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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217화 (217/235)

00214 「22-3 : 부활하는 주인공 (3)」 =========================

‘동료나 친구의 죽음’이라는 이벤트는 어디서든지 흔히 볼 수 있는 클리셰 중 하나다.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 등. 온갖 인쇄 및 영상 매체에서 지겹다 못해 나오면 신물이 나올 정도의 클리셰지만……그 효과는 거의 100%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지겹다 못해 언급조차 귀찮지만……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분노한 경우는 많았지만 그 중 일부는 친구인 크리링의 죽음이었다. 피콜로 대마왕 편이 시작될 때 한 번, 나메크 성(星)에 가서 프리더한테 한 번. 총 두 번 죽었지만 이 죽음은 친구인 손오공한테 항상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스승인 무천도사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복수를 하기 위해 근두운을 타고 날아간 것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초사이어인으로 변하기까지 했으니 굳이 자세한 설명을 곁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초사이어인이 나오면 늘 두들겨 맞는 프리더를 볼 때마다 눈물에 습기가 차오르지만……그냥 그놈 팔자려니 하고 넘어가자.

드래곤볼 외에도 이러한 이벤트는 허다했다. 친구가 죽은 것으로 인해 원래 지닌 힘이나 능력보다 더 많은 힘을 발휘하게 되는 이벤트. 이미 언급했던 【각성(覺醒) 이벤트】가 바로 이러한 것이었지만……각성을 하게 만들어주는 계기는 사람마다 달랐다. 제일 충격적인 것이 동료나 친구의 죽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동료가 죽음 자체로 인해 각성하게 되는 이벤트도 있지만 때로는 그 동료한테 엄청난 힘이나 능력, 아이템(혹은 무기) 등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호평 받는 열혈노력닌자 이야기에서 금수저, 혈통빨로밖에 살아남을 수 없다며 비난을 받게 된 『나루토』가 그러한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였다.

저승사자 카카시……가 아니라. 상급닌자로 알려진 카카시는 친구인 우치하 오비토가 사망할 때 그의 사륜안 중 하나를 이식받게 된다. 그 사륜안으로 나루토라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엄청 활약하게 되는데 그런 걸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게 ‘뭐야, 금수저나 능력 있는 친구를 가지라는 이야기인가?’였다. 사륜안이나 뛰어난 능력 없는 사람은 그냥 뒈져라, 이건가?

여하튼, 동료나 친구의 죽음으로 인한 파워 업(각성) 이벤트도 존재했지만, 죽어가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파워나 아이템을 받는 이벤트도 존재하기는 했다.

최근에는 이런 이벤트나 클리셰를 적극적으로 쓰는 사람들은 좀처럼 없었다. 대부분 이세계로 가서 존나 짱센 존재로 태어나 깽판 치는 게 유행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최강인데 각성 이벤트나 무기 받는 이벤트가 필요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이세계를 다룬 작품에서는 사람이 죽는 이벤트보다는 위기의 순간에 구해주는 이벤트가 더 많았다. 위기의 순간에 똿! 하고 나타나 괴물이나 적을 일망타진한 후 쓰러진 사람(주로 여성)한테 작업을 거는 게 대부분이었다. 일본의 라이트노벨이나 한국의 양판소나 수준은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말도 많고 예시도 엉망진창이었지만……쉽게 말해 ‘주인공이 각성하거나 파워업 할 때는 주변의 사람들이 죽는다. 그치만 예외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한테서 힘이나 무기를 얻어 각성 혹은 파워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였다. 작품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플롯은 대략 그러했다.

내가 지금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공간 안에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는 탁한 색의 구체는 내가 지금까지 보던 ‘동료나 친구의 죽음 → 그들로부터 각성에 필요한 힘이나 도구를 얻음’ 이벤트와 똑같았다. 물론 그들은 내 동료도, 친구도 아니었지만……그들이 나한테 힘을 주겠다는 것 하나만큼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실제로 저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좋아서 그렇냐고? 아니, 다르다. 이건 긴장하고 있는 거다. 예상은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 실제로 겪는 일과 예상이 항상 같을 수는 없는 법이며, 예상으로 겪었던 일을 실제로 겪게 되면 사람은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어안을 잃은 나처럼 말이다.

