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2 「23-1 : 어둠이 사라진 뒤……. (1)」 =========================
하늘은 맑았다. 이렇게까지 맑은 하늘을 보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기에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예쁘다고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이 하늘을 세린과 함께 보곤 했지만……그는 더 이상 그녀의 곁에 없었다. 정확히는 ‘그 누구의 곁에도 없다’라고 해야겠지만.
“혜린 씨도 하늘 구경이에요? 오늘은 하늘이 정말 맑네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중충했는데……역시 하늘은 맑은 게 제일 예쁜 거 같아요.”
아이나의 말에 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식사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오다니. 아이나도 식사보다는 하늘에 더 시선을 빼앗긴 것 같았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예쁜 경치를 보게 된 사람들은 식사보다는 경치 그 자체에 눈을 빼앗기기 마련이었으니까.
“아이라는?”
아이나의 동생인 아이라는 아이나와 달리 바로 식당으로 갔다. 함께 일은 했지만 아이라는 세린이 사라진 후 일에 몰두하게 됐다. 일을 하는 동안은 세린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거겠지. 아이라의 언니이자 세린의 부인이었던 아이나는 동생의 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로라랑 메이는?”
아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린이 사라진 것도 충격이었지만……여자가 된 세린을 범할 때 가장 격하게 세린을 때렸던 건 누가 뭐래도 로라와 메이였으니까.
메이의 경우 아기를 직접적으로 죽인 원흉이나 다름없었고, 함께 세린을 범하던 혜린이나 로라, 미카 또한 적지 않은 심적(心的) 충격을 받았었다.
로라와 메이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사람이 아무것도 안 먹으면 7일밖에 견딜 수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양 식사 자체를 거부했다. 미카가 대원들을 동원해 로라나 메이의 입에 음식을 넣으려 했을 때는 아주 발광을 했었지……. 그때를 생각하면 머리가 또 아파온다.
세린이 너희가 굶어죽는 걸 원하겠냐며 소리치자 두 명은 결국 눈물을 흘리며 바닥을 두들겼었다. 그렇게 말하는 미카 또한 남은 한쪽 눈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모두 알고 있었다. 세린은 죽었다는 사실을…….
프레그넌트가 습격당했던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었지만……그건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생각이었다. 카인이라는 인물은 사실 ‘유린’이라는 이름의 신(神)이었으며, 그년(당시에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소환당해 목숨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기가 끌려온 것도, 희진이나 은채가 원래 세상에서 소환됐던 것도. 모두 세린이 전의(戰意)를 상실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도. 유린 때문에 세린이 얼마나 많이 고생했는가 하는 것도. 모두 다 알게 됐다. 유린은 세린이 고생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비웃곤 했었으니까.
세린이 우리를 욕하며 발악을 할 때는……어, 음. 솔직히 열 받았었지. 원해서 지배를 당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 주제에 ‘이루이’라는 애랑 섹스를 하는 걸 봤을 때는 진심으로 살의(殺意)가 좀 올라오더라.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입으로는 아내다, 사랑한다 지껄이면서 하반신은 다른 여자한테 박아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모두 화도 내고 실망도 했지만……그래도 세린을 좋아한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수도로 왔었으니까. 도망칠 수도 있었고 구하러 오지 않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위태한 상황에서도 그는 우리를 구하려 했었다. 자기가 죽을 걸 알면서도 괴물들을 없애며 다가오던 세린의 모습은 흡사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님 같았지.
나이 30을 넘긴 주제에 ‘왕자님’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 표현이었지만 그 외에는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력(死力)을 다해 왔던 세린은 결국 함께 온 ‘이루이’라는 여자한테서 마법 공격을 받고 쓰러져버렸지.
