를 베이스로 만든 이 시대에서는 ‘인구=노동력’의 개념이 여전했으니 나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괴물이 없어졌으니 전투력 부분에서는 약화(弱化)를 피할 수 없겠지만……싸움이 없는 시대가 차라리 낫다. 괴물 때문에 힘들고 괴로워하는 시대보다는 전투력이 약화되더라도 모두가 행복한……그런 시대가 역시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매달 지급되는 생활비도 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 이 세상을 복구시키며 생활비 같은 지급금(支給金)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렸으니 돈 때문에 문제가 일어날 일도 없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 같은 어려운 문제는 잘 모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 세상을 만든 걸 보니 유린도 골치 아픈 문제는 아예 생각하기도 싫었나보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가지고 노는 주제에 이런 귀차니즘 쩌는 부분만큼은 나랑 일맥상통했단 말이지, 그 자식.
병사(病死)부터 시작해 화폐가치의 급증(急增)이나 급락(急落), 경제적인 요소에 의한 문제 발생 등. 현실 세상에서는 늘 일어났던 일들이 이곳에서는 일절 없었기에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현실 세상에서는 달러나 엔화 급증 등에 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나랑은 상관없는 내용이네’하고 그냥 흘러 넘겼었다. 이유? 빚 때문에 공부나 취업 활동 하느라 바쁜데 외국에 갈 돈과 시간,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어디인지도 모를 나라의 화폐가치보다는 내 인생을 윤택하게 만들어줄 요소가 더 중요했다. 현실은 그토록 시궁창이었다.
내가 살던 세상을 생각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유린이 아무런 능력도 없이 내가 살던 세상에 떨어지게 됐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하는……. 내 모습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육체와 영혼뿐이었다. 실제로 경험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그가 현실 세상에 갔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잘 적응했다……라고는 차마 생각할 수가 없었다. 현대 사회는 걔가 생각한 것만큼 호락호락한 사회가 아니다. 부당한 일이 일어나도 힘이 없으면 꾹 참아야 하지. 하렘 어드벤처에 있을 때처럼 신 노릇을 할 수 없게 된 유린이 과연 소시민적(小市民的)인 삶을 살아야 하는 현대 사회에 만족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럴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힘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이전에 말했다. 그 힘에 누구보다 도취(陶醉)되어 있던 것은 바로 유린이다. 늘 신과 같은 힘으로 모든 것을 꿰뚫고 파악하던 그가 아무런 힘도 없이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현대 사회에 떨어지다니.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거냐, 뭐냐?
운이 좋아 우리 부모님을 만났다 치더라도……그놈이 할 줄 아는 게 뭐 있을까? 외국어를 잘 하는 것도 아냐, 기술을 가진 것도 아냐. 그렇다고 집안이 부자인 것도 아니지. 순식간에 내 빚을 대신 갚을 삶을 살게 됐을 거라 생각하니 킥킥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아……병신 새끼. 그냥 이 세상에 만족했으면 됐을 것을. 뭐 하러 빚 갚으러 그런 곳에 가냐?
산책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인구수는 적을지 몰라도 마을은 생기가 넘쳤다. 인구가 적은 만큼 서로 힘을 합쳐 일을 해결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국 사회에는 좀처럼 없는 정(情)을 보니 여기가 진짜 정이 넘치는 세상이구나 싶더라.
뭐? 정이 넘치는 나라라고? 헬조선이? 옛날이라면 또 모를까 요즘 한국에서 정이 넘친다니. 머리 괜찮아요? 어디 잘못 맞거나 이상한 거 주워 먹은 거 아니세요? 병원에 가보셔야죠. 헬조선이 정이 넘치는 나라라니. 너님은 정이 넘쳐서 열정페이와 노오오오력론을 펼치십니까?
가끔씩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루이의 이름을 부르며 아루아 씨의 안부를 물었다. 물론 안부를 묻던 사람들은 나를 보며 ‘그 사람’이냐고 물었고, 이루이는 가슴골 사이로 내 팔을 안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으윽, 그러고 보니……섹스한지 꽤 됐구나.
내가 여자가 된 후부터는 계속 범해지기만 했으니 아무리 낮게 쳐줘도 일주일 이상은 섹스를 못했군. 여자일 때 당했던 것은 잊고 싶었지만……여자일 경우에는 그 나름대로의 쾌감과 짜릿함이 있었고, 그걸 떠올린 자지는 성욕을 풀고 싶다며 뿔룩대기 시작했다.