“저, 저한테……모든 것을 다 맡기신다고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지식뿐이었다고. 죽어가는 동료나 친구한테서 힘을 받아 각성한다고? 실제로 그런 위치에 서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 나는 저 사람들(영혼이긴 하지만)과 알지조차 못하는 사이인데도 이 정도니……실제로 그런 일을 겪는 사람들은 얼마나 슬플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렇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원래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가능하면 쓰고 싶지 않았다. 이걸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는 뜻이었으니까.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시기가 오는 걸 바라지는 않았다만…….”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유린을 이길 수가 없다는 사실을. 놈이 카인이었을 때도 졌는데 내 몸을 차지한 상태(유린)가 되니 더 이상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었겠지…….

“이 세상이 멸망하면 영혼밖에 남지 않은 우리는 성불(成佛)조차 하지 못한 채 소멸된다. 우리가 원하는 안식을 맞이하겠지만 그런 형태는 원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안식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절대자가 한 행동은 모두 옳았다는 뜻이 되겠지만……우리는 그걸 인정할 수도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소환과 죽음도 억울하건만, 안식마저 놈에 의해 부여받다니……절대 인정할 수가 없었다.”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질 정도다. 듣고 있는 나마저 혹시 내가 유린 대신 벌을 받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압박과 분노, 증오가 느껴진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 커서 야단이나 비난받는 게 아닐까 싶었다.

옳은 말이었다. 유린의 사정은 딱하겠지만……그게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도 좋다는 변명이나 이유는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소환당해 죽은 것도 억울한데 놈한테 필요 없는 이 세상을 소멸시킴으로써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럼 뭐야? 끝까지 이용당하다가 죽었다는 소리잖아? 내가 생각해도 좆같았는데 저 사람들은 오죽할까?

“우리는……우리가 살던 세상, 예전의 삶에서는 최선을 다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내가 그들의 입장을 생각하던 중 들려온 것은 뜻밖의 목소리였다. 내가 이루이한테 속마음을 고백했던 것처럼, 그들 또한 자신들이 오랫동안 생각하고 느끼던 것을 털어놓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검은 공간에서 진행되는 고해성사(告解聖事)라니. 슬프면서도 애절했다. 들어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소환된 시대와 시간은 다를지 몰라도 자신의 인생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점은 똑같았다. 이 세상의 절대자가 그러한 기준으로 사람을 소환할 수 있다는 걸 들은 후에는……후회하고 분노했다. 어째서 자기 인생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것인가, 왜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값어치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인가 하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난 이 세상에 온 후 매우 기뻐했었으니까. 이 세상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던 대한민국 헬조선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안락하고 감미로운 세상이었으니까.

“원통했다.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안타까웠지만……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걸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 이상으로 원통했다. 살해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구해줄 수 없었고 죽어서 이렇게 된 후에 할 수 있는 일은 설명하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일밖에 없었다. 어째서 이토록 무능한 것인가에 대해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내 이야기군. 난 예전에도 무능했고 지금도 무능했다. 마법이나 무기를 못 쓰게 된 것도 모자라 아내들까지 잃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들이나 유린의 자지를 빨아대며 아양과 교태를 부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심했다. 이 세상의 절대자이자 창조주, 신(神)이나 다름없는……그 빌어 처먹을 놈.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 이 세상을 없애려 한다면……그 이전에 마지막 발버둥을 쳐보자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너한테 맡기자고 결심했다. 성공이나 실패의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가 살아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는……절대 무가치(無價値)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놈한테 보여주고 싶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도 내 나름대로 힘들고 괴로워했지만……그건 육체와 정신, 영혼이 있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들은? 영혼만 남은 상태. 저항이나 발버둥은커녕 존재의 확인조차 되지 못한 자들이었다. 누군가 듣기에는 별 것 아닌 바람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바람이 얼마나 절실하고 소중한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현재의 나와 똑같은 처지였으니까.