그 후에는 뭐……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가 계속 이어졌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지배당하고 있던 우리는 필사적으로 육체를 멈추려 했지만 현실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유린한테 온갖 아양을 떨며 암캐처럼 섹스만을 요구했고, 세린은 여자로 변한 후에도 우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도 잠시. 하고 싶지 않은 아양과 교태까지 떨며 세린은 우리를 위해 몸까지 바쳤다. 증오나 분노 같은 감정만이 극대화(極大化)된 우리를 한 번에 네 명까지 상대하기도 했었다. 맨 처음 그를 상대한 우리 때문에 결국 아기를 죽여 버리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폭행에 윤간, 정신적 충격까지. 이미 여자로 변하고 있었던 세린은 자존심을 버리고 몸까지 써가며 우리를 구하려 했지만 결국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유린이 제안한 것은 결코 이룰 수 없는 조건이었으며, 패배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기에 그의 정신을 박살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세린의 최후는 누구보다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와 다른 여자들은 경비대원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검─나중에 들어보니 ‘아밍 소드’라고 했다. 세린이 무기에 대해 설명했던 것이 기억났기에 그때 또 울었었지─을 쥔 채 세린을……찔러 죽였다.
나를 포함한 16명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었다. 우리를 아끼고 사랑했었던 남자. 우리를 구하기 위해 죽음까지 무릅썼던 남편.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던 세린은……다름 아닌 우리의 손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아주 무참하게.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잔혹한 꼴로 변해버린 채…….
아무리 지배당하고 있었다곤 하지만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육체와 우리한테 남편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그 새끼를 욕하던 것도 잠시. 우리는 유린에 의해 소멸됐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그의 알 수 없는 ‘힘의 일부’가 된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별로 기억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만.
아무리 판타지와 연관이 없던 나라지만 쉽게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 이걸로 끝이구나. 이젠 죽었구나. 희망이나 미래 같은 건 없이 그냥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모든 걸 포기한 채 죽기만을 기다렸었지. 죽어서 세린을 만나게 되면 뭐라고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고. 아, 아기를 낳지 못한 채 죽은 것도 억울했었지. 우리 린린이를 세상에 내보내주고 싶었는데…….
죽은 후에 세린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죽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싶었지만……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내가 죽는 것도, 세린을 만나는 것도. 모두 다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눈을 뜬 곳은 저승이 아니라 이미 폐허가 되어야 했을 프레그넌트였으니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 다 있었다. 죽었던 마을 사람들부터 시작해 수도에 있어야 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다. 폐허가 됐던 경비대의 건물이나 주민들의 집마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부서진 파편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기에 이게 꿈인가 싶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죽었던 사람들.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자 모두 서로를 껴안은 채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에 바빴다.
경비대원들부터 시작해 그 청록색 촉수괴물한테 죽었던 마을 사람들까지. 원래 존재해야 했던 이들이 모두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은 재회의 기쁨을 나눈 후였다. 상식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모두한테 공통되는 점이 딱 하나 있었다.
나나 로라, 메이. 세린의 아내들을 포함해 예전에 죽었거나 한 사람들. 왕궁에 피신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다 한결 같이 입을 모아 공통점을 말했다. 모두 다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세린의 목소리를 말이다.
『얘들아……지금까지 정말 미안했다. 그리고……진심으로 사랑한다.』
기쁨의 눈물이 슬픔의 눈물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느끼게 됐다. 원인이나 이유, 방법은 모르지만 누가 이런 일을……누구도 이룰 수 없었던 기적을 이룬 것인가에 대한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 그가 말한 것.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데에는 10초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신세린. 그가……우리의 남편이 해낸 거였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해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는 이뤄냈다’는 거였지. 과정보다 결과에 집착하는 것 같아 영 마음에 드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설령 과정을 알아보려 한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건 그다지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 돌아왔다. 부서져 있던 마을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렇다면……다른 마을은 어떨까? 그런 의문을 품게 된 우리는 몇 명의 인원들과 함께 다른 마을을 돌아다녔다. 텔레포트를 사용하는 사람은 주로 아이라였지만 그녀는 아무런 불평이나 불만 없이 마법을 썼다. 혹시나 다른 마을에 세린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그녀도 가지고 있었겠지.
부카케, 자멘, 어보션. 우리가 모험을 할 때 들렀던 마을은 완전하게 되돌아간 상태였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또한 괴물한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 원래대로 되돌아온 마을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들 또한 세린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할 때는 정말 소름이 돋았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으니까.