나도 노답이지만 내 자지도 참 노답이군. 자기가 당할 때의 고통을 쾌감으로 인식하며 딱딱하게 굳어지다니. 주위의 보는 눈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진정시키며 산책을 계속했다. 생각 같아서는 누군가와 몸을 나누고 싶었지만……그건 프레그넌트에 가서 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는 꾹 참도록 할까.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자 이른 점심이 준비되어 있었다. 점심뿐만 아니라 내가 먹을 도시락까지 준비한 걸 보니 내가 꽤 급하다는 걸 이해하신 것 같았다. 이루이한테는 미안하지만……아루아 씨의 빠른 판단과 행동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들. 너무 많은 것들이 있었기에 이곳에 언제까지고 머무를 수는 없었다.
점심을 먹고 도시락까지 챙긴 것 때문일까? 이루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직 집을 나가지도 않았는데 울어버리다니……. 어머니뿐만 아니라 내가 돌아온 것에 매우 기뻐하고 있었던 것 같기에 그 마음은 참으로 갸륵한 거라 생각했지만……안타깝게도 언제까지고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겠지만 이별이 생각 외로 빠르게 다가오니 울어버린 거겠지.
여기 와서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난 이루이를 달래는 거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루이를 껴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훌쩍거리던 이루이는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기분 좋았던지 약간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으음……울면서도 자기가 챙길 것은 챙기다니. 약아빠졌다고 해야 할지,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나중에 여기 오게 된다면 생각보다 오래 머물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루이를 프레그넌트로 오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미카의 경우 부카케에 있다가 프레그넌트로 왔으니까. 아이나와 만나게 된다면 한 번 상담해봐야겠군.
아아……이런 걸 생각하니 내가 정말 기둥서방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놈팽이, 밥도둑, 월급서방, 하반신을 박아대는 변태 새끼. 어느 쪽이든 간에 닉네임이나 이명(異名)으로는 적절하지 않았기에 한숨이 나왔다.
좀 멋있는 닉네임이 나와도 될 텐데, 왜 이런 것만 생각이 나는 걸까 하고 고민했지만……왜긴 왜겠어? 이런 닉네임 달아도 할 말 없을 정도로 막장으로 살아왔으니까 그런 거겠지! 오죽하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생각해서 나온 게 저거겠냐, 멍청아!?
이루이와 아루아 씨는 경비대까지 배웅을 해줬다.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생명의 은인이자 딸의 남편인 나를 혼자 가게 하는 건 마음에 걸린다며 따라오셨다. 진짜 안 해도 되는데……. 어차피 혼자 가는 거니까 배웅하는 사람이 없는 편이 나한테는 좋은데. 마음 편하잖아.
경비대에 도착한 우리는 아루아 씨의 안내를 받아 막사 근처로 갔다. 막사 건물을 보니 프레그넌트가 더 그리워진다. 은색 비키니 아머를 입은 채 마법을 준비하던 여성은 공손히 인사했고, 나도 거기에 맞춰 머리 숙여 인사했다. 엄청 예의 바르네. 그렇게까지 예의 바르게 인사할 필요 없는데.
날 이동시키는 것은 텔레포트 에어리어(Teleport Area)를 이용하기로 했다. 단, 에어리어를 이용하는 이유는 에어리어를 통해 보다 텔레포트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프레그넌트에는 텔레포트 에어리어가 없기에 그 근처를 가본 사람이 직접 보내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아이나한테 가면 말해야 할 게 하나 더 늘었군. 에어리어 설치도 건의해보자.
다행스럽게도 루인은 프레그넌트와 1주일 정도의 거리였기에 자주 들른 사람이 몇 명 있었다고 했다. 난 ‘야만족의 숲 근처에 저를 보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주변 사람들은 약간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야만족의 숲도 프레그넌트 주변이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치안이 좋은 마을이 아니라 그런 외지의 숲에 가려 하니 걱정이 됐나보다.
난 걱정 말라며 손을 흔들었지만 텔레포트를 쓰는 사람이나 주변 사람들의 표정은 여전히 개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루이는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했으니 문제없었다. 내 갈 길보다 이루이가 우는지 어떤지를 걱정하다니. 나도 참 웃긴 놈이다.
모두가 걱정하는 가운데 이루이와 아루아 씨만이 손을 흔들고 있었고, 난 그들의 인사에 다시 오겠다고 대답했다. 눈부신 빛이 나를 감쌌고 눈을 뜬 내 앞에 있던 것은……정말 오랜만에 보는 ‘야만족의 숲’이었다.
============================ 작품 후기 ============================
회사에서 야근을 하면 가장 짜증나는 게 퇴근 시간. 이 정도 하면 됐으니 퇴근해도 되겠지 싶은데 아무도 안 일어나더군요. 좆같아서 먼저 말하고 일어났습니다. 우리 나라 야근 문화는 진짜 쓰레기 중의 쓰레기. 일본도 야근 있고 블랙 기업 많지만 한국도 거기에 뒤지지는 않죠.