“너는 물었다. 넌 지금 죽은 상태냐고.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으니 대답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대답해주마. 너는 죽었지만 소생(蘇生)을 기다리는 상태다. 니가 현재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육체는 너의 정신과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며, 소생을 기다리는 동안 니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인식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소생을 기다리는 상태라고? 그럼……난 역시 살아났다는 소린가?

“그렇다. 너는 살아있다. 지금은 소생을 기다리고 있지만 틀림없이 부활할 존재를 죽었다고는 하지 않는다. 니가 베개나 침대의 감촉을 느낀 것은 너의 육체가 살아있어서 그런 것이다.”

“자, 잠깐만요. 그치만 전……몸을 빼앗겼잖아요.”

초를 치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이 물어야 했다. 세상일은 내가 기대하거나 바란 대로 흘러가지 않기 마련인데 이건 너무 내 입맛에 딱 맞게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괜히 기대하다가 통수를 맞을 바에야 실망할 부분을 미리 찾아내는 게 더 나았다.

“제 진짜 육체를 빼앗겨 여자인 상태로 죽었는데 지금 이 상태로……어, 원래 제 몸으로 부활한다는 말인가요? 부, 부활한다 치더라도……싸울 방법이 없잖아요.”

기뻐해야 할 소식은 현실적인 문제를 주렁주렁 달며 내 입을 열게 만들었다. 기쁜 일이긴 했지만 세상에는 기쁜 일만 존재하지는 않는 법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유린을 향한 복수겠지만 난 거기에 따르는 다양한 문제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 부활시켜주신다는 것은 정말 감사드려요. 그치만……부활한 후에는요? 제 몸으로 부활하는지 어떤지도 모르겠지만 부활한 후에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 무기나 마법은 더 이상 쓸 수 없잖아요. 설령 있다 하더라도 유린한테 통하나요?”

내가 예상하는 그들의 대답은 ‘아니’였다. 마법? 이 세상의 신(神)인데? 무기? M16A1에서 발사된 탄알이 안 통하는 걸 직접 목격했는데? 되살아나는 건 기쁜 일이지만 아무런 힘이나 대책 없이 부활했다간 또 칼빵 맞아 죽을 것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게, 게다가……괴물들도 많아요. 괴물들의 수는 터무니없이 많고……어쩌면 제 아내들이랑 싸우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뭘 어떻게 하면 좋은 건가요?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쁘지만……문제가 너무 많아서 제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얼마나 해결할 수 있을지. 도무지 상상이 안 가요.”

나란 놈은 진짜 웃긴 놈이었다. 부활은 기쁘다면서 문제점을 이렇게 주르륵 나열하다니. 그럼, 뭐 어쩌라고? 저 사람들이 그걸 해결해줄 거라 믿냐? 바보냐? 아내들한테 강간당하면서 뇌도 같이 당한 거냐? 뇌에 좆물이 흥건해질 정도로 병신이 된 거냐, 멍청아?

“걱정할 것이 많다는 것은 안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너한테 떠맡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만……그것은 우리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다.”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미안하다’라고 하니 내가 더 송구했다. 날 위해 목숨뿐만 아니라 지식이나 힘까지 준다고 하는 사람한테 사과하게 만들다니……나도 참 인간쓰레기군. 자기혐오(自己嫌惡)를 안은 채 경청(傾聽)했다.

“우리가 너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지만……이 상황을 최대한 타파(打破)할 수 있는 힘과 지식은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문제는 많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빌어먹을 놈이 이 세상에서 나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것만 성공하더라도 너나 우리의 목적은 반 이상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래, 맞는 말이다. 문제는 많지만 거기에 언제까지고 얽매일 수는 없었다. 유린이 이 시공차원을 없애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부활해야만 했다. 현실적인 문제가 구름처럼 떠다니는 것 같았기에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지금은 약한 소리 할 때가 아냐……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막아야 해!