마법사 양성소까지 둘러본 우리는 바로 수도인 레이프로 향했다. 괴물의 빔 공격 때문에 녹아들어간 상태가 되어 있어야 했던 성벽은 멀쩡한 상태였다. 세린의 아내인 마리아와 아테나, 헬레나가 있는 왕궁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그녀들을 찾아갔다. 그녀들이라면 이 사태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의 희망을 품은 채…….
결과?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그녀들이 우리한테 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세린은 어디로 갔으며 대체 어떻게 죽었던 사람들이 되살아난 거냐고……. 그녀들 또한 정신과 육체를 지배받고 있을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 다급함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우리도 초조한 상태였으니까.
우리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린은……죽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인정할 수도 없었지만……그렇게 생각하는 것 외에는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었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들었던 세린의 목소리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함과 함께 사랑을 전하는 최후의 한 마디. 흔히 말하는 유언(遺言)이나 다름없었고, 그 말과 함께 모두를 소생시킨 세린이 어딘가에 무사히 있을 거라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았다.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긴 싫지만 그때처럼 누군가의 죽음을 거부하고 싶었던 때는 없었다. 죽었다니……세린이 죽었다고? 아, 그래. 알고 있어. 세린은 이미 죽었다. 우리 때문에. 누구보다 아끼던 우리한테 칼을 맞아 죽어버렸지. 그건 세린의 아내들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헌데 우리가 느끼는 ‘세린의 죽음’은 그것과는 달랐다. 말은 안 되지만 마치……세린이 다시 한 번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지리멸렬한 횡설수설이었지만, 그런 바보 같은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병신이 주위에 수두룩하니 덜 병신 같은 놈이 그나마 멀쩡한 정상인으로 보인다’라고 해야겠지.
이미 죽었어야 했던 세린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그런 짓을 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그가 죽었다는 사실만큼은 매우 확실했기에 우리는 눈물로 낮밤을 지새웠다.
앞서 말했지만 로라나 메이의 경우에는 식음전폐(食飮全廢)를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었다. 두 명은 원래 세상에 있던 나를 제외하면 처음으로 사귄 여성들이었으니까 그럴 만도 하겠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예전과 많이 달라진 건 두 명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이나는 마을의 촌장이니 대놓고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많이 슬퍼하고 있었다. 덤벙거리는 게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는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자신을 챙겨주는 사람이 더 없으니 더 이상 덤벙대거나 실수를 할 수는 없다는 정신적인 성장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아이라도 아이나처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 방법은 꽤 달랐다. 사람들이나 마을의 상태를 신경 쓰며 온화하게 대처하는 아이나와 달리 아이라는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세린을 잊으려 했다. 갑작스럽게 되돌아온 마을이긴 했지만 여전히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은 많았으니까.
미카는 쇠약해진 로라를 달래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며 대리 경비대장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로라처럼 방에 틀어박힌 채 모든 것을 잊고 싶다고 했지만, 자기가 그러면 세린이 정말 좋아할까 하고 생각했었다고 말했지. 물론 기뻐할 리는 없었겠지만…….
부서진 마을과 죽은 사람들. 돌아올 수 없었던 것들이 다시 돌아와 기뻤지만……기쁜 것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던 것은 ‘더 이상 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텔레포트를 쓰며 방문한 마을을 포함해 우리가 사는 프레그넌트. 그 주변에 한 마리 이상 있던 괴물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프레그넌트의 경우에는 토벌을 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수도나 다른 마을 주변에도 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커다란 충격이었다.
기뻐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 스케일이 너무나 거대했기에 믿겨지지가 않았었다. 뭐……1주일 이상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괴물이 없는 숲이나 초원이 당연한 모습이 되었다만. 사람이 무언가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것일 줄은 몰랐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것들을 당연한 것 마냥 받아들이다니. 인간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다.
괴물의 존재가 없어졌다는 것은 밖으로의 출입이 자유로워졌다는 것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희생은 없다는 걸 의미했기에 모두 기뻐했다. 아, 그렇다고 경비대를 해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괴물은 없을지 몰라도 곤란하거나 위험한 일이 있으면 경비대는 출동을 해야 했으니까. 목숨을 걸고 싸울 일이 없어졌다는 것은 역시 순수하게 기뻐해야 할 점이겠지.