그 덕분에 집에 와서 없는 시간 쪼개서 씻고 내일 출근할 준비하고, 후기 쓰고. 이런 걸 보면 차라리 아르바이트가 더 편하고 좋은 거 같습니다. 정해진 일을 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계약직이나 파견직도 편하다지만 그 중에 정규직 될 생각 없이 딱 할 일만 하고 가는 타입이 접니다. 왜 딱 할 일만 하냐고요?
회사가 좋고 일 할 만 하면 하지 말라고 해도 열심히 하거든요.
좆같이 가르치지만 대응은 존나 착착 칼 같이 해주길 바라는 회사에 가보세요. 여러분은 그 회사에 열과 성을 바쳐 충성을 다 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다 건강 해쳐도 아무도 책임 안 져주고 정규직으로 써주지도 않을 텐데?
문재인 정부 돼서도 실업 상태는 여전합니다만, 그것도 그럴 수밖에요. 이명박근혜 9년 동안 온갖 횡포를 다 치며 노오오오력 + 헬조선 + 꼰대 문화가 극대화됐는데 그게 순식간에 없어지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도 참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거 알면서도 끝까지 품고 가니까요.
울트라맨 오브는 썬더 블래스터로 변하며 '어둠을 껴안아 빛이 된다!'라고 합니다. 사악한 우주인 조피(!?)와 정의의 울트라맨 베리알(?!)을 퓨전 업시킨 형태이면서도 그 성질을 정말 잘 드러냈다고 말할 수 있죠. 이걸 한국식으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꼰대문화와 노오오오력으로 헬조선을 유지시킨다!'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qndyd02님, 코멘트를 보자마자 '으아니 ㅋㅋㅋ'하며 웃었습니다. 능력이 없어진 세린과 마을 여자들의 난교 이벤트는 당연히 저도 생각했거든요 ㅋㅋㅋ 아마 제 글을 봐오신 분들이라면 'ㅋㅋㅋ 이 작가 또 시작이네. 난교 이벤트 발동! 도퓻도퓻!'이라며 웃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쓸 수 없었던 점은 첫 번째로 스토리 진행, 두 번째로 세린의 현재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스토리 진행이야 그렇다 싶지만 세린의 경우, 현재 그다지 건강한 상태가 아닙니다. 잠을 몇 시간이고 내리 잘 정도로 피로한 상태라 난교가 발생했다간 진짜 쪽쪽 빨리다 탈진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저라지만 거기까지 쓸 정도로 하드하지는 않았기에 그만뒀습니다만, 독자분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난교 이벤트를 생각했다는 것에 기쁨을 느낍니다.
예? 기쁠 게 없어서 그런 거에 기쁨을 느끼냐고요?
어, 사실 기쁨을 느낄 만한 요소가 현실에는 별로 없습니다. 오늘도 늦은 시각에 집에 돌아올 거 생각하면 소설이나 게임 정도밖에 즐거운 요소가 없습니다. 그 소설 쓰는 시간도 야근 때문에 갈려 나가니 사실상 힘듭니다. 독자분들과의 교류나 높은 조회수 등이 그나마 몇 안 되는 안락함을 주는 요소입니다.
로리콤MK님, 사실 로리 캐릭터를 내지 못해 서운한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쓰면서 연예인, 여기사, 마법사, 허당 푼수, 호기 있는 여기사, 범죄자 등. 정말 다양한 성향의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켰습니다. 그 와중에도 고민했던 게 '로리 캐릭터는 언제 내면 좋지?' 였습니다.
안 내자니 계속 마음에 걸리고.
그렇다고 내자니 아청법이 도사리고 있고.
요즘 출시된 게임인 테라M으로 치자면 '그래서, 엘린 동인지는 언제 나오나요?'급이겠죠. 아, 전 그 게임 안 합니다. 과금 유도 냄새가 뿡뿡 스루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안 그래도 낙태에 TS강간 임신까지. 온갖 걸 다 묘사한 막장 소설이었습니다만, 그나마 최후의 선(로리)을 안 넘어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싶네요. 매우 안타깝지만 로리 캐릭터는 보류라는 방향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벌써 목요일. 야근 좀 하니 진짜 날짜 감각이 완전히 날아가버리네요. 여러분은 부디 야근 많이 하는 회사 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야근을 많이 하면 능률이 오르는 게 아니라 사원의 근무 의욕과 체력이 쭉쭉 떨어집니다.
P.S - 꿀 빠는 직종(정규직 / 알바)이 있다면 추천해달라규! 독자분들의 정성 어린 대답을 기다리겠다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