“너는 현재 정신만이 남은 상태다. 우리의 힘과 지식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가지게 된다면 예전의 놈과 동등……혹은 그 이상의 조건을 가지게 된다. 너의 지식과 우리의 영혼. 우리가 만든 육체를 쓰게 될 테니 놈과 맞붙는다 치더라도 쉽게 밀리거나 당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만든 육체……? 거기에 대해 묻고 싶다는 내 마음을 미리 파악한 걸까? 목소리는 내가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다.

“육체는 니가 남자였을 때의 모습 그대로 부활하게 된다. 니가 실제로 가지고 있던 육체가 아니라 실망할 수도 있을 테고, 놈이 지닌 육체보다 약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수도 있겠지만……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걱정 많고 고민 많은 내 성격까지 다 꿰뚫어 본 것인지 내가 걱정하는 것에 대해 현실적인 판단과 의견까지 덧붙여줬다. 그런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써줘서 고맙긴 한데……결국 유린과 다시 싸우게 될 거라 생각하니 한숨이 또 나온다.

젠장, 전생(前生)에 무슨 원수를 졌길래 놈이랑 또 만나 싸우게 되는 걸까? 원수라고 해도 나쁜 놈은 유린 쪽이겠지만!

“놈이 빼앗아간 육체는 어디까지나 다른 시공차원으로 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오히려 너의 육체를 쓰고 있으니 섣불리 맞서 싸우지는 못할 것이다. 육체를 잃게 될 경우 가장 손해를 보는 건 그놈일 테니 말이다…….”

오옷, 그렇군. 생각지도 못한 발상(發想)이었다. 내 육체를 얻어 좋아하고 있겠지만……그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내 육체를 잃어버리면 나도 슬프겠지만 놈은 나 이상으로 슬플 테니까. 20년 걸려 겨우 얻은 육체가 없어져 버리면 존나 곤란하겠지. 그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는 놈이 우위(優位)에 있었겠지만 이제부터는 다르다. 다른 시공차원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너의 육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만 하는 것 중 하나니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을 것이다. 설령 나선다 쳐도 그 육체는 빼앗은 것. 자기가 만든 것과는 달리 한계나 제한이 있으니 너한테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런 소리를 들으니 한 번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나를 엿 먹였겠지만 이제는 나한테 엿 먹어볼 차례라는 뜻으로 들렸거든. 내가 실실 웃자 목소리도 조금 활기를 띤 것 같았다.

“우리가 만든 육체는 놈이 만들었던 육체와 비슷하다. 너의 원래 몸을 대신하기는 어렵겠지만 전투력 부분에서는 너의 육체보다 월등히 앞서고 있다. 이 세상에서 놈과 치고받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만든 육체로 놈을 마음껏 때려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사심(邪心) 가득한 말이었지만 난 그 말에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거야 부탁받을 것도 없다. 난 놈을 엿 먹이고 때려주려고 부활하는 거니까. 그런데……육체는 어떻게 만든 거지?

“앞서 말했다시피……우리는 영혼이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지식과 힘을 얻었다. 여러 사람의 영혼을 하나로 만들 때마다 강해졌지만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덕분에 다양한 것을 실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육체였다. 너도 봤을 것이다. 너의 육체를 얻기 전까지는 자기가 만든 몸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을…….”

그렇군. 카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때처럼 ‘이 세상에서 쓸 전용 육체’를 만들었다, 이거군. 내 몸이긴 하지만 원래의 몸과는 비교도 안 될 전투력을 가진 ‘신세린의 육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이젠 정말 별에 별 것을 다 하는군.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은 놈의 소멸과 죽음이다. 놈이 죽으면 아마 우리는 이 빌어먹을 공간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너 또한 육체와 영혼을 돌려받을 수 있겠지. 너의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소유주가 죽었으니 원래 소유주인 니가 그것을 돌려받는 건 당연한 이치일 테니 말이다.”

그것까지는 생각도 안 했었기에 그 말을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전혀 생각도 못 했던 것이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목숨 걸고 다시 싸워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응? 싸워야 할 첫 번째 이유? 그거야 그놈 엿 먹이고 싶어서 그런 거지! 그걸 꼭 설명할 필요가 있냐?