하지만……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우리가 잃은 것은……뱃속에 있던 아기들이었다. 나나 로라, 메이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 수도에 있던 마리아나 아테나의 뱃속에 있던 아기들 또한 사라진 상태였다. 세린이 ‘낙태’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아기가 사라진 것에 대해 꽤 많은 충격을 받았었지.
오랜 시간 동안 뱃속에 있던 아기가 사라진 것에 대해서 커다란 슬픔과 충격을 느끼긴 했지만……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마리아와 아테나가 다시금 ‘생명의 씨앗’을 만들 수 있게 됐다는 점이었다. 다시금 ‘생명의 씨앗’을 만들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기뻐하면서도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
우리부터 시작해 마을 주민들 모두……세린과 몸을 겹쳐서 얻은 아기였기에 그만큼 각별한 추억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3개월 이상의 시간을 들여 얻게 된 아기를 보며 모두 기뻐했었건만. 이런 식으로 아기들과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기에 슬픔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안나와 니나는 로라와 메이처럼 모녀(母女)관계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하염없이 울던 니나를 달래며 안나는 말했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베풀어준 은인을 죽게 내버려뒀다고. 그런 사람이 목숨을 바쳐 우리를 구해줬건만, 우리는 그한테 되돌려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안나 또한 울고 있었지만 니나처럼 서럽게 울지는 않았었다. 니나는 아빠는 어디에 있냐, 왜 아빠가 죽어야 했냐 등 주변에 있던 사람들마저 울게 만들 정도로 날카로운 질문을 날리며 펑펑 울었었지. 나도 그렇게 울고 싶었지만……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울면 또 다른 사람이 따라 울 것 같았으니까.
둘 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우울해 보이는 것은 여전했다.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이라와 비슷했지만 성질은 달랐다. 아이라가 세린을 잊기 위해 일에 몰두한다면, 그녀들은 일에 몰두함으로써 세린한테 최대한의 사죄와 감사를 나타내려는 거였으니까.
세린이 준 새 삶과 기회를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괴물은 사라졌지만 경비대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일에 매진하는 두 명의 모습은 어딜 보더라도 방 안에 처박힌 로라와 메이 모녀보다는 나아 보였다.
희진이와 은채는 나와 비슷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펑펑 울지는 않았지만 세린이 죽었다는 걸 인지하고는 있었다. 비록 유린이라는 미친 년 때문에 이곳에 끌려오긴 했지만, 자기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던 남자가 죽었다고 하니 슬프지 않을 리가 없었겠지.
은채는 그래도 우리보다 어려서 그런지 결국 눈물을 왈칵 쏟아버렸다. 자기를 보호해줄 거라며 깝치더니 왜 멋대로 죽냐며 울던 은채의 모습은 어찌 보면 울음을 참지 못하는 어린애 같았지만……한편으로는 누구보다 그의 죽음에 슬퍼하는 한 명의 ‘여성’과도 같았다. 저런 솔직함을 가지지 못하게 된 우리가 참으로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 건 덤이다.
아스카는 정신이 아니라 몸이 더 걱정되는 사람이었다. 카인한테 지배받고 있을 때, 아스카는 아기를 낙태시켜버렸다. 세린의 아기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원하지 않는 괴물까지 대량으로 낳아야 했기에 육체적으로 매우 쇠약해진 게 아닐까 걱정했었다.
다행스럽게도……우리와 함께 프레그넌트에서 깨어난 아스카는 매우 멀쩡한 상태였다. 원하지도 않는 괴물을 낳아야 했기에 아기를 잃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그 빌어먹을 놈한테 칼로 찔리거나 베였던 상처들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스카는 우리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세린의 목소리가 들렸느니라. 세린이 나를……모두를 위해 희생해준 것이니라. 이유는 잘 모르겠다만 그렇게 느껴지는구나. 너무나 안타깝구나……내 남편한테……서방님께 ‘고맙다’라는 인사조차 전하지 못하게 되다니…….”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나나 다른 사람들은 봤다. 아스카가 방 안에서 흐느끼며 우는 모습을.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세린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모습을…….