원래라면 ‘아내들을 구하기 위해, 이 시공차원을 구하기 위해! 평화의 사도, 신세린! 출동!’이라며 오두방정을 떨어야 했지만……지금의 나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정신지배를 받고 있는 아내들이나 유린의 바보짓 때문에 엉망이 된 하렘 어드벤처는 안타깝게 생각한다만……정신지배는 유린을 쓰러뜨리면 풀릴 것이고 살아남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세상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린은……다른 건 몰라도 유린만큼은 없애야만 했다. 유린이 다른 시공차원으로 간다는 것은 모든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완전히 없애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유린을 살려둘 생각은 없지만 이 시공차원을 소멸시키게 내버려두는 것만큼은 막아야만 했다.

하렘 어드벤처를 그대로 두고 간다 치더라도 놈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놈의 정신 상태나 사상은 결코 범인(凡人)의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가지지 못하는 것을 남한테서 빼앗아 가지려는 더러운 사상과 마음. 살인자나 다름없는 놈이 다른 곳에 가게 된다면 우리 같은 피해자가 얼마나 생길지 짐작도 안 갔다.

아, 물론 유린이 코즈믹 호러 같은 시공차원에 떨어져 무참하게 죽는다는 결말도 있겠지만……놈이 가는 곳을 내가 정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놈이 죽는 걸 바라다가 내가 죽을 바에야 부활해서 목숨 걸고 다시 싸우는 게 몇 백 배는 낫지. 안 해보고 후회할 바에야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나을 테니까.

“놈을 막기 위한 방법은 우리와 하나가 된 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무기나 마법, 힘 등에 대해서도 걱정할 것은 없다. 우리는 너를 이기게 할 생각으로 접촉을 시도한 것이니까. 절대적인 승리를 보장할 수는 없지만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패배를 맞이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참으로 고마운 소리였다. 저들과 하나가 된다면 앞으로 내가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놈과 싸울 수 있는 힘도 얻게 된다는 거니까. 자세히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만큼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이겠지. 모든 걸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테니 자신들의 지식과 힘을 얻어 이해하라는 건가. 나도 바라던 바다.

“우리는 이제부터 너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걱정 마라. 우리는 너한테 힘을 주기 위해 하나가 되는 것일 뿐. 너의 정신이나 육체, 영혼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주는 힘과 지식은 어디까지나 너한테 무리한 부탁을 하기 위한 선물일 뿐. 우리는 이대로……우리는 ‘우리’인 채로 너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탁한 색의 구체가 조금씩 빛나며 나한테 다가온다. 평소라면 겁을 내며 달아났겠지만……지금은 아니다. 그 구체가 내 가슴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침을 삼켰다.

“13번째로 이 세상에 소환된 자여. 부탁한다. 이 세상은 이미 거의 끝났다. 너의 승패에 관계없이 안식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한때 인간이었던 자로서……장난감 이하의 취급을 당한 것도 모자라 원수나 다름없는 놈의 손에 의해 안식을 얻고 싶지는 않다. 부탁한다. 우리한테 안식을……육체와 정신을 잃은 후에도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증거를 남겨다오. 그것만이 우리가 바라는 유일한 것이다.”

얼마나 슬퍼했을까? 아무것도 모른 채 소환되어 순식간에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영혼이 됐지만 성불조차 하지 못해 몇 년 이상을 이곳에 있어야만 했다니…….

짐작도 가지 않았고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지만 상상할 자격이나 권리조차 없었다. 그들은 나와 달리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 채 죽어갔으니까. 나름 누릴 것을 모두 누리며 이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내가 그들의 비참한 삶을 생각해 얼토당토않은 동정(同情)을 준다고? 훌륭한 개소리였다.

하지만 단 하나……단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노력했다. 육체와 정신을 잃어 영혼이 된 후에도……더 이상 생물학적으로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상태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노력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나와 달리 그들은 일의 성사 여부보다는 자신들이 살아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 했다. 자신들은 이 세상에 존재했었으며, 절대 가치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나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증오와 분노, 원한을 지식이나 힘으로 바꿔왔다.

“증명해드릴게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탁한 색의 구체는 내 몸에 닿자마자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따뜻하다. 차가울 거라 생각했었지만 그 구체는 무엇보다 따뜻했다. 검고 새카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온도를 가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러분의 존재와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드릴게요…….”

눈물이 흘렀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이 눈물은 타인(他人)을 위해 흘리는 눈물.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줄 수 있다는 것은 동물이 아니라 지성(知性)을 가진 인간이라는 뜻이었고, 나는 내가 인간임을 다행으로 여기며 눈물을 흘렸다.

어디로 갔는지 누구도 몰랐던 사람들. 행방불명이 됐는지도, 이런 세상이 있었는지조차 몰랐기에 그들의 명복을 빌어줄 사람은 거의 없었겠지. 내가 우리 부모님의 소중한 자식이듯, 이들 또한 누군가한테 있어서는 소중한 가족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육체와 정신을 잃은 후 간신히 영혼만이 남아 이렇게 나와 하나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무언가 남기실 말씀은 없으세요? 이름을 말씀해주시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혹시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들의 존재는 나와 하나가 됨으로써 사라진다. 장난삼아 말할 게 아니었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무적인 말투까지 쓰며 그들의 의향(意向)이나 이름을 물었지만 그들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영혼이 살아남았는지 어떤지조차 모른 채 사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놈한테……우리가 준비한 지식과 힘으로 복수해주는 것. 우리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우리의 노력과 존재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목소리가 점점 엷어졌다. 이들의 지식과 힘이 점점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이름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내 안에 있을 거고, 난 그들을 그리워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거면 충분했다. 그들한테 이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존재했다.

쓸모없지 않았다.

그 자체로 충분했다.

“부탁한다……13번째 용사여…….”

그게 마지막이었다. 탁한 색의 구체도, 빛도.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공간은 내 발밑에서부터 점차 사라지고 있었고, 검은 공간이 사라지는 부분부터 녹음이 우거진 숲과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야만족의 숲이군.”

신기했다. 나무와 잔디로 가득할 뿐인데도 내가 있는 곳이 야만족의 숲이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굉장하군……단지 서서 주변을 보는 것만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니. 십 년 넘게 모은 지식과 힘은 용솟음치고 있었다. 내 육체는 내 것이었으되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으며, 지식과 힘은 그 그릇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늘 대기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모두. 장담은 못하지만……여러분의 원한(怨恨)은 반드시 풀어드리겠습니다.”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더 이상 그들은 없었지만……어디에선가 ‘고맙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온 느낌이 드는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가진 지식과 힘을 대강 체크한 나는 주먹을 쥐었다. 내가 해야 할 일도 알았으니……부활한 기념으로 맨 먼저 이 짓을 해야겠군.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힘차게 하늘을 향해 외친다.

“기다려라, 씨발놈아! 내가 너 존나 정성 들여 패주러 갈 테니까 거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 알아들었냐, 개새끼야!?”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속 시원하게 소리를 질러서 그런 걸까, 아니면 사람 냄새가 풀풀 나서 그런 걸까? 주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에 보는 청록색 촉수괴물이군. 예전에는 여기서 도망치기 급급했지만……지금은 사정이 바뀌었다. 너희는 이제 ‘사냥당하는 쪽’이라고.

“자……어디 한 번 싸워보실까?”

부활한지 5분도 지나지 않은 시각.

부활을 기념하는 내 첫 전투가 시작됐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세린이 부활했습니다. 21-1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온갖 수모와 고난을 겪어왔던(물론 당할 만 해서 당한 것도 있지만) 주인공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마침내 돌아왔네요. 마냥 정의롭다고 할 수만은 없지만 적어도 하렘 어드벤처라는 글 안에서는 유린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여러 일을 겪었으니 대가리도 조금은 나아졌겠죠.