마리아나 아테나, 헬레나의 반응은 알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 되돌아온 이상 그녀들은 자기 위치에 맞는 업무를 봐야 했다. 우리와 함께 프레그넌트에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그녀들의 반응을 보지는 못했지만……아마 우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들은 세린이 아예 왕궁에 남기를 바랄 정도로 그를 사랑했었으니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헬레나도 세린이 어디 있는지 연거푸 물어댔던 걸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현실에서는 여자 친구 하나 제대로 못 사귄 놈이 어쩌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을 휘어잡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으니까.
‘안즈’라는 이름의 여자는 볼 수 없었다. 야만족의 숲에 가면 그녀를 볼 수 있겠지만……우리 중 누구도 그곳으로 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를 만나봤자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다시금 맛볼 게 뻔했으니까. 그곳에도 세린은 없었다는 현실을 말이다.
“슬슬 식사하러 가요.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을 너무 늦게까지 수고스럽게 만들면 그렇잖아요.”
아이나의 말에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오래 생각하고 있었군. 하늘을 보다 떠올린 생각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었거든.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 나온 레몬파이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세린은 애플파이를 좋아했지만 레몬파이도 꽤 좋아했었지. 단 걸 좋아하는 입맛이어서 놀리기도 했었는데.
스프와 빵, 고기를 적당히 먹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늦게 와서 그런지 우리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2~3명 남아있던 대원들도 우리를 보고 인사한 후 얼마 안 돼 일어났으니……늦게 오긴 늦게 왔군.
식당의 아주머니─실제로는 아주머니가 아니라 엄청난 미인이다. 한국에서 가게 주인을 아줌마나 이모라고 불러서 이렇게 불렀다만, 매끈매끈한 피부나 예쁜 이목구비는 어지간한 성형 아이돌이나 여성 스타를 뺨치고도 남을 정도로 예쁜 사람이었다─는 괜히 빨리 먹을 필요 없다며 말했다.
로라나 메이를 포함해 침울해진 사람이 많아졌으니 그녀 나름대로 배려를 하는 거겠지. 이 식당에서 세린과 함께 밥을 먹던 걸 몇 번이고 봤을 테니까. 그때는 정말 하루하루가 즐거웠는데……. 지금은 이렇게 아이나랑 둘이서 밥을 먹게 되다니. 웃으면서도 고개를 젓는 이 버릇은 아무래도 세린한테 옮은 거 같았다. 한숨 쉬는 건 안 하지만.
식사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아이나는 사무를 비롯한 촌장 업무를 했기에 그리 많은 식사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나는 세린이 죽은 다음부터는 그렇게 많이 먹고 있지 않았으니까.
많이 먹고자 하면 그럴 수도 있었지만……식탐을 부리고 싶다는 욕망마저 들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죽어버린 상태였다. 감정의 주인인 내가 봐도 기가 차는데 이런 모습을 세린이 본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밥을 왜 그렇게 적게 먹냐? 다이어트하냐?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너희는 지금 제일 예쁜데 무슨 다이어트를 한다는 거야?”
아하하, 그래. 그렇게 말할 거야. 말하는 게 딱 그렇겠지. 여자를 모르면서도 한결같이 걱정하는 남자가 할 법한 말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다이어트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준’은 다르기 마련인데. 근데 그거 아냐? 내가 밥 적게 먹는 건 다이어트 때문이 아냐. 너 때문이지.
“아이나, 너도. 밥을 그렇게 적게 먹어서야 일할 수 있겠냐? 괜히 밥 적게 먹었다가 비실대며 넘어지지 말고 제대로 먹으라고. 그러다 넘어지면 진짜 허당 푼수 된다?”
잔소리를 들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 앞에서 식사를 하던 아이나는 안 그래도 사람들 입에서 ‘허당’이나 ‘푼수’라는 소리가 나오면 자기 이야기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뜨끔하는 여자인데, 그런 여자 앞에서 저런 소리를 꺼내다니. 아이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가 허당 푼수라는 거예요!? 진짜 맞을래요!? 예전처럼 한 대 맞고 싶어……서……!?”
자기를 디스하는 소리에 아이나는 벌떡 일어나며 분노를 나타냈다. 하하, 신기하네. 나한테만 세린의 잔소리가 들렸나 싶었는데 아이나도 들은 거 같았다.