초기 구상과는 다르지만 변경된 플롯을 통해 죽은 사람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린에 의해 소환됐지만 아무것도 못한 채 죽어버린 사람들의 구체성도 조금이나마 보강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로부터 힘을 받으니 '작가 병신 새끼 ㅋㅋㅋ 이게 무슨 샤먼킹이냐? 초상집에서 요미가에레(소생하여라)! 라고 말하는 거임? ㅎㅎㅎ'라고 비웃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죽음으로부터 돌아올 수 있는 플롯은 이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릇 죽은 사람은 좀비나 소생술을 쓰지 않는 한 만날 수 없습니다. 이건 굳이 창작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가 다 그렇죠. 저도 돌아가신 분을 꿈에서 본 적 있는데 다른 분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건 웃기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존나 진지하게 말하는 겁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 혹은 그리움이 증폭되면 사람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그리운 사람을 그리기 마련입니다. 창작물뿐만이 아니라 현실 세계까지. 모두 다 그랬고 그런 과정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게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 중에는 돌아가신 분들한테 도움 받아 위험을 모면한다거나 복권에 당첨된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일종의 계시를 내린다고 볼 수도 있겠죠.

세린도 마찬가지입니다. 변경되긴 했지만 죽은 사람들로부터 힘과 지식을 양도받는다는 구도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에 괜찮은 플롯 변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아무런 이유나 배경도 없이 '마법카드 발동, 죽은자의 소생! 되살릴 대상은 묘지에 잠든 신세린! 나와라, 하렘 어드벤처를 구할 자! 신세린!'이라며 부활하는 건 좀 아니잖아요. 그런 건 제가 존나, 매우 싫어하는 전개 중 하나입니다. 개연성과 타당성이 전혀 없으니까요.

물론 그런 방식으로 전개할 수도 있긴 합니다만, 첫 작품이고 나름 열심히 써온 글이기에 막장부활 노선은 안 가고 싶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sckgjjjDrthcjfjdj님, 200화 넘는 양을 꾸준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용두사미가 되지 않도록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상 마지막 전투가 시작될 무렵이기에 전투가 끝난 후 펼쳐질 내용은 에필로그로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고양이새벽님, 사실상 업그레이드를 포함한 강화소생(强化蘇生)이라 보시면 됩니다. 되살아나는 것부터 시작해 지식이나 힘까지 얻으니 곧바로 유린과 싸울 수 있죠. 쉽게 말하면 초보자들이 바로 게임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강력한 아이템이나 스킬, 마법 등을 같이 넣어주는 겁니다.

카드게임으로 치자면 스타터 덱이나 스트럭처 덱이죠. 차이점이 있다면 스타터 덱이나 스트럭처 덱은 그냥 바로 돌려봤자 별 승산이 없지만 세린의 경우에서는 아예 이기기 위한 방법이나 힘을 중점으로 받는 것이기에 승산이 꽤 높다는 겁니다.

로리콤MK님, 코멘트를 보고 유린이 '히, 히잇! 내, 내가 너 같은 놈의 자지에 굴복할 거 같아!? 개, 새……응기익! 아, 앗! 세린의 아기 임신해버려어어엇!'라고 소리치며 굴복하는 모습만 떠오릅니다. 어떻게 그런 변태적인 생각을 할 수 있냐고요? 어허, 이 독자분이? 척하면 척이잖습니까!

로리!

다이스키이이이잇────!

YES 로리 NO 터치의 정신을 가진 작가입니다. 지금까지 약 한 사발 빨고 '이히힛! 시발, 좋다 이거!'라며 <강제TS-강간-임신-아내들한테 살해>라는 4단 콤보까지 실현시켰는데 이제 와서 유린이 굴복하는 걸 생각 못 할 리가 없잖습니까? 그러니 저런 상상은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예? 유린이 세린의 아기를 낳아 기르는 엔딩은 언제 쓰냐고요?

레드썬!

이상입니다. 정의로운 레드썬(레드썬에 정의가 있냐 없냐는 따지지 맙시다)을 쓰느라 오늘도 힘들었네요. 여러분도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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