신기한 게……나도 들었다니까? 나뿐만 아니라 아이나한테 잔소리를 하는 것까지 들리다니. 아이나가 일어서며 맞고 싶냐고 화를 낸 걸 보니 마치 진짜로 세린이 잔소리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
……아이나가 왜 멍하게 서있지?
‘설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설마가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떠올랐다고 해야 할까. 그치만 이번만큼은……나와 아이나가 들은 목소리. 벌떡 일어난 아이나가 멍하게 선 채 내 뒤를 바라보고만 있는 광경. 그 모든 것에서 도출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떠올린 나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았다. 이번만큼은 그 ‘설마’가 나나 아이나를……우리를 잡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린 곳에는 탁한 색의 옷을 입은 채 웃고 있는 남자가…….
우리를 위해 목숨과 순결, 모든 것을 바친 채 사라졌던 남편이…….
“……건강하게 잘 지냈냐?”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신세린이 머리를 긁으며 웃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회사 출근을 위해 일찍 자도 모자랄 판국에 자정 업로드라니. 여러 모로 미친짓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마지막 챕터다 보니 그러려니 하며 감수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 챕터가 끝나면 완결이고 한 챕터가 1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길어도 다음 주면 이 소설이 완결나겠네요.
외전의 경우 쓸까 말까 고민했지만 안 쓰는 쪽으로 더 마음이 가네요. 마지막 업로드가 끝나면 후속작 광고 및 대차게 약을 빤 후기를 겸해 한 편 올릴 생각이니 그걸로 마무리도 짓고, 독자분들의 코멘트에도 답변할 생각입니다.
아, 덧붙여 마지막 특별편 어느 정도 써놨는데 이미 규정 용량인 50kb를 가뿐하게 넘겨버렸습니다. 양으로만 치자면 본편을 능가해버렸어요 ㅋㅋㅋ
모든 것이 끝나고 평화가 돌아온 하렘 어드벤처.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만 그 안에 세린은 없었습니다. 여러 모로 좀 병신 같은 주인공이었지만 아내들한테 있어서는 소중한 남편이자 파트너였단 거겠죠. 그런 세린을 떠올리며 살던 중 마지막에 등장하는 세린. 이것은……타다이마 오카에리의 냄새가 풀풀 나는구만! (스피드왜건 풍으로)
이제 곧 업로드 1주년인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친 짓이었던 거 같습니다. 시라누이 마이를 포함한 유명 캐릭터가 암캐처럼 헤벌레한 표정으로 있는 표지도 모자라 '자지의 맹세'라는 설정을 달고 나오다니. 1년 전에 나왔는 것도 문제지만 지금 내도 문제가 매우 많은 소설이긴 합니다. 끝에 와서 생각하자니 좀 쪽팔리기도 하지만…….
첫 연재라 모자라는 부분도 있었고 설정상으로 맞물리지 않는 부분도 있었습니다만 상당히 즐거웠다고 생각합니다. 결과도 나름 만족스러웠고요. 적어도 아무런 목표나 생각 없이 팬픽만 적는 것보다는 나은 거 같아요. 그것도 지금 와서 생각하면 소중한 추억이지만…….
아, 출판취소 당한 좆같은 기억은 딱히 소중하지 않네요. 그 회사 사람들은 네 명 정도밖에 없었으면서 회사 운영을 개좆같이 했더군요.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틈새시장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는데. 진짜 죽어라. 인간적으로, 양심적으로. 진짜 죽어라 시발. 개인적입니다만 죄질로만 치자면 저한테는 조아라 이상의 범법자 + 개좆병신들입니다. 그러니까 죽어라 시발.
작가로서 그런 말 해도 되냐고 묻겠지만……아무렴 어떻습니까? 이 글 연재하는 플랫폼인 조아라한테도 욕 한 사발 하고 출판예정이었던 출판사가 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와서 두려울 거 같았으면 처음부터 적지도 않았겠죠.
그러니까 진짜 출판취소한 출판사 관계자들은 다 죽어라 시발.
어지간하면 참는데 1년이 훨씬 지난 지금 생각해도 분노가 들끓어오르네요. 통수를 치는 건 안 좋아합니다만 통수를 맞는 건 존나 싫어합니다. 그걸 극명하게 '가르침 당한' 게 출판사 건이었죠. 어지간하면 배웠다고 하는데 저런 일본어 번역투까지 쓰면서 말할 정도로 존나 강렬한 통수를 맞았습니다. 여러분은 부디 이런 통수를 맞지 마세요. 평생의 상처가 됩니다.
아, 맞다. 소설도 소설이었지만 후기도 워낙 약을 빨아서 그런지 이제 와서는 후기에서 온갖 걸 다 털어놓게 됐네요.
그런 후기를 반복하며 독자분들과의 정을 끈끈하게 만든 것도 소중한 추억입니다. 그 추억의 단편을 볼까요.
'로리, 다이스키이이잇!'
'부히힛, 배캅전개 왔다 시발!'
'모녀덮밥 & 자매덮밥을 그리라규! 느긋하게 이해하라규!'
'낙태 중절 타락 모에에에엣!'
'세린TS당해서 고통받는 거 좋다 헤벳! 하앍하앍!'
'태어날 아기들한테 고통받는 세린의 모습, 생각한 것만으로……싸, 싼다 시발!'
'(실제로 적지는 못했지만) 아기들과 세뇌당한 아내들이 주신 똥오줌 세례의 맛……무녀님의 똥맛처럼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
…………
……………… (나 자신한테 기억제거 버전으로) 레드썬!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sckgjjjDrthcjfjdj님,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옥수수와 다이아……는 아니고, 소설을 업로드했습니다. 자정 업로드니 이전 주처럼 저녁 늦게까지 기다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양이새벽님, 이제 남은 건 사실상 후일담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싸움이 끝난 후의 일상을 담담히 그리는 거니 과도한 기대는……예? 미나미가 좋아하냐고요? 하루카를 제일 좋아합니다.
zxc54님, 물론 넣을 겁니다만 퍽퍽헉헉 이 맛에 소설 씁니다. 붕가☆붕가! 급으로는 못 넣을 거 같습니다. 스토리 진행을 우선시해야 할 거 같네요.
로리콤MK님, 아시발꿈 엔딩은 생각은 했었는데 금방 포기한 것 중 하나가 됐습니다. 좋은 소재긴 한데 꿈으로 만들어버리자니 지금까지 세린이 경험했던 것들을 꿈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좀 그렇네 싶어서요.
E종범님, 즐겁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한 챕터, 재밌게 읽어주시면 좋겠네요.
qndyd02님, zxc54님께 대답드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19금씬이 들어가긴 들어가겠지만 상당히 나중에. 그것도 약간 들어갈 거 같습니다. 무분별한 19금씬 남발보다는 스토리 진행을 우선시해야 이 글을 끝낼 수 있어서……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요즘에는 유희왕 게임을 하고 있는데 유희왕DM(GX 이전)에 나오는 카드. 그것도 그냥 범용성 높은 것들만 적당히 넣었는데도 꽤 잘 굴러가더군요.
융합, 싱크로, 엑시즈, 펜듈럼. 뭐가 됐든 그 세계관의 캐릭터들을 차례차례 분쇄☆옥쇄★대갈채! 하는 제 잡덱을 보니 '의외로 이 덱도 잘 굴러가네' 싶었습니다. 아니, 덱에 있는 제물 몬스터가 데몬소환과 버스터 블레이더인데 이 덱이 잘 굴러가다니. 이거 미친 거 아닙니까?
링크소환을 만든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솔리티어 벽듀얼 하며 한 턴에 싱크로 몬스터 5장씩 쭉쭉 뽑아내는 환경에는 변화를 줘야 할 거 같았는데……어느 쪽이든 코나미는 욕먹어도 쌉니다. 자기들이 만든 게임 밸런스 조절 못 해서 이 지경 요 꼬리지니 낫딴다요! 게다가 새 환경에는 무조건 플레이어의 돈을 쓰게 하다니. 너희는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제 소설도 개판이지면 유희왕의 파워 밸런스보다야 낫겠죠. 그런 고로 여러분, 여러분은 사악한 펜듈럼 소환을 멀리 하고 기존의 소환법을 쓰시는 게 낫습니다.
아크 파이브?
영혼의 펜듈럼?
물러가라, 이 사악한 악